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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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좋아하지만, 책에 관한 책은 즐겨 읽지 않는다. 글쓰기에 관한 책 또한 마찬가지이나 그럼에도 읽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고 후련해지는 때가 있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도 바로 그렇다. 잠시 이야기하자면 책에 관한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책 속에 함몰될까 두려워서이다. 진정으로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손에 주어지니까 혹은 모두가 읽어서라는 이유 등이라면 과히 기분이 좋지 않다. 물론 그렇게 만난 책이더라도 만족을 준다면 횡재한 기분일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계획 없는 책읽기는 곁가지가 너무 많아져 나무기둥보다 가지가 무거워진다는 점이다. 물론 그래도 끄떡없을 정도의 내공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런 식의 책읽기도 해보았는데 내게는 계획적인 방향이 더 기억에도 남고 책에 다가서기 편했다.

 

 이 책은 조선의 책벌레들 이야기가 가득하다. 우선 책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데 실제로 보면 은은하고 아름다워서 그 옛날 비단 책표지가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책의 두께도 마음에 드는 점이다. 더 두꺼웠어도 아마 좋아했을 것이다. 그만큼 손을 내려두기 싫게 집중해서 흥미롭게 읽었다는 말이다.

 

 조선 서적 문화의 중심은 바로 중국에서 수입된 서적들이었다. 이것은 당시 지식층인 사대부나 읽을 수 있었는데 그들이 조선을 이끌었으니 바로 세종대왕, 정조를 비롯하여 이황, 이익, 이덕무, 박지원, 정약용 등이었다. 초반부에 금속활자로 책을 찍자는 정도전 이야기를 시작으로 어떻게 책이 보급되었으며 활자로 찍어낸 책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정조가 책을 탄압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정조와는 사뭇 다른데 그가 책을 탄압한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해준다. 그래서 저자 강명관이 왜 정조를 책과 사상의 탄압자라 부르는지 알게 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판단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

 

 하나의 집단이 뭉치는 데는 반드시 목적이 있고 목적을 뒷받침하는 사상이 있게 마련이다. 어떠한 윤리나 규범(특히나 도덕적 이념.) 없이 집단이 탄생한다면 그건 아마도 혼돈 그 자체일 것이다. 조선은 지금도 사대부의 나라, 성리학의 나라로 후대에 전해지는데 당시 시대상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책은 한마디로 종이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다. 어쩌면 모두가 알 것이다. 더구나 저자가 책벌레들 이야기를 들려주며 안내하는 조선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시간이 언제 지났는지도 모른다. 이황, 이덕무, 박지원, 정약용을 좋아하는 독자가 많으니 그들의 이야기만 만나도 행복하리라.

 

 훈훈한 이야기로 기억되는 건 역시 홍대용의 이야기다. 그 시대에 중국의 지식인과 개별적으로 만나 오직 필담으로 마음을 트고 인맥을 쌓다니 대단하다. 한마디로 책에 미친 사람 사이에는 국경도 없다는 이야기지만 지금과 비교하니 왠지 서글프다. 오프라인 인맥을 넘어 온라인 인맥까지 가진 우리 중 책으로 만나 이렇듯 깊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누군가를 모두가 갖고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남의 글을 읽지 않으니 마음이 통할 리도 없다.

 

 그리고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은 저자 강명관의 냉소적인 글투라고 해아 한다. 흥미로운 책벌레들 이야기를 듣노라면 마음이 푸근해지지만, 그가 꼬집어 비판(간혹 너무도 시니컬한)하는 이야기를 듣자니 머리가 서늘해진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바라건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두고 여러모로 조명한 다양한 의견의 책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으면 한다.

