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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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권과 만나기 그 네 번째 책. 이 책 또한「미학 오디세이」세 권과 함께 오래전에 사두었던 책이다. 이제 사둔 책 중 단 한 권이 남았다. 그 책도 아마도 2주 안에 읽을 계획인데 이후에는 사야 할지 생각 중이다. 사실 저자의 책은 아주 흥미롭고 영감을 주기에 계속 사고 싶기는 하다. 이번 책은 제목 그대로이며 여러 가지 꼭지를 묶어두었다.「미학 오디세이」가 여러 가지를 묶었다면 이 책은 비교적 작은 하나의 소재를 짧게 들려준다. 가볍게 먼저 읽어봐도 괜찮을 책이다. 그러나 책을 통한 확장성은「미학 오디세이」만큼이나 커질 수 있다. 무지개색으로 나뉜 소재는 그 이상의 색을 창조하게 상상력을 키우라 말하는듯하다. 
 
 작가가 말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면 어찌나 재미있는지. 내가 좋아하는 관심거리가 제법 많이 나온다. 체스, 광대, 애너그램, 아크로스틱 등. 특히 광대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면서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더 알아보고 싶었다. 재치 넘치는 익살꾼이자 비판자 그리고 인간이면서 아닌듯한 묘한 존재라 느껴졌다. 그런데 저자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광대를 언급한다. 역시나 광대가 인상적이었던 건 나만이 아닌듯하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린도전서> 3장 18절.) - 57쪽, 우연과 필연中에서.

 

 

고대에 광우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 에라스무스의 책에 인용된 호라티우스가 이르기를, "그대의 생각에 약간의 광기를 섞으라. 알맞게 헛소리를 함은 즐겁도다."라고 하였다. 중세만 해도 광우는 경외의 대상으로 일상의 일부였다. 광인이 사회에서 추방되는 것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이다. 

 

- 58쪽, 우연과 필연中에서. 

 광인이 사회에서 추방되기 전에는 일상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새롭다. 어쩐지 낭만적이다. 광대의 애매모호한 말속에는 지혜와 일침이 공존했다. 지금 세상에서는 그 자리를 예술인이 대신하고 있기는 하다. 이처럼 우리에게 친근하거나 흥미로운 주제로 접근하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신선함보다는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일상에 스며든 놀이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가까운 예로 빛과 그림자놀이, 숨바꼭질의 연속성 등이 그렇다. 아기 때 까꿍 놀이부터 시작된 놀이문화 그리고 예술. 거창하게 예술가가 아니어도 이미 우린 모두 놀이와 예술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며 다시 느끼는 소소한 놀이가 얼마나 재미있고 인간에게 자양분이 되는지 느껴본 바로 저자의 의견에 크게 공감한다. 평소에 생각하던 부분이 이 책에 다 있으니 저자는 그것을 꺼내들춰 보이며 내 머릿 속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아이에게는 물을 쏟는 일을 비롯해서 세계는 연속이 아니라 단편들로 주어진다(242쪽.)는 글을 읽으며 이 책은 부모들이 읽어도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게는 아이를 이해하는데 도움도 되지만 크게 보면 부모가 놀이와 예술, 상상력에 대해 돌아보고 아이를 그 세계로 이끄며 도움을 주면 좋겠다.
 
 처음 이 책을 대충 넘겨보고는 관심사가 많아서 흥미롭다고만 생각하고 덮었는데 제대로 읽어보니 몇 년의 시간만큼의 나를 뛰어넘게 된다. 묵혀둔 시간만큼 나는 더 넓어진 시야로 이 책을 만나고 있었다. 그때 읽어도 괜찮았겠지만 지금 읽어도 나쁘지 않다는 의미이다.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 거기서 얻는 영감은 제법 많았다. 읽을수록 캐낼 수 있다면 더욱 근사하겠다. 아, 영감을 상상력으로 이어가는 일은 정말이지 어렵다. 이런저런 이유로 삶에 치여 먼지가 뽀얗게 쌓여버린 나만의 창고를 닦아내야겠다. 그 즐거움이야말로 삶의 윤활유가 될 테니까. 온전한 나로 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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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재처럼 살아요 - 효재 에세이
이효재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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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이던가. TV를 통해 효재의 삶을 본 기억이 있다. 당시 타샤 튜더를 좋아하던 내게는 한국에는 이효재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계기였다. 더구나 그녀는 한복 디자이너였다. 전통적이고 자연적이며 바지런하고 살림을 잘하는 사람. 단아하고 순박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두루 갖추고 사는 삶을 보여주는 여자였다. 보자기로 멋지게 선물포장을 하고 음식 하나를 대접해도 정성을 다하며 한시도 손을 가만두지 않는 사람.
 
