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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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 효과란 말이 있다. 유명인이나 자신이 존경해 마지 않았던 사람이 죽게 되면 그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자살을 하게 된다는... 글쎄, 사실 난 그런류의 생각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사람마다 성격 차이가 있음으로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는 감정도 다르겠지만 내게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을 듣게 되면 나도 모르게 영화 한편이 떠오르곤 한다. <글루미 선데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역시 사랑을 담았던 노래가 아니었나 싶다. 그 노래가 방송을 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자살이 늘어가기 시작해 사회라는 거대한 무리가 흔들리는... 영화를 보면서 뭐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다. 노래라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심금을 울린다느니, 감동을 했다느니 하는 말들이 그냥 괜히 나오는 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꿈결같았던 학창시절에 도서관을 찾으면 왜 이리도 이해할 수 없는 고전을 찾아 헤맸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겠으나 이 책 역시도 이미 그시절에 나의 손을 거쳐 갔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나의 기억속에서 그다지 커다란 공간을 차지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죄와 벌, 폭풍의 언덕, 목걸이, 까라마조프가의 형제 등등등... 생각나는 고전들은 많지만 유독 이 책의 내용은 그다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한번 꼭 읽어보리라 생각하면서도 쉽게 다가서지 못했었는데 책을 읽고나서 나는 다시 또 생각하게 된다.  좀 더 세월이 지난 후에 읽어볼 걸 그랬다고... 그렇다고 내가 다시 고전읽기에 도전한 마음을 되돌리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절실한 그리고 아주 지독한 짝사랑이 불러왔던 고통, 그 고통으로 인하여 주인공이 받아들여만 했던 아픔의 순간들, 결코 승화되어질 수 없었던 집착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만 보여지던 그 사랑의 행로.. 그처럼 지독한 사랑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해보았을까?  사랑을 하면 이 세상의 크기가 오직 그사람만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만큼의 크기로 보여진다는 말이니 온통 상대방 생각뿐이라는 말도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가질 수 없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욕심과 집착을 키워가며 끝내는 자살이라는 이름으로 끝내버린 그의 사랑을 나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지가 않다. 그것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자신의 집착에 불과했을 뿐이다.  

사랑도 시대에 따라 변하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단지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변할 뿐이다. 헤어지면서도 행복을 빌어주었던 사랑법과 너 같은 사람 다시 만나 너도 나처럼 당해보라는 식의 사랑법은 확실히 다르다. 그다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편지 곳곳에서 묻어나던 베르테르의 현실적 감각이 느껴질 때마다 자살로 맺음을 해야했던 그의 모순을 보게 된다. 꽤나 현실적인 듯 하면서도 이상에 자신을 맡겨버린 무책임함도 그의 자살을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인정하기는 싫다.

