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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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언제부터 읽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책이었다. 아주 오랜동안을 책꽂이에 꽂힌 채 그 앞을 수도없이 왔다갔다 하던 나를 바라보았을 저 책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선은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알고 싶었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이웃종교로 읽는다는 그 다음말에 왠지 마음이 동했던 처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종교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가장 먼저 나는 왜?라는 질문부터 하게 된다. 그 끝없는 물음표들을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지?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하는거지? 하며 끝도 없이 나를 힘겹게 했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다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난무하는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로 아니 천당으로 가기 위한 길이 너무 많은 것이다. 하기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지옥이라 생각한다면 그 정도의 교회만으로는 천당가기 너무 힘들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 교회 한번 안가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성가대 생활도 오래 했을 뿐 아니라 학생시절에는 학생부 임원을 할 정도로 정말 열심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을까? 

종교라는 의미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왜 저렇게 형식적이어야 하는지, 왜 저토록 문자주의 혹은 율법주의라는 것에 얽매여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마음도 없이 그저 '믿음'이라는 글자 앞에서 벌벌 기다시피하는 그들의 모습이 나는 싫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인정한 것만이 옳다고 떠들어대는 그들이 모습이 나는 싫었다. 종교라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져 종내는 나의 마음을 편하게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너무도 많이 했었다. 또하나의 구속으로 존재하는 종교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다. 또하나의 구속이라는 말이 잘못된 것일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구속이란 의미로밖에는 보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종교, 과연 그것이 무엇이건데 이토록 나를 힘겹게 하는가!

큰 맘 먹고 책장을 펼쳤다.  모태신앙이었던 기독교인이 왜 불교에 관한 책을 써야 했는지, 왜 불교에 관한 공부를 해야 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기독교와 불교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종교관은 이런 모습을 해야 한다는 작가의 노력과 자부심이 가득하여 나도 함께 묻어가기에 너무 좋았다. 불교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동양의 불교, 서양의 불교 그리고 각 나라마다의 불교에 관하여 들려주시던 말들이 너무 편하게 다가왔다. 불교를 아는 것은 더 이상 불교 신자들만의 의무가 아니라는 말, 하나의 종교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와의 비교를 통한 분석과 이해가 필수라는 말('하나의 종교를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 많은 불교 서적이 출간되고 있지만 불교 이론을 설명하는 책의 대부분이 주로 불교 지도자들이 쓰고 있어 어려운 불교 용어와 사상을 쉽게 풀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것이 대부분이라 일반적인 (바로 나와같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 특히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넘나들면서 예로 들어주는 여러가지 해설은 평소 내가 했던 의문점에 대한 마침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경험하고 생각했었던 것들이 모두 이 안에 들어있었다.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두가지를 서로 어울려가며 같은 맥락으로써 읽을 줄 알았던 작가의 그 커다란 마음씀씀이에 나는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는데 하물며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커다란 일을 함에 있어서 외골수적인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가르침앞에서는 정말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오래 된 연못
개구리 뛰어든다
물소리 퐁당
- 일본의 가장 유명한 하이쿠 시인 바쇼의 작품(269쪽)

이름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장미라고 하는 그것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향기는 마찬가지
- 셰익스피어

저 두가지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점은 아마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아무 꾸밈없는 그 처음의 세계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속에서 모든 것을 찾으려고 하는 마음, 우리가 한번 건너뛴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곳의 진리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다는 느낌이었다. 어느샌가 내 손에는 볼펜이 들려져 있다. 그리고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과 같은 마음이 되어 있었다. 공감하며 읽어갈 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 편하고 좋았던 까닭이다. 그야말로 글자만 읽는 책읽기가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해가며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넓혀가고 싶은 욕심이었을 게다. 오로지 불교라는 종교의 배경과 특징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종교인이 되기 위해서 혹은 진정한 종교를 받아들이는 마음자세를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많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우리도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염원했던 부분은 바로 동야의 불교가 서양으로 넘어가서 자리를 잡게 되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정말 너무도 욕심이 나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왜 저렇게 될 수 없는 것일까?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하나, 기복적이거나 의례 중심에서 참선 혹은 명상 중심으로
둘, 스님 중심에서 재가 불자 중심으로
셋, 남녀 차별에서 남녀 평등으로
넷, 수직적  권위주의에서 수평적 대등관계로 (지도자와 불자의 위계적 차별도 적다)
다섯,가족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각자 개인의 종교를 인정해야 한다)
여섯, 종파주의에서 연합주의로
일곱, 종교적 고립에서 종교간 대화로
여덟, 사회 고립에서 사회 참여로