 육아를 하다 보면 지쳐서 살림은 누가 좀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전부는 아니어도 청소만이라도 아니면 음식만이라도. 그래서 힘들고 짜증이 나서 살림을 즐겁게 하지 못하는 순간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그럴 때 이 책은 많은 안식을 준다고 할까. 효재의 살림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가짐 또한 어찌나 아름다운지 말이다. 물론 효재는 자식이 없고 남편도 자유영혼이라 혼자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니 그녀만큼 아름답게 살림하고 가꿀 수는 없겠다. 그러나 사실 그녀와 같은 상황이라도 이렇게나 바지런하게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선물하기를 좋아해서 조카에게 첫 해외여행을 선물한 사람. 여름에는 부채를 만들어 선물하고 온갖 나물도 말려보내고 곽티슈를 보자기로 싸서 보내는 등.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선물하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사서 보내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이 모두 직접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고 정성이 들어간다. 이런 선물이니 받는 사람도 얼마나 기쁠까.

 
 그녀의 고독은 슬프거나 불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 시간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변모시킨 효재의 긍정 에너지와 여유 있는 마음이 돋보였다. '나는 나를 충분히 산다.' (38쪽)고 자신 있게 말할만하다. 사람에게 참으로 잘하는 사람. 날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그녀는 값비싼 부담 가는 선물은 주지 않으면서 소소하고 부담 없지만 마음에 남는 행복을 선물한다. 얼마나 현명한 판단인가. 아마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인 거 같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은 기억하지 못한다. 매일매일, 그때그때, 지금이 다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드니 매 순간이 선물이다. 삶 자체가 선물이더라.

 육아로 지친 요즘 다시 만난 효재는 내게도 선물을 주었다. 일상의 소중함과 살림의 즐거움을 다시 느끼게 해준다. 아이들을 위해 외식을 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힘들어서 하는 일이 있었는데 주말을 제외하고는 평일은 꼭 내 손으로 차려주기. 그 시간이 피곤에 쩔어서 하는게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무엇이든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다 아는 사실이 내가 비로소 받아들였을 때에야 진실이 된다.
 
 예쁜 책으로 만든 효재의 이야기였다. 사진이 많지만 난 왜 그 많은 사진 속에서 시원하게 발을 씻는 사진이 가장 기억에 남을까. 맨발의 자유로움이 시원해 보였나 보다. 살림 속에서 아니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 속에서 자유의 순간이 있다면 아마도 저 사진으로 대변될 수 있지 않을까. 바쁜 가운데의 휴식이야말로 달콤하지 않은가. 그러고자 나도 나로 충분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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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3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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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학 오디세이의 마지막은 피라네시와 함께 했다. 책표지만 보자면 피라네시의 이름은 몰라도 어딘지 낯설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건축가 겸 화가인 피라네시의 영향을 받은 예술가가 많을만하다. 영감을 부르는 그의 작품과 마주하니 에셔와는 확실하게 다름을 알았다. 몽환적인 느낌 그리고 지금은 잊혀진 오랜 과거의 어느 순간을 보는듯한 착각.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자연스러움은 그만의 능력이리라. 첫눈에 어디가 논리적이지 않은지 보이는 에셔와 다르게 피라네시는 인지가 어려웠다. 에셔도 재미있지만 피라네시 역시도 놀랍다. 18세기의 환상적 리얼리스트라는 명칭은 그냥 얻은 게 아니다.
 
 모르는 예술가만 나오면 섭섭하지. 모네의 이야기를 들으며 루앙 성당이나 수련에서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을 알게 되었다. 그저 인상주의 화가였거니 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수련 작품을 많이 좋아한다. 객관이 아닌 주관을 지향한 화가의 눈을 통해 보여진 작품 앞에서 나 역시도 객관과 주관에 대해 돌아본다. 그리고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발러가 다시 그린 걸 보며 두 작품의 차이에서 차이보다는 공존을 느꼈다.
 
미메시스는 인식론적 모방(imitation)이 아니다. 그것은 주위 환경에 맞춰 제 몸의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과 같은 존재론적 '닮기'를 말한다.
 
- 86쪽, 창조의 언어中.
 모방과 닮기, 복제 그리고 원본 이 모든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복잡함과 다양함. 이것이 현대미술인가 보다. 오래전부터도 있어왔겠지만 더 후대로 갈수록 과거와는 구별되는 획을 긋는 시도는 지금도 계속된다. 이런 와중에도 과거로의 회귀도 공존하니 우리네 세상은 참 재미있다.
 
