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번 교향곡
조셉 젤리네크 지음, 김현철 옮김 / 세계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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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슈베르트, 구스타프 말러, 거기에 드보르작까지... 모두 교향곡 9번을 작곡한 후 사망했다?  그것이 바로 9번 교향곡의 저주란다. 일단은 소설의 모티브가 되어 준 '9번 교향곡의 저주'라는 의미가 내게는 상당히 강하게 다가왔다. 9번 교향곡을 작곡한 슈베르트가 젊은 나이인 서른한 살에 사망했던  까닭에 교향곡 제9번을 작곡하면 음악가들에게 저주가 내린다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음악에, 특히 클래식이라는 분야에 문외한인 내가 읽기에도 전혀 거부감이 없었을 정도로 이 책은 아주 세심하게 쓰여져 있는 것 같다.  음악평론가이자 대학교수인 젊은이 다이엘 파니아구아.. 다니엘은 박사지만 출판을 위해 베토벤에 관한 연구리포터를 준비중이기도 하다. 젊다는 것은 무엇엔가 도전할 수 있다는 용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다니엘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음악의 세계에 빠져들기 위해서는 어느정도는 용기가 필요할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펼쳐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음악의 문외한이니까 말이다. 가끔 듣는 클래식이라는 것도 사실은 졸릴 때가 더 많으니 어쩌랴...

알레그로, 아리아, 소나타, 칸타타 등등등..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음악적인 용어가 많아서 책을 읽는 내내  겁을 먹었지만 아주 세심하게 배려라도 해주듯 잘 설명되어진 문장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음악적인 지식이 없는 나에게조차 하나의 호기심을 채워주기에는 충분하다는 듯이.. 아직 세상에 발표되어지지 않은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이 로널드 토마스라는 음악가에 의해 발표되고, 그것을  듣는 순간 로널드 토마스의 작품이  아니라 베토벤이 직접 작곡한 작품이라고 확신하는 다니엘. 그 후 그 음악을 들려주었던 작곡가 토마스는 머리가 잘려진 시체로 발견된다. 머리를 찾아 헤매던 형사들이 다니엘을 찾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 하다. 찾아낸 머리에 문신으로 새겨져 있던 악보. 그 악보를 기준삼아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야 하는 수사진과 다니엘의 일정, 그리고 10번 교향곡을 둘러싼 음모가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하는 걸 보면 스토리가 상당히 촘촘하게 엮여져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를 따라다니던 느낌 하나를 버리지 못했다. 바로 댄 브라운의 작품 <다빈치코드>이다. <다빈치코드>를 읽을 때의 느낌과 이 책을 읽을 때의 느낌이 거의 대동소이하다면 이상한 일일까?  스토리의 짜임새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팩션이라는 같은 맥락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들지만 단지 '그림'에서 '음악'으로 주제만 바뀐듯한 느낌이 들었다. 프리메이슨과 같은 종교집단을 내세운 것도 그렇고 암호를 만들어 그 암호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도 거의 비슷하게 느껴진다. 물론 모든 것이 다 똑같을 수는 없다. 다만 전체적인 흐름이 자꾸만 나를 <다빈치코드>쪽으로 몰고 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재미있다. 적지않은 쪽수임에도 불구하고 한번 잡게 되니 책을 손에서 놓기가 쉽지 않았다. 주인공이 엮어가는 다음 일정이 궁금해서.

현재의 사건을 풀어나가면서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찾아 헤매는 설정은 언제 보아도 참 재미있게 다가온다. 사실과 상상이 만들어내는 그 공간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 작가는 어떻게 그려주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이 책을 통해서 베토벤이라는 음악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베토벤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바로 떠오르는 게 ' 빠바바밤...' 하는 웅장한 소리로 시작되어지는  제5교향곡 '운명'밖에는 없지만 말이다.  베토벤에 얽힌 일화들, 베토벤이 사랑했던 여인들, 그리고 베토벤의 어린시절과 일상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걸 보면서 문득 지은이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작가 조셉 젤리네크 역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이고 베토벤 전문가라는 말에  책속의 주인공 다니엘과 겹쳐지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무던히도 사랑하여 빠질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참 행복한 일일거라는 엉뚱한 생각도 하면서. 그랬기에 이런 작품도 나올 수 있는거겠지 한다.

