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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잠이 든 아이의 뱃속에서 누군가가 글씨를 쓰고 있었다. help me.. 잠이 든 육체를 사이에 두고 선과 악이 대립을 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하여 육체를 희롱하였던 악마적인 감성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정말 섬뜩하다는 거였다. 다섯째 아이를 읽으면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현실적이었다는 점과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때문이었을까? 책장을 덮으면서도 내 마음속에 솟아올랐던 소름은 사라지지가 않았다. 도리스 레싱이란 작가의 이름을 어디서 보았더라? 아하, 그랬군! 사실 나는 노벨문학상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우리의 작가 고은님께서 몇번을 후보에 올랐었다는 말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도리스 할머니였다는 걸 기억해내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심 오르한 파묵이란 작가의 글처럼 (오르한 파묵이란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되었던 계기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다는 점 때문이었지만) 너무 주관적인 관점이 아니길 은근히 바라기도 했었다.작가의 작품들 중에서 내가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것은 아마도 가족이야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두 남녀가 이루고 가꾸어 나갔을 그 가정의 이야기...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평범하다. 특별히 남들의 앞에 서서 달려나가는 타입도 아니다. 어쩌면 고지식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어울리겠다. 혼전성관계를 용납하지 못하고 허울과 가식이 넘쳐나는 파티를 마음속으로 조롱할만큼... 그런 그들이 서로에게 운명이라고 느낀 순간 그들은 하나가 된다. 그리고 많은 아이를 낳아 행복한, 그야말로 행복한 이상적인 가정을 꿈꾸며 소망한다. 빅토리아풍의 커다란 주택에서 그들은 그들이 원했던 삶을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다섯째 아이를 임신하기 전까지는.. 다섯째 아이..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뭔가 알 수 없는 힘을 발산하고 태어남으로 인하여 그 가족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해줄 수 없었던 다섯째 아이.. 아니 어쩌면 그 자신보다도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오고자 했던 그 아이의 존재에 대해 이미 가족들은 아무런 존재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건지도 모르겠다. 괴물, 그렘린, 호빗... 그아이를 따라다니던 많은 수식어들이 그 아이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처음부터 상실감만을 안고 태어난 아이. 인정받을 수 없었던 아이. 환영받지 못했던 아이.. 어쩌면 그런 것들이 그아이를 그렇게 만들어버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의 입을 통하여 자신에게 전해져 왔던 약의 의미는 너무도 참혹했다. 어린 태아를 진정시키기 위한 진정제란 말조차도 끔찍했다. 그 아이가 태어나 자람으로 인하여 그 커다란 저택을 꾸며주었던 행복의 존재들과 아이들은 하나 둘씩 해리엇을 떠나게 되는 서글픔..
그 다섯째 아이 벤은 진정 장애아였을까? 하지만 내게는 장애아는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화자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아무런 이상은 없었다. 그 아이는 단지 엄마 뱃속에서부터 들려왔던, 그리고 느껴왔던 공격적인 정서에 반응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주변사람들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버지의 묵인하에 시설에 갇히게 되는 벤.. 벤이 사라지던 그 순간부터 다시 일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오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자신들이 꿈꾸어왔던 행복이란 개념을 다시 찾아 올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갖는다. 하지만 벤을 포기할 수 없었던 해리엇은 막무가내로 벤이 있는 곳을 찾아가게 되고 벤이 처해진 그 현실에 경악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시작... 벤이 돌아오자 모든 가족들은 해리엇에게서 등을 돌리지만 해리엇은 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라고 보여지지 않으니 또 왠일일까? 책을 읽고 있는 내게는 해리엇의 행동이 사랑보다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한발 먼저 앞섰다는 느낌뿐이었다. 어째서? 왜 그래야만 하는거지? 물론 엄마로써의 의무와 책임감을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진실로 그 무서운 아이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지 않으면서도 굳이 행복하고 싶어하는 가족 틈새로 그 아이를 밀어넣어야 할 권리는 그녀에게는 없어 보였다. 적어도 내게는.. 