책의 307쪽에 나와있는 이 여덟가지는 서양 불교의 특징과 동향에 관한 이야기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서양불교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종교적인 입장을 대변하여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하고..  베트남의 유명한 틱낫한 스님께서 수행중에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나만 이렇게 수행을 해야 하는가 하여 참여불교를 말씀하셨다는 말을 보면서 참으로 놀라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의 세상속을 떠돌고 있는 모든 종교는 변해야 하며 또한 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일전에 TV를 통해 보여지던 광고가 생각난다. 성탄절에 스님들이 교회를 찾아가 함께 기뻐하고 석탄일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해주던 그 광고...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말이다.

개인적으로 산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산에 오를 때마다 수학공식처럼 따라다니는 산사에 머무를 때가 많았다. 잿빛 가사를 걸치고 하얀 고무신을 신은 스님들의 그 조용한 움직임, 지붕 한 귀퉁이에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아주 맑은 소리로 내게 다가오던 풍경의 속삭임이 너무 좋았다. 종교적인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 산사가 안고 있던 느낌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어느날 문득 불교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점을 찾았지만 그 딱딱함으로 다가오던 문자들이 내게는 너무 생소했다. 몇권을 책을 들춰보고 읽어보고 하기를 반복하다가 끝내는 빈손으로 나오기 일쑤였다. 왜지? 이래가지고 대중적인 종교라고 할 수가 있겠나?  참 바보같은 질문이었겠지만 왠지 내 가슴 한켠에 남아 나를 느끼고 있는 산사의 이미지와 불교라는 종교를 같이 묶어버렸던 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 어느 틈엔가 대웅전의 불상앞에서 절을 올리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실 어떻게 절을 해야하는지도 몰랐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옆의 아주머니가 하시는 모양대로 따라했을 뿐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 한쪽에 바람이라도 들어온 양 그렇게 시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인연이었을까? 그 뒤로도 나는 산사를 자주 찾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불교인이라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한다. 종교적인 면에서보다는 모든 형식을 떠나서 그저 나를 한번 더 돌이켜 생각할 수 있는 그 시간을 허락해주는 공간이 너무 좋았고 조용하게 주변을 위해 마음을 모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니 그저 좋을 뿐이다. 이런 내가 어찌 종교의 유무를 따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나에게는 정말 크나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었다. 메모를 시작하며 읽었는데 어느새 몇장의 메모가 생겼다. 책속에는 작가가 추천해주기도 했고 참고했다던 책들이 참 많다. 서점에 갈 기회가 있다면 메모를 들고 가 한번 더 찾아볼 요량이다. 그러고보니 어느샌가 인터넷 서점에 익숙해져버린 내 모습이 보인다. 발품파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종교인이라면 꼭 한번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 굳이 종교를 갖지 않아도 좋다. 읽어본다면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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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컨스피러시 -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겨냥한 대 테러 전쟁
에이드리언 다게 지음, 정탄 옮김 / 끌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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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일전의 신문기사가 생각났다. 우리나라의 종교단체에서 봉사라는 목적으로 아랍권을 찾았다가 납치되어던 사건말이다. 꽤나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협상을 시도했다던 기사.. 그 기사로 인하여 세계각국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던... 테러라는 말 자체를 실감하기에 나는 너무 멀리 있는 것 같다. 미국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부르짖는 것과 또한 느닷없이 건물속에 쳐박힌 비행기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9.11테러에 관한 것들도 어떻게 저럴수가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 가만히 생각해보면 테러라는 것 또한 하나의 종교전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책속에서 만나지는 테러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종교가 등장하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일국의 그것도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하는 큰 나라의 대통령조차도 자신의 종교관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나는 또다시 생각하게 된다. 도대체 무조건적인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컨스피러시conspiracy... 찾아보면 공모共謨라고 나온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뜻을 모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책제목 자체가 하나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어보기도 한다.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상황, 그리고 그 베이징을 향한 여러 사람의 공동모의가 이 책의 가장 큰 줄기인 까닭이다. 가장 냉철하면서도 비열한 그 공모의 밑바닥엔 저마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저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익이 생기는 일이라면 적과의 동침조차도 마다하지 않는 실리주의 원칙일까? 실상적으로 베이징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 베이징을 향한 시선들을 따라가면서 이야기는 전개되어지고 있다.  베이징은 사실상 표적물로써의 이미지일 뿐이지 상황전개속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좀 더 알기쉽게 표현하자면 알라신을 내세운 이슬람과 전능하신 하나님을 내세운 기독교가 맞붙고 있는 것이다. 제각각 저들의 신이 더 잘났다고 떠들어대고 있는것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에 한가닥 더 붙여보자면 소수민족 국가들의 권리주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덩치 큰 나라들에게 비이커안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달궈지는 소수민족 국가들이 이제는 그 뜨거워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튀어오르기 시작했다는 거다.