토마스의 죽음을 따라가면서 과연 살인자는 누구일까 나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프리메이슨이라는 음성적인 집단을 내세운 작가의 교묘한 함정에 하마터면 빠져버릴 뻔 했다. 실제적으로 베토벤이 일루미나티라는 단체에 가입을 했었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혹시나 했었다.  스릴러의 경우 범인은 늘 가까이에 있다는 법칙이 적용되곤 한다.  죽은자의 가장 가까이에 머물렀던 사람중에 하나라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책은 이미 처음부터 범인을 밝힌 채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도 아주 잠깐 스쳐가는 그 이야기를 책을 읽는 내내 기억해내지 못했다. 아니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가서야 무릎을 치게 되니 그 맛이 또한 스릴러의 참 맛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제1교향곡,  제2교향곡, 제3교향곡 '영웅', 제4교향곡, 제5교향곡 '운명', 제6교향곡 '전원', 제7교향곡,제8교향곡, 제9교향곡 '합창', 그리고 제10교향곡... 베토벤의 작품들이다. 이 책을 통해 교향곡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커다란 수확이 아닐까 싶다. 물론 전체적인 배경이야 내가 알 수 없겠지만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지식만으로도 배가 부른것 같다.  책 뒤에 부록으로 따라 온 작은 CD를 보면서 과연 어떤 음악이기에? 하는 의구심이 들면서  빨리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책속에서 베토벤을 그렸다는 책과 영화에 대한 대목들이 잠시 등장하는데 그 작품들에 대한 궁금증 역시 엄청나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은 그 작품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욕심을 앞세워 본다.

사랑은 참 무섭다. 기쁨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원망과 증오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랑의 방식 또한 다양하다. 다니엘이 보여주는 사랑도 그렇고 과거속의 인물 베토벤이 보여주는 사랑, 그리고 죽음을 불러들인 토마스의 사랑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베토벤의 10번교향곡이라는 모티브로 이끌어가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잘못된 사랑의 방식이 끔찍한 살인을 불러오게 되는 이야기의 마무리가 왠지 섬뜩해지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긴장감속에서 조바심을 내며 읽었던 책이 아닌가 싶다. 정말 재미있고 유용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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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습관에게 말을 걸다 - 손톱을 물어뜯는 여자, 매일 늦는 남자
앤 가드 지음, 이보연 옮김 / 시아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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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좋은 습관은 어려서부터 몸에 베이도록 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살아오는 동안 수도없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도 모르게 생겨난 버릇 하나쯤은 다 하나씩 갖고 있는 듯 하다. 그런 습관이 생겨나게 되는데는 배경이 꼭 있을거라는 이 책의 소개글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무심코 하는 사소한 습관에 과연 어떤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일까? 사실 그런류의 말과 설명들은 굳이 이 책이 아니더라도 보고 들을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욕심을 갖게 된 이유는 습관이 생겨나게 된 배경들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해답정도는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가 컸던 이유도 있었는데 이 책속에는 문제는 있고 답이 없는 듯 하다.  역자 후기에서도  이 책에서 습관을 고칠 수 있는 기술적인 방법을 기대하지 말라고 써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습관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 저자의 말처럼 일종의 강박관념이나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기억에 의한 불안감이나 정서가 흔들릴 때 나도 모르게 그것을 배척하거나 숨기거나 혹은 거부하기 위한 하나의 행동으로 습관이 생겨날 수도 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당사자에게는 좋은 기억일리가 없다. 그러니 그것으로 인한 어떤 심리적인 상태가 습관을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 습관을 하는 행동속에는 우리가 지나쳐 온 과거의 기억이나 심리적인 상태가 잘 나타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스트레스 수위를 자각할 수 있는 몇가지 경고 신호에 대한 예를 보았다. 과연 내 스트레스 경고 신호는 몇가지나 될까?  행여라도 남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닐까?  완벽하지 않은 나의 모습에 지나치게 실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자신과 다른 사람을 너무 가혹하게 평가하지는 않을까? '반드시'라거나 '꼭' '틀림없이'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하지는 않을까? ... 피해갈 수 없었다. 나 역시도 스트레스 경고 신호음이 울리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과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도통했다는 사람에게조차도 스트레스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그런 현상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게 나의 지론이기도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습관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게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런 것도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싶은 것들도 참 많았다. 설마, 하는 마음이 들게끔 하는 것들도 많았다. 습관은 의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습관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들이 습관으로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눈을 떳을 때부터 다시 잠자기까지 하루라는 시간속에서 습관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질 게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약간의 반감이 일었다.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 모든 것들을 습관이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그 습관이라는 말조차도 내게는 스트레스로 작용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혹시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나요? 끊임없이 물어오는 저자의 그 말투가 왠지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그런 행동속에 숨겨진 속마음이나 숨겨진 상처를 찾아낸다고는 하지만 왠지 너무 극단적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물론 좋지않은 습관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나에게 좋은 점수를 주지는 못하겠지만 어쩌면 그냥 그렇게 넘어가도 좋을 만한 것까지 습관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삶의 무게가 더 무거워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기는 건 또 무슨 까닭인지....

