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병과 최루가스가 길거리위에서 엉겨붙어 싸우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학생이라면 그런 시위 한번쯤은 해야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념이 춤을 추고 그 너울거리던 춤사위에 숨이 막혀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던 사람들도 있었다.  행동을 하는 사람과 그 행동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했던 사람들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이렇게 훌쩍 지나와버린 그 시간들속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행동하는 사람들의 질서였다고나 할까?  아무리 이념만을 외쳐대고 그 이념속에 묻혀 사는 그들이었다고는 해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차마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던 그들만의 질서를 기억한다. 한쪽으로는 화염병을 던지며 한쪽으로는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 화염병의 피해속에서 피신시키고자 했었던 그들의 질서...  눈 밑에 치약을 바르면 덜 따가울 거라며 교복입은 채 출입금지였던 다방안으로 피신했던 여학생에게 다방주인이 내밀던 그 치약을 기억한다.

오현우... 행동하는 사람의 대표격인 인물설정으로 보여진다. 자신 스스로가 판사앞에서 '나는 사회주의자요' 라고 외칠 수 있었던 그의 가슴속에서 활화산처럼 솟아올랐던 그것은 '잠시만이라도 나만 바라봐주면 안되겠느냐' 던 그녀의 눈길조차도 외면해야 했다.  수배자.. 그리고 피신.. 외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예정되어지지 않았던 동거는 또다른 이름의 삶을 잉태한다. 함께 있음으로 평안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사치였을까?  그의 살갗에 내려와 앉던 그녀의 사랑이 어쩌면 그에게는 바늘처럼 따가운 고통으로 전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랬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 고통이 다시금  지나왔던 그 길을 바라보게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동료들이 하나둘씩 수감되고 함께 행동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무너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만의 행복을 용서할 수 없었던 남자는 결국 왔던 자리로 되돌아가기로 한다.  빗속에서의 이별.. 어쩌면 그들이 흘려야 했던 눈물이 비로 승화되었던 건 아니었을까?  숨겨주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그런데 왜가니?  하던 여자의 독백이 빗속에 묻혀버리길 바랬는데 그 목소리가, 그 눈길이 빗속에 선명하게 자국을 남겨버린다.  수감.. 그리고 17년.. 모진 고문속에서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간간히 전해져 오는 그녀의 그림속 아이가 그에게는 무슨 말을 전해줄 수 있었을까?  세월은 참 무심하다. 이념도 행동도 그 세월속에서 무디어지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런게 아니라 그 세월이 무디어지는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변해가는 게 세월일테니 말이다.

한윤희...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행동하는 사람을 껴안을 수 밖에 없다. 어느 날 찾아 든 한 남자에게 그녀는 말했었다. 이불이 하나밖에 없지만 머물러도 좋다고. 그리고 그들은 한이불속에서 머문다. 그 시간들이 행복이라는 이름을 달고 찾아왔다고 그녀는 생각했지만 '떠남'을 전제로 해야했던 그 남자에게는 그녀의 행복조차 펌프물처럼 그렇게 쏟아져 내리고 말지.. 된장국을 끓이고 두개의 밥그릇에 밥을 담고 상추쌈을 싸서 함께 먹고 싶다는 그 소박함조차도 현실은 인정해주기 싫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오래가지 못할 그녀의 삶을 이유로 그 남자를 떠나보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방황끝에 다시 외진곳의 추억속으로 되돌아와 그림속에 자신의 시간을 덧칠해 버렸을 때 그녀의 삶은 시한부였다. 그와 그녀를 닮은 아이를 키워주던 그녀의 엄마는 아마도 시간의 그림자였을 게다. 그 시간이 커가는 아이를 등에 업은 채 엄마의 생명과 아버지의 고통을 받아 먹으며 달려가고 있다.  그녀의 죽음.. 그 남자의 출소.. 다시 찾은 그곳.. 그리고 회상..