책속의 설정이 가슴 떨리게 두려운 까닭은 생화학테러라는 점일 것이다. 바이러스라는 무시무시한 무기가 우리가 숨쉬는 공기속에서 우리를 공격한다고 생각해보라.  지은이는 자신이 테러리스트라고 가정하고 이 소설을 썼다고 했지만 첩보 부대에서 근무하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했었던 지은이의 이력을 살펴본다면 그리 과장된 설정만은 아닌 것 같아 내심 놀랍기도 했다.  인물들이야 허구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흘러가는 전개과정은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하듯이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정말 지독한 힘이예요. 종교말입니다. 논리보다 믿음에 바탕을 둔다는 것. 그게 바로 종교의 문제죠." "우리는 늘 자신보다 더 나은 존재를 믿고 싶어하죠. 그게 바로 인간인가 봐요. 그리스와 로마를 봐요. 전쟁을 대변하는 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폴로,헤르메스,제우스."(285쪽)... 지은이가 현재 호주 국립대학 아랍 이슬람 연구원으로 재직중이라는 이력을 보고나서야 테러전의 밑바탕에 종교적의식이 깔려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아니 굳이 그런 지은이의 이력을 들이대지 않는다해도 이미 오래전부터 종교를 앞세운 전쟁은 끝도 없는 게 사실일게다. 신의 이름을 앞세우며 서로가 서로를 향해 전쟁을 선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이세상 모두가 저만이 옳타고 외쳐대고 있는 것과 다름없음이다. 지은이의 말처럼 세상이 잔인한 광기로 울부짖고 있다는 말에 조금은 공감한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당신은 결코 이 책을 손에서 놓을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책의 뒷표지에 써 있었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나는 책의 초입부에서부터 이 책을 손에서 놓고 싶었다.  이제 막 소설쓰기를 배우는 학생이 원리원칙대로 배열해가며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다는 게 나의 첫느낌이었던 까닭이다. 그만큼 더디다는 말도 되겠지만 사실 넘겨지지 않는 책장과의 싸움은 힘겨웠다. 4장의 Chapter로 이어지고 있었지만 첫장 최종해결로 가는 길은 너무 길었지 않았나 싶다. 테러전의 긴박한 숨결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었다면 테러전으로 가기전에 이미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테러전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발판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  지루하기까지 한 종교적 심리전이었다. 1차공격을 하고나서 그들이 외쳐대던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 나, 그에 대응하며 끝도 없이 요한계시록을 들먹이며 아마겟돈을 외쳐대던 상대편의 의식에는 정말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한편의 시나리오를 미리 읽어버린 듯한 이 느낌을 지을수가 없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떠오르는 장면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이미 우리의 기억속에 산재되어져 있는 뻔한 장면들이란 생각이 들어 나의 기대감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으로 다가오던 테러전의 실체에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그런 세상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일게다. 테러... 단지 언어적인 의미로써 내게 보여지던 테러라는 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 준 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이비생각