습관뒤에 감춰진 심리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 습관을 고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습관속에는 분노나 두려움, 질투, 열망과 같은 많은 감정이 있어 늘  우리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에게 처해진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능력이 없고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끼는 것이다. 뒤로 물러서서 그 감정상태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 채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데 더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이말에 100% 공감한다. 문제를 회피하고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깊을수록 더 심해지는 건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뿐이다. 그 많은 습관들이 그렇게해서 생겨난 것이라면 그것은 좀 심각하다. 문제와 마주하며 풀어나가기 보다는 일단은 피하고 보자는 심리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말일테니...

심각하게 생각하다보니 너무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이렇게 재미있는 습관도 있단다. 부부싸움중에 아내가 순종하지 않을 때마다 자신의 바지춤을 잡아당기는 버릇이 있는 남자의 심리속에는  '바지를 입고 있는 나는 남자야' 하는 남성우월주의가 숨어 있는거라는 말을 보며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대게 무언가 자신의 기대만큼 혹은 생각했던 것과 일치하지 않을때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불편한 마음 상태를 숨기거나 아닌 척 위장하기 위한 행동들이 자꾸 반복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일게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 평소의 내 생각과 행동들에 대해, 그리고 이제 마악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녀석과의 심리전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러면서 나는 아들녀석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의 사소한 말과 행동들이 아들녀석에게 끼치게 될 영향을 생각하니 참 끔찍스럽기도 했다.