 

 하나 말하자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라는 말은 모두가 안다. 그러나 그 금속활자로 과연 무엇을 찍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를 저자가 들춰낸다. 당시 중국 서점시장의 활성화와 우리의 금속활자. 입안이 쓰다. 이는 마치 최신 업데이트를 모두 받을 수 있는 최고급 컴퓨터를 묵혀두고 쓰더라도 선 긋기나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 밖에도 저자의 다양한 의견을 들으며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책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와 아울러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돌아보는 걸 좋아하는 독자에게도 만족을 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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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인간의 도리를 말하다 푸르메 어록
김영두 엮음 / 푸르메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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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말에는 뼈가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말과 글로 느껴지는 상대방의 인상도 곧 그 사람을 이루는 일부이기에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어록에서는 더하겠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것만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본의 아니게 말이 헛나올 수도 있고 글을 항상 진솔하게 적지 않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길어지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어떠한 글과 말만으로 상대를 못 박아 둘 수 없다는 것이다. <퇴계어록>을 풀어 둔 책이 나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설레었다. 누군가를 통한 해석이겠지만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견해가 아닌 될 수 있으면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심도 있게 퇴계를 이해하는 이가 했으리라 믿기에.
 

 생각보다 얇은 책인 <퇴계, 인간의 도리를 말하다> 는 한마디로 퇴계의 인간성과 그의 마음가짐을 돌아보기 좋은 책이다. 퇴계 이황 하면 지폐에 나오는 사람 정도만으로 생각하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다.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나와 조금은 아쉬웠다. 내가 기대한 것은 더 많은 내용이었기 때문인데 그러자면 한자로 된 원전을 찾아 읽어야 할 판이니 이 정도에 감사하며 퇴계에 대한 책을 좀 더 읽어야겠다.

 

 퇴계는 조선의 학문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방대한 책에 몰두하며 읽은 선비들이 많았다. 책벌레 세종대왕부터 유명해서 이름 좀 거론된 인물들이 많다. 그러나 성리학 즉 주자가 그 방대한 학문적 체계를 완성해서 주자학이라고도 하는 어려운 학문은 도대체 끝이 없어 한평생을 연구해도 모자랄 정도라 한다. 오죽하면 세종대왕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성리학에 대한 이해수준이 낮았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이라 하겠다.(자세한 내용은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저>를 참고.> 이런 학문을 퇴계는 오래도록 심취해 이해했으니 그만큼 이해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몇 권의 책만 대충 보고 이해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에 퇴계 또한 평생을 정진했다.  특히 선생은 <심경부주>를 신명과 같이 믿고 평생토록 가까이했다고 하는데 <심경부주> 또한 궁금해진다. 115쪽을 보면 심경부주의 내용이 주로 사서삼경, 정자, 주자의 글에서 마음(心)에 대한 격언을 뽑아 모았다는 말이 나온다. 

 

 아무튼, 이런 퇴계가 말하는 인간의 도리에 대한 글을 통해 나는 퇴계의 인간성을 느끼는 재미가 있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쉽고 간단하게 말이다. 그는 품성 자체가 성실했고 신중했다. 매력적인 인간이나 무조건 존경할 대상이 아닌 학문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인물이라 하겠다. 거대한 하나의 줄기에 몸을 맡겨 결국 그 줄기를 이루는 중심점이 되었다고 할까. 퇴계가 성리학뿐 아니라 다른 학문에도 그랬다면 우리의 학문사는 또 얼마나 달라졌을까 잠시 상상해 보았다. 그 생각을 하자면 조금 아쉽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자신이 믿는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는 몰입이 퇴계의 장점인듯하다.

 

 그래서 퇴계를 다소 고집스러운 노인네라 생각했었다. 달리 말해 융통성없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의견이 어떠하건 들을 줄 아는 자세가 되어 있었으며 조선의 상황에 맞지 않는 성리학 예법을 잘못되었다고 거듭 말했다고 한다. 그의 기질이라는 걸 아겠다. 만약 박제가나 박지원이었다면 전혀 다르게 대체했을 거 같다. 그런 면에서 보니 퇴계는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참으로 적합한 듯하다. 권위적이지도 않고 이 사람 자체가 하나의 학문이니 말이다. 그것도 온화한. 말과 행동 면에서 정말이지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다.