"마지막으로, 그들의 종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원리주의자들에게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대체 어떤 신이 10억의 기독교인들과 10억의 이슬람교도들, 40억이 넘는 다른 종교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창조해놓고 그중 한 그룹에게만 지도를 준단 말입니까. 대체 어떤 신이 자신의 피조물 중에서 극히 일부만 구하고 나머지는 유황 지옥속에서 불타게 한단 말입니까. 대체 어떤 신이 자신의 위대함을 무고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무수히 죽이는 것으로 보여준단 말입니까. 그런 신이라면 저는 숭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이 잔혹한 폭력을 승인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원전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입니다.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는 원전을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다른 문화와 신념을 가진 분들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할 것입니다. 타협은 약한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것입니다." (-4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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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화분에서도 꽃은 핀다.
이미 깨져버린 화분속에는 그리 많은 흙도, 그리 많은 물도 없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보란 듯이 꽃을 피워냈다.
기지개를 켜며 한껏 자신의 화사함에 도취되었다.
햇살도 피해가는 저 미소앞에 나는 잠시 멈춘다.
숨을 쉬지 못한다.
사람은...
사람은...
왜 저리도 아름다운 아픔을 알지 못하는가..

사랑인들 뭐 다를까?
버려진 마음속에서도 사랑은 늘 피어난다.
사랑이 끝났다고 느끼는 순간
어쩌면 새로운 사랑은 다시 잉태되어질 것이다.
밤새 내려준 빗방울이 잠시 멈춰선 까닭은
저 꽃들의 미소에 화답함이리라..
저 먼곳으로부터 나의 이름 부르는 이 있어
나의 사랑도 아직은...
진행중인가 보다...



처음, 버려진 화분속의 저 꽃을 바라보았을 때 알 수 없는 희열이 있었다. 이제는 화려했던 그 시간이 가버리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아니 어쩌면 저토록 화려했던 순간이 원래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언제부터인가 내가 느끼는 시간들이 화려함으로 채색되어지길 바랬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내게 머무는 모든 순간들이 저렇게 보기 좋았으면 했던 것 같다. 현실은... 그렇게 오지랍이 넓지 못한데도 나는 늘.. 그렇게 세상을 향해, 삶을 향해 넓은 이해와 포용만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려놓지 못하는 등짐을 지고 시지프스처럼 그렇게 내가 오르는 일상의 언덕.. 그 언덕위에 혹은 아래에 내가 모르는 나만의 꽃들도 저렇게 꽃을 피워내고 있을까?  알.수.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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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 치는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꿀꺽꿀꺽 골짜기' 에 살고 있던 늑대와 '산들산들산' 에 살고 있던 어린 염소가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염소고기를 가장 좋아하던 늑대 '가브' 와 엉덩이가 예쁜 염소 '메이'가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까?  폭풍우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함께 울던 그 밤, 그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만난 늑대와 염소..  폭풍우를 피해 뛰어들었던 그 집에서 '메이'가 착각했었던 건 목발소리였었다.  발을 다쳤던 '가브'의 그 목발소리에 한시름 놓인 '메이'..  사실 이 애니는 구성이 조금 어설프다. 철저하게 아동용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작은 그릇속에 너무 많은 음식을 담으려했던 욕심의 덫에 걸려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둘 다 감기때문에 냄새를 맡지 못했다는 설정도 조금 어설프기는 했지만 해피앤딩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발판쯤으로 여기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그늘에서 잠시 벗어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때는 서로 같은 종족이라고 생각했었기에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한다. 서로를 확인하기 위한 암호 '폭풍우 치는 밤에'를 나누어 가진 다음 그들은 헤어졌다. 자, 그 다음날 그들은 정말 만날 수 있었을까?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기로 했다. 왜냐? 서로가 서로의 매력에 끌렸다는 설정하에서 우정을 나누기로 약속을 한거다.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장소로 걸음을 옮기는데 앞서가는 '메이'의 엉덩이를 보며 꿀꺽! 침을 삼키던 '가브'.. 친구가 먹이로 보인다! 과연 저 둘의 우정 지키기는 성공할 수 있을까?  둘의 만남에 숲속 동물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끝내는 무리들에게 그 소문은 퍼져나간다. 당연히 일어날 순서는 이렇다. 늑대무리는 '가브' 를 통해서 염소고기 잔치를 벌이고 싶어하고, 염소무리는 '메이' 를 통해서 늑대가 다니지 않는 곳을 알아내고 싶어한다. 순수한 우정을 뒤로한 채 마지막 만남을 갖게 되는 우리의 '가브' 와 '메이' 는 과연 어떻게 될까?  차마 자신들의 속마음을 말할 수 없었지만 비가 내리고 냇물을 건너면서 그들은 끝까지 우정을 지켜내기로 한다. 각자의 무리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쪽으로도 돌아갈 수 없었던 둘은 급하게 흐르는 물살속으로  빠져들고 떠내려가며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폭포 아래에서 다시 만난 '가브'와 '메이'는  전설의 숲으로 가기로 한다.