말다툼의 시초는 상대방을 향한 기대(-267쪽) 라는 말처럼 기대치를 약간만 낮출 수 있다면,  상대방에게 나의 욕구에 대한 반응이나 성과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심리적인 방황은 줄어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그것을 피하려 하지 말고 일단은 부딪혀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거라는 생각을 한다.  짧은 고통으로 오랜 평안을 가질 수 있다면 그쪽이 훨씬 현명해 보인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 늦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는 책속의 말처럼  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책을 덮으면서 나는 나의 습관 중 하나를 고쳐보기로 다짐한다. 시간지키기에 너무 투철한 나머지 나는 약속시간 전에 미리 나가는 습관이 있다. 일단은 상대방을 기다리게 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남의 소중한 시간을 뺏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의 그런 습관 때문에 나 역시 상대방이 늦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도 했으니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그것은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 책을 빌미로 한번쯤은 시도해 볼 만 하지 않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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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패턴 - 루스 베네딕트 서거 60주년 기념, 새롭게 탄생한 문화인류학의 고전
루스 베네딕트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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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다가서지 못했었다. 리스트에 올려놓은지도 꽤 되었는데.. 루스 베네딕트라는 이름보다 먼저 다가왔던 책이었는데.. 문화인류학이라는 분류를 보면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고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게다.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라고 되어있는  문화라는 말의 정의가 너무 어렵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재의 생활 역시 문화의 한 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넘겨보기로 했다. 그런데 왜 굳이 패턴이라는 말을 썼을까? 책을 읽으면서 내게 다가왔던 의문점이었다.  그 말의 뜻처럼 어떤 유형이나 틀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실제로 예를 들었던  푸에블로 부족, 도부족, 콰키우틀족.. 이들 세 부족의 삶의 형태를 보면서 그들만의 틀을 볼 수 있기도 했고,  왠지 지금의 현대인들이 그들의 틀속에서 하나씩 튀어나와 또다른 모습의 일상을 만들어 낸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인간은 본능이 아닌 관습에 의해 형성된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들이 만들어내는 관습들은 지금의 우리가 볼 때, 아니 책을 읽는 내가 볼 때에도 뭔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자연과 하나된 채로 살아가고 있을 그들의 모습에서조차 내가 느끼는 이질감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왜 원시부족이었을까? 하던 내 의구심에 작가는 이렇게 답변해 주었다. 단순한 문화의 객관적 사실들은, 복잡한 사회에서는 파악하기 까다롭고 잘 증명되지 않는 사회적 사실들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원시부족 사람들을 연구함으로써 전통적 관습의 영향 아래 개인적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세 부족의 일상적인 면을 한번씩 훓어본다면 현대인이라고 말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한번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로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부족이다.  그들의 공동체 의식은 참으로 놀라웠다.  개인보다는 단체가 우선적으로 취급되었다. 개인적인 감정 따위는 단체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했고, 편파적이지 않은 중간을 택함으로써 그들 무리에 그 어떤 이상징후가 나타나지 않도록  힘썼다.  주술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약물이나 알코올 등에 의한 환각적인 쾌락 따위가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 같다. 결혼이나 죽음, 장례식등을 치루면서도 그것에 의한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이 오래가지 않도록 신경썼고, 그런 개인적인 감정들로 인해 단체에 어떤 영향이 미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애를 썼다.  권력이나 폭력을 경멸했고 누가 누구 위에 군림하여 다스린다는 그 자체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전형적으로 '나'가 아닌 '우리'를 위한 삶의 형태였다. 

두번째로 도부 족이다.  악의와 배신을 미덕으로 여긴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적개심이 있었다. 그들의 생활자체가 모든 것을 주술에 의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거였다.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적개심을 드러내야만 하는 생활패턴속에서 당신은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물며 얌(고구마의 일종)을 심어 열매를 맺게 되는 과정조차도 그랬다. 크고 실한 열매가 열린다해도, 신통찮게 열매가 열린다해도 그것은 모두가 다 남탓이었고 남의 주술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조차도 가까이 있는 사람에 의한 것이라 하여 죽은자와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 비난이 돌아갔다면 더 이상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말이다. 부부사이에서도 끝없이 의심하고 경계하며 체면치레에 급급한 그들의 모습. 그들에게는 살인적이라 할 수 있을만큼의 투쟁만이 있을 뿐이었다.

