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조인간
시마다 마사히코 지음, 양억관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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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심코 걸어가던 아이가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 아이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달려와 이렇게 말했다. "떼찌, 떼찌 왜 우리 아가를 울리는거냐 응? 떼찌!" .. 그리고 엄마는 아이를 달랬다. 아이는 신기하게도 울음을 그쳤다. 누가 옳을까? 아니 누가 아이이고 누가 어른일까? ..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캄캄한 세계에서, 어느날 지진 비슷한 것이 일어나고 곰 발바닥 같은 산부인과 의사의 손에 붙잡혀 어머니의 자궁 밖 세계로 끌려나오면서 나의 세상은 시작되어진다. 우리 부모와 그 주변사람들에게는 첫아이였음으로 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나를 안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시안에다가 냄비에 눌어붙은 된장 찌꺼기 같은 여학생이 나를 안으려고 손을 내밀 때 몸을 뒤로 뺄수 있을만큼의 심미안도 생겼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나와 비슷한 것이 생겨난 것을 알았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나의 자리를 빼앗겼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처음부터 나를 아주 제 손아귀에 쥐고 흔들양인가 보다. 냄비에 눌어붙은 된장 찌꺼기 같은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생각하며 박장대소를 하게 만든다. 이렇게 나는 태어났다. 그리고 하나 둘씩 세상이 나의 의식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왜 아쿠마 카즈히도야?"
"카즈히도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야"
"아빠와 엄마가 없어도, 세상 모든 사람이 사라져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강한 어린이가 되었으면 해서 지은 이름이란다"... 이렇게만 보면 모든 부모의 욕망은 똑같은건가? 세상 어디를 간다고 해도?
나의 이름은 아쿠마 카즈히도.. 불행하게도 나의 이름중 아쿠마는 악마惡魔 와 같은 발음이다. 그리고 카즈히도는 一人이다. 결국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악마인 것이다. 글자를 모르던 어린시절엔 그래도 괜찮았다. 단지 소리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니까. 하지만 초등학교를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 아쿠마 카즈히도는 부모의 그 심오한 뜻과는 다르게 惡魔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진정 악마가 되기로 결심하고 곧이어 행동으로 옮겨 요주의인물이 되기로 한다. 만지면 부풀어오르던 고추를 가지고 장난을 하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나는 나외의 '나'가 더 있음을 알게 되고 그 나외의 '나'와 모든 시간을 함께 한다. 그렇게 우리는 늘 그림자같은 나의 내면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거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그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사실조차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도 내 안에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며 한 사건을 두고도 '예스'와 '노'를 동시에 외쳐대는 아이러니를 겪는것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또다른 나와 만나게 될까 노심초사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책속에서 나를 이끌어가고 있는 나는 '책속의 나'가 아닌 '책을 읽는 나'일수도 있다. 어쩌면 그리도 내속을 박박 긁어대는지... 현실이란 건 어디서 마주쳐도 두려운 존재인 것 같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다가오는 세상이란 굴레는 나의 덩치만큼씩 함께 커져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안에서 내가 찾아 헤매야 하는 것들은 비슷비슷하다. 사랑도 있을테고, 우정도 있을테고, 믿음도 있을테고, 배신도 있을테고, 행복이란 감정도 있을테고, 불행이란 감정도 있을테고... 우아하게 살고 싶다는 내면속에는 그저 되는대로 막살고 싶다는 욕망도 함께 자리한다. 무엇을 택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내가 택하고 남은 것들이 또다른 나를 만들어낸다는 거다. 나의 그림자로 나와 똑같이 살아간다는 거다. 그러니 내가 어디를 가든 늘 나와 함께일수 밖에 없다는 거다.