 또 보르헤스는 역시!! 보르헤스의 글은 정말로 매력적인데 사실 많이 읽어보지 못해 아쉽다. 새롭게 발터 벤야민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다. 베이컨의 작품은 처음 보았는데 흥미롭다. 예술은 언제나 아름답지 않다는 공식을 깬 이들은 꽤 있었지만 그의 작품은 단연코 강렬했다. 내게는.
 
 그리고 클레. 처음 클레의 작품을 보았을 때 어린아이처럼 천진함과 단순함과 색채 등에 끌려 좋아했다. 책에서 다시 만난 클레는 더욱 생각하고 들여다보게 하는 매력적인 예술가였다. 저자의 말처럼 마그리트와 클레가 통한다는 사실. 그래서 둘 다 더 좋아지고 내가 추구(?)하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했다.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베이컨 등의 작품을 통해 정말 수많은 예술가가 표현하는 방법 앞에서 다양성과 치열한 예술혼을 본다. 더불어 그들의 사유를 느꼈다. 그에 반해 바쁜 현대인은 정신적으로 과연 얼마나 치열하게 사고하는지 자문한다. 이것은 내게 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너무도 쉽게 정보를 얻는지라 그래서 생각의 체력이 약해진 게 아닐까 싶다. 관념은 보편타당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하다. 아하~~ 이건 말장난이 아니다.
 
실재와 가상을 가르는 기준 역시 가상이며, 현실과 허구를 나누는 기준마저 허구일 수 있다는 것. 도대체 무엇이 실재이며 무엇이 가상인가? 대체 어디까지 현실이며 어디부터 가상인가? 그런 의미에서 사라지는 것은 예술만이 아니다.
 
- 360쪽, 다시 가상과 현실中.
 저자가 줄기차게 말해왔던 안과 밖 그리고 실재와 가상까지. 그의 언급처럼 영화 <매트릭스>가 저절로 떠오른다. 아, 현대예술까지 달려온 탁월한 구성의 미학 오디세이! 다른 책과 철학자의 사상과 예술을 잘 골라 버무려 흥미 있고 쉽게 독자에게 다가왔다. 저자 진중권의 생각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따지자면 과거의 활자나 관념에 빚지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까. 아니 있기나 하나. 정말 즐겁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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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2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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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 에셔와 함께 하는 미적 탐험 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마그리트와의 2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흥미진진함이 계속되었다. 마그리트의 철학과 예술은 익히 관심분야였지만 더불어 달리도 살짝 다시 만났고 무엇보다 세잔의 그림을 다시 접하게 된다면 천천히 들여다봐야겠다. 그저 내가 선호하는 그림이 아니네 했는데 그림을 알고 보니 관심이 생겼다.
 
 원초적 지각(64쪽.) 편에서 마그리트와 메를로-퐁티의 철학이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보며 이후 세잔의 애매모호한 그림까지 연결되는 하나의 축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처럼 보인다. 불투명한 경계의 뭉게짐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랄까. 이쪽 철학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꽤 신빙성 있어 보인다. 사실 산다는 게 어떤 철학 하나만이 옳은 진리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나이가 먹어가면서 제법 두루뭉실해지고 있다. 또한 그 어떠한 것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진짜 화가는 손이 아니라 머리로 그린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론적 기술만이 다가 아닌 세상이다. 저것도 예술이냐는 논란을 받은 작품이 나온 지 꽤 되었으니까 말이다. 모두의 눈에 아름답고 완벽한 예술은 없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공존이 곧 예술의 새로움으로 이어지니까. 현대 예술이 내면의 직관을 밖으로 표현하는(87쪽.) 모습은 공감하는 바인데 정말이지 말해주지 않으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예술은 쉽고도 어려운 것인가 보다. 아니 어쩌면 아이들의 열린 눈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술가의 자화상을 앞으로는 더욱 쳐다보게 생겼다. 렘트란트의 자화상은 특히!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확인해야 하니 거론하지 않겠다. 미학 오디세이를 읽으면 점점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미궁에 빠질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다양한 관점에서 인식의 틀을 벗어던지게 된다. 과연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이 책에서 나갈 수 있을까? 책 밖으로!! 이 이야기는 내가「미학 오디세이 1」에서도 했던 이야기인데. (316쪽 저자의 말에 공감하며.)
 
 책의 거의 끝부분에 에셔와 마그리트에 관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노라니 내가 에셔보다 마그리트를 더 좋아하는 이유를 알겠다. 개인적으로 난 수학과 논리학 쪽 형식 체계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에셔의 발상이 재미는 있지만 감성과 다른 부분까지는 공명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에 반해 마그리트의 사유적 내용은! 나와 강하게 공명한다. 새삼 확인하며 예나 지금이나 난 변함이 없음을 알았다.
 