세번째로 밴쿠버 섬의 콰키우틀 족이다. 그들의 문명은 해안을 끼고 발달했다. 그들에게는 식인문명도 있었고 푸에블로 부족과는 정반대적인 입장이었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경쟁하기를 좋아했고 목이 마를 정도의 자화자찬, 상대방에게 내가 가진 것에 대한 자랑 일삼기, 더 많이 가졌다는 것을 보이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고마는 그들의 생활형태를 보면서 나는 왜 지금의 현대인들을 생각해야 했는지...  나보다 나은 상대방과의 결혼을 통해서 귀족이 되고자 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죽음까지도 불사했던 그들... 어쩌면 과시욕이야말로 그들을 살아가게 하는 밑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부족을 이야기하면서 작가는 디오니소스적 인물과 아폴로적 인물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스 신화속의  디오니소스는 바카스라고도 하는 술의 신이다. 광란적인 의식으로 숭배되었다는 디오니소스..    국가의 중요한 도덕이나 법률을 주관한다는 신이 아폴론이다.  특히 아폴론은 살인죄를 벌하고 그 더러움을 씻어주는 힘을 갖고 있는 신이라고 하니 어찌보면 디오니소스와는 반대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속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정과 이성의 차이처럼 말이다.  그들 세 부족의 모습속에는 분명히 우리들의 모습이 있었다.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혹은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나  문화의 형태를 그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들 세 부족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상태로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형태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인류학에 대한 설명속에서 다른 문화들에 대한 우리의 맹목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걸 보면서 이분법적인 우리들의 사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것 아니면 저것, 나 아니면 너,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고, 오른쪽이 있으면 왼쪽도 있고, 바름이 있으면 어긋남도 있고,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는... 수도없이 많은 이분법적인 우리들의 논리가 '나와 다름'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너무 멀리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왠지 우리의 모습을 다시한번 되돌아보기를 원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스 신화속에 나오는 강도, 프로크루스테스 이야기를 떠올린다.  지나가는 사람을 강제로 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혀 길이가 맞도록 발을 잘라내거나 발을 잡아당겨 늘였다는..  따지고 보면 아폴로적인 삶의 형태로 예시되었던 푸에블로 부족이나, 디오니소스적인 형태로 예시되었던 도부족, 콰키우틀 족의 모습도 이상한 건 아니다. 단지 그들의 문화를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 뿐.  작가의 말처럼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이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것은 아니라는 거다.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고정된 타입은 없다.  사회적 상대성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교리 라는 소제목처럼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관용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는 말에는 공감한다.  문화인류학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고 나니 루스 베네딕트의 작품 <국화와 칼>을 꼭 한번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처럼 나에게는 생소하겠지, 아니 틀림없이 그럴테지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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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기술
딘 R. 쿤츠 지음, 양혜윤 옮김 / 세시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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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상하다고?  물론 전체적인 내용과 흐름을 본다면 분명 식상할수도 있는 소재다. 하지만 그 식상함을 어떻게 녹일 수 있는가에 따라 이야기의 흐름은 달라진다. 그 흐름속에 독자를 얼만큼 끌여들여 함께 호흡할 수 있게 만드는가는 작가의 역량이다. 그런 면에서 주저없이 이 책을 선택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만큼이나 호흡력이 강한 작가라고 생각했었던 까닭이다. 그의 작품을 정말 오랜만에 접해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나는 도저히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숨가쁘게 달려가는 그의 발걸음속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어느정도는 성공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미혼모 크리스틴은 여섯살짜리 아들 조이와 함께 행복한 쇼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주차장에서 그 노인과 마주치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조이와 함께 행복한 하루를 마감했을 것이다. 만약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초록색으로 휘감은 노인이 느닷없이 당신앞에 나타나 당신의 아들이 악마라고 외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에 그 지저분하고 괴상한 노인이 내 앞에 나타나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단연코 내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그렇게 크리스틴과 조이에게 죽음의 공포가 찾아왔다. 어쩌면 그것은 정신적인 환각일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저어보지만 엄연한 현실로 찾아오는 공포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망가거나 자신을 지켜줄 누군가를 찾아내야 하는 것 뿐... 그래서 그들은 찾아나섰고 또하나의 동행자와 만난다. 사립탐정 찰리.. 이제부터 그들이 해야 할 모험의 길로 함께 따라나서야 하겠지만 이쯤에서 우리는 이미 그들이 어떠한 여정으로 접어들런지 조금은 아는 척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정해진 순서대로 그야말로 이미 예정되어진 그 길로 그들은 갈 것이기에.. 그 모험의 과정속에는 눈물나는 모정이 숨어 있을테고 엄마와 아이를 서로 묶어두었을 단단한 믿음의 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빠질 수 없는 것, 찰리와 크리스틴의 사랑.. 긴박한 순간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날수 밖에 없을테니까. 그것도 아주 깊은... 