인간이 머리만으로 살다 보면,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해버리고, 쾌락도 고통도 모두 상상의 세계에서 맛보게 된다. 마침내 그는 논리의 미로에 빠져들어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인간은 육체라는 피드백 장치가 없으면, 파멸하게 되어 있다. 한편 육체만으로 살아가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보통 사람은 그런 광인과 짐승의 경계를 어슬렁거린다.(40쪽)

참 무섭다. 머리만으로도, 그렇다고 육체만으로도 살아서는 안되는 인간이라는 동물.. 포유류중에서 가장 고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 인간이란 동물이라고 했던가?  인간에게 있어 진화라는 것은 단지 자신의 삶에 맞추어 변화하는 것일뿐이라던 어떤 영화속의 자막이 떠오른다.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 내가 보기엔 육체만으로 살아가던 시대를 벗어나 머리만으로 살아가는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어쩌면 태어나는 인간 모두에게도 바코드를 찍어야 할지 모른다는 말들이 공중을 떠다니고 있다. 그래,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될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 책속에서 흐느적거리는 두명의 아쿠마 카즈히도처럼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어느쪽에 머물러 있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그런 순간이 올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보통사람일까?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는 보통사람의 범주에 들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말씀이야, 인간은 모두 미완성의 모조품이지. 옛날 사람들의 패러디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단 말이야. 나도 그래. 나는 누군가의 패러디다.(199쪽)

또하나의 아쿠마 카즈히도와 마주치기 위해,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성인이 된 아쿠마 카즈히도는 암벽을 타기로 한다. 그렇다고 내가 끝내주는 클라이머일 것이라는 생각은 마시라... 두 개의 칸테(암벽이 튀어올라온 부분)를 넘어서고 릿지를 오르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황과 마주치게 된다. 죽음이란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그 와중에서도 고독이란 놈이 찾아와 나는 나자신과 끝도 없이 싸움을 한다. 여전히 나를 비웃고 있는 또하나의 아쿠마 카즈히도..  인간은 죽음 직전에 이르러 과거를 일순간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299쪽)... 하지만 나는 살았다. 죽음 5초전까지 체험하면서.. 그 순간 나는 아쿠마 카즈히도가 무엇인가를 알아버리게 된다. 결국 내가 또다른 나를 이기는 순간이다.  이 책속의 아쿠마 카즈히도는 책을 읽는 모두의 모습일거라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까? 불현듯 신화속의 남자가 떠오른다. 시지프스.. 무거운 바위를 굴리며 언덕을 올라야만 하는 우리의 시지프스.. 다 올랐다싶으면 다시 떨어져 내리는 바윗돌.. 우리에게는 우리가 올라야 할 정상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정상을 향해 서로 짓밟고 짓밟히며 올라야 하는 애벌레탑처럼 그렇게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작가가 말해주고 있는 (그게 아니라면 정말 끝내주는 번역가의 말일수도 있겠지만)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다시한번 곱씹어 보면서 나는 책장을 덮기로 한다. 아쿠마 카즈히도의 여운이 길---게 내게 남아 있을것만 같아 두렵기도 하지만... /아이비생각

 '나'는 유전자나 단백질의 번역기계, 유기적인 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모조인간은 타인의 의식속에 사는 '나'의 환상이며, '나'의 의식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타인들의 환상이다. 인간은 이 두가지 부분이 꼬여 있기 때문에 이상해지는 것이다. '나'의 중추나 다른 기관들은 '나'의 의식속에서 살아가는 타인들의 환상작용 없이는 활동하지 않고, 타인의 의식속에 사는 '나'의 환상은 '나'의 중추나 다른 기관의 활동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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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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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이었던가?  가난한 노부부 앞에 나타나 세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그래서 그 노부부는 세가지 소원을 말했었다. 배가 고프니 우선 소세지나 좀 먹게 해 달라고, 그까짓 소세지를 소원으로 말해? 당신 코에나 붙어버려! 이제 소원은 한가지만 남았다. 노부부는 고민을 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소원을 말했다. 그 소세지가 코에서 떨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누구나 꿈꾸는 소망 하나씩은 가지고 산다. 그 소망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가? 물론 그 사람이 처해있는 현실이 어떠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또한 사람들이 가슴속에 품고 있는 소망이기도 하다.  동화속이건 우화속이건 이야기속에서 소원을 말하라고 하는 일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착한 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착한 일을 한 댓가로 받는 소원풀이는 그야말로 멋진 환상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의아했다. 이렇게 황당할수가!  정말 황당했다. 운명을 바꾸고자 과거로 돌아갔다던 이야기는 많이 회자되어지기도 했고, 시간 여행을 했다는 이야기 또한 많이 들어왔던 바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황당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었다. 이상하리만치 억지스러웠던 이 느낌들을 어이할까나.