 

 그의 모든 말에 장단을 맞추지 않더라도 배울 점 한 가지는 분명하니 학문에 임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하나 더하자면 온화한 성품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과 행동을 간접적으로나마 지켜보고 얻은 결론이다.

 

 마지막으로 퇴계의 책읽기 방법에 대한 글 하나를 옮겨본다.

 

"책 읽을 때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반드시 성현의 말씀과 행동을 마음으로 익히되 푹 잠겨 참뜻을 구하고 묵묵히 깊은 맛을 본 다음에야 바야흐로 심성이 길러지고 학문이 이룩되는 성과가 있게 된다. 만약 설렁설렁 해석하고 넘어가고 벙벙하게 외워 말할 따름이라면 말 몇 마디 귀로 듣고 입으로 옮기는 쓸데없는 재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천 편의 글을 다 외우고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경전을 떠들어댄들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37쪽. 독서讀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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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절하는 곳이다 - 소설가 정찬주가 순례한 남도 작은 절 43
정찬주 지음 / 이랑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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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숲에서 누구는 외롭다. 그리고 누구는 사람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문제로 마음이 심란하다. 살아가는 일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버거운 일이기도 하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어딘가로 떠나고 싶지만 늘 그럴 수만은 없는 현실이 발목을 잡는다. 그럴 때 책은 좋은 친구가 되는데 <절은 절하는 곳이다>가 그랬다.  
 

 소설가 정찬주가 순례한 남도의 작은 절을 차례로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마음이 편해진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남도를 좋아해서인지 언젠가는 나도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실은 예전부터 어머니와 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계획했었지만 실행하지 못했는데 언제가 되더라도 이 책을 떠올리며 꼭 가봐야겠다. 종교에 관계없이 절이란 곳은 누가 들어서건 간에 마음에 이는 칼바람을 잠재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기에 저자의 마음이 공명하여 큰 떨림이 되었다.

 

 일단 저자가 정찬주였기에 이런 책이 나왔을 테지. 노을의 황금빛깔로 물든 미황사를 보며(책의 사진.) 어느 가을 보았든 이름 모를 절의 풍경이 선했다. 눈부시게 빛이 나서 서까래며 벽면 등을 물든 고운 빛을 정확하면서도 우아하게 표현하는 모습 그리고 불심과 다도에 조예가 깊은 그답게 글 곳곳에서 느껴지는 향기가 좋았다. 글에서 느껴지는 저자 고유의 풍경이나 느낌이 있는데 책에서 풍기는 게 딱 그였다. 갑자기 <하늘의 도>라는 그가 쓴 책이 떠오른다. 발자국을 남기며 눈 위에서 걸음을 떼던 모습과 책 등장인물의 내면이 혼재되 시공간을 무너뜨리는 듯하다.  

 

 위에서 말했듯 저자의 문장력과 더불어 여러 절에 대한 간략한 설화 등과 사진이 함께한다. 특성상 많은 곳을 짤막하게 소개하다 보면 지루할 만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번에 읽지말고 쉬어갈 때마다 펼쳐야 할 책이었다. 유마사에서 '살아있는 부처를 무서워하라'라는 말도 인상적이다. 역시 설화의 일부라 전체를 소개하지는 못하고 큰소리로 꾸짖는 말을 옮겨본다. "너는 종이에 그린 부처는 무서워하면서 어찌 살아 있는 부처는 무서워하지 않느냐!" (109쪽.) 어쩌면 어디선가 들은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는데 그곳이 유마사라는 걸 이제서야 알았다. 그리고 유명한 운주사의 거지부처가 문득 보고 싶어진다. 

 

저절로 절하게 하는 거지부처이다.

욕심도 사랑도 미움도 다 버린 무욕無慾의 얼굴이다.

