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행
시노다 세츠코 지음, 김성은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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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탈이었을까? 아니 단순히 일탈이라고하기엔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잠시 떠났을뿐이라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가슴속 우물이 너무 깊기만 하다. 무엇이 그녀를 저토록 무모한 도피행을 감행하게 했을까?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까지 깊은 서글픔에 빠지게 했을까? 아내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살아가야 하는 여자에게는 살아가면서, 세월의 무게를 더해가면서 왜 나자신에 대한 감정이 삭혀져야만 할까?  이 책속에서 듣는 말들이 곧바로 내게 가시가 되어 박혀버린다.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엄마가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나 있어?", "엄마는 맨날 집에서 일만 하니까..."  그랬지, 엄마는 잘 알지도 못하고 맨날 집에서 일만 했지.. 하지만 누구를 위해서였을까? 커가는 아이들이 가슴속에서 하나둘씩 떠나려 발버둥칠때마다 상처를 감싸쥐고 우는 건 엄마였는데... 엄마에게 감히 따지지 마라, 누가 그렇게 살라고 했느냐고.

늙은 개 포포가 그만 옆집아이의 목을 물어 죽게 만들고, 어찌되었든간에 그 죽음을 불러왔던 원인을 외면해버린 채 그것이 느닷없는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모든 이들의 시선이 원망스럽게 다가설 때, 단순히 늙은 개 포포를 좀 더 살리기 위해서 그녀가 야밤에 도주를 결행했던 건 아니었으리라.. 그 늙은 개 포포에게는 9년이라는 기한을 다 채우고도 기약되어진 시간이 단 1,2년에 불과했었다. 모든 원망을 뒤로하고 안락사를 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편의 통장과 인감을 훔쳐 도피하던 그녀를 보면서 나는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이 세상이 그렇게 그녀를 내버려둘 것 같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운이 좋았던 것일까? 트럭기사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끝내는 예정되어지지 않았던 장소까지 도피하게 되고 어느새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되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그렇게라도 둥지를 틀게되는 그녀의 도피행을 보면서 내심 안심이 되었다. 안타깝지만 그녀의 말처럼 그녀와 포포에게는 앞으로의 일은 없을테니까...

남편을 위해 시간을 버렸고, 커가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모두 써버렸던 그녀에게 남은거라곤 '주부'라는 이름의 껍데기뿐이다. "혼자 사는 게 살벌할 때도 있지만 가족에게 둘러싸여 있는데도 고독한 건 더 살벌해요" 사정이 있어 다른 곳에 살 수 없는 인간만이 정착하는 곳, 영혼의 영역.. 하지만 모두가 그곳을 전원주택이라고 부르는 곳에 그녀가 떠밀리듯이 들어왔을 때 이웃집 남자 쓰쓰미는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이 세를 내고 빌렸던 그곳에서 그야말로 아들집에는 있을 자리가 없었던, 그랬기에 자살할 수 밖에 없었던 할머니가 살았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굳이 그녀가 그곳을 떠나지 않고 눌러 살았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그녀에게도 자살한 할머니처럼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어느날 문득 그녀를 찾아왔던 것은 평온...이라는 거였다. 자신만의 영역에서 아무것에도 쫓기지 않고 자신과 맞닥뜨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질수 있다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하여 다시한번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하여..

익숙해져 있던 것들을 모두 버렸다. 남편도 아이들도... 나에겐 가족이 없다고 담담하게 말하던 그녀, 타에코의 가슴속에서 서서히 자라나던 평온함이 뿌리를 내릴 즈음, 급격하게 노화가 시작되는 포포.. 그녀의 마지막 거처가 너무도 안스러웠다. 마지막 거처에 와서 둥지를 틀기 전까지는 그녀와 포포는 별개의 의미였지만 그 둥지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안 그들은 하나가 되어갔다. 늙고 병든 포포처럼 죽어가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래, 세상인심이 그렇지 뭐.. 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일테니...  함께 있다는 그 느낌하나만으로도, 체온과 눈길만으로도 소리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그녀 타에코와 포포.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배신하지만 개는 배신하지 않아요... 쓰러진 그녀를 병원으로 이송해놓고 쓰쓰미가 불러모았던 그녀의 가족들은 과연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수술을 받고 이미 1,2년밖에는 살 수 없는 아내였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그렇게까지 되도록 내버려둔 남편에 대하여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쓰쓰미의 예감처럼 어쩌면 그남자는 그녀를 떠나보낸 후의 자신의 삶을 설계중이었을것이다. 참 씁쓸했다. 그녀를 향한 애잔함이 더 깊어지고 말았다.