예순살의 엘리엇은 평생 사랑했으나 자신의 미욱함으로 인하여 그녀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과거를 잊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다. 캄보디아에서의 의료활동이 끝나던 날 차마 떨쳐내지 못했던 작은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끝내 돌아가지 못한채 선행을 하게 되었던 엘리엇에게 노인이 찾아와 말했다. 아이를 구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꼭 해보고 싶은 소원이 있느냐고. 그래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대답을 했다. 노인에게서 받은 황금색 알약 10개... 그 황금색 알약은 과거의 자신에게로 데려다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미 예순이 되어버린 엘리엇이 서른의 엘리엇을 만나러 시간 여행을 떠난다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운명은 거스를수가 없다고, 감히 운명을 거스르려하지 말라고. 하지만..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엘리엇은 정말 기가막히게도 운명을 거스른다. 자신의 운명을 되바꿔 놓을 수 있다는 이야기 전개과정은 정말이지 나에게 어설픈 억측처럼만 들려왔다. 그것도 타인이 나의 운명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설정과 먼 과거속으로 들어간 타인의 손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다는 설정 앞에서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뭔가 크게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그 잘못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내는 그런 거짓말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차라리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 신경과민인 어머니 사이에서 살얼음을 밟고 살아가는 듯 했다던 엘리엇의 어두운 성장과정이야기가  그 이야기속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했다. 왜 그랬을까?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얼굴표정을 떠올려 보았다. 어쩌면 그 기대와는 너무 어긋나버린 이야기전개때문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안타까움을, 그 아련함을 어쩌지 못한채 차마 떠날 수도, 있을 수도 없는 표정으로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정말 슬픔일게다. 하지만 이 책속에서는 한점의 슬픔조차도 느끼질 못했다. 모르겠다. 기욤 뮈소라는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게 되었던 동기는 내가 파울로 코엘료라는 작가와 만나게 된 것과 비슷했다. 신문지면을 활짝 펼쳤을 때 그 지면의 반쪽을, 그야말로 대문짝만하게 들어나는 그 광고를 보게 되었을 때의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만 할까?   책장을 덮으니 책표지가 내 앞에 우뚝 선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시간의 반대방향에서 거꾸로 가고 있는 그림. 그리고 책 제목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 사랑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련함을 전해주는 애달픈 이야기도 아니고...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는 예순이었던 엘리엇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는 서른의 엘리엇이었던 그 설정이 나에게 주고 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제목만큼이나 나를 서글프게 했던 책이었다. /아이비생각

당신의 은신처는 당신 자신이다.
다른 곳은 없다.
당신은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당신 자신만 구월할 수 있을 뿐이다.
- 싯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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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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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세상으로 들어가면 나는 산책하는 것보다 달리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추리소설의 경우에는 그런 현상이 더욱 더 두드러지곤 한다. 600쪽이 넘는 추리소설을 만났을때는 거의 오래달리기 수준이니 심적으로 오는 압박(?)감을 어쩌지 못한다.  준비운동과 심호흡을 한채 책장을 열어 책속 세상으로 들어서니 스밀라라는 이름의 여인이 나를 맞이한다. 스밀라.. 참 부드럽다. 느낌이 좋다. 함께 가자고 내민 손을 잡으니 영 내달릴수가 없어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밀라는 내게 말했다. 천천히 가자고. 아주 천천히 내가 보여주는 것만 보며 따라와 달라고. 서두르지 말자고.

스밀라의 어린 친구 이사야의 죽음으로부터 스밀라의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지붕에서 떨어져 죽은 어린 친구의 죽음 앞에서 스밀라는 그자리에 단지  '소년의 죽음'만이  존재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었던 어린 친구의 죽음이라고는 볼 수 없었던 스밀라.. 단지 그것뿐이었다. 추락사가 아닌 죽음으로 몰아갔을 무엇인가가 분명하게 있다고 믿었던, 그래서 그것만을 알아내면 된다고, 단지 그것만 알아내면 되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겨울의 눈내린날, 단순한 추락사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던 그 눈의 이야기가 그녀를 그렇게 엄청난 모험속으로 끌어들일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조차도.