회상... 잊을 수 없었던 그녀의 여운을 찾아 되돌아 온 그들만의 정원. 너무도 오래된 정원속에서 그는 듣는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그녀의 시간들에 대해. 그리고 그 시간들이 아픔이었지만 결국 사랑이었고 행복이었다는 것을.  오직 당신밖에 사랑하지 못했노라던 그 목소리가 환영처럼 만들어낸 그녀의 영혼.. 그녀가 그의 어머니가 있는 집을 찾았을 때 가져왔던 오래된 그의 사진이 그녀의 그림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삶을 놓아버려야 하는 민머리 그녀곁에 나란히 서서. 그렇게 둘이었다가 하나가 되고 다시 둘이 되어야 했던 그들이 그녀의 그림속에서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결코 다시 둘이 될 수는 없었노라고.. 사랑은 그렇게 그녀의 가슴속에서 우물같은 깊이로 머물렀었나 보다.  그 남자, 오현우는 그녀가 남긴 두레박으로 회상속의 사랑을 퍼올릴 수 있을까?  이미 지나가버린 그 회한의 시간을 퍼올릴 수 있을까?  은결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아이가 훌쩍 커버려 그들이 사랑을 나누었던 그 때의 나이로 그의 앞에 섰을 때 그는 알아버렸다.  그가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그것은 사랑이었노라고. 그리고 이제는 그 두레박의 끈을 놓칠 수 없다고.

오래된 정원... 이 영화는 사실 너무 깊지 않았나 싶다. 보여주는 장면속에 깔아놓은 복선의 흐름이 너무 가파르다. 회상과 현실속으로 건너가는 돌다리를 건널 때 주의깊게 살펴봐야만 한다. 건너야 할 돌의 넓이와 돌과 돌사이의 간격을 잘 파악하지 않으면 물 속에 빠져버릴 것처럼 위태롭다.  이념과 타협하지 못한 자가 겪어내야 했던 삶도, 이념과 타협하며 살아냈던 자의 삶도 옳다 그르다 평가할 수 없다. 어느것도 옳다 말할 수 없으며 그르다 말할 수 없을테니.  영화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빌려 말해주고자 하는 것조차도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으니 그것은 온전히 속울음일 뿐이다.  시대가 만들어낸 이념의 희생자는 아니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변화는 우리가 겪어내야 할 선택이 아닌 필수과목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모든 복잡함을 떠나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단지 여자는 아주 작은 행복 한자락만을 붙잡고 싶어했을 뿐이라고... 그리고 그 남자, 홀연히 떠나야 했을 뿐이라고...

모를 일이다. 사랑이 왜 그렇게 엇박자를 좋아했는지.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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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털 사계절 1318 문고 50
김해원 지음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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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하하... 재미있다. 후련하다. 그리고 속시원하다. 그야말로 유쾌, 상쾌, 통쾌다. 무엇이 그토록 재미있고 후련하고 속시원한지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저 공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거라는 믿음을 안겨주는 책이다. 뭐, 그렇다고 지지리 궁상으로 살던 시절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른들이 지나쳐왔던, 그러나 어쩌면 외면하고 싶을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슬쩍 깔아주는 그 묘미가 참 좋다.  우리네 어른들이 살아냈던 그 배경을 뒤에 업고 제 할말은 다하고 사는 우리의 청소년들을 그려냈다는 것도 또한 별미다. 그래서 이 책은 나를 새벽까지 잠 못들게 만들었다.

좀 미안한 얘기지만 이 책이 풍겨주는 느낌은 일전에 읽었던 <완득이>를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완득이와 열일곱살의 털, 송일호는 확실히 다르다. 그 주변을 천천히 보여주며 삶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던 <완득이>와는 달리 자아찾기에 도전하는 고등학교 1학년 송일호의 모습속에는 그 세월의 한 단면을 보여주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래, 그랬었지... 그때는 나도 그랬었지... 하는 공감의 부분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불러내고 있음이다.  우리 나이에  한 때 반항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은채 살았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생활에 치여 너무 일찍 철이 들었던 탓에 '애어른'처럼 살았다할지라도 그 속까지야 어른이 될 수는 없었을테다.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나를 찾아와 몹시도 힘들게 했었던 그 시절속으로 다시 들어간 것처럼 이 책은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참 많았다.