이루고 싶은 꿈이 복잡한 나로서는 결코 닮지 못할 얼굴이다.

 

(290쪽.)

 

 

 설화는 당시 상황의 재현이다. 민중이 바라는 희망을 담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절마다 간직한 역사에서 꺾이지 않는 희망이 보인다. 시詩가 말言과 절寺이 합쳐졌다며 절에서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되돌아보라는 저자의 말 또한 잊지 못하겠다. 침묵의 언어는 시가 된다고 했으니까.

 

 절의 수를 줄이고 더 자세하게 실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순례길에 만난 절들이라 하나하나 그에 걸맞은 풍경을 독자에게 전한다. 수행이 수행자만의 것이 아니듯 책을 접하는 독자 또한 자신만의 수행을 정진하라는 거 같다. 미래나 삶에 대한 행복한 기대감보다 더 떨리는 것은 현재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게 무언지 아는 일이다. 그리하면 수없이 내 몸과 마음이 부서져 망가지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이 아무리 절망적이더라도 맑은 차 한 잔 우려내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이다.  

 

 단순한 절소개서가 아닌 명상서처럼 마음을 안아준 책이었다. 물론 저자처럼 불심까지 있다면 더욱 몰입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 않더라도 마음의 일기예보란 게 없는 우리 모두에게 한순간이나마 마음의 고요를 보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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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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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책속으로 들어가기 전

 

<패싱 Passing>의 뜻을 생각하기도 전에 바로 아래 적힌 문구를 발견했다. 백인 행세하기! PASSING. 그렇다면 백인이 아닌 인종이 백인 행세를 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띠지에 적힌 글로 얻은 정보는 할렘 르네상스 문학의 대표작가 넬라 라슨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1929년에 발표한 작품이 국내에는 글빛 출판사를 통해 2006년에 소개된 것인데 아쉽게도 넬라 라슨은 당시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상황(남편과의 이별, 출판사와의 불화 등)으로 세 번째 소설을 출판하지 못하고 1930년대 말에 작가생활을 청산했다. 결국, 단 두 권의 작품으로 주목받는 작가이니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2006년 지인의 서평을 통해서도 궁금했던 책을 이제야 펼치게 되었다.

 

 

ㅡ 패싱을 선택한 사람들

 

 두 흑인 여성의 대조되는 삶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야기. 아이린은 전적으로 패싱하지 않지만, 편의상 백인만 들어가는 호텔이나 영화 티켓을 끊을 때 등 잠깐씩 백인인 척 한다. 다시 말하자면 흑인과 백인의 구별이 모호한 외모이므로 다른 이들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니까 그녀도 일부러 말하지 않는 정도이다. 책에서는 물라토라고 했던 거 같다. 혼혈이 되어 외모만으로 백인과 흑인을 구별할 수 없는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이들을. 아이린과 다르게 패싱하는 클레어는 대담하게 백인과 결혼해서 딸을 낳았는데 딸의 외모도 다행히(클레어에게는 천만다행.)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는다.  

 

 우연히 재회하게 된 이들의 장소는 의미심장하게도 백인만 들어갈 수 있는 호텔이었다. 그날의 만남으로 클레어는 아이린의 삶에 들어온다. 백인 속에서 그것도 흑인이라면 치를 떠는 남편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온 클레어에게 아이린과의 만남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러니 더욱 아이린과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강박을 느끼며 불안과 만족으로 뒤범벅된 생활에서 같은 인종이 그리웠을 것이다. 애써 거짓으로 위장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 또한. 매력적인 외모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상대를 조정할 수 있는 클레어를 아이린은 달가워하지 않지만 아이린이 거부해도 클레어는 이미 그녀 속으로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무튼, 의도는 다르지만 아이린과 클레어 둘 다 백인행세를 한다는 점은 같다. 아이린의 가벼운 패싱과 클레어의 패싱은 차이를 보인다. 자신의 불행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패싱을 택한 클레어를 보며 공존하는 탐욕과 공허함을 느껴진다.


