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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1 ㅣ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미학 오디세이」는 세 권을 오래도록 책장에 두었어도 정독을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저 가끔 생각날 때나 뒤적이며 읽었었다. 내가 좋아하는 에셔나 마그리트 그리고 몰랐던 피라네시까지 두루 볼 수 있었고 미학뿐 아니라 철학적인 사유까지 겸할 수 있어서 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흔히 미학 입문서로 추천하는데 공감한다.
"새 책은 유한성이 지난 다음에 읽는다."는 벤야민의 말을 저자가 언급했는데 내가 책을 읽는 방식이 그렇다. 그래서 베스트셀러나 신간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되거나 책장의 묵은 책 혹은 사두고 몇 년이 지나서 읽는 경우가 흔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기를 고대하다 막상 사서는 바로 읽지 않는 걸 이해할 수 있을까. 거품이 빠진 후 읽으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것에 일장일단이 있듯 시간이 지난 후에 읽는 이유는 좋은 책은 언제 읽어도 똑같다는 믿음 때문이다. 결국은 살아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좋은 책이라도 절판되는 일이 많으니 신간 정보는 놓치지 않는 편이 좋은 거 같다.
이 책도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별로 주목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독자들 사이에서는 미학 입문서로 소문난 책이다. 앞으로도 많은 독자와 만날 것이고 그들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다. 1권은 에셔와 2권은 마그리트, 3권은 피라네시와 함께 하며 미학과 상상, 철학 등으로 연결된 이야기에서 뻗어나갈 가지가 무수하다. 제법 많은 곁가지를 품은 아름드리나무와도 같다. 그러니 읽으며 가슴이 뛰거나 영감을 얻거나 하는 게 아닐까. 나처럼 철학책을 체계적으로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마구잡이로 읽은 탓에(그것도 고등학생 때라 가물가물.) 깊이가 없어서 말이다.
이집트 벽화 등을 보며 그네들이 보이는 대로가 아닌 중요한 본질을 보고 그렸다는 사실은 다시 읽어도 새롭다. 사실 사람은 보이는 대로만 보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아니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어떠한 생각의 장벽 없이 오롯하게 다 볼 수 있으려면 미술사만 공부한다고 가능한 게 아니다. 도상학이나 미술사 같은 지식보다 무의식과 의식을 적절하게 활용해야 한다. 얼마나 의식적으로 깨어있어야 할까. 그래야 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림이나 작품뿐 아니라 모든 사물을 비롯해 사람까지 어떻게 보아야 할지 저절로 돌아보게 되었다.
이는 플로티노스의 독창성과 같은 맥락이다. '예술가가 사물의 외관을 모방하지 않고 내면의 형상에 따라 창작을 한다고 본 점.'(127쪽.) 공감하는 바이다. 그래서 중세 예술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오래전 고딕 예술에 매료되었던 때를 떠올려보니 통(通) 하는 바가 있어서였다. 당시에는 왜 그랬는지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지나고 나니 정리가 된다.
책은 어렵지 않게 잘 풀어서 이야기한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이야기처럼 흥미를 끄는 것들도 많다. 그래서 미학 입문서로 추천하는 것이겠지만. 저자 진중권은 무엇보다 쉬운 설명과 짧은 글로 독자를 이끌어 나간다. 삽입된 작품들만 보아도 즐거운 책이다. 더구나 1권은 에셔의 작품과 함께여서 경계의 구별 혹은 그 무의미함이나 어울림의 매력을 잘 활용하고 있다.
책의 끝부분에 인간의 유한성과 세계의 무한성에 대한 글도 공감한다. 이런 공감의 글을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 하늘 아래 새로운 사상이 더 나올 수 있을까 싶은 생각. 내가 하는 생각과 말이 내가 아닌 그 누구의 경험과 습득해온 것들에서 나왔다는 걸 문득 느낀다. 생각의 체력이 강한 누군가가 내 머릿속을 열어 본 느낌이다. 대중적인 공감으로 위안을 얻는 책도 있겠고 개인의 철학이나 미묘한 감정의 공감으로 재미있는 책도 있다. 이 책은 당연 후자의 책이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둘 다 개인적이기는 하지만 전자가 공감으로 위안을 얻는다면 후자는 공감으로 위안뿐 아니라 희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