묵은지처럼 시어빠진 후에야 꺼내어 보게되는 여자의 시간들, 아니 주부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의 시간들... 그 시간들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누가 그렇게 살라고 했느냐고 되물어올 수도 있겠지만 누가 그렇게 살라하지 않아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주부라는 울타리일테니 어찌하랴... 작금의 현실을 바라볼 때 많이 달라져가고 있다고 느껴지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 울타리가 견고하게 보이는 것을...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남편과 주부는 뗄래야 뗄수 없다. 아이와 주부 역시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설혹 꿈을  키우기 위해서, 아니면 그저 주부로써 지내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자신만의 삶을 살수 있는 맞벌이를 한다고해도 그 주부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고무줄처럼 늘여진 그 울타리안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어지는 것일테니 말이다. 묵은지처럼 시어빠진 시간이라해도 맛있게 나눠 먹을 수 있는 그런 존재를 주부는 갖고 싶었을게다. 그녀, 타에코의 가슴속 깊디 깊은 우물에서 끌어올려진 그 시간들이 너무도 서글프다.

이 작품속에서 만나는 타에코의 도피행은 단순히 그녀 하나만의 문제는 아닌듯 보여진다. 주부라면 정말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다. 아니 어쩌면 타에코처럼 살아가고 있는 주부들도 많을 것이고, 타에코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주부들도 많을 것 같다. 소통의 부재가 오직 한곳뿐일까? 함께 있으되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함께 있으되 서로의 마음을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 소통의 부재... 문득 일전에 읽었던 책의 한귀절이 떠오른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사랑이라던...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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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1
츠츠미 미카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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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국... 세계를 쥐고 흔든다는 나라.. 어찌보면 모든 것의 시작일것처럼도 느껴지는 나라.. 웬만한 개도국이라면 그들의 길을 따라 걸어가지 않을까 싶은 그런... 그런 나라에 한번쯤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요즘의 중국을 떠올려보게 된다. 메이드 인 차이나의 굴욕에 대하여, 그리고 그와 똑같은 상황을 겪어냈을 메이드 인 코리아에 대하여.. 그랬던 우리도 지금은 값비싼 임금앞에 무너져 많은 것들을 빼앗기고 있다는 말을 심심찮게 보고 듣게 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듯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이 대한민국으로 찾아오는 타국인들의 삶을 매스컴을 통해 바라볼 때마다 지구촌이라는 단어앞에 무안해지곤 했었던 기억도 있다. 무엇이 우리들에게 이처럼 가혹한 현실을 만들라하는가!

책을 읽으면서도 가슴 한쪽에서 스멀거리는 분노를 어쩌지 못한 채 애를 태워야 했다. 힘없는 나라 약소국의 서러움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저들의 이해득실앞에 무너져가는 우리의 아이들이 떠올랐던 까닭이다. 비만아 대책... 결국 저들의 이윤만을 따지는 시장원리에 멍들던 기업들이 희생양을 찾아 저소득층이나 개도국으로 방향전환을 했다는 것은 그리 놀랄일도 아니겠지만 그런 것들을 너무도 무책임하게 저항감없이 받아들이는 입장에 대해서는 개탄해마지 않을수가 없다는 말이다.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이란 나라, 아니 이윤을 추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것들이 가혹하리만치 냉정하기만 하다. 평균 개인소득이 하위에 속하는 저소득층의 자녀들에게 실시되는 무료.할인 급식제도의 잘못된 점들에 대하여 정부가 책임지기를 꺼려한 채 외면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건 정말 슬픈일이 아닐수가 없다.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주제를 나름대로 대략 기억해보자면 서글프게도 우리의 현실과 맞닥뜨려지는 점들이 참으로 많다.  푸드편을 보자면 이렇다. 빈곤이 만들어낸 비만이라거나  왜 빈곤층의 아이들에게 비만아들이 더 많은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책을 읽다보면 남의 이야기만도 아닌것 같다.  패스트푸드제품에 찌들어가는 지금의 우리 아이들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아프리만치 따끔한 질책처럼도 느껴지니 말이다.  그토록 잘산다는 선진국의 대표급인 미국이라는 나라에서조차 기아에 허덕이는 국민들이 점점 늘어간다는 것은 모순일까? 아니 단지 우리가 모르고 있는 저들의 모습일 뿐일게다.