이 애니는 정말 이쁘고 귀엽다.  구성자체는 어눌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에 쏙 들어가기에 안성맞춤이지 싶다. 깊은 속뜻이야 전해지지 않는다해도 외모나 조건, 보여지는 것들에 치우쳐 살아가는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충분히 전달될 수 있는 주제의식도 보인다. 생긴 모습은 다르지만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사실, 또한 무리중에서 왕따를 당했던 '가브'의 외로움을 약하고 힘은 없지만 '메이'의 따스함이 감싸줄 수 있었다는 사실, 힘겨운 과정을 서로 헤쳐나가며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하나씩 발견해가는 그 순간들이 아주 잘 그려져 있음이다. 가끔  아주 가볍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이런 작은 애니에게조차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어하는 그런 영화평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냥 이렇게 순수하게 보여지는 것만 볼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적도 있었다.  물론 같은 작품이라해도 보는 이마다 느낌이 다를 것이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너무 복잡하게 꼬인 일상만을 바라보았기에 단순한 것조차도 복잡하게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함께 보았던 아들녀석과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이 참 좋았다. 그 순수함을 잃어버리지 않고 어른이 될 수 있다면 행복할까? 그건 알 수 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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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의 복수 -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가 경고하는 인류 최악의 위기와 그 처방전
제임스 러브록 지음, 이한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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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이아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 거짓말처럼 나는 지구를 생각했었다. 신화속의 여인 가이아가 누구인가? 바로 대지의 여신이다. 우리모두를 품어 주었던 대지의 여신.. 이 책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이아 이론이란 것이 지구 전체가 동물이 체온과 화학적 균형을 조절하는 것처럼 내부 환경을 조절하는 하나의 생물로서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한다면 살아가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그렇게 해왔던 존재라는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치유해가며 살아가는 하나의 존재.. 그런데 그 가이아가 지금 병들어 신음하고 있다고 한다. 늙고 병들어서 이제는 우리가 먼저 가이아를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고 저자는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더이상은 품을 수 없을정도로 많아진 인구수와 그 인구들이 먹고 살기 위해 혹은 자신의 편안한 일상을 위해  저지르는 모든 일들이 가이아를 힘들게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두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파괴능력과 문명건설 능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에너지를 오용하고 인구 과잉 상태로 만든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속에서의 모든 움직임이 이산화탄소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올시다라는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으니 지구라는 이름을 가진 가이아에게 그저 미안할 뿐이다.