갓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집에 오는 길에  친구가 사준 오방떡을 길에서 먹는다는 게 부끄러워 차마 먹지 못한 채 가방에 넣어 두었었다. 집에 돌아오니 오방떡은 완전히 납작떡이 되어버렸고 그 때 그일을 친구는 두고두고 울궈먹었었다. 내가 입학했던 여학교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학교와 붙어 있었다.  남학생은 위아래 까만색 교복을 입었고 여학생은 까만 치마에 하얀 브라우스를 입어야 했었다. 교복자율화니 두발자율화니 하는 말들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까까머리에 모자를 썼고, 단발머리 혹은 종종 땋아내린 머리를 가지런히 해야했던 그 시절.. 아침 등교길이면 학생주임과 교련선생이 어김없이 교문앞에 서서 지각단속과 함께 두발, 복장 단속을 했었다. 그리고 하교길이면 남학생 여학생이 서로를 바라보며 쑥덕거렸다.  하얗게 고속도로가 나버린 남학생의 머리는 모자를 써도 가려지지 않았고, 귀밑 1cm를 넘기면 어김없이 짝짝이 머리를 해야 했던 여학생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어쩌랴... 그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볼 밖에. 그랬어도 그 시절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너무 짧았다.

어른이 되어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어른들이 우리들을 길들이려고 하듯, 어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에 길들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208쪽)

우리의 주인공 송일호.. 단지 머리가 학교규정에서 약간 어긋났다고 하여 너무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던 옆반 친구를 대신하여 감히 선생에게 항거를 했던 그 순간부터 범생이 일호는 가슴속에서 불현듯 일어서는 무언가를 느낀다. 이건 아니지.. 하는 일호의 의지를 보면서 그건 진정 반항이 아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어른이라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문제아로 몰아가는 상황이 왠지 뻔뻔스러운 우리의 삶과 일치하는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하다. 니가 아무리 그래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 적당히 하고 집에 가서 쉬지?...  관심을 끌고자 한 것도 아니었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나도 틀에 박힌 어른들의 잣대가 싫었고, 그것에 길들여진다는 그 자체에 항의했을  뿐이다. 세상의 수많은 규칙과 약속을 다 지키며 살기에는 너무 벅차다. 그렇다고 그 많은 것들을 모른 척 외면하며 살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너무 기성세대적인 시선으로만 우리의 청소년들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훤히 알고 있는 그것들을 내가 편하기 위해 일부러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작금의 교육현실을 바라볼 때 개탄해마지 않을 일이다.

"송일호, 너는 방망이로 때리면 어디서 튀어 오를지 모르는 두더지 오락기 같아. 자극을 받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아무도 모르지"
"사람에게 빛깔이 있다.... 아마 그 빛깔은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215쪽)

자유를 달라고? 그건 아니었다. 자유가 아닌 자유스러움의 특성을 요구했을 뿐이다. 머리털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인격이 철저하게 무시되는 그런 현실말고 저마다 가지고 있는 그 특성을 아주 조금만 인정해 달라는거였다. 결국 제 편이 되어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송일호는 승리를 했다.  두발규제에 그토록 강경하게 굴었던 교장선생 앞에서 이발사였던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었다.  옛날에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린 한 학생이 이발소에 찾아와 별을 만들어 달라고 했었다고. 그래서 그 학생의 뒷꼭지에는 별이 그려졌다고. 그리고 그 학생은 절대로 내 자식의 머리를 내 마음대로 하지는 않을거라는 말을 했었다고.  누구나 똑같이 겪어내야 했던 그 시절의 번민과  고뇌를 이미 지나쳐간 일이라고 외면한다면 반목과 결렬만이 있을 뿐이라는 교훈을 슬쩍 내던지던 대목이다. 결국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손에 의해 많은 별들이 만들어지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학생시절에 가장 부러운 것이 무엇일까? 두말 할 필요없이 빨리 학교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는거다. 이 지긋지긋한 규율의 늪에서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는 거다.  맘대로 머리기르고 사복입고 가고 싶은데 눈치보지 않고 가는거... 그 시절에 어른들이 그렇게 말했었다. 공부하기가 그렇게 힘드냐? 지나고 보니 가방들고 학교다닐 때가 가장 속편하고 좋았다 이눔아... 지금 늬덜이 무슨 걱정이 있다고... 그랬다. 정말 지나고보니 가방들고 학교다닐때가 정말 좋았다.  하지만 그 때는 모르지. 현실의 무게는 누구나에게 무겁게 느껴질테니까. 나 역시도 그 시절의 현실은 너무나 무거웠었다.