이해하고 싶다는 것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고자 하는 시도다. (55쪽)

스밀라.. 이누이트족 어머니와 유럽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 이누이트족이라 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에스키모다. 캐나다 인디언이 '날고기를 먹는 인간'이란 뜻으로 붙여준 이름처럼 그들의 생활은 주로 수렵과 고기를 잡는 것에 있다. 그녀의 속성이 자연과 함께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린 시절을 어머니와 함께 이누이트족으로 자랐지만 어머니의 죽음 후 아버지에게로 가게 된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음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음이다. 눈과 얼음속에서 함께 공존하며 살았던 그녀는 역시 눈과 얼음에 관한 공부로 자신을 무장하게 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어린 친구였던 이사야의 죽음을 단순하게 볼 수 없었던 아이러니가 생겨난걸 보면 우리의 삶은 그렇게 마음먹은대로만 움직여주지는 않은 모양이다.

사람들은 시계를 도구로 삼아 서로의 삶을 묶는다. (85쪽)

결코 추락사가 아니라고 그녀는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 다시한번만 더 수사를 해 줄수는 없는거냐고 그녀는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수사는 해보겠지만 당신은 빠져줄 수 없느냐는 무례를 범해가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것 역시 누군가를 '믿을 수 있다'는 감정하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닐까?  그녀, 스밀라에게는 언제부터인가 이사야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서 믿음을 지워버린다. 무언가 있다! 그렇다면 그 무언가는 과연 무엇일까?  왜 이사야의 죽음속에서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일까?  하나둘 밝혀지는 사건의 과정들을 앞에 두고서 문득 그녀앞에 우뚝 선 남자 수리공 페터.. 이사야라는 어린 친구를 함께 공유했었던 또 한사람의 등장이기도 한 동시에 그녀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감정의 사슬이기도 한 수리공 페터의 존재는 책을 읽어가는 내게조차도 상큼한 등장처럼 느껴졌었다.  서른이 훌쩍 넘어선 노처녀의 감정속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페터와, 그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이사야의 기억처럼 스밀라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손을 잡게 된다. 이쯤에서부터 나는 스밀라의 손을 놓고 나혼자 앞서 달려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스밀라는 끝까지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함께 가야 한다고. 그래서 내게 힘을 실어주어야만 한다고 그녀가 말하고 있는것만 같았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한가지 방법이 있다. 실제로 살아보는 것. 그 문화속으로 이사하여, 손님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해서 언어를 배운다. 어떤 순간이 되면 이해가 찾아온다. 이해는 언제나 비언어적이다. 무엇이 낯선 것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설명하려는 충동을 잃어버린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 현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259쪽)

스밀라에게 있어 그녀의 아버지는 또다른 아픔이었고, 믿음이었으며, 사랑이었는지도 몰랐다.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소망하되 서로에게 어쩔 수 없는 간격을 두고 그 거리를 좁혀갈 수 없다. 아버지에게는 젊은 무용수가 있다. 하지만 나중에야 스밀라가 알게 되는 진실.. 자신을 향한 혹은 어머니를 가슴에 둔 아버지에게는 그 젊은 무용수조차도 찾고 싶은 사랑을 대체할 수 없었다는 것을.. 수리공 페터에게서 알 수 없는 안정과 '행복'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던 스밀라의 가슴속에도 어쩌면 거부해야만 하는 것처럼 여겨왔던 그 감정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체성을 드러냈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라니.. 나는 이쯤에서 눈치챘어야 했다. 어린친구 이사야와의 친분을 통해 부여잡고 싶어했었던 그녀의 가슴 저 아래쯤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그 깊은 고독을... 그 고독을 끌어안은 채 살아왔을 그녀의 서른 일곱해의 많은 시간들에 대해서...

어떤 사람속에는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고 관대하며 믿을 만한 개인이지만, 뼛속까지 썩어버린 상습범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어렴풋한 모습밖에는 빛 속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 (486쪽)