얼마전 미국을 강타했던 뉴올리언스의 재난을 기억한다. 그 이재민들이 지금은 고향땅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버려졌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세계에서 제일 비싼 의료비로 인하여 중류층이 몰락해가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병원이 하나의 주식회사처럼 운영되어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정말 이해하기가 힘들었지만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앞에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수가 없었다. 균형적인 식사와 운동, 수면으로 충분히 지켜낼 수 있는 건강마져도 의료비가 너무 비싼 나머지 건강보조제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씁쓸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국가가 도와주지 않으니 아프면 병원가서 치료할 엄두조차내지 못한다는 그들.. 그 건강보조식품의 폐해가 날로 늘어만가고 있다는 데 우리는 어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무하다싶을 정도로 건강보조식품을 대하는 우리의 강박관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가시스템이나 사회적인 구조가 그들과 똑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지는 결과가 비슷한 걸 보면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저들을 닮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까닭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바로 교육에 대한 문제였다. 전쟁마져도 민영화되어가는 저들의 속셈을 보면서 왠지 소름이 돋기도 했다. 학자금 대출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저들의 젊은이들이 이제 더이상은 오갈데가 없어 부당 징병 정책의 희생양이 되어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여 졸업장을 받았다한들 제대로 된 일자리하나 구하기가 너무도 힘겹다는 저들의 젊은이들.. 하지만 그것은 저들만의 문제는 아닐것이다.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조차도 어쩌면 그 절차를 밟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탈출하고자 혹은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군인이 되어야만 했던 젊은이들이 결국은 병자가 되고 낙오자가 되고 노숙자가 되어 처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그 밑바닥에는 저들을 보살피고 이끌어주어야 할 국가의 어긋난 시스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말앞에서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우리라고해서 저렇게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싶었던 때문이다.  민영화라는 틀에  맞추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우리의 국가적 시스템도 모른척 할 수 없었던 때문이다. 카드빚에 허덕이는 우리의 젊은이들만을 탓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민영화된 전쟁’.. 세계 여러나라의 근로 빈곤층들이 지탱해나가고 있다는 전쟁의 현실.. 저 밑바닥에 숨어 자신의 실체는 드러내지 않은 채 하나의 기업이라는 이름만을 내세워 힘없고 돈없는 세계의 빈곤층들을 겨냥하여 끝도없이 유혹의 손길을 내미는 저들의 악마적인 모습.. 그 악마가 내미는 손을 잡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서러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사람의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긴다는 저들의 웃음뒤에 숨어 버린 나라의 이해타산적인 비굴함을 어이할까.. 개인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정말 괜찮은 일자리가 있는데 말이죠”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파견이라는 순수한 비즈니스입니다” 일하고 싶지만 일자리가 없고 겨우겨우 풀칠해가며 살아가고 있는 전 세계의 빈곤층을 향한 저들의 비열함앞에서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던 말이 떠올라 내심 한숨을 내쉬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하나의 거대한 눈길.. 1984라는 소설속의 빅브라더.. 참으로 무서운 현실앞에서 무엇을 탓하고 무엇을 원망하랴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또 왜일까?  어느 누구도 이런 세상을 만들라고 등떠밀지 않았을거라는 사실이다. 테러보다 무서운 민영화라는 말을 들으면서 앞으로 더 힘겨운 세상을 살아내야 할 우리의 아이들을 어이할까 싶었다.