이 책처럼 편지글 형식의 책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  편지글 형식이었기 때문에 약간의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용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조금은 답답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일게다. 공감할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 아직은 내가 그 사랑이란 것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 같다. 그 편지를 받았다던 친구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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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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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잠이 든 아이의 뱃속에서 누군가가 글씨를 쓰고 있었다. help me.. 잠이 든 육체를 사이에 두고 선과 악이 대립을 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하여 육체를 희롱하였던 악마적인 감성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정말 섬뜩하다는 거였다. 다섯째 아이를 읽으면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현실적이었다는 점과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때문이었을까? 책장을 덮으면서도 내 마음속에 솟아올랐던 소름은 사라지지가 않았다. 도리스 레싱이란 작가의 이름을 어디서 보았더라? 아하, 그랬군! 사실 나는 노벨문학상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우리의 작가 고은님께서 몇번을 후보에 올랐었다는 말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도리스 할머니였다는 걸 기억해내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심 오르한 파묵이란 작가의 글처럼  (오르한 파묵이란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되었던 계기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다는 점 때문이었지만) 너무 주관적인 관점이 아니길 은근히 바라기도 했었다.작가의 작품들 중에서 내가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것은 아마도 가족이야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두 남녀가 이루고 가꾸어 나갔을 그 가정의 이야기...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평범하다. 특별히 남들의 앞에 서서 달려나가는 타입도 아니다. 어쩌면 고지식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리겠다. 혼전성관계를 용납하지 못하고 허울과 가식이 넘쳐나는 파티를 마음속으로 조롱할만큼... 그런 그들이 서로에게 운명이라고 느낀 순간 그들은 하나가 된다. 그리고 많은 아이를 낳아 행복한, 그야말로 행복한 이상적인 가정을 꿈꾸며 소망한다.  빅토리아풍의 커다란 주택에서 그들은 그들이 원했던 삶을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다섯째 아이를 임신하기 전까지는.. 다섯째 아이..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뭔가 알 수 없는 힘을 발산하고 태어남으로 인하여 그 가족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해줄 수 없었던 다섯째 아이..  아니 어쩌면 그 자신보다도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오고자 했던 그 아이의 존재에 대해 이미 가족들은 아무런 존재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건지도 모르겠다. 괴물, 그렘린, 호빗... 그아이를 따라다니던 많은 수식어들이 그 아이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처음부터 상실감만을 안고 태어난 아이. 인정받을 수 없었던 아이. 환영받지 못했던 아이.. 어쩌면 그런 것들이 그아이를 그렇게 만들어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의 입을 통하여 자신에게 전해져 왔던 약의 의미는 너무도 참혹했다. 어린 태아를 진정시키기 위한 진정제란 말조차도 끔찍했다. 그 아이가 태어나 자람으로 인하여 그 커다란 저택을 꾸며주었던 행복의 존재들과 아이들은 하나 둘씩 해리엇을 떠나게 되는 서글픔..

그 다섯째 아이 벤은 진정 장애아였을까? 하지만 내게는 장애아는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화자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아무런 이상은 없었다. 그 아이는 단지 엄마 뱃속에서부터 들려왔던, 그리고 느껴왔던 공격적인 정서에 반응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주변사람들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버지의 묵인하에 시설에 갇히게 되는 벤.. 벤이 사라지던 그 순간부터 다시 일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오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자신들이 꿈꾸어왔던 행복이란 개념을 다시 찾아 올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갖는다.  하지만 벤을 포기할 수 없었던 해리엇은 막무가내로 벤이 있는 곳을 찾아가게 되고 벤이 처해진 그 현실에 경악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시작... 벤이 돌아오자 모든 가족들은 해리엇에게서 등을 돌리지만 해리엇은 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라고 보여지지 않으니 또 왠일일까?  책을 읽고 있는 내게는 해리엇의 행동이 사랑보다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한발 먼저 앞섰다는 느낌뿐이었다. 어째서? 왜 그래야만 하는거지? 물론 엄마로써의 의무와 책임감을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진실로 그 무서운 아이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지 않으면서도 굳이 행복하고 싶어하는 가족 틈새로 그 아이를 밀어넣어야 할 권리는 그녀에게는 없어 보였다. 적어도 내게는.. 무엇때문에 하나를 위하여 다섯을 아니 그보다 많은 것들을 희생시켜야 하는건지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으며 그토록 영위하고자 했었던 그 많은 것들을 왜 포기해야만 했는지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사랑은 결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나의 생각만으로는 결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세월은 흐른다. 그 세월속에서 가장 많이 아파했고, 그 현실을 가장 혹독하게 견뎌낸 사람은 누구였을까? 해리엇이었을까? 데이비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벤이었을까? 사실 속깊이 들여다보면 아프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마는 화자의 시선속에서 또 하나의 장애아가 자라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넷째 아이 폴.. 엄마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기에 자신의 자리를 벤에게 빼앗겨 버렸던 아이.. 그 아이는 자라면서 무언가를 끝도없이 요구하게 된다. 엄마는 항상  벤,벤,벤, 벤뿐이잖아요.. 나도 사랑이 필요하다구요, 나도 엄마가 필요하다구요... 벤을 다시 집으로 데려왔을 때 흘렸던 그 가족의 눈물을 나는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는 내내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이 일을 어찌하나?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그 아픔이 내게로 전이되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도 했고 그 고통이 나에게로 전이되어져 해리엇과 벤이 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벤이 익혀가는 어설픈 상황대처법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그런 벤을 이해할 수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해리엇과 데이비드를 바라보면서 삶은 정말 우리를 가혹하게 시험하려 드는구나 싶기도 했다.

