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애무
에릭 포토리노 지음, 이상해 옮김 / 아르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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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이혼을 하고 아이들의 양육권은 엄마에게로 넘어간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들을 일주일에 한번씩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자에게는 아이들을 양육할만큼의 경제적인 능력이 없다. 그 남자에게 있는 것은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뿐. 하지만 그 남자는 아이들과의 만남을 포기할 수 없었던 탓에 여자로 분장을 하고 자기집의 가정부로 들어가게 된다. 아주 완벽한 분장 덕에 잘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아내의 새로운 사랑이 나타나자 하나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들켜버린 아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아이들은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용납을 해주고 지속적인 만남이 유지된다. 그리고 다시 찾은 가정. 아내는 알게 된 것일까? 아이들에게 아빠의 사랑이 얼만큼의 크기로 다가오는지를?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미세스 다웃파이어>란 영화를 떠올린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하여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아빠는 엄마 대신일 수 있을까? 그리고 엄마는 아빠 대신일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그 능청스러운 연기를 보자면 가히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아빠는 엄마가 될 수 없다고. 그리고 또한 엄마는 아빠가 될 수 없다고.

책 속의 주인공 펠릭스는 보험회사 지점장이다. 어느날 자신에게 보험을 들어주었던 한 남자에게서 전화를 받게 되고, 달려간 곳에서 그를 맞이해주는 것은  불이 휩쓸고 가버린 채 타다남은 흔적뿐. 거기까지라면 괜찮았을 게다. 하지만 그 불타버린 집의 주인공인 엄마와 어린아들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펠릭스에게는 몇달전에 잃어버렸던 아들 콜랭의 기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불운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콜랭을 낳은 마리는 아이가 젖을 떼자 제 갈길로 가버렸고 펠릭스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며 아이를 키우게 된다. 아이가 주는 기쁨과 설레임속에서 펠릭스는 행복을 맛보게 되는가 싶었는데 조금씩 커가는 아이가 엄마를 찾게 되면서부터 펠릭스에게는 힘겨운 일상으로 다가온다. 어쩔 수 없이  여자처럼 가슴을 만들어 옷속에 넣기도 하고 가발을 쓰기도 하면서 아이를 위해 엄마로 변장하게 되는 펠릭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속아주는 어린 콜랭. 그것은 정말 단순한 변장놀이에 불과했을까? 아주 잠깐이었다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와의 접촉을 외부에서까지 연장하고 싶어하는 어린 콜랭의 요구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끝내는 너무 많은 사랑이 병이 될 수도 있다는 유아원 원장의 충고까지 듣게 되는 펠릭스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이제 그만 멈췄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었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적어도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느닷없이 엄마 역할을 하겠다며 돌아온 마리에게 콜랭을 빼앗기다시피 하는 펠릭스는 아빠도 아니고 엄마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심한 상처를 입게 되고 만다. 이제 다시 아빠로 돌아가야만 하는 펠릭스에게 가장 힘겨운 것은 마리와 콜랭을 묶어주는 그 알 수 없는 감정의 고리가 너무나도 낯설었다는 점이다. 어린 아들을 위하여 여장까지 해가며 그동안 함께 지내왔던 아빠보다는 엄마에게 더 많은 감정을 표현하는 어린 콜랭이 어쩌면 너무나도 야속하고 서운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만고의 진리인것을.

펠릭스의 일상을 따라가면서도 나는 왠지 무언가 빠져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러다가 책장을 넘기면서 내가 알게 되는 진실앞에서 잠깐 숨을 골라야 했다. 역시 그랬구나... 아빠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어린 펠릭스는 가엾게도 엄마의 사랑조차 받지 못한 채 자랐다. 도대체 아빠가 무엇인지 그 느낌조차 없었던 펠릭스에게 다가왔던 콜랭의 존재는 그야말로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막연하게 꿈꾸어 왔던 아빠라는 의미를 하나씩 콜랭에게 전해주고자 했었던 그의 안타까움을 보게 되었던 거다. 결핍된 가정에서 자라나 무언가 채우지 못하는 공허를 가슴속에 안고 살아야 했을 펠릭스가 너무도 안스러웠다. 유아원에서 콜랭을 데리고 나오던 마리가 전화통화를 하는 중에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는 상황이 너무도 느닷없다. 아니 충분히 그럴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들이 나에게는 느닷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속의 설정 또한 그랬다. 도대체  교통사고가 일어날만한 상황이 전혀 아닌데 단 한명의 목격자도 없는 뺑소니라니....