저자 후기에서 말하고 있듯이 중요한 것은 그 적을 결코 잘못 알아서는 안 되는 것 이라던 말이 가슴을 찌른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번지르르함보다는 그 속에 내재되어져 있는 성질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살 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국가적 시스템에 손발이 묶인 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미디어의 역할에 대해서도 저자는 아프게 꼬집고 있다.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인간이 '생명'이 아니라 '상품'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결코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책장을 덮기전 저자가 말하고 있는 뼈아픈 결론을 여기에 옮겨 적으며 다시한번 기억해 두고자 한다. 그 가슴아픔에 대하여... /아이비생각

무지나 무관심은 '바꾸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공포를 낳고, 언젠가는 무력감이 되어 우리의 힘을 뺏는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문다면 우리는 패할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이 스스로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가 아이들에게 있어서 절망의 시작이 된다. 현상이 괴로울수록 우리는 시험당한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차세대에게 건네줄 수 있는 것은 한없이 귀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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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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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언제나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러고도 또 남의 걸 빼앗아오고 싶어하지. 그러니 전쟁이 일어나고 ... 그리고나면 조금이라도 자기 몫을 늘리기 위한 기나긴 협상이 시작되지. 자기가 먼저 깃발을 꽂았기 때문에 그럴 권리가 있다고 하지.. 하지만 그들도 자연의 이치를 바꿀 수는 없어... 할아버지가 작은나무에게 들려주었던 저 이야기속에는 지금의 세상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런데 나는 가끔씩 의문점이 생기곤 한다. 종종 다큐멘터리라는 공간속에서 보여지는 사람들의 모습때문이다. 그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함께 숨쉬고, 자연속에서 자연이 주는 것만을 받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사회도 있고, 그들 나름대로의 규칙도 있고,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도 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그들에게도 모두 있다는 말이다. 굳이 없는 것을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감히 문명이라고 말하는 그런 것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토록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이 책은 그다지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 선택했던 책이었다. 그저 그런 자기 계발서류의 이야기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랬던 내가 작은나무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책속의 소년 작은나무에게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작은나무의 발소리와 눈길을 따라 자연속에서 생활하다보면 우리가 정말 얼마나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한번 돌이켜 보게 된다.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관념으로 본다면 사생아라는 테두리에 갇혀 너무도 힘겨운 시간들을 버텨내야 했을 작은나무가 체로키족인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 숲으로 간 건 너무나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산에 올라 어두워지는 밤하늘에 하나둘씩 별들을 그리며 잠이 들 준비를 하는 산과 아침을 깨우며 벌겋게 솟아오르는 태양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작은나무는 그야말로 축복받은 아이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두개의 마음을 갖고 있단다. 하나의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마음이어서 몸을 위해 잠자리나 먹을 것 따위를 마련할 때 써야하니 자기 몸이 살아가려면 누구나 이 마음을 가져야 하지..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것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단다. 영혼의 마음이지. 만약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다른 사람을 해칠 생각을 한다면 그 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어서 작아지게 되지. 영혼의 마음을 잃게 되면 그런 사람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 되고 말아..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쓰면서 영혼의 마음을 더 크고 강하게 만들라던 할머니의 교육.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비로소 이해라는 것을 할 수 있으니 이해와 사랑은 당연히 같은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던 할머니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작은나무가 아닌 내 마음속을 아프도록 깊게 각인이 되었다. 영혼의 마음이 밤톨만큼 작아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도 귀한 가르침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었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 곁을 스쳐지나는 계절들을 온전히 느끼면서 살아가는 순간이 얼만큼이나 될까? 그 한순간마다 함께 호흡하고 함께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또 얼만큼이나 갖고 살아가는 것일까?  단순히 계절만이 아니라 우리곁에서 함께 숨쉬고 살아가는 이웃들에 대해 얼만큼이나 제대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단순히 살기에 바빠서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미안하고 죄스럽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통해 작은나무에게로 전해지는 자연의 속삭임을 한번쯤은 온전하게 나도 느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났다.