사실 사건은 하나였을 뿐이다. 그 무언가의 정체는 빙산과도 같았다. 보여지는 부분은 물위로 솟아오른 일각일 뿐, 그 아래로 더 많은 부분을 숨기고 있는.. 한사람씩 차례대로 등장해 주었다면 나는 아마도 오랜 기다림에 목말라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숨겨진 부분을 움켜쥐고 있는 손들은 많았다. 공동체 의식을 치루듯이 그렇게 그들은 하나의 의식처럼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던 거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이미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었다면 그것은 현재일까, 과거일까?  그 과거가 죽은 시간이 아닌 살아남은 시간으로 그녀에게로 걸어와 작은 소년의 죽음이 있어야만 했던 진실속으로 그녀를 몰아갔다. 그녀는 이미 내재되어져 있는 그녀안의 은밀한 감각을 되살려 바다로 나갔고, 그 바다를 거쳐 다시 얼음이 있는 세계속으로 되돌아갔다. 태초의 모습, 그녀를 있게 해주었던 그 태초의 세계로 다시 돌아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 자연앞에서 작아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욕망은 무너져 내린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묻고 있는 자연앞에서 인간은 정말이지 비협조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자연이라는 이름의 엄마에게서 그동안 받았던 것들은 모두 잊어버린채 다시 또 달라고 손내미는 어린 아이처럼 자연앞에서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가련하기만 하다. 얼음동굴속에서 행해지던 그 파렴치한 인간의 너절한 핑게거리라니... 하지만 우리의 스밀라는 자신 스스로가 얼음이 되어 그런 인간의 오만함을 단죄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남아 있어줄까?  마지막 믿음까지 소멸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끝내는 자신이 처한 현실과 스밀라의 말을 인정하며 자신의 얄팍한 욕망을 버릴 수 있었던 수리공 페터처럼.  그녀와 그의 사랑이 마지막 남은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생각이 스밀라에게 들켜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사랑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를 배신해서는 안되는 것일테니까. 

옮긴이의 말을 빌어보자. 이누이트들은 눈雪을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른다는..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 어떤 사물도 더이상 같지 않다는 뜻이라는.. 다른 이름은 다른 세상을 보는 다른 눈眠을 의미한다는...
그렇게 보면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하나의 처세술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 더이상 같지 않을 모든 것들에 대한 감각.. 그 감각이 발달할수록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는 많아진다. 동물적이라는 말은 어쩌면 자연적이라는, 자연에 좀 더 가깝다는 말도 될테니 말이다. 그녀에게서 볼 수 있었던 동물적 감각 또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상황판단능력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현실속에서 그 현실만을 가슴에 안아들고 사는 사람과, 현실속에서 그 현실안에 자연의 힘을 들여놓고 그 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점은 상당할 것이다. 사실 이 책속 세상에서는 내가 빨리 달려나가고 싶어도 달려나갈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광범위한 작가의 지식과 체험들이 어울어져 있는 까닭이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이 책속에는 너무도 많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책표지에 장황하게 써놓았던 어느 소설가의 당부처럼 그녀에게 더 많이 더 자주 입을 맞춰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에게서 입맞춤을 당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스밀라... 이누이트족이 쓰는 자연을 닮은 의미와 유럽식 의미가 합쳐졌던 그녀의 이름.. 내면적으로는 자연속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우리의 아픈 소망이 담겨져 있던 그녀의 이름... 나는 이 책을 놓아버린 후에도 스밀라라는 이름을 사랑하게 될 것만 같다. 내게 그녀의 그 깊은 내면을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시간에 관계치않는 영화 한편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 스밀라를 위하여..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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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의 풍경
데이비드 리스 지음, 남명성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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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에서 펼쳐지는 다이하드... 이 책의 소개글중 하나이다. <다이하드>라는 영화가 아마 4편까지 나왔던가?  몸으로 부딪혀가며 악당과 싸우는 주인공의 무모한 대결신들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다이하드>라고?  언론상에서 부패의 풍경을 처음 만났던 것 같다. 책을 소개해주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부패의 풍경이란 제목과 꼭 읽어야 할 책 목록이라고 추천하던 대목만이 떠오를 뿐..  500쪽에 달하는 두꺼운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던 책..  데이비드 리스라는 작가를 보며 내가 읽었던 <암스테르담의 커피상인>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움추렸었다. 와, 이런!
<암스테르담의 커피상인>을 너무 딱딱하게 읽었었던 까닭이기도 했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이 책을 펼쳐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빠져 들었다. 나는 사실 이 작품의 전작이라고 하는 <종이의 음모>를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해서 전작의 흐름도 이 책과 같았으리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한마디로 흥미진진하다. 막힘없이 한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듯한 착각이 든다.