콜랭을 죽인 뺑소니 교통사고가 재수사에 들어가고 그 수사를 맡은 형사와 두어번 마주친 펠릭스의 반응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회상형식과 현재가 오버랩되듯이 이어진다. 지나간 시간속에서 현재를 끌어내기도 하고 현재속에서 불쑥 불쑥 불거져 나오는 과거와 마주치기도 한다.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아빠가 엄마를 대신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채울 수 없었던 그 어떤 것들이 결핍되어진 펠릭스의 행동이 콜랭에게는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었을까? 나는 차라리 그렇게 묻고 싶었다. 사랑이었다기 보다는 왠지 집착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으니 말이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변화시켜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에 빠져들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한채 결코 놓칠 수 없다고, 놓쳐서는 안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들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졌던 것에 대한 상실감은 너무나도 클 수 밖에 없다. 단 몇줄로 보여주었던 그 놀라운 반전앞에서 알 수 없는 허무감이 다가왔다.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앞서는 이 착잡함을 어쩌지 못하겠다. 집착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으므로.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정말 아빠는 엄마대신일 수 없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럴수는 없을 것 같다. 엄마는 엄마로써 그리고 아빠는 아빠로써 그 이름만큼의 존재의미가 다를테니 말이다.  붉은 불꽃처럼 한순간을 타올랐던 펠릭스의 사랑앞에서 왠지 서글픔이 밀려온다. 마지막으로 엄마 차림을 한 채 경찰서로 향하는 펠릭스의 모습을 그려본다. 마리와 콜랭을 향한 질투의 늪에 빠진 한 남자의 모습을. 불꽃처럼 타올랐던 사랑의 다른 이름 질투에 대하여 나는 생각한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 多情도 병이라는 말과 함께...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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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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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정겨움을 느끼게 해주는 풍경이 얼마나 있을까? 사느라고 바빠 하늘 한번 제대로 쳐다볼 여유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생겨나는 배경들이 삭막하게 솟아오른 콘크리트 빌딩이 아니라 나무와 나무들이 서로 뽐내듯이 얽혀든 그림으로 하늘을 받쳐줄 수 있다면, 그런 풍경들이 늘 우리곁에 머물러 줄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시원한 느낌, 그 정겨운 느낌을 이 책이 담고 있음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제목에서부터 풍겨나오고 있음이다. 똥친 막대기... 지금 세상에야 치울 수 있는 똥이라는 게 개똥이나 비둘기똥 따위의 것들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정말 나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그 똥이라는 게 자주 마주치는 그런 것들의 하나였다.  동네어귀를 들어서면 어김없이 맞아주는 커다란 나무 한그루. 그리고 그 아래에는 또한 어김없이 동네어르신들께서 모여 장기 한 판 두시는 정자가 있었거나 마루가 있었다.

옛날에 아니 그리 옛날도 아니겠지만 나 어렸을 적에는 고무신이 참 많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동네 도랑으로 나가 고무신을 거꾸로 뒤집어 배를 만들어 오빠와 동생이랑 재미있는 뱃놀이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그만 떠내려가는 고무신배를 잡지 못한 채 덜렁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엄마한테 혼나야 한다는 것보다도 잃어버린 신발이 아까워 눈물을 찔찔 흘렸던 기억도 있다. 들로 산으로 온통 천지가 다 놀이터였고 놀잇감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이 책속에 등장하는 소녀 재희를 보면서 느닷없는 추억에 사로잡혀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단발머리를 나폴거리며 논둑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참 귀엽기도 하고....

