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애무
에릭 포토리노 지음, 이상해 옮김 / 아르테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부부가 이혼을 하고 아이들의 양육권은 엄마에게로 넘어간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들을 일주일에 한번씩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자에게는 아이들을 양육할만큼의 경제적인 능력이 없다. 그 남자에게 있는 것은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뿐. 하지만 그 남자는 아이들과의 만남을 포기할 수 없었던 탓에 여자로 분장을 하고 자기집의 가정부로 들어가게 된다. 아주 완벽한 분장 덕에 잘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아내의 새로운 사랑이 나타나자 하나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들켜버린 아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아이들은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용납을 해주고 지속적인 만남이 유지된다. 그리고 다시 찾은 가정. 아내는 알게 된 것일까? 아이들에게 아빠의 사랑이 얼만큼의 크기로 다가오는지를?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미세스 다웃파이어>란 영화를 떠올린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하여 자신을 변화시켜가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아빠는 엄마 대신일 수 있을까? 그리고 엄마는 아빠 대신일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그 능청스러운 연기를 보자면 가히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아빠는 엄마가 될 수 없다고. 그리고 또한 엄마는 아빠가 될 수 없다고.

책 속의 주인공 펠릭스는 보험회사 지점장이다. 어느날 자신에게 보험을 들어주었던 한 남자에게서 전화를 받게 되고, 달려간 곳에서 그를 맞이해주는 것은  불이 휩쓸고 가버린 채 타다남은 흔적뿐. 거기까지라면 괜찮았을 게다. 하지만 그 불타버린 집의 주인공인 엄마와 어린아들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펠릭스에게는 몇달전에 잃어버렸던 아들 콜랭의 기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불운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콜랭을 낳은 마리는 아이가 젖을 떼자 제 갈길로 가버렸고 펠릭스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며 아이를 키우게 된다. 아이가 주는 기쁨과 설레임속에서 펠릭스는 행복을 맛보게 되는가 싶었는데 조금씩 커가는 아이가 엄마를 찾게 되면서부터 펠릭스에게는 힘겨운 일상으로 다가온다. 어쩔 수 없이  여자처럼 가슴을 만들어 옷속에 넣기도 하고 가발을 쓰기도 하면서 아이를 위해 엄마로 변장하게 되는 펠릭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속아주는 어린 콜랭. 그것은 정말 단순한 변장놀이에 불과했을까? 아주 잠깐이었다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와의 접촉을 외부에서까지 연장하고 싶어하는 어린 콜랭의 요구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끝내는 너무 많은 사랑이 병이 될 수도 있다는 유아원 원장의 충고까지 듣게 되는 펠릭스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이제 그만 멈췄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었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적어도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느닷없이 엄마 역할을 하겠다며 돌아온 마리에게 콜랭을 빼앗기다시피 하는 펠릭스는 아빠도 아니고 엄마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심한 상처를 입게 되고 만다. 이제 다시 아빠로 돌아가야만 하는 펠릭스에게 가장 힘겨운 것은 마리와 콜랭을 묶어주는 그 알 수 없는 감정의 고리가 너무나도 낯설었다는 점이다. 어린 아들을 위하여 여장까지 해가며 그동안 함께 지내왔던 아빠보다는 엄마에게 더 많은 감정을 표현하는 어린 콜랭이 어쩌면 너무나도 야속하고 서운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만고의 진리인것을.

펠릭스의 일상을 따라가면서도 나는 왠지 무언가 빠져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러다가 책장을 넘기면서 내가 알게 되는 진실앞에서 잠깐 숨을 골라야 했다. 역시 그랬구나... 아빠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아야 했던 어린 펠릭스는 가엾게도 엄마의 사랑조차 받지 못한 채 자랐다. 도대체 아빠가 무엇인지 그 느낌조차 없었던 펠릭스에게 다가왔던 콜랭의 존재는 그야말로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막연하게 꿈꾸어 왔던 아빠라는 의미를 하나씩 콜랭에게 전해주고자 했었던 그의 안타까움을 보게 되었던 거다. 결핍된 가정에서 자라나 무언가 채우지 못하는 공허를 가슴속에 안고 살아야 했을 펠릭스가 너무도 안스러웠다. 유아원에서 콜랭을 데리고 나오던 마리가 전화통화를 하는 중에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는 상황이 너무도 느닷없다. 아니 충분히 그럴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상황들이 나에게는 느닷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속의 설정 또한 그랬다. 도대체  교통사고가 일어날만한 상황이 전혀 아닌데 단 한명의 목격자도 없는 뺑소니라니....

콜랭을 죽인 뺑소니 교통사고가 재수사에 들어가고 그 수사를 맡은 형사와 두어번 마주친 펠릭스의 반응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야기는 회상형식과 현재가 오버랩되듯이 이어진다. 지나간 시간속에서 현재를 끌어내기도 하고 현재속에서 불쑥 불쑥 불거져 나오는 과거와 마주치기도 한다. 정말 묻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아빠가 엄마를 대신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채울 수 없었던 그 어떤 것들이 결핍되어진 펠릭스의 행동이 콜랭에게는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었을까? 나는 차라리 그렇게 묻고 싶었다. 사랑이었다기 보다는 왠지 집착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으니 말이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변화시켜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에 빠져들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한채 결코 놓칠 수 없다고, 놓쳐서는 안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들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졌던 것에 대한 상실감은 너무나도 클 수 밖에 없다. 단 몇줄로 보여주었던 그 놀라운 반전앞에서 알 수 없는 허무감이 다가왔다.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앞서는 이 착잡함을 어쩌지 못하겠다. 집착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으므로.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정말 아빠는 엄마대신일 수 없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럴수는 없을 것 같다. 엄마는 엄마로써 그리고 아빠는 아빠로써 그 이름만큼의 존재의미가 다를테니 말이다.  붉은 불꽃처럼 한순간을 타올랐던 펠릭스의 사랑앞에서 왠지 서글픔이 밀려온다. 마지막으로 엄마 차림을 한 채 경찰서로 향하는 펠릭스의 모습을 그려본다. 마리와 콜랭을 향한 질투의 늪에 빠진 한 남자의 모습을. 불꽃처럼 타올랐던 사랑의 다른 이름 질투에 대하여 나는 생각한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 多情도 병이라는 말과 함께...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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