수박을 두드려볼 때 알아두어야 할 점...'팅' 소리가 나면 아직 하나도 익지 않은 것이고, '탱' 소리가 나면 지금 익고 있는 중이며, '텅' 소리가 나는 수박이라야 완전히 익은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진리가 그러하듯이 이렇게까지 해도 수박을 잘랐을 때 원하던 결과를 얻을 가능성은 항상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작은나무는 과연 '팅','탱','텅' 소리에 얽힌 삶의 진리를 터득했을까? 그렇게까지 하고도 원하는만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며 살아왔을까? 세상의 모든 일중에서 내가 원하는만큼의 결과를 안아들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설령 원하는만큼의 결과였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 백프로 만족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작은나무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는 욕심버리기였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만큼만 갖기.. 지금 필요한 것만 갖기..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고 아주 작은것들조차도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이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을게다. 하지만 자연속에서 숨을 쉬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가는 작은나무의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렇게 아름답게 커가고 있던 작은나무에게도 시련이 찾아온다. 사회라는 커다란 악마가 의무라는 올무를 작은나무의 목에 걸었던 거다.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지도 않고 아이를 혹사시키고 있다고  고아원에 수용시켜버린 것이다. 문득 할아버지와 함께 숲속에서 생활하던 하이디라는 어린 소녀를 떠올린다. 그 소녀가 숲을 떠나 문명의 그늘에 가려졌을 때처럼 그랬다면 괜찮았을까?  느닷없이 자신을 가둔 그 고아원에서조차 작은나무는 오래된 떡갈나무와 대화를 나누며 바람을 통해 자신이 있던 숲의 소식을 전해 듣지만 작은나무에게 가해지던 그 참혹한 매질의 흔적때문에 나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만약에 작은나무가 다시 숲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면 내 가슴속은 아마도 눈물바다가 되었을 것만 같다. 작은나무야 미안해!

행복했던 불행했던 계절은 바뀌고 세월은 간다. 죽음의 계절속에서 사랑했던 사람들을 하나씩 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게 되는 작은나무가 나는 너무도 안스러웠다. 아직은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데... 아직은 곁에 있어주며 안아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한데... 하지만 작은나무는 많이 울지 않았다. 네가 나무들을 느끼듯이, 귀기울여 듣고 있으면 우리를 느낄 수 있을 거다. 널 기다리고 있으마.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이번보다 더 나을 거야. 모든 일이 잘될 거다... 작은나무의 곁을 떠나는 사람들이 모두 그랬다.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이번보다 더 나을거라고.. 모든 일이 다 잘될거라고..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남은 겨울을 그곳에서 보낸 작은나무는 봄이 오자 길을 떠났다. 아득히 먼 서쪽 산들 너머에 있다는 인디언 연방을 찾아서. 가면서 함께 동행했던 두마리의 개 블루보이와 리틀레드를 묻어주게 되지만 작은나무의 가슴속에는 그가 떠나왔던 숲의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줄기의 희망조차도 버려지지 않은 채...