이 책의 주인공인 '나'는 처음부터 똥친 막대기가 아니었다.  백양나무의 가지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많은 햇살과 바람과 엄마나무가 주는 양분을 받아먹고 살아가던 파릇파릇한 나뭇가지였었다. 그런데 어느날 느닷없이 꺾여지고 말았으니...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기차소리에 놀라 하릴없이 제 일터를 떠나버린 소의 궁둥짝을 때려주기 위해 그 아름답던 사월 봄날의 어느날 농부의 손에 들려지는 된 나는 의인화되어버린 나뭇가지다. 작가는 이 나뭇가지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쁜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채 아니 잊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한없이 불러 모으고 있다. 제 자신이 왜 꺾였는지를 잘 알면서도 그 일만큼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나뭇가지 '나'의 마음을 통해서 나는 영락없이 나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버려지지 않은 채 농부의 손에 들려 집으로 가게 되는 나뭇가지..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나'의 염원이 담겨져 있다. 일하는 아버지를 위하여 점심을 가져왔던 그 소녀, 재희를 다시 보고 싶다는.. 그녀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어하는 '나'의 염원이 함께 있었다. 그렇게해서 다시 소녀를 보게 되지만 그녀의 종아리를 때려야 하는 회초리가 되었다가 그 집의 뒷간앞에 세워져 추운 밤을 떨며 지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제발 똥만큼은 살에 닿지 않게 해달라고 다시 기도하지만 무심하게도 그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똥통속에 첨벙!...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하는 나뭇가지의 그 한숨소리가 내게도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네 삶속에는 늘 힘겨움과 고통만이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똥친 막대기로 그냥 버려지지 않는 나뭇가지 '나'의 처지를 보니. 재희의 손에 들려 재희를 놀려먹는 개구쟁이 소년들에게로 부터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있었던 기쁨과 함께 다시 물 가까이에 버려져 말라가던 몸에 수분을 채울 수 있었던 기쁨의 순간도 잠시, 모내기가 끝나버린 후에는 아주 버려진 채 아무도 '나'의 존재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어느 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나'를 붕 떠오르게 했던 장마가 시작되었다. 희망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운좋게도 떠내려가던 돼지의 등짝에 달라붙게 되고 그 마을에서 한참 멀어진 벌판에 덩그마니 혼자 떨어져버린 '나'의 운명. 그 똥친 막대기는 그냥 말라 죽었을까?

작가가 보여주는 똥친 막대기의 여정이 딱 우리의 삶이다. 힘겨움속에서도 희망은 함께 한다는 메세지를 단 한번도 놓치지 않도록 손을 내밀어 주고 있다. 비록 냄새나는 똥통속에 푹 빠졌던 '나'였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허허로운 벌판에 하나의 근본으로 우뚝 서는 또하나의 백양나무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음을 잊지 말라고 한다. 자신의 몸속에서 근질거리며 희망이 뻗어나갈 때, 그렇게 땅속으로 뿌리를 내려 뻗으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나'의 존재가 바로 당신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그 희열을 당신도 느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책속의 그림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린다.  童話... 나는 그 말이 참 좋다. 거기에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말해준다면 더욱 더 좋다. 내가 잃어버린채 살아가고 있는 것들이, 아니 내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그 안에 숨쉬고 있는 까닭이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 한편을 가슴속에 품어본다. 그 이야기.. 가끔 힘겨울 때마다 풀어본다면 참 좋을 것 같아서. 짧은 이야기였지만 참 좋은 이야기였다. 아들녀석 책상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그녀석이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방식들이 그 안에 있다고는 해도 나뭇가지인 '나'가 들려주는 말을 한번 들어보라고...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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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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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자로서 1천 엔짜리 지폐의 모델이기도 했다는 말과 국제적 명성을 지닌 20세기의 작가로 일본의 세익스피어라 불린다는 말이 흥미로웠던 까닭이었다. 한편으로는  인상깊게 읽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생각나기도 했고. <설국>에서 보여주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식의 심리전을 떠올리며 이 책을 보면서도 혹시 나스메 소세키식의 심리전에 휘말려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기도 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의 출판가를 평정하다시피하는 일본 문학의 고전을 대하고 싶다는 욕심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그 나라의 지폐속에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있게 밀어줄 수 있는 작가라는 말도 될테니 은근하게 밀려드는 기대감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외로운 사람입니다만 때에 따라선 댁도 외로운 사람 아니오? 나는 외로워도 나이를 먹었으니 흔들리지 않고 견딜 수 있지만  젊은 당신은 다르지요. 움직일 수 있는 만큼 움직이고 싶을 거요. 움직이면서 무엇엔가 충돌해보고 싶을거란 말이오"
"전 조금도 외롭지 않습니다"
"젊은 것만큼 외로운 것도 없지요. 그렇지 않다면 왜 당신은 그렇게 자주 날 찾아오는 겁니까?"