벤자민 위버.. 그는 교수대에 오르기전 재판을 받게 된다. 자신이 죽이지도 않은 사람을 죽였다는 살인죄다. 거짓 증인들이 나와 증언을 하지만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구린내가 나는 증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감옥으로 끌려가는 순간 아리따운 미녀 하나가 은근슬쩍 그에게 건네준 자물쇠 따는 쇠붙이와 쇠를 자르는 줄.. 이건 또 뭔가? 그렇다면 누군가는 자신이 살기를 바라고 또 누군가는 자신이 죽기를 바란다는 말이 된다.  죽기를 바라는 자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자의 가운데에서 과연 그는 어느 쪽을 택하게 될까?  결국 그는 탈옥을 한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그런데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책을 펼치면 친절하게도 역사적인 배경을 연도별로 나열해 주고 있다. 18세기 초 영국의 정치 상황을 알기 쉽게 전달하고자 했다는... 나에게는 아주 커다란 도움이 되었음을 두말하면 잔소리다. 단지 그 역사적 배경이란 것이 또!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사실 반가운 것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정치와 종교, 정말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모양이다.  단지 너무 뻔한 모양새가 역겹게 느껴질 뿐이다. 역사적 배경을 기억해가며 책장을 넘기다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리고 줄달음을 친다. 우리의 주인공 위버가 과연 다음에 취해야 할 액션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손에 쥔 것이라고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우리의 주인공께서 과연 어떻게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으려는지...

그렇게 탈옥하여 그가 휘젓고 돌아다니는 18세기 영국의 풍경은 그야말로 처참하다.  아직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탓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묘하게도 그 시절의 정치적, 사회적 풍경은 지금의 우리시대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의 막무가내식 해결법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니 어찌된 일일까?  사람의 마음이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사람의 마음이 상황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섬뜩해져 온다. 우리의 주인공 위버의 활약은 그야말로 <다이하드>라는 영화속 주인공의 모습과  딱 맞아 떨어진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멍청하리만치 단순하게 문제를 파고 든다. 핵심은 하나뿐이다. 자신의 무죄만 밝혀낼 수 있으면 된다는 것..  하지만 잔혹한 삶은 그를 정치라는 커다란 늪속에 빠뜨려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발을 들여놓게 되는 정치판에서 그는 되묻고 있다.  도구화 되어가고 있는 자신에게..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치판의 희생양이자 뜨거운 감자로 변해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벤자민 위버. 아니 매튜 에번스.. 위버와 에번스로 자신을 변화시켜가며 알아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 진실이 과연 밝혀지기는 할까?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폭력도 불사하며 금품과 뇌물이 빈번하게 오고가는 뒷거래의 풍경들은 그야말로 부패 그자체의 모습이었다. 계급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던 그 시절의 서민들은 살아 있어도 살아있음이 아니었으니 그야말로 처참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살인자인 위버가 탈옥을 하고 느닷없이 군중의 위상으로 떠올랐던 것은 어쩌면 자신들의 처지를 어쩌지 못하는 불행한 서민들의 감정표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성공과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고위층 인사들과 당장 목구멍으로 넘겨야 할 양식과 일거리를 찾아 헤매야 하는 서민들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보면 같다. 살아야 한다는 것.. 그들이 서로가 달랐던 것은 돈이란 이름의 힘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뿐이다.

하나씩 밝혀지는 위버의 진실.. 그 진실에 묻어나오는 거짓들.. 행복과 불행이 쌍둥이듯이 진실과 거짓도 쌍둥이다. 진실이 있으면 거짓이 있게 마련인데 진실의 얼굴보다 그 뒤에 숨어 나타나는 거짓의 얼굴이 더 더럽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아마도 진실을 아프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하나뿐인 거짓으로 말미암아 아파해야 할 진실이 더 많은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도대체 범인이 누구일까 나름대로 예측해보기도 했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느닷없는 반전으로 나를 또 실망시키는 건 아니겠지?  위버가 궁금했던 것처럼 그에게 자물쇠를 따는 쇠붙이와 쇠를 자르는 줄을 건네주었던 여인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 비밀은 참으로 기가막히게 밝혀졌다.  어쩌면..이란 가정조차도 감히 들이댈 수 없었던 그 멋진 결말을 보면서 진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감히 높은 분의 지시를 어길수가 없었던 탓에 그나마 양심적인 선택으로 행해졌던 일이었다는 것..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를 죽이기 위해 지시를 내렸던 동기가 나를 허탈하게 했다. 질투... 그리고 두려움... 사람이 자신속에 내재되어져 있는 감정을 이겨낼 수 있는 한계는 어디쯤일까?