" '패싱' 에 관해서는 정말 알 수 없어요.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용서해요. 우리는 그것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찬미해요. 우리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며 그것을 피하면서도 보호해요."

 

- 본문 101쪽. 아이린의 말.

 

 

ㅡ 뿌리 깊은 인종차별

 

 패싱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종차별이 극심하기 때문이다. 백인우월주의는 갈래도 많고 다양하다. 백인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외모가 따로 있을 정도이니까. 낯빛이 다르다는 이유로 백인 이외의 인종은 지금도 차별을 받는다. 저자가 살았던 시대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다. 간단한 예로 검다와 희다의 단어로 표현하는 것들을 보자면 검은 것은 대게 부정적이고 나쁘게 치부한다. 검은 게 뭐 어쨌다고.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말이다. 유색인종이니 하는 말들도 결국은 피부색으로 나뉜 근본적인 분류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나라도 성리학 폐단으로 관습 지어진 남녀차별은 수면 아래로 숨겨진 부분이 제법 길다.

 

 다시 패싱으로 가서. 그렇다고 종족을 부정하면서까지 삶을 바꾸길 원했을까. 마지막 클레어의 선택은 그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의 선택이 충동적인 게 아니라 늘 마음 일부분을 차지한 어떤 하나의 그림자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래서 클레어의 선택은 능동적이었다고 믿는다.

 

 

ㅡ 두 여인의 섬세한 내면묘사

 

 저자가 여자여서일까. 아이린과 클레어의 내면묘사와 묘한 관계가 흥미롭다. 이것은 여성작가만이 쓸 수 있는 부분인데 권지예의 <내 가슴에 찍힌 새의 발자국>과도 비슷하다. 아이린은 클레어의 존재를 반기지 않지만 클레어를 밀쳐내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파경을 향해 치닫는다. 필사적으로 치키려는 무언가(가정)가 있는 아이린의 심경은 복잡했다. 그러나 두 여인은 어쩔 수 없는 같은 인종이었고 위에서 인용한 말에서 느껴지듯 그녀 자신도 클레어를 마주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결국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클레어의 선택으로 아이린 또한 행복해졌을지는 알 수 없다.

 

 

ㅡ 끝나지 않는 패싱

 

 백인 행세하기라는 의미의 패싱을 크게 보며 현대의 우리는 어떤 행세를 하며 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행세하기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대부분 자기 위안에서 그친다면 자의식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무조건 따른다면 내 방식으로의 삶은 없다. 타인과 타인 사이에서는 이렇듯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문제가 사회나 종교, 민족 더 나아가 국가 등으로 거대해질수록 그 힘은 가공할만한 위력을 낸다. 그런 거대세력과 개인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나는 그런 행세하기를 무조건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런 비행동적 폭력 아니 폭력적 관념으로 얼마나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버리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거대한 무언가가 싫을 뿐이다. 그래서 다수를 절대적 승자로 만들어 소수를 억압하는 게 싫다. 끊임없는 모색이 필요하다. 그것도 절실하게. 어떤 수단을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게 옳지 않음을 알고 묵인하지 않아야 한다.

 

 

ㅡ 책장을 덮으며

 

 얇은 책에 든 넬라 라슨의 이야기가 새롭게 느껴진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 힘은 넬라 라슨이 직접 체험한 데서 오는 절박함이 아닐까. 그녀의 시대를 온몸으로 힘겹게 살아내다 간 불운한 작가였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소설을 좋아하거나 반대로 읽지 않더라도 이 소설은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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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동물을 잘 그려요 엄마 아빠와 함께 신나게 그리기 1
레이 깁슨 지음, 신형건 옮김, 아만다 발로우 그림 / 보물창고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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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생일 선물로 주었더니 엄마와 아이가 다 좋아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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