책을 열자마자 만나는 화두는 외로움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며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만은 이 책속의 두 주인공이 겪어내야 하는 외로움은 왠지 더 쓸쓸하게 다가왔다. 젊은 화자인 '나' 와 철저하게 개인적인 외로움의 감옥에서 끝내는 자살로 자유와 독립을 얻어냈던 선생님(여기에서 선생님은 교사가 아닌 일반적인 호칭으로서의 선생님이다)인 '나' 가 주고받는 말속에서 외로움은 끝없이 숨쉬고 있었다. 순수한 감정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일일까?  진실된 모습만 보여주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또한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일까?  알 수 없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더 편하고 이로운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 보게 된다. 이미 지나쳐버린 과거속의 상처로 인하여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 또한 죄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사실은 이 책을 읽는 나조차도 어쩌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책속의 화자인 '나'가 자주 찾아가 자신의 마음속에 선생인 '나'의 마음을 들여놓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외로움 그 자체보다는 인간대 인간으로써의 소통을 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어느 날 우연히 해안가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야만 할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인하여 맺어진 인연 하나. 그 인연의 고리를 채우기 위해 그들이 나누어야 했던 대화들이 속속 내 가슴속에 눈처럼 쌓여가고 있었음을 나중에야 나는 알았다.

자신이 믿었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상처가 되고 그 흔적 또한 깊이 남는다.  모든 것을 잃고 가까운 친척에게 배신당했다는 그 과거에 얽매여 자신의 마음을 닫아버린 채 스스로의 감옥속에서 생활하게 되는 소설속의 선생님이 그러한 예로 등장한다.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누군가에게 상처받게 되는 상황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숙집 딸에 대한 연정을 품었으면서도 사람을 믿지 못하는 그 아픔때문에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지만  하숙집 딸에 대한 친구 K의 고백앞에서 더이상은 아무것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토록 절절한 친구의 마음을 알면서도 자신이 먼저 사랑했던 여자를 빼앗기기 싫어 순간적으로 친구를 배반하게 되는... 하지만 느닷없는 친구 K의 자살은 그에게 죄책감이라는 올가미를 던져주고 말았다. 고독한 지식인... 친구를 배반하고 연인을 얻었지만 결코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없었던 그가 선택했었던 것은 술과 책의 수렁에 빠지는 거였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올가미를 풀지 못한 채 살아왔던 긴 세월.  마침내 누군가에게 그 자신이 겪어내야 했던 '삶의 고독'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그 때가 왔을 때 그가 택했던 자유로움은 자살이었다. 자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에 나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닐걸세...

젊은 화자 '나'에게 보내져 온 선생의 편지속에서 또다른 '나'로 등장하는 선생의 지난 모습. 그가 살아왔고 그가 견뎌내야 했던 그 시간들은 사실 그렇게 지독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봄직한 그런 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토록 깊은 상처를 입었던 까닭은 믿었던 사람, 마음을 주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어떤 일들을 앞에 두고서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되는 그런 상황들이 군더더기 없는 표현으로 나에게 거침없이 다가왔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생기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자신만의 고집스러운 외로움속에서 헤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에는 은근히 화가 나기도 했다. 충분히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지만 그가 택했던 길은 외로움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믿고 인정해 준다는 것이 그토록 힘겨운 일이었을까? 물론 쉽진 않았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자신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야 했을까 나는 묻고 싶었다.