매스컴이나 언론을 통해 흔히 들어왔던 지구온난화라든가 환경문제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이아를 살아있는 존재로써 인식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은 놀라웠다.  삶의 풍요로움을 위하여 '자연'이라고 불리워지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우리에게 최소한의 '시골'을 잃어버려서는 안되는거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음이다. 사실 나는 이 책속에 나와있는 열역학이니 양의 되먹임이니 음의 되먹임이니 하는 말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어려운 말들은 차치하고라도 내게 들려왔던 것들은 이랬다. 가이아가 복수를 하기 이전에 기후변화에 맞설 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하며 재생에너지를 얻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는 그런 것들.. 그리고 더이상은 '자연'을 파괴하여 지구에게 이중으로 타격을 가해서는 안되는거라는... 그많은 재생에너지들을 논하면서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핵에너지를 선택했을 때의 장점에 대해 끝까지 열변을 토한다. 유기농이니 풍력에너지니 하는 말들은 겉만 번지르르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시설들을 마련하기 위해 파괴되어지는 자연을 염려하면서 말이다. 체르노빌 사태와 같은 상황을 예로 들어주면서도 핵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이나 편견이 조속히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저 많은 인구들을 모두 먹여 살릴 수 있는 유기농식품이 아니라면 유기농식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더 많은 농경지를 만드는 것도 중단해야하며 지구 온난화를 막아주는 숲을 파괴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휴대폰과 컴퓨터에게 후한 점수를 준 저자의 변론에는 그렇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움직여야만 했다면 그것으로 인한 오염도가 훨씬 더 심해졌을거라는 말에 살풋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 자체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자기 조절 능력에 의해 한번쯤은 뒤집어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게 될 시기가 가까워오고 있다는 말에도 나는 공감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래도 인간이라는 종은 끝까지 살아남을 거라는 말은 빼놓지 않았다. 그만큼 강하다는 말일까? 아니 어쩌면 그토록이나 이기적인 존재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억지일까?   언젠가 너무도 놀라운 마음으로 보았던《마이크로 코스모스》라는 다큐영화에서처럼 인간도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한갖 미물임에 불과할텐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일전에 보았던 《투모로우》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기후학자인 어느 박사가 지구의 기온 하락에 관한 연구발표를 하게 되고 급격한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빙하가 녹아 바닷물이 차가워지면서 결국 해류의 흐름이 변하게 된다는.. 지구 전체가 서서히 빙하로 뒤덮이는 재앙을 보여주었던 영화.. 도시 전체를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만들어가며 밀려들어오던 바닷물의 공포를 보면서 어쩌면 정말 저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섬뜩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었다. 이 책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지금 우리 모두가 가이아의  늙고 병듬을 믿어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살길이 보일 거라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영화속에서처럼 이 책의 저자도 해수면에 맞닿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재앙이 닥쳐올지도 모른다고 예견한다. 언제였는지 일본이 가라앉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던 기억도 난다. 눈 앞에 시련이 닥쳐와야만 그것을 알 수 있다면 그때는 이미 늦어버린 거라는 저자의 말이 왠지 무서워지기도 한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그런 재앙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전문적인 해설을 따라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1 장에서 늙고 병든 지구의 현재상태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가이아가 무엇을 말하는 것이지, 그리고 그동안 가이아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가이아의 생활사라는 구분으로 이해를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실제적으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의미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저자가 예로 들어주었던 21세기에 관한 예측이라거나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원에 관한 이야기들은 환경론이나 지구라는 의미에 대해 언어적인 의미로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에게조차 왠지 조바심을 느끼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동식물과 많은 미생물들이 더이상은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가이아는 뜨거워질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철저한 파국이 찾아올 것이라는 작자의 의도를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저 끔찍한 책의 제목처럼 가이아의 복수가 시작되어진건 아닐까?  더이상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세계속의 이슈들이 모두 기후조건에서부터 왔다는 것을 부정할수는 없을 것 같다.  지구의 여기저기를 휩쓸고 다니는 커다란 홍수의 물결을 봐도 그렇고, 폭설에 의한 재앙소식도 우리를 두렵게하기는 마찬가지다. 지진이나 토네이도와 같은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의 처참한 모습들을 매스미디어를 통해 볼 때 전해져오던 그 전율들은 그저 그냥 생겨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속에서 은근히 비추어내던 지구의 예견된 앞날이 바로 저런 모습은 아닐런지... 무언가로 한대 맞은듯한 기분이다. /아이비생각

가이아도 그렇다. 자기 삶의 처음 오랜 세월 동안 세균만 있었고, 중년 막바지에야 최초의 다양한 동물상과 후생동물이 출현했다. 80년대에 들어서야 행성에 최초의 지적동물이 등장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간에, 가이아가 아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을 때 우주에서 행성 전체의 모습을 보게 함으로써 우리는 가이아의 노년을 흡족하게 한 것이 분명하다. 불행히도 우리는 정신분열증 경향을 보이는 종이다. 그렇기에 파괴적인 성향이 점점 늘어나는 십대 무리와 한 집을 쓰는 할머니처럼 가이아는 점점 화가 나고 있으며, 그들의 행태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들을 내쫓을 것이다.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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