책을 읽으면서 범생이 일호가 단단해지기 위해 치뤄내는 일종의 수련과정들이 밉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그랬든, 현실도피적인 일탈이 되었든 오랜동안 집을 떠나있었던 아버지의 귀가는 일호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알게 해 주었다. 거기에 손자와 할아버지를 묶어주었던 믿음의 끈과 아버지와 아들을 묶었던 그 질긴 가족간의 情은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을만큼 강하게 다가왔다. 일호와 정진의 우정도 옹골지다. 그리고 멋지다. 믿어준다는 것, 그리고 한편이 되어준다는 것은 말만으로도 참 좋다. 그 느낌만으로도 푸근하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책장을 덮으며 아쉬웠던 한가지가 있다면 왠지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었던 아버지의 가출과 귀가에 대한 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너무나도 재미있게 읽혀졌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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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08-09-22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비님, 축하드려요. :)
 
언어없는 생활
둥시 지음, 강경이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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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다리가 없는 친구가 있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위하여 다리없는 친구를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가 업고 다녔다. 그렇게 상대방의 눈이 되고 발이  되어주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 책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소설집이다. 그런데 이 책속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전래동화속의 그 따뜻함은 보이지 않는다.  읽는 내내 가슴 한켠이 아렸다. 과연 어느쪽이 장애인인지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면 억지일까?  부족한 사람끼리 만나 칡넝쿨처럼 그렇게 얽혀 살아가는 모습에 왠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 주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처음 이 책을 보면서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 와 <눈 뜬 자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온갖 사회의 부조리에 얽힌 인간의 내면세계를 그려주었다는 생각에 상당히 인상깊게 읽은 책이기도 하지만,  이 책 <언어없는 생활>을 읽으면서도 그와 비슷한 걸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마을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아야 한다는 건 그들에게는 정말 지옥 같았을 것이다. 세상 어느 구석을 보더라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너무 만연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누구의 탓도 아닌 우리들 자신이 만들어가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어찌보면 서로가 서로를 탓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책속에는 다섯편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이야기들이었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를 따라오던 그 느낌의 여운은 너무나도 길고 깊었다.

'언어 없는 생활' -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귀가 들리지 않는 아들, 그리고 나중에 한 식구가 되는 벙어리 며느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들리지 않는 자신의 귀가 너무도 원망스러워 스스로 잘라내 버리던 아들의 모습과  단지 벙어리라는 이유로 다른사람에게 치욕스러운 일을 당해야 했던 여자.. 그들에게도 마침내 아이가 생겨난다. 하지만 아이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가족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 아이조차도 귀와 입을 닫아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마을사람들과 하나가 되지 못한채 채 완성되지도 못한 개울건너의 집으로 짐을 옮겨가던 날은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울컥해왔다. 

소아마비로 인하여 한쪽 다리를 저는 한 아이의 성장과정속에서 드러나는 열망과 차별에 의한 열등감을 다룬 '느리게 성장하기' 는 성공을 향한 삐뚤어진 심리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바르게 가지 못했으니 그 성공이 제대로 자리 잡을리가 없다. 무너져 내리는 그의 성공이 가슴 아팠다.
'살인자의 동굴' 은 이웃남자를 살해하고 동굴로 숨어든 살인자 아들을 극진하게 보살피는 모정을 이야기한다. 제 몸 하나야 어찌되었든 어떻게 해서라도 그 아들만큼은 살려내고 싶어하던 어머니의 마음. 저 하나만의 안위를 위하여 모두가 버린 아들을 지켜내고자 하던 모정은 정말 눈물겨웠다.