"나는 지금보다 더 지독한 외로움을 참기보다 차라리 외로운 지금의 상태로 버텨가고 싶네. 자유, 독립 그리고 나 자신으로 가득 찬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가 이 외로움을 맛봐야겠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했던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세상에는 없다고 했던가?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억지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물었더니 '과'가 있습니다 했다던 우스개 소리가 생각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것들이 사라져가는 지금의 세상속에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어서는 안될 것들이 자꾸만 끼어드는 세상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소설속의 선생인 '나'를 통해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싶다. 나 스스로의 족쇄를 채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은 이미 우리를 향해 마음을 열어두고 있는데 내 자신이 그것을 의심하여 행복이 더디게 올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늘 누군가를 탓하며 살아가고 있는것은 아닌지.  ..... 한번쯤은 돌아볼 일이다. 외롭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내게 오는 행복의 발걸음이 더디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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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나라
이케가미 에이코 지음, 남명수 옮김 / 지식노마드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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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이 말을 듣고 볼 때마다 나는 긴 칼을 옆에 차고 당당하게 활보하는 남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책표지의 그림을 보면서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무사 쥬베이'라는 애니메이션이 떠올랐고, 맹인이면서 기가 막히게 칼을 잘 썼던 맹인 검객 '자토이치'를 떠올렸다. 어찌보면 하나의 신화같은 이야기로 느껴질법한 말들이 실제로도 존재했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일종의 문화적인 콘텐츠로써 자리잡았다는 그런 의미로써 생각하기도 했었다는 말이다. 수많은 권법을 내세우며 중국의 그 넓은 땅을 주름잡았던 영웅들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이케가미 에이코는 단순히 사무라이라는 그 의미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 '사무라이'라는 전통적인 이미지속에서 찾아내고 싶어하는, 그리고 현재까지도 버려지지 않는 그 '사무라이'의  정신이 남겨주고 간 것들과 연관적인 일본의 문화적 상황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토지를 소유한 무인, 토지와 농산물의 지배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던 무사 '사무라이'.. 사무라이란 원래 전문가 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 기능으로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기능집단이었다. (89쪽)  일종의 성주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며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변에 모여 살았다. 아니 그렇게 모여 살도록 만들었다. 고대 일본에는 군대가 없었다는 말을 빌어 볼 때 그들은 영지를 개간하여 경지화한 후 허락을 얻어 경작하며 경제적인 기반을 다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은혜와 봉사의 교환 즉, 은혜를 입었으니 그를 위해 나는 봉사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은혜와 봉사의 개념이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점이 참 특이하다. 거창한 말로 '나라를 위해서'라거나, 멀리 있는 '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녹봉을 주고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자신만의 '주군'을 위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관계를 명예롭게 여겼다. 자신에게 속해있는 가솔(여기서 가솔이란 단순히 자신의 가족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지를 통하여 먹고 사는 모든 이들을 일컫는다)들을 지켜주고 또한 자신에게 은혜를 배푸는 주군을 위해 기꺼이 죽을 줄 알았던 그들의 관계는 인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았을거라는 말은 지극히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무사로서 무인의 명예에 대한 배경을 보게 되면 이렇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용맹심, 겁쟁이로 보여서는 안되며,  어떤 경우라도 사람을 올바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너를 좋게 보도록 신경써야 한다 라거나 의식적으로 자세를 낮추어라. 상관없는 사람일지라도 공손하게 대하라 라는 무사적 배경을 보여주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놀라웠다. 일반적으로 무사 즉, 무인계급이라하면 문인과는 반대적인 이미지를 풍기게 마련이다. 나쁘게 말한다면 이런 저런 생각없이 힘만을 최고로 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무라이의 배경을 보게 되면서 나는 저자가 왜 '명예'라는 말을 앞서 설명하려 했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사지만, 공사의 처리에 뛰어나야 하며 건전한 판단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그 말속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단순히 무예만을 으뜸으로 치지 않고 그 무예를 다룸에 있어서의 교양까지도 그들은 잊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의 주군이 죽자 그 복수를 하기 위하여 2년동안이나 준비를 해 왔던 47인의 사무라이 이야기는 정말 사실이었을까? 그 많은 사람들이 주군을 위한 복수를 하고 죽음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자체는 정말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서서히 국가의 형태를 만들어가던 일본의 상황으로 볼 때 일종의 사병이기도 했을 그들만의 관계를 인정해주고 또한 보호해주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우리의 역사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만드는 계기도 되었다. 조선의 역사 같았으면 그 사병으로 인한 반란을 미리 염려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썼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런 상황들은 많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반란이나 반역 따위는 할 생각조차 없었으며 지배계급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자신의 군대를 보내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에게는 뭔가 다른 게 있었던거라고 나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강한 연대감으로 묶어놓았을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우리가 그토록 크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유교적인 관념이 일본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부모에게 먼저 '효'를 다하기보다 주군을 위한 '충'이 먼저였다는 일본의 신유교를 알게 되었다.  일본식 신유교는 이에 즉, 家를 번영케 하는 유일한 길은 공무에 헌신하는 거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다시말하자면 국가적인 논리에 따라 '충'은 공적 가치인데 반해 '효'는 사적인 가치로 여겨 '충'을 우선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어찌 생각해보면 일리있게 들리기도 한다.  물론 그 시대적인 상황에 맞추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문화는 달라지기 마련이겠지만 자신의 처지에 맞게 받아들이고 수정할 줄 알았던 일본적인 시각에 왠지 부러움마져 느껴졌다.