가을은 죽어가는 것들을 위해 정리할 기회를 주는, 자연이 부여한 축복의 시간이다. 이렇게 정리해나갈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했어야 했던 온갖 일들과.... 하지 않고 내버려둔 온갖 일들이 떠오른다. 가을은 회상의 시간이며.... 또한 후회의 계절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하지 못한 일들을 했기를 바라고... 하지 못한 말들을 말했기를 바란다.... 나의 조그만 버릇중에 하나가 책을 잡으면 조급증이 인다는 것이다. 빨리 읽고 싶다는 조급함에 어떤 때는 숨도 쉬지않고 읽어내려갈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떻게하면 좀 더 늦게 읽을 수 있을까 조바심이 났다. 한장 한장 넘겨지는 책장마다 왜 그리도 아쉬움이 느껴지던지... 그 아름다운 말들을 한번 더 읽고 또 읽고... 그 아름다운 문장속에 숨겨져 있는 풍경과 의미들을 조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심은 또 왜 그렇게 컸었는지... 숲을 떠나 어쩔 수 없이 이 문명의 사회속으로 되돌아와야 할 작은나무에게 전해 줄 따스함 한자락을 우리가 품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작은나무가 들려주었던 그 따스함에 대해 우리가 먼훗날까지 잊지않고 간직할 수 있다면 말 그대로 살 맛나는 세상이 다시 펼쳐지지 않을까?  이 가을에 작은나무를 만난 것이 나에겐 행복이었다. 작은나무와 이야기할 수 있었던 시간들 또한 나에겐 행복이었다.  그 따스함을 내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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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애무
에릭 포토리노 지음, 이상해 옮김 / 아르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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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이혼을 하고 아이들의 양육권은 엄마에게로 넘어간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들을 일주일에 한번씩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자에게는 아이들을 양육할만큼의 경제적인 능력이 없다. 그 남자에게 있는 것은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뿐. 하지만 그 남자는 아이들과의 만남을 포기할 수 없었던 탓에 여자로 분장을 하고 자기집의 가정부로 들어가게 된다. 아주 완벽한 분장 덕에 잘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아내의 새로운 사랑이 나타나자 하나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들켜버린 아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아이들은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용납을 해주고 지속적인 만남이 유지된다. 그리고 다시 찾은 가정. 아내는 알게 된 것일까? 아이들에게 아빠의 사랑이 얼만큼의 크기로 다가오는지를?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미세스 다웃파이어>란 영화를 떠올린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하여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아빠는 엄마 대신일 수 있을까? 그리고 엄마는 아빠 대신일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그 능청스러운 연기를 보자면 가히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아빠는 엄마가 될 수 없다고. 그리고 또한 엄마는 아빠가 될 수 없다고.

책 속의 주인공 펠릭스는 보험회사 지점장이다. 어느날 자신에게 보험을 들어주었던 한 남자에게서 전화를 받게 되고, 달려간 곳에서 그를 맞이해주는 것은  불이 휩쓸고 가버린 채 타다남은 흔적뿐. 거기까지라면 괜찮았을 게다. 하지만 그 불타버린 집의 주인공인 엄마와 어린아들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펠릭스에게는 몇달전에 잃어버렸던 아들 콜랭의 기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불운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콜랭을 낳은 마리는 아이가 젖을 떼자 제 갈길로 가버렸고 펠릭스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며 아이를 키우게 된다. 아이가 주는 기쁨과 설레임속에서 펠릭스는 행복을 맛보게 되는가 싶었는데 조금씩 커가는 아이가 엄마를 찾게 되면서부터 펠릭스에게는 힘겨운 일상으로 다가온다. 어쩔 수 없이  여자처럼 가슴을 만들어 옷속에 넣기도 하고 가발을 쓰기도 하면서 아이를 위해 엄마로 변장하게 되는 펠릭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속아주는 어린 콜랭. 그것은 정말 단순한 변장놀이에 불과했을까? 아주 잠깐이었다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와의 접촉을 외부에서까지 연장하고 싶어하는 어린 콜랭의 요구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끝내는 너무 많은 사랑이 병이 될 수도 있다는 유아원 원장의 충고까지 듣게 되는 펠릭스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이제 그만 멈췄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었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적어도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느닷없이 엄마 역할을 하겠다며 돌아온 마리에게 콜랭을 빼앗기다시피 하는 펠릭스는 아빠도 아니고 엄마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심한 상처를 입게 되고 만다. 이제 다시 아빠로 돌아가야만 하는 펠릭스에게 가장 힘겨운 것은 마리와 콜랭을 묶어주는 그 알 수 없는 감정의 고리가 너무나도 낯설었다는 점이다. 어린 아들을 위하여 여장까지 해가며 그동안 함께 지내왔던 아빠보다는 엄마에게 더 많은 감정을 표현하는 어린 콜랭이 어쩌면 너무나도 야속하고 서운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만고의 진리인것을.