그리고 욕정에 시달리는 창녀촌을 고향으로 둔 한 남자의 이야기 '음란한 마을' 속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욕정의 사슬을 끝내 끊어내지 못한 한 남자의 절규가 담겨져 있다. 그것을 피해 달아났건만 다시 되돌아온 원점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는 한 사람의 여정을 아주 절절하게 그려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술과 게으름으로 아내와 아들을 돌보지 않는 뻔뻔한 가장의 예를 들려주던 '시선을 멀리 던지다' 는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주변에 얽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야말로 가난이 죄가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기도 한...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이 생각났다. 그 영화를 보면서 중국의 서민층이 살아가는 모습에 참 낯설고 생소하다는 느낌을 가졌었는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 책속에서는 너무 차갑고 냉정한 모습만 그려준 것 같아 '산다'는 말의 의미앞에서 잠시 서늘해지기도 했다. 어쩌면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직설적인 표현들이 그렇게 느끼게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습들을 끄집어내어 우리의 정서에 대해 한번쯤은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랬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과의 소통이 너무도 어려웠던 그들에게 과연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만큼이나 있었을까? 그들의 슬픔, 그들의 절망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일본소설이 난무하는 요즘 출판계의 흐름속에서 중국문학을 만났다는 것이 참으로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기회가 되는대로 중국문학을 만나 볼 요량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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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 교향곡
조셉 젤리네크 지음, 김현철 옮김 / 세계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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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슈베르트, 구스타프 말러, 거기에 드보르작까지... 모두 교향곡 9번을 작곡한 후 사망했다?  그것이 바로 9번 교향곡의 저주란다. 일단은 소설의 모티브가 되어 준 '9번 교향곡의 저주'라는 의미가 내게는 상당히 강하게 다가왔다. 9번 교향곡을 작곡한 슈베르트가 젊은 나이인 서른한 살에 사망했던  까닭에 교향곡 제9번을 작곡하면 음악가들에게 저주가 내린다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음악에, 특히 클래식이라는 분야에 문외한인 내가 읽기에도 전혀 거부감이 없었을 정도로 이 책은 아주 세심하게 쓰여져 있는 것 같다.  음악평론가이자 대학교수인 젊은이 다이엘 파니아구아.. 다니엘은 박사지만 출판을 위해 베토벤에 관한 연구리포터를 준비중이기도 하다. 젊다는 것은 무엇엔가 도전할 수 있다는 용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다니엘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음악의 세계에 빠져들기 위해서는 어느정도는 용기가 필요할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펼쳐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음악의 문외한이니까 말이다. 가끔 듣는 클래식이라는 것도 사실은 졸릴 때가 더 많으니 어쩌랴...

알레그로, 아리아, 소나타, 칸타타 등등등..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음악적인 용어가 많아서 책을 읽는 내내  겁을 먹었지만 아주 세심하게 배려라도 해주듯 잘 설명되어진 문장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음악적인 지식이 없는 나에게조차 하나의 호기심을 채워주기에는 충분하다는 듯이.. 아직 세상에 발표되어지지 않은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이 로널드 토마스라는 음악가에 의해 발표되고, 그것을  듣는 순간 로널드 토마스의 작품이  아니라 베토벤이 직접 작곡한 작품이라고 확신하는 다니엘. 그 후 그 음악을 들려주었던 작곡가 토마스는 머리가 잘려진 시체로 발견된다. 머리를 찾아 헤매던 형사들이 다니엘을 찾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 하다. 찾아낸 머리에 문신으로 새겨져 있던 악보. 그 악보를 기준삼아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야 하는 수사진과 다니엘의 일정, 그리고 10번 교향곡을 둘러싼 음모가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하는 걸 보면 스토리가 상당히 촘촘하게 엮여져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를 따라다니던 느낌 하나를 버리지 못했다. 바로 댄 브라운의 작품 <다빈치코드>이다. <다빈치코드>를 읽을 때의 느낌과 이 책을 읽을 때의 느낌이 거의 대동소이하다면 이상한 일일까?  스토리의 짜임새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팩션이라는 같은 맥락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들지만 단지 '그림'에서 '음악'으로 주제만 바뀐듯한 느낌이 들었다. 프리메이슨과 같은 종교집단을 내세운 것도 그렇고 암호를 만들어 그 암호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도 거의 비슷하게 느껴진다. 물론 모든 것이 다 똑같을 수는 없다. 다만 전체적인 흐름이 자꾸만 나를 <다빈치코드>쪽으로 몰고 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재미있다. 적지않은 쪽수임에도 불구하고 한번 잡게 되니 책을 손에서 놓기가 쉽지 않았다. 주인공이 엮어가는 다음 일정이 궁금해서.