무엇때문에 하나를 위하여 다섯을 아니 그보다 많은 것들을 희생시켜야 하는건지 나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으며 그토록 영위하고자 했었던 그 많은 것들을 왜 포기해야만 했는지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사랑은 결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나의 생각만으로는 결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세월은 흐른다. 그 세월속에서 가장 많이 아파했고, 그 현실을 가장 혹독하게 견뎌낸 사람은 누구였을까? 해리엇이었을까? 데이비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벤이었을까? 사실 속깊이 들여다보면 아프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마는 화자의 시선속에서 또 하나의 장애아가 자라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넷째 아이 폴.. 엄마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기에 자신의 자리를 벤에게 빼앗겨 버렸던 아이.. 그 아이는 자라면서 무언가를 끝도없이 요구하게 된다. 엄마는 항상 벤,벤,벤, 벤뿐이잖아요.. 나도 사랑이 필요하다구요, 나도 엄마가 필요하다구요... 벤을 다시 집으로 데려왔을 때 흘렸던 그 가족의 눈물을 나는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는 내내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이 일을 어찌하나?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그 아픔이 내게로 전이되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도 했고 그 고통이 나에게로 전이되어져 해리엇과 벤이 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랴.. 벤이 익혀가는 어설픈 상황대처법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그런 벤을 이해할 수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없었던 해리엇과 데이비드를 바라보면서 삶은 정말 우리를 가혹하게 시험하려 드는구나 싶기도 했다.
어느덧 청년으로 자라버린 다섯째 아이 벤. 그리고 나이보다 부쩍 늙어버린 해리엇과 데이비드. 그렇게 사회속의 일원으로 발을 디디는 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멀지 않은 벤의 미래를 생각하는 해리엇의 예측속에는 벤속에 내재되어져 있을 그 엄청난 파괴본능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이쯤에서 묻고 싶다. 과연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꿈꾸었던 가정이야말로 정말 이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어쩌면 벤속에서 억압되어지고 내재된채로 커나가고 있었을 그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본능은 우리 모두가 안고 살아가는 그런 것들은 아니었을까? 틀안에서 보여지지 않은 그 어떤 틀안에서 나도 모르게 그 틀에 맞춰살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모두가 자신의 속마음을 숨긴채 현실을 바라보았던 그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장을 덮자 알 수 없는 느낌의 공포가 나를 향해 웃고 있는것만 같았다. 잘못했다, 이 책을 밤을 세워 읽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리 긴 이야기도 아니었건만 나는 너무도 긴 이야기를 읽고 난 느낌이 들었다. 겨우 200쪽에 가까운 이야기였을 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가온 느낌은 너무도 무거웠다. 누가 비정상이었을까? 벤이었을까? 아니면 벤을 둘러싸고 있었던 그의 주변이었을까? 누가 비정상적이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단지 현실을, 그 현실이 가혹하든 행복하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허울뿐이었든 진심이 담겨있었든 그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길로 통하는 것은 아닌지...
"우린 애가 없어, 해리엇. 아니, 나는 애가 없어. 당신은 애가 하나 있지" 그가 집에 더 자주 있었더라면 그렇게는 말을 하지 않았을텐데, 하고 그녀는 느꼈다. (169쪽)
마흔다섯의 나이에 머리가 세어버린 해리엇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과연 그가 자주 집에 있었더라면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을까? 지쳐버린 그들의 삶속에서 다시 시작되어질 또다른 삶 하나가 눈을 뜨고 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 누구를 탓해서도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 저마다의 몫이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들조차도 어쩌면 다시 가혹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가족 모두에게 각자의 행복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해리엇, 그녀의 이름은 여자였고 그녀의 이름은 엄마였으며 그녀의 이름은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또하나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든든한 그 무엇으로써의 의미로...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