"바보짓이라기보다는 일이 얄궂게 돌아간 것 같소.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고자 어쩔 수 없는 짓을 하곤 하니까" ... 재미있었던 점은 아무런 특징도 없는 아주 평범한 벤자민 위버라는 사람이다. 정치가 무엇인지도 이념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사람이 자신을 구해내기 위해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던 그 과정은 정말 흥미로웠다. 판사의 말처럼 모든 것은 자신을, 자신이 가진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살인누명을 쓴 벤자민 위버의 모습과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상류층으로 변해야 했던 매튜 에번스는 분명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가 살아내야 하는 삶은 너무도 달랐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내면은 아니었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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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비밀] 서평단 알림
할아버지의 비밀 작은거인 15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한미희 옮김 / 국민서관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이 글의 배경은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오스트리아이다. 책소개글에서처럼 시대적 배경은 어둡고 칙칙할 수 있겠지만 주인공인 할아버지와 손녀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그것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꿈과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왠지 동화적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할아버지가 주는 느낌과 손녀가 주는 느낌이 내게는 물과 기름처럼 느껴졌던 까닭이기도 하다.
우리의 정서와 맞아 떨어지지 않는 탓일까? 그것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동화라고 보기엔 펼쳐지는 배경들이 너무 어른스럽다. 할아버지의 오토바이와 맺어져 있는 비밀 골짜기라는 설정속에서 나는 왠일인지 비밀결사대의 냄새를 맡는다. 어이없게도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영화속에서 보여주었던 주인공 가족의 탈출기가 생각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야기속에서 왔다갔다하는 환상세계가 전혀 환상세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너무 맑은 이야기를 기대했던 탓인지도 모를일이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아들녀석을 생각하며 이 책을 선택했기에...

언제나 일요일이면 뒹굴뒹굴 치료를 하는 할아버지.. 이 뒹굴뒹굴 치료시간이면 우리의 이쁜 손녀는 어김없이 할아버지를 찾아온다. 마술사나 예언자들이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수정구슬처럼 바로 앞의 사건을 보여주는 서진이 할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로운 일상의 모습들을 예견해주는 할아버지의 서진.. 그 서진을 통해 막막한 현실을 탈출하고, 그 서진을 통해 그들은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전쟁이 끝나는 꿈을.. 그것이 차라리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꿈과 희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공습경보가 울리고 방공호로 대피하며 어느날 어느 순간에 떨어져 내린 폭탄에 집이 무너질지 모르른 그런 현실속에서 꿈꾸는 미래.. 그 미래를 할아버지의 서진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비록 수정구슬이 아닌 사과만한 유리구슬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할아버지에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니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다가왔던 어색함이 너무 싫어 옮긴이의 말을 파고 든다. 사랑이 있기에 삶은 아름답다는 말로 시작되는... 글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와는 문화와 정서가 다른 까닭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이 책속에서 나는 그렇게 이쁘고 맑은, 그야말로 동화적 이미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너무도 현실적인 이야기였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전쟁이 일어나고 물자가 부족해지고, 유태인을 학살하고, 더구나 군에 끌려간 아버지는 소식도 없고, 집이 폭격당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이주명령서도 그렇고, 이주한 뒤 보여지는 그곳 사람들의 생활상이 또 그렇고...
현실을 환상처럼 보여주고 싶었던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실은 현실일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왠지 책을 읽는 내내 어색한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문학상, 빈 아동문학상을 타게 해 준 작품이란 소개글을 보면서 왠지 한쪽 가슴이 서늘해져 온다. 답답한 마음에 언제나 가장 먼저 찾았던 작가의 프로필을 뒤늦게 찾아나선다. 모두가 당연시 여기던 권위에 도전하거나 어린이 책에서 금기시 하던 주제를 많이 다루며...라는 말이 눈에 띈다. 그제서야  약간의 수긍을 하게 된다. 아무래도 나는 너무 맑지 못한 영혼을 가진 모양이다. 지독한 편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 자신을 다시한번 되돌아보게 해 준 작품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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