현재의 사건을 풀어나가면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찾아 헤매는 설정은 언제 보아도 참 재미있게 다가온다. 사실과 상상이 만들어내는 그 공간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 작가는 어떻게 그려주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이 책을 통해서 베토벤이라는 음악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베토벤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바로 떠오르는 게 ' 빠바바밤...' 하는 웅장한 소리로 시작되어지는  제5교향곡 '운명'밖에는 없지만 말이다.  베토벤에 얽힌 일화들, 베토벤이 사랑했던 여인들, 그리고 베토벤의 어린시절과 일상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걸 보면서 문득 지은이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작가 조셉 젤리네크 역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이고 베토벤 전문가라는 말에  책속의 주인공 다니엘과 겹쳐지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무던히도 사랑하여 빠질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참 행복한 일일거라는 엉뚱한 생각도 하면서. 그랬기에 이런 작품도 나올 수 있는거겠지 한다.

토마스의 죽음을 따라가면서 과연 살인자는 누구일까 나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프리메이슨이라는 음성적인 집단을 내세운 작가의 교묘한 함정에 하마터면 빠져버릴 뻔 했다. 실제적으로 베토벤이 일루미나티라는 단체에 가입을 했었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혹시나 했었다.  스릴러의 경우 범인은 늘 가까이에 있다는 법칙이 적용되곤 한다.  죽은자의 가장 가까이에 머물렀던 사람중에 하나라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책은 이미 처음부터 범인을 밝힌 채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주 잠깐 스쳐가는 그 이야기를 책을 읽는 내내 기억해내지 못했다. 아니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가서야 무릎을 치게 되니 그 맛이 또한 스릴러의 참 맛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제1교향곡,  제2교향곡, 제3교향곡 '영웅', 제4교향곡, 제5교향곡 '운명', 제6교향곡 '전원', 제7교향곡,제8교향곡, 제9교향곡 '합창', 그리고 제10교향곡... 베토벤의 작품들이다. 이 책을 통해 교향곡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커다란 수확이 아닐까 싶다. 물론 전체적인 배경이야 내가 알 수 없겠지만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지식만으로도 배가 부른것 같다.  책 뒤에 부록으로 따라 온 작은 CD를 보면서 과연 어떤 음악이기에? 하는 의구심이 들면서  빨리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책속에서 베토벤을 그렸다는 책과 영화에 대한 대목들이 잠시 등장하는데 그 작품들에 대한 궁금증 역시 엄청나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은 그 작품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욕심을 앞세워 본다.