중국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서 중국에 맞는 수많은 제도들을 우리에게 접목시키려 했던 우리의 역사와는 다르게 일본은 중국식 유교사상을 다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단지 유교의 도덕적 특성만을 정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그랬기에 그들의 토착적 관습에 유교의 영향력이 깊게 침투하지 않았고 가족의례나 친족관습 등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유교적 특징을 일본식으로 변화시켰다는 말이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그들만의 정체성을 그대로 살려둘 수 있었다는 말도 되는 것 같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종교적인 의미 또한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 않았던 듯 하다. 

장기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단기적인 욕망을 스스로 규제할 줄 알았으며 개인의 충동이나 욕망을 사회조직적으로 정의한 목적과 조화시킬 줄 알았던 사무라이의 명예문화는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사무라이 문화를 통해 바라볼 수 있었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확고한 명예심이 경쟁적인 개인성과 질서있는 의식, 그리고 성실성을 뒷받침해 주었다는 말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사 영주의 직무가 단순하게 군사영역이나 정치활동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고 재산이나 자원, 인재를 등용하는 복잡한 관리체계까지도 포함되어져 있었으니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농업생산력을 개선하는 수단을 강구해야 했으며 그들 영지내에서의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활동등을 통해 수입을 얻으려고 했다는 말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자립적인 의미를 보여주고 있음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거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일본의 전통이라는 말조차도 나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책을 통해서나 매스컴을 통해서 알고 있는 아주 단면적인 지식이 전부라는 말이다. 이런 책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그들의 내면을 알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큼 좋은 수확도 없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음으로써 그들의 문화를 다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일본인으로써 현재의 그들을 있게 해 주었던 것, 일본의 전통에 대해 도움말이 될 수 있기를 바랬던 저자의 말처럼 안다는 것은 정말 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제대로 보여주며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제대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얕보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역자 서문의 말이 왠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런 우리이기에 정말 일본에 대해 제대로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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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한 라라
마광수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우선은 호기심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즐거운 사라>로 마광수 열풍이 불어댔을 때도 나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문학이라는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작가로써 표현의 자유조차 박탈당하는가 싶어 아주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한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생각했을 때 뭐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던 까닭이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광수 열풍은 식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종의 축복이라면 축복일테지만 그를 위해 구명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일종의 성공이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책장의 소개글에서  '제대로 읽어보고 평을 해달라'는 말처럼 나는 그의 작품을 한번쯤은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긴 장편의 소설이 아닌 그가 틈틈이 생각나는대로 옮겨 적었을 단편 모음이라는 말에 아마도 더욱 호기심이 발동했으리라. 꾸며진 글보다는 순간적인 느낌으로 자신의 생각을 적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 자신만의 표현이 아닐까 하는 어리숙한 정의를 내려보면서 말이다.