펠릭스의 일상을 따라가면서도 나는 왠지 무언가 빠져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러다가 책장을 넘기면서 내가 알게 되는 진실앞에서 잠깐 숨을 골라야 했다. 역시 그랬구나... 아빠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어린 펠릭스는 가엾게도 엄마의 사랑조차 받지 못한 채 자랐다. 도대체 아빠가 무엇인지 그 느낌조차 없었던 펠릭스에게 다가왔던 콜랭의 존재는 그야말로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막연하게 꿈꾸어 왔던 아빠라는 의미를 하나씩 콜랭에게 전해주고자 했었던 그의 안타까움을 보게 되었던 거다. 결핍된 가정에서 자라나 무언가 채우지 못하는 공허를 가슴속에 안고 살아야 했을 펠릭스가 너무도 안스러웠다. 유아원에서 콜랭을 데리고 나오던 마리가 전화통화를 하는 중에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는 상황이 너무도 느닷없다. 아니 충분히 그럴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들이 나에게는 느닷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속의 설정 또한 그랬다. 도대체  교통사고가 일어날만한 상황이 전혀 아닌데 단 한명의 목격자도 없는 뺑소니라니....

콜랭을 죽인 뺑소니 교통사고가 재수사에 들어가고 그 수사를 맡은 형사와 두어번 마주친 펠릭스의 반응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회상형식과 현재가 오버랩되듯이 이어진다. 지나간 시간속에서 현재를 끌어내기도 하고 현재속에서 불쑥 불쑥 불거져 나오는 과거와 마주치기도 한다.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아빠가 엄마를 대신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채울 수 없었던 그 어떤 것들이 결핍되어진 펠릭스의 행동이 콜랭에게는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었을까? 나는 차라리 그렇게 묻고 싶었다. 사랑이었다기 보다는 왠지 집착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으니 말이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변화시켜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에 빠져들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한채 결코 놓칠 수 없다고, 놓쳐서는 안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들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졌던 것에 대한 상실감은 너무나도 클 수 밖에 없다. 단 몇줄로 보여주었던 그 놀라운 반전앞에서 알 수 없는 허무감이 다가왔다.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앞서는 이 착잡함을 어쩌지 못하겠다. 집착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으므로.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정말 아빠는 엄마대신일 수 없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럴수는 없을 것 같다. 엄마는 엄마로써 그리고 아빠는 아빠로써 그 이름만큼의 존재의미가 다를테니 말이다.  붉은 불꽃처럼 한순간을 타올랐던 펠릭스의 사랑앞에서 왠지 서글픔이 밀려온다. 마지막으로 엄마 차림을 한 채 경찰서로 향하는 펠릭스의 모습을 그려본다. 마리와 콜랭을 향한 질투의 늪에 빠진 한 남자의 모습을. 불꽃처럼 타올랐던 사랑의 다른 이름 질투에 대하여 나는 생각한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 多情도 병이라는 말과 함께...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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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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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정겨움을 느끼게 해주는 풍경이 얼마나 있을까? 사느라고 바빠 하늘 한번 제대로 쳐다볼 여유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생겨나는 배경들이 삭막하게 솟아오른 콘크리트 빌딩이 아니라 나무와 나무들이 서로 뽐내듯이 얽혀든 그림으로 하늘을 받쳐줄 수 있다면, 그런 풍경들이 늘 우리곁에 머물러 줄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시원한 느낌, 그 정겨운 느낌을 이 책이 담고 있음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제목에서부터 풍겨나오고 있음이다. 똥친 막대기... 지금 세상에야 치울 수 있는 똥이라는 게 개똥이나 비둘기똥 따위의 것들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정말 나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그 똥이라는 게 자주 마주치는 그런 것들의 하나였다.  동네어귀를 들어서면 어김없이 맞아주는 커다란 나무 한그루. 그리고 그 아래에는 또한 어김없이 동네어르신들께서 모여 장기 한 판 두시는 정자가 있었거나 마루가 있었다.