범인은 이미 밝혀져 있다. 단지 범인이라고 증명할 만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 어쩌면 증거가 있어도 무형의 의미이기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얼만큼이나 허망한지, 사람의 마음이 얼만큼이나 간사하고 연약한지를 한편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설정들이 가끔은 나를 서글프게도 하지만 신을 향한 사람의 오만함보다는 신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그 연약함이 그래도 나은 듯 싶은 것은 왜일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영화 한편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물론 겹쳐지는 영화의 장면들이 많기도 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오멘>이다. 악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던 그 어린 소년의 모습이 크로즈업 되어 와 이 소설속의 조이와 하나가 되어버린다. 딘 쿤츠라는 작가는 이 소설속의 작은 소년 조이에게 알 수 없는 의구심을 품게 만들고 혹시? 하는 의문점을 남겨두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크리스틴과 찰리의 마음을 통해서. 그리고 알 듯 모를 듯 묘하게 표현되어지는 조이에 대한 작가의 의구심을 모른척하고 넘어간다면 아마도 작가가 실망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속에 그런 것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속에서도 잠깐 다루고 있지만 그 파티마의 기적이라는 거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그들의 내면속에 들어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이 무엇이길래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의지마져도 어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일까?  아주 맹목적인 믿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미쳐버릴 것만 같은 믿음이 생겨난다는 것은 어찌보면 어불성설인 것만 같다. 사람의 내면속에는 자신도 미쳐 알아채지 못한 아픔과 그 아픔으로 인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가 들어와 그것을 어루만져 주고 따뜻한 느낌을 전해주었다면 그것은 가능할 것이다.  이 책속의 크리스틴이나 찰리 역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아픔의 기억들을 안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 기억의 껍질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며 아픔을 이겨내는 모습 또한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말하고 있는 부분에서 나는 참으로 놀라웠다. 섬뜩한 느낌마져 들었다. 어쩌면 이리도 표현을 잘했을까 싶었다. 황혼교단의 교주 그레이스만 보더라도 그렇다. 천년동안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이 오기전에 악마의 씨를 말려야 한다던 그녀가 택한 것이 고작 여섯살의 어린아이였으니 더 말해 무얼할까?  그 여섯살의 어린아이를 선택해야만 했던 그녀의 그 깊은 내면속의 아픔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딘. R. 쿤츠... 역시 멋지다. 빠른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그야말로 크게 심호흡 한번 할 시간도 없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와처스>나 <사이코>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나는 것 같아 책을 읽는 동안  내심 즐겁기도 했다. 그렇게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것이 스릴러의 참맛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촉박한, 도저히 살아나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죽음의 상황에서 그야말로 기적처럼 살아나온 찰리가 묻고 있다. 혹시 조이가 초능력자는 아니었을까? 자신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 초능력자... 그레이스의 말대로 조이가 정말 악마라면?  어떤 쪽이 되었든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기로에 서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묻고 있다. 정의는 무엇인가?  수많은 선택중에 우리가 정의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게 있기는 할까? 그것이 항상 옳은 선택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이비생각