 1권만큼 재미있는 2권. 3권도 그럴까? 내가 모르는 피라네시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생각해보니 3권은 넘겨본 기억이 전혀 없다. 미지의 세계로 흠뻑 빠져봐야겠다. 거참 재미있는 책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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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1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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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는 세 권을 오래도록 책장에 두었어도 정독을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저 가끔 생각날 때나 뒤적이며 읽었었다. 내가 좋아하는 에셔나 마그리트 그리고 몰랐던 피라네시까지 두루 볼 수 있었고 미학뿐 아니라 철학적인 사유까지 겸할 수 있어서 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흔히 미학 입문서로 추천하는데 공감한다.

 
 "새 책은 유한성이 지난 다음에 읽는다."는 벤야민의 말을 저자가 언급했는데 내가 책을 읽는 방식이 그렇다. 그래서 베스트셀러나 신간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되거나 책장의 묵은 책 혹은 사두고 몇 년이 지나서 읽는 경우가 흔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기를 고대하다 막상 사서는 바로 읽지 않는 걸 이해할 수 있을까. 거품이 빠진 후 읽으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것에 일장일단이 있듯 시간이 지난 후에 읽는 이유는 좋은 책은 언제 읽어도 똑같다는 믿음 때문이다. 결국은 살아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좋은 책이라도 절판되는 일이 많으니 신간 정보는 놓치지 않는 편이 좋은 거 같다.
 
 이 책도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별로 주목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독자들 사이에서는 미학 입문서로 소문난 책이다. 앞으로도 많은 독자와 만날 것이고 그들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다. 1권은 에셔와 2권은 마그리트, 3권은 피라네시와 함께 하며 미학과 상상, 철학 등으로 연결된 이야기에서 뻗어나갈 가지가 무수하다. 제법 많은 곁가지를 품은 아름드리나무와도 같다. 그러니 읽으며 가슴이 뛰거나 영감을 얻거나 하는 게 아닐까. 나처럼 철학책을 체계적으로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마구잡이로 읽은 탓에(그것도 고등학생 때라 가물가물.) 깊이가 없어서 말이다.
 
 이집트 벽화 등을 보며 그네들이 보이는 대로가 아닌 중요한 본질을 보고 그렸다는 사실은 다시 읽어도 새롭다. 사실 사람은 보이는 대로만 보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아니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어떠한 생각의 장벽 없이 오롯하게 다 볼 수 있으려면 미술사만 공부한다고 가능한 게 아니다. 도상학이나 미술사 같은 지식보다 무의식과 의식을 적절하게 활용해야 한다. 얼마나 의식적으로 깨어있어야 할까. 그래야 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림이나 작품뿐 아니라 모든 사물을 비롯해 사람까지 어떻게 보아야 할지 저절로 돌아보게 되었다.
 
 이는 플로티노스의 독창성과 같은 맥락이다. '예술가가 사물의 외관을 모방하지 않고 내면의 형상에 따라 창작을 한다고 본 점.'(127쪽.) 공감하는 바이다. 그래서 중세 예술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오래전 고딕 예술에 매료되었던 때를 떠올려보니 통(通) 하는 바가 있어서였다. 당시에는 왜 그랬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지나고 나니 정리가 된다.
 
 책은 어렵지 않게 잘 풀어서 이야기한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이야기처럼 흥미를 끄는 것들도 많다. 그래서 미학 입문서로 추천하는 것이겠지만. 저자 진중권은 무엇보다 쉬운 설명과 짧은 글로 독자를 이끌어 나간다. 삽입된 작품들만 보아도 즐거운 책이다. 더구나 1권은 에셔의 작품과 함께여서 경계의 구별 혹은 그 무의미함이나 어울림의 매력을 잘 활용하고 있다.
 
 책의 끝부분에 인간의 유한성과 세계의 무한성에 대한 글도 공감한다. 이런 공감의 글을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 하늘 아래 새로운 사상이 더 나올 수 있을까 싶은 생각. 내가 하는 생각과 말이 내가 아닌 그 누구의 경험과  습득해온 것들에서 나왔다는 걸 문득 느낀다. 생각의 체력이 강한 누군가가 내 머릿속을 열어 본 느낌이다. 대중적인 공감으로 위안을 얻는 책도 있겠고 개인의 철학이나 미묘한 감정의 공감으로 재미있는 책도 있다. 이 책은 당연 후자의 책이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둘 다 개인적이기는 하지만 전자가 공감으로 위안을 얻는다면 후자는 공감으로 위안뿐 아니라 희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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