옛날에 아니 그리 옛날도 아니겠지만 나 어렸을 적에는 고무신이 참 많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동네 도랑으로 나가 고무신을 거꾸로 뒤집어 배를 만들어 오빠와 동생이랑 재미있는 뱃놀이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그만 떠내려가는 고무신배를 잡지 못한 채 덜렁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엄마한테 혼나야 한다는 것보다도 잃어버린 신발이 아까워 눈물을 찔찔 흘렸던 기억도 있다. 들로 산으로 온통 천지가 다 놀이터였고 놀잇감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이 책속에 등장하는 소녀 재희를 보면서 느닷없는 추억에 사로잡혀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단발머리를 나폴거리며 논둑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참 귀엽기도 하고....

이 책의 주인공인 '나'는 처음부터 똥친 막대기가 아니었다.  백양나무의 가지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많은 햇살과 바람과 엄마나무가 주는 양분을 받아먹고 살아가던 파릇파릇한 나뭇가지였었다. 그런데 어느날 느닷없이 꺾여지고 말았으니... 기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기차소리에 놀라 하릴없이 제 일터를 떠나버린 소의 궁둥짝을 때려주기 위해 그 아름답던 사월 봄날의 어느날 농부의 손에 들려지는 된 나는 의인화되어버린 나뭇가지다. 작가는 이 나뭇가지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쁜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채 아니 잊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한없이 불러 모으고 있다. 제 자신이 왜 꺾였는지를 잘 알면서도 그 일만큼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나뭇가지 '나'의 마음을 통해서 나는 영락없이 나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버려지지 않은 채 농부의 손에 들려 집으로 가게 되는 나뭇가지..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나'의 염원이 담겨져 있다. 일하는 아버지를 위하여 점심을 가져왔던 그 소녀, 재희를 다시 보고 싶다는.. 그녀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어하는 '나'의 염원이 함께 있었다. 그렇게해서 다시 소녀를 보게 되지만 그녀의 종아리를 때려야 하는 회초리가 되었다가 그 집의 뒷간앞에 세워져 추운 밤을 떨며 지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제발 똥만큼은 살에 닿지 않게 해달라고 다시 기도하지만 무심하게도 그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똥통속에 첨벙!...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하는 나뭇가지의 그 한숨소리가 내게도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네 삶속에는 늘 힘겨움과 고통만이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똥친 막대기로 그냥 버려지지 않는 나뭇가지 '나'의 처지를 보니. 재희의 손에 들려 재희를 놀려먹는 개구쟁이 소년들에게로 부터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있었던 기쁨과 함께 다시 물 가까이에 버려져 말라가던 몸에 수분을 채울 수 있었던 기쁨의 순간도 잠시, 모내기가 끝나버린 후에는 아주 버려진 채 아무도 '나'의 존재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어느 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나'를 붕 떠오르게 했던 장마가 시작되었다. 희망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운좋게도 떠내려가던 돼지의 등짝에 달라붙게 되고 그 마을에서 한참 멀어진 벌판에 덩그마니 혼자 떨어져버린 '나'의 운명. 그 똥친 막대기는 그냥 말라 죽었을까?

작가가 보여주는 똥친 막대기의 여정이 딱 우리의 삶이다. 힘겨움속에서도 희망은 함께 한다는 메세지를 단 한번도 놓치지 않도록 손을 내밀어 주고 있다. 비록 냄새나는 똥통속에 푹 빠졌던 '나'였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허허로운 벌판에 하나의 근본으로 우뚝 서는 또하나의 백양나무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음을 잊지 말라고 한다. 자신의 몸속에서 근질거리며 희망이 뻗어나갈 때, 그렇게 땅속으로 뿌리를 내려 뻗으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나'의 존재가 바로 당신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그 희열을 당신도 느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책속의 그림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린다.  童話... 나는 그 말이 참 좋다. 거기에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말해준다면 더욱 더 좋다. 내가 잃어버린채 살아가고 있는 것들이, 아니 내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그 안에 숨쉬고 있는 까닭이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 한편을 가슴속에 품어본다. 그 이야기.. 가끔 힘겨울 때마다 풀어본다면 참 좋을 것 같아서. 짧은 이야기였지만 참 좋은 이야기였다. 아들녀석 책상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그녀석이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방식들이 그 안에 있다고는 해도 나뭇가지인 '나'가 들려주는 말을 한번 들어보라고...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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