사랑은 참 무섭다. 기쁨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원망과 증오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랑의 방식 또한 다양하다. 다니엘이 보여주는 사랑도 그렇고 과거속의 인물 베토벤이 보여주는 사랑, 그리고 죽음을 불러들인 토마스의 사랑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베토벤의 10번교향곡이라는 모티브로 이끌어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잘못된 사랑의 방식이 끔찍한 살인을 불러오게 되는 이야기의 마무리가 왠지 섬뜩해지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긴장감속에서 조바심을 내며 읽었던 책이 아닌가 싶다. 정말 재미있고 유용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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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습관에게 말을 걸다 - 손톱을 물어뜯는 여자, 매일 늦는 남자
앤 가드 지음, 이보연 옮김 / 시아출판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좋은 습관은 어려서부터 몸에 베이도록 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살아오는 동안 수도없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도 모르게 생겨난 버릇 하나쯤은 다 하나씩 갖고 있는 듯 하다. 그런 습관이 생겨나게 되는데는 배경이 꼭 있을거라는 이 책의 소개글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무심코 하는 사소한 습관에 과연 어떤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일까? 사실 그런류의 말과 설명들은 굳이 이 책이 아니더라도 보고 들을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욕심을 갖게 된 이유는 습관이 생겨나게 된 배경들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해답정도는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가 컸던 이유도 있었는데 이 책속에는 문제는 있고 답이 없는 듯 하다.  역자 후기에서도  이 책에서 습관을 고칠 수 있는 기술적인 방법을 기대하지 말라고 써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습관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저자의 말처럼 일종의 강박관념이나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기억에 의한 불안감이나 정서가 흔들릴 때 나도 모르게 그것을 배척하거나 숨기거나 혹은 거부하기 위한 하나의 행동으로 습관이 생겨날 수도 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당사자에게는 좋은 기억일리가 없다. 그러니 그것으로 인한 어떤 심리적인 상태가 습관을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 습관을 하는 행동속에는 우리가 지나쳐 온 과거의 기억이나 심리적인 상태가 잘 나타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스트레스 수위를 자각할 수 있는 몇가지 경고 신호에 대한 예를 보았다. 과연 내 스트레스 경고 신호는 몇가지나 될까?  행여라도 남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닐까?  완벽하지 않은 나의 모습에 지나치게 실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자신과 다른 사람을 너무 가혹하게 평가하지는 않을까? '반드시'라거나 '꼭' '틀림없이'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하지는 않을까? ... 피해갈 수 없었다. 나 역시도 스트레스 경고 신호음이 울리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과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도통했다는 사람에게조차도 스트레스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그런 현상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게 나의 지론이기도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습관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게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런 것도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싶은 것들도 참 많았다. 설마, 하는 마음이 들게끔 하는 것들도 많았다. 습관은 의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습관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들이 습관으로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눈을 떳을 때부터 다시 잠자기까지 하루라는 시간속에서 습관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질 게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약간의 반감이 일었다.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 모든 것들을 습관이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그 습관이라는 말조차도 내게는 스트레스로 작용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혹시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나요? 끊임없이 물어오는 저자의 그 말투가 왠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그런 행동속에 숨겨진 속마음이나 숨겨진 상처를 찾아낸다고는 하지만 왠지 너무 극단적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물론 좋지않은 습관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나에게 좋은 점수를 주지는 못하겠지만 어쩌면 그냥 그렇게 넘어가도 좋을 만한 것까지 습관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삶의 무게가 더 무거워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기는 건 또 무슨 까닭인지....

습관뒤에 감춰진 심리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 습관을 고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습관속에는 분노나 두려움, 질투, 열망과 같은 많은 감정이 있어 늘  우리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에게 처해진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능력이 없고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끼는 것이다. 뒤로 물러서서 그 감정상태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 채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데 더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이말에 100% 공감한다. 문제를 회피하고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깊을수록 더 심해지는 건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뿐이다. 그 많은 습관들이 그렇게해서 생겨난 것이라면 그것은 좀 심각하다. 문제와 마주하며 풀어나가기 보다는 일단은 피하고 보자는 심리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말일테니...

심각하게 생각하다보니 너무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이렇게 재미있는 습관도 있단다. 부부싸움중에 아내가 순종하지 않을 때마다 자신의 바지춤을 잡아당기는 버릇이 있는 남자의 심리속에는  '바지를 입고 있는 나는 남자야' 하는 남성우월주의가 숨어 있는거라는 말을 보며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대게 무언가 자신의 기대만큼 혹은 생각했던 것과 일치하지 않을때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불편한 마음 상태를 숨기거나 아닌 척 위장하기 위한 행동들이 자꾸 반복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일게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 평소의 내 생각과 행동들에 대해, 그리고 이제 마악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녀석과의 심리전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러면서 나는 아들녀석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의 사소한 말과 행동들이 아들녀석에게 끼치게 될 영향을 생각하니 참 끔찍스럽기도 했다.

말다툼의 시초는 상대방을 향한 기대(-267쪽) 라는 말처럼 기대치를 약간만 낮출 수 있다면,  상대방에게 나의 욕구에 대한 반응이나 성과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심리적인 방황은 줄어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그것을 피하려 하지 말고 일단은 부딪혀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거라는 생각을 한다.  짧은 고통으로 오랜 평안을 가질 수 있다면 그쪽이 훨씬 현명해 보인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 늦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는 책속의 말처럼  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책을 덮으면서 나는 나의 습관 중 하나를 고쳐보기로 다짐한다. 시간지키기에 너무 투철한 나머지 나는 약속시간 전에 미리 나가는 습관이 있다. 일단은 상대방을 기다리게 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남의 소중한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의 그런 습관 때문에 나 역시 상대방이 늦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도 했으니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그것은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 책을 빌미로 한번쯤은 시도해 볼 만 하지 않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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