어느덧 청년으로 자라버린 다섯째 아이 벤. 그리고 나이보다 부쩍 늙어버린 해리엇과 데이비드.  그렇게 사회속의 일원으로 발을 디디는 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멀지 않은 벤의 미래를 생각하는 해리엇의 예측속에는 벤속에 내재되어져 있을 그 엄청난 파괴본능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이쯤에서 묻고 싶다. 과연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꿈꾸었던 가정이야말로 정말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어쩌면 벤속에서 억압되어지고 내재된채로 커나가고 있었을 그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은 우리 모두가 안고 살아가는 그런 것들은 아니었을까?  틀안에서 보여지지 않은 그 어떤 틀안에서 나도 모르게 그 틀에 맞춰살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두가 자신의 속마음을 숨긴채 현실을 바라보았던 그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장을 덮자 알 수 없는 느낌의 공포가 나를 향해 웃고 있는것만 같았다. 잘못했다, 이 책을 밤을 세워 읽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리 긴 이야기도 아니었건만 나는 너무도 긴 이야기를 읽고 난 느낌이 들었다. 겨우 200쪽에 가까운 이야기였을 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가온 느낌은 너무도 무거웠다. 누가 비정상이었을까? 벤이었을까? 아니면 벤을 둘러싸고 있었던 그의 주변이었을까? 누가 비정상적이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단지 현실을, 그 현실이 가혹하든 행복하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허울뿐이었든 진심이 담겨있었든 그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길로 통하는 것은 아닌지...

"우린 애가 없어, 해리엇. 아니, 나는 애가 없어. 당신은 애가 하나 있지" 그가 집에 더 자주 있었더라면 그렇게는 말을 하지 않았을텐데, 하고 그녀는 느꼈다. (169쪽)
마흔다섯의 나이에 머리가 세어버린 해리엇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과연 그가 자주 집에 있었더라면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을까? 지쳐버린 그들의 삶속에서 다시 시작되어질 또다른 삶 하나가 눈을 뜨고 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 누구를 탓해서도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저마다의 몫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들조차도 어쩌면 다시 가혹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가족 모두에게 각자의 행복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해리엇, 그녀의 이름은 여자였고 그녀의 이름은 엄마였으며 그녀의 이름은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또하나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든든한 그 무엇으로써의 의미로...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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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배려 - 어린이 자기계발 동화 01, 엄마와 아이가 함께 감동한 베스트셀러 <배려>의 아동판 어린이 자기계발동화 30
한상복 원작, 전지은 글, 김성신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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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뱃돈을 왕창 벌었다고 입이 귀에 달린 아들녀석이 만원만 그냥 쓰면 안될까요? 하고 묻길래 뭘 하려고?  이렇게 되물었다. 어차피 통장으로 들어갈 돈이기에 염려는 없었지만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만원이란 돈의 의미를 저녀석이 알기는 알까 싶어 노파심에 나는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뭔가 너를 위하여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한참을 고민하던 녀석이 책을 사볼래요 한다. 그렇게 하여 선택되어진 책이 이 책이다. 얼마전에 읽었던 <배려>의 느낌이 좋아서 아들녀석에게 보여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해하기가 버거울 것 같다고 말했더니 그 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일단은 표지그림부터가 이쁘다. 그러니 책 속의 내용이 이쁜건 보나마나.. 우선은 아들녀석부터 읽게 하고 엄마도 함께 읽었다. 역시 이쁘다. 약속했던대로 엄마와 함께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녀석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점은 가족에 대한 배려였다는 말에 왠지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나 역시도 엄마로써 아들녀석에게 많은 배려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반성하고 있었으니 오죽할까?  책속의 예나와 아들은 동갑이다. 그러니 녀석에게는 더욱 더 현실적인 감각으로 다가왔으리라.