사족... 책제목이 아무래도 맘에 걸린다. 이 책의 어디에도 살인의 기술은 없었다. 아주 단순한 의미로 선택되어진 제목이라면 왠지 상업적인 냄새가 난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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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서
한호택 지음 / 달과소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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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소설은 미완성이다. 1편에 이어 2편이 나올 확률이 많아 보인다. 어쩌면 상중하일수도 있겠고 시리즈물로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역사는 단 한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작가의 생각에 의해 더 많은 이야기가 창조될 수도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아니 이건 순전히 나 혼자만의 생각일뿐이다. 책을 읽고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戀書... 누구와 누구의 연서일까? 그리고 그 연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한권의 책만으로는 그 연서에 대한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미리 예고된대로 서동요를 모티브로 삼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의 이야기를 한참 건너 뛴 또다른 이야기가 어디선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백제 위덕왕의 서자로 태어났다는 장이 홀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나 영웅이 되기 위한 훈련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문득 <영웅문>을 생각했다. 처음 <영웅문>을 읽었을 때의 황홀함을 잊지 못하는 까닭이다. 방대한 중국땅을 배경으로  무예의 달인으로 성장해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은근한 깊이가 참 좋았었는데 이 책속에서 주인공 장이 성장해가는 과정의 은근한 깊이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내심 기대를 걸게 만들기도 했다. 스승과 제자가 나누는 선문답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메타포들이 내게는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위덕왕과 장의 어머니 수련에 얽힌 이야기나 그의 후비 해진과의 일화는 왠지 끼워맞춘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늘어지지 않는 스토리 전개가 긴장감을 놓치지 않게 하려 무척 애를 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름대로는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를 생각했다면 어쩌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지만 그 안타까운 러브스토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초석을 단단하게 해주기 위함이었는지 중반부를 달려가면서 두사람의 이야기가 얼핏 얼핏 보여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신라나 백제가 아닌 왜의 땅에서 대면하는 그들의 만남과 사랑이 또한 애틋하게 그려지고 있다. 왠지 요즘의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사랑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팩션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사랑을 그려내는 작가의 손길에 많은 궁금증이 일었다. 그 사랑이 어떻게 그려질까?  만약 이 소설이 이 한권의 책으로 끝나는거라면 그들의 사랑 역시 미완성으로 끝날테지만...

"천하다 함은 어떤 뜻입니까?"
"돼지는 천하지 않다. 생긴 모습 그대로 살기 때문이다. 천하다 함은 생긴 모습 그대로 살지 못함을 뜻한다." (94쪽)
역사소설을 읽다보면 빠뜨리지 않고 나오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 뿌리깊은 반상제도의 모순성을 이 책속에서도 만난다. 부조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의 틀에서 선뜻 나서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 그런 대목을 보게 되면 어쩌면 누구나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진실된 모습인지도 모르겠다는 억지스러운 위안을 앞세워보기도 한다.  한사람의 영웅으로 태어나기 위해 장이 만나야 하는 삶의 모습은 참 다양하다. 먼저 도자기 만들고 굽는 과정을 통해 나자신을 이겨내야 하는 훈련을 하였고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장사를 통해 세상사람들을 알고 그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 훈련을 하게 된다. 그 과정속에서 밝혀지는 출생의 비밀은 이슈적인 느낌이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러면서도 결코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장이라는 인물 설정이 참 좋았던 것 같다.

"보이지 않아도 중심이 없는 것은 없다. 움직이는 것의 중심은 변한다. 변해도 중심은 몸 안에 있다. 중심이 몸을 벗어나면 그것이 무엇이든 쓰러진다. 지고 싶지 않거든 중심을 몸 안에 두고, 이기려거든 상대의 중심을 빼앗아라" (68쪽)
영웅이기에 그토록 커다란 것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복잡하고 다양한 이 시대를 살면서도 누구나 영웅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나라와 사랑하는 자신의 여자를 위하여 끝까지 자기 자신의 위치, 자기 자신의 중심을 세울 줄 알았던 장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에게 필요한 한마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흔들림이 많은 세상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켜내기가 쉬운 일은 아닐테니 말이다. 

책을 읽다보니 책속의 장면들이 그림처럼 머리속에 그려진다. 스토리가 어렵지 않게 흘러가듯이 전개되어지는 까닭일까?  하지만 눈앞에 영화처럼 그려지는 그 장면들이 있어  책속 내용이 한결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바꿔 말한다면 역사소설이면서도 그다지 무게감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게 솔직한 말일까? 어쩌면 서동요라는 이야기가 주었던 선입견이 작용했을수도 있겠고 우리에게 너무도 많이 다가왔던 하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일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묵직한 맛은 없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바램이 있다면 이 한권의 책으로 마무리 되어지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나라를 구하고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자리를 넘긴 채 사랑하는 여자와 길을 떠났던 장. 하지만 나라가 위급해지자 다시 왜에 있는 장에게 배를 보냈다... 라는 말로 끝을 맺은 이 책의 마지막은 뭔가 아직 할말이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만의 느낌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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