<사라>를 만나보지도  못한 채 <라라>를 만나본 후의 소감은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사라>를 만나보고 싶다! 는거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라라>속에 <사라>가 어느정도는 살아 있었을거라고 생각되어지지만, 강도의 차이만이 있을거라고 생각되어지지만, 그래도 <사라>의 그 무엇이 왜 그토록 세상을 달구었는지가 궁금하다는 말이다. <라라>속의 <사라>는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데 아마도 사람들은 들어내지 말고 함부로 보여주지도 말라고 했던 그런 것들에 대해, 혹은 내가 말하고 싶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대리만족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 책속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관음증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보지 말라고 하는 것과 숨기고 싶어하는 것은 굳이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사람의 이중적 심리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던 상황이었을거라고 지레 짐작해버리고 만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시끄러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표를 찍게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지금같은 세상속에서 性을 이야기한다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그리고 그 性을 표현함에 있어 은유적이지 않고 직설적이어서 문제가 된 거라면, 정말 단순히 그게 문제였다면 세상은 너무 짙은 선그라스를 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그가 정말 性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그렇게 살아왔든 그냥 상상속에서 그렇게 살기를 원했든 간에 그것도 아니면 그가 꿈꾸는 性생활이 그랬든간에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라는 거다. 이 책으로 인한 우리의 젊은이들이 걱정이 되었다면 굳이 이 책이 아니라해도 청소년들에게 위해를 끼칠만한 책은 얼마든지 있을테니 말이다. 세상이 바뀌면 거기에 맞게 우리의 의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아직은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시기상조였을 거라는 위로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한 말은 도대체 이건 뭐야? 했었다.  왜 이렇게 낯뜨거운 표현을 해야만 하는 거지? 하다가도 그럴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고... 하지만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법이 조금 역겹기도 했었던 건 사실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표현해야만 그 느낌이 살아나는 것은 아닐텐데..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뭐랄까, 너무나 직설적인 표현앞에서 일종의 작위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까? 

모를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라라>의 발랄함이 읽혀지기보다는 <사라>를 잃었던 마광수라는 사람의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된 것 같다. <사라>로 인해 그 자신에게 생겨났던 일들에 대한 변화를 읽을 수 있었으며 자기 자신을 변호해주고 싶어하는 안타까움이 읽혀지기도 했다. 책속의 글 중에서 '<슬픈 사라>를 쓴 죄' 나 '심각해씨의 비극' 같은 글을 통해 그리고 다른 몇편의 글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직은 아닐까? 하다가도 그래도 그건 아니지! 하는 그런 안타까움 말이다. 그랬기에 <사라>를 다시 <라라>로 환생시킨 것일게다. 감시와 검열에서 자유로워지고 독자들에게 재미있게 읽혀지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속에서 아직도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저항의식이 느껴진다면 억지일까?  사실 말이지 지금의 젊은이들은 표현하는 데 있어서 참 대담하다. 솔직하게 자신의 욕구와 원하는 것을 말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할 줄도 안다. 때로는 그 표현함이 너무 쉽고 가벼운 것만 같아 안스러울 때도 있을만큼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세대이기도 하니 이런 책이 나왔다고 한들 굳이 감시와 검열이 따라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책 제목을 자세히 바라보면  '발랄한' 의 'ㄹ'이 뒤집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마음 한 켠일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나는 책속에서 만날 수 있던 <라라>의 모습들을 여기에 다시 옮겨 적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것은 그만의 생각이고 표현일테니 말이다.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잘 모르겠다는 거다. 그가 말하는 유미주의적이라거나 탐미주의라는 말을 이해하기엔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예술이 무엇인지조차 내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거였다. 마치도 한편의 포르노라는 정의를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다지 재미도 없다. 재미있게 읽혀졌으면 하는 작가의 바램이 무색하리만치. 그래서 그럴까?  나 역시 작가에게 반대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왠지 자신만의 생각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까닭이다. 

모든 사람들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랑만을 꿈꾸며 살까?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겠지만 굳이 직설적이여야만 제대로 된 '性的'표현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표현함에 있어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살짝 감춰둠으로해서 더 아름다운 느낌을 갖게 하는 것도 많다. 어쩌면 너무나 가식적인 우리들의 모습에 칼을 대고 싶어했던 건 아니었을까?  수없이 많은 가면을 바꿔가면서 세상을 살기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했던 건 아니었을까?  체면과 겉치레의 틀에 갇혀 사는 우리 모두에게 말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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