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며 행동했었던 예나가 바른생활부를 위하여 고민하고 실천을 하며 변해가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아들녀석은 무엇을 배웠을까?  자신의 일과 가정의 일을 병행하면서 힘겹게 지내고 있던 엄마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예나의 마음이 아들녀석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비쳐졌을까?  예나의 부모가 예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나 역시도 엄마로써 아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본 적이 과연 몇번이나 있었을까?  예나를 통하여 묻고 있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나는 물었다. 승호의 엄마와 예나의 엄마중에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되어지는 모습이 있느냐고. 승호의 엄마는 그야말로 극성엄마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거리낌없다. 그런 반면에 예나의 엄마는 어지간한 것들은 예나에게 맡겨두는 타입이다. 아들녀석의 대답은 의외로 예나 엄마 타입이 더 좋아요, 였다. 왜? 엄마가 학교에 자주가고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아무래도 니가 더 이쁨을 받지 않을까?  아니요. 학교일은 제 생활이니까 그냥 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가는 편이 훨씬 더 나아요.. 하긴 엄마한테는 승호엄마처럼 하래도 할 수 없다고 혼자 중얼거려 본다. 그게 사실이니까. 문득 바른생활이란 단어를 바라보면서 나 어릴적의 교과서가 바른생활이었음이 기억났다. 지금은 도덕이라는 말로 바뀌었지만 그 바른생활을 배웠던 우리의 어린시절과 도덕을 배우는 지금의 어린아이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생활패턴이 아무리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바른 생활의 덕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텐데도 말이다.

엄마와 아들로써 서로에 대한 배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한참을 이야기 나누다가 우리는 서로 약속을 했다. 꼭 한번씩만 서로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그리고 서로에게 화가 나거나 짜증나는 일이 있을 때는 대화로써 풀어가자고.  지금의 아이들은 사춘기를 두번씩이나 겪는다는 말도 있다.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아들녀석이 사춘기에 접어든 모양새다. 내가 늘 하던 말처럼 이 전쟁은 아마도 아들녀석이 성년이 된 후에도 계속될 것임을 알기에 서로에 대한 배려를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많이 힘겨울 것이다. 밖으로 나가기 이전에 우선 가족에서부터 그 배려를 출발하고 싶다. 매일처럼 아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가 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먼저라고. 함께 노력하자고 손가락을 내미니 녀석이 베시시 웃으며 손가락을 건다. 화이팅!!!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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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식시종
우고 디폰테 지음, 피터 엘블링 영역, 서현정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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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식시종이라는 말이 낯설었다. 물론 시종의 종류가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시식시종이란 말이 주는 느낌이 좀 의아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주인이 음식을 먹기전에 먼저 음식의 맛을 보아야 한다는 시식시종. 결국 그 음식에 독이 들어있나 없나를 확인하기 위하여 주인보다 먼저 시식을 해야하는 시종이다.  책속의 배경은 중세의 이탈리아이다. 책속에서 많은 음식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나는 왠일인지 이탈리아라는 말속에서 피자만 생각난다. 이런!.. 각설하고 가난한 소작농이었던 주인공 우고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형 비토레만을 편애하던 아버지가 있었다. 형과 아버지로부터 모진 구박을 견디다 못한 우고는 가출을 하게 되고 처음으로 사랑하게 되는 여인에게서 딸 미란다를 얻게 되면서부터 그의 인생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시식시종이란 직종이 뭐하는 것인지도 모른 체 그저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 가야만 했던 영주 페데리코의 성에는 그가 살아왔던 시간들이 무색할 정도로 판이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공 우고는 우직하다. 영리하지도 못하다. 낙천적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듯 보여지는 그의 일상속에는 늘 아슬아슬하게 넘어가야 할 삶의 곡예들이 펼쳐져 있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있듯이.

성 베드로의 발톱, 엘리야의 머리카락, 에메랄드 귀고리, 상아반지...... 부적의 종류는 많고 많았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시식시종들이 몸에 지녔던 부적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내게는 참으로  크게 다가왔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면서도 맛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운명이란 어쩔수 없는 아이러니다. 늘 배고픈 그들이 그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음식을 입에 넣을 때마다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하니 맛을 음미할수도 없는 상황이다. 우습게도 그 장면을 떠올리며 행복과 불행은 늘 함께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우고의 삶 역시 그와 똑같이 기쁨이 오면 반드시 슬픔이 그 뒤를 따라오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생활에 적응해가며 나름대로 삶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속에는 우리 모두의 삶이 내포되어 있는 듯 하다.  주변으로부터 가히 독살을 당하고도 남음직한 포악한 영주 페데리코의 음식을 시식하는 하루 하루를 살아내면서도 커가는 딸 미란다를 위한 그의 정성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딸을 향하는 그의 사랑은 절대적이라고 말할만 하다.

시대적인 배경을 통하여 귀족층과 평민층이 너무도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아주 담담하게 잘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의 주인공 우고는 그런 차이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음이다. 각종 음식들과 곁들여지던 귀족층들의 대화속에는 위선과 허울뿐인 그들의 모습이 비쳐지기도 한다. 간혹 볼 수 있었던 중세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영화속의 장면들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거리게도 한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내게 다가왔던 느낌 하나를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책속의 내용은 단순히 중세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어떤 종교적인 의미를 많이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을 찾으며 끝도없이 기도를 하게 되는 우고의 모습과 우고에게 고통과 좌절만을 안겨주었던 형 비토레를 적그리스도라 불렀던 우고의 말속에서 종교적인 상징을 얼핏 보았던 까닭이다. 또한 그에게 다가왔던 여인들, 아그네스와 헬레네의 역할 그리고 그의 곁에 머물며 가끔씩 그를 시험에 들게 하는 딸 미란다 역시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음이다. 비토레를 통해 보여주었던 광란의 의식속으로 분연히 딸을 구하기 위하여 뛰어들었던 우고의 모습과 비토레의 최면에 걸린 채 자신들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던 마굿간의 사람들.. 마녀재판을 생각나게 하는 시식시종들끼리의 시기와 질투...어쩌면 작가는 우고 디폰테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존재를 빌어 자신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종교적인 색채가 상당히 짙게 베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었다. 책의 카피에서 보이듯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를 가늠할 수가 없다. 어찌보면 아주 훌륭한 상상속 인물인듯도 하고 어찌보면 정말 힘겹게 세상을 살아낸 한 남자의 이약기같기도 하고...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뭐 이런류의 질문이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이 그토록 무서워하던 독을 이용하여 페데리코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던 우고.. 결국 모든 고난을 이겨낸 우고 디폰테는 자신의 삶을 찾게 되고 그토록 사랑하던 딸 미란다에게도 행복한 삶을 선사해준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해피앤딩으로 끝날 수만 있다면 좀 좋을까?  그많던 삶의 언덕을 넘고 넘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정말 행복한 삶이리라. 작가의 가감없는 직설적인 문체를 보면서 삶의 의미는 안개속에 갇혀진 것처럼 흐릿한 것은 아닐거라고 생각해본다. 그렇기에 우리의 어깨가, 우리의 가슴이 무거운 까닭이리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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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평화를 짝사랑하다 - 붓으로 칼과 맞선 500년 조선전쟁사 KODEF 한국 전쟁사 1
장학근 지음 / 플래닛미디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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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조선시대에 대마도를 정벌한 후 그들의 말처럼 조선에 귀속시켜 관리인을 두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만약에 흥선 대원군이 나라의 대문을 꽁꽁 걸어 잠그는 쇄국정책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만약에 우리의 선조들께서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기 위한 당파싸움을 저멀리로 내던질수만 있었다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안겨줄 수 있었을까?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책이었던 것 같다. 얼마전에 읽었던  책속에서 나에게 너무도 강하게 다가왔던 한줄의 글귀가 있었다. 한국처럼 우리의 유교주의를 제대로 이어받은 나라는 없는 것 같다던... 그래서 한번쯤은 한국을 방문하여 그것을 다시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던... 지식층의 말을 보여주던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던가?  대의명분만을 내세울 줄 아는 그런 학문에 어쩌면 그리도 심오한 철학을 심었어야 했는지 나는 가끔씩 되묻고 싶었었다. 이 책의 저자는 마치는 말을 통해 결코 유학의 책임이 아니라고, 단지 조선의 사대부들이 유교의 다양성 중에서 명분론과 예론만을 취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찌되었든 득과 실을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제게 필요한 것만을 받아들여야 했던 상황들이 나는 미운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쯧쯧.. 혀를 차기를 몇번, 제대로 받은 것도 없으면서 어쩌면 그리도 충성스러운 사대주의에 물들어 살아야 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스스로가 제 안위를 책임지려 하지 않고 그야말로 손 안대고 코풀려는 듯한 그런 태도들을 보인 것은 정말 맘에 안든다.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하였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안타까움이니 하는 말이다.

책속에서는  조선시대의 군사적인 규모나 형태 혹은 무기류의 실정들, 전쟁에 대처하는 자세 또는 전략 전술에 대한 이야기들을 아주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바탕 조선시대의 전쟁사에 대한 특강이라도 들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너무 장황한 설명앞에서 조금은 따분하기도 하였지만  이런 얘기는 차라리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앞서는 대목들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 묘사를 보면 그야말로 속이 탄다. 탁상공론에만 치우쳐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모습들은 답답하기조차 하다. 오죽했으면 예고되어진 전쟁이라고까지 말하겠는가 말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이순신과 같은 명장이 역사속에 살아 있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만다행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임진왜란의 뒤를 이은 전쟁들이 수도없이 일어났다.  그 전쟁들에 대한 작가의 설명을 듣다보면 아이구, 소리가 저절로 나오기도 한다. 내 나라의 안위보다도 친명배금정책을 써가면서까지 오직 명나라의 안보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던 말은 가히 충격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저멀리 만주벌판까지 우리의 땅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그렇게 할 수도 있는 저력도 충분히 있었다. 그랬음에도 식민지가 되어 우리의 역사에 빨간 줄을 그어야 했다는 것은 정말 통탄할 일이 아닐수가 없다.

만약에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중에 병사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그 전쟁을 지휘했다면 우리의 조선은 어찌 되었을까?
만약에 쓸데없는 친명배금 정책과 같은 사대주의를  앞세우지 않고 시기적절하게 실리를 챙길 수 있는 외교를 할 수 있었다면 우리의 조선은 어찌 되었을까?
만약에 조선의 문을 열기 위하여 끝도 없이 다가왔던 열강들에게 조금씩이라도 문호를 개방했더라면 우리의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을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작금의 현실과 비교해 보게 되었다. 무엇이 다를까?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작가의 말처럼 지도자의 오판과 정책적 오류가 때로는 얼마나 큰 재앙으로 연결되는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게 아픈 역사들이 있어 좀 더 나은 후세들이 되었어야 하는 건 아니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면 그 아픈 역사들이 주는 교훈은 모두 어디로 간것인지...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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