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짧은 문장

 

 

그대의 구들장 밑 감춰진 오래도록 해묵은 잿더미들을

나는 매일 들춰내 닦아줄 수 없다.

그러나 군불로 지펴진 뜨거운 아랫목 같은 그대 가슴에

연일 고단히 내려앉은 흙먼지들을

나는 매일 샅샅이 핥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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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아이들 1 천국의 아이들 1
마지드 마지디 지음 / 효리원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천국의 아이들 - 웃기고 슬픈 아동의 세계로의 초대장

 

 

  만일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아마 이런 영화를 하나 만든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어떻게 아주 작은 물건 하나에 그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을까? 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바로 이런 영화이다. 신발이라는 아주 작고 하찮은 물건 하나로 삶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성찰하고, 더불어 유쾌한 행복까지 전해주고.. 물론 아마 내 기질 상 영화 찍으면 난잡한 내용에 판금 조치될 확률이 더 크겠지만-.- 뭐, 여하튼... 그럼에도 사람이 한 번쯤 자신과 반대되는 것을 꿈꿔 본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이렇게 간혹 글을 쓰지만... 아주 어둡고 칙칙한... (소설이나 시 경우;;) 사실 정말로 한 번 쯤 써보고 싶은 글은 난 ‘어린 왕자’ 같은 글이다. 그렇지만 아마 이 정도 되려면 인생을 한참 달관하고 나서 모든 것들을 하나로 오롯이 녹여낼 수 있는 황혼의 나이쯤이 아닐지...

 

 

  그럼 이제 삼천포는 이 쯤 해두고, 본격적으로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 영화는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가 잘 접하기 힘든 아랍 영화이다. 일단 먼저 여기서 떠오르는 건 아마도 ‘빈 라덴’과 무시무시한 ‘이슬람교도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후세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만약 영화를 조금 본 사람이라면 ‘올리브 나무 사이로’나 ‘체리향기’같은 영화를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영화와는 역시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영화이고, 우리가 떠올리는 그러한 아랍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뜨리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영화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일단 사건의 전말은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신발 하나로 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시작부터 아주 작은 꼬까신^^; 하나를 요모조모 수선하는 데부터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있다. 그리고 좀 있으면 한 귀여운 남자아이가 그 신발 수리에 대한 가격을 치르고서 다시 야채 가게로 가, 감자를 외상으로 사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쯤 되면, 우리는 지레 아이가 엄마 심부름을 나와 여동생의 신발을 수선하고, 감자를 사러 나왔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돌연 여기서 발생한다. 이 귀여운 남자아이가 어머니의 과도한 심부름에 들 것이 하도 많아 깜빡했는지 동생의 신발을 야채가게에 놔두고 와버린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신발만 고쳐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여동생을 집에서 마주쳤을 때, 그 얼마나 당혹스러웠겠는가? 그래서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야채가게로 달려가, 야채가게 아저씨의 눈치를 봐가면서 여기저기 찾아보지만, 이미 신발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닌가? 하나밖에 없는 신발을 잃어버린 여동생의 표정은 다시 일그러지고, 아빠에게 이르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한다.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 착하디착한 소년은 여동생에게 집안의 가난을 설명하면서, 당분간 비밀로 할 것을 간청한다.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당분간 그 둘은 소년의 신발을 함께 쓰기로 한다. 아직 저학년인 동생이 어차피 오전반이고, 오빠인 소년은 고학년이기에 오후반이니, 시간만 잘 맞추면, 그것은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웃지 못 할 에피소드들이 연일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수업이 ‘땡’하고 끝마치자마자, 여동생은 그 조금만 몸짓으로 사력을 다하여 뛴다. 빨리 오빠에게 신발을 건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조그만 걸음으로 아무리 뛰어도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것도 모르고 오빠는 초조하게 어서 동생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동생이 겨우 도착하여 이제 신발을 체인지할 시점, 오빠인 소년은 화를 미처 내기도 너무 바빠 부랴부랴 학교로 미친듯이 뛰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어찌해도 지각을 면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몰래 학교로 들어가는데.. 왠지 학생주임 같은 표정 뚱한 선생 하나가 소년을 발견한다. 그리고 단단히 주의를 주며, 다음부터 그러면 학교에 못 오게 하겠다고 엄포를 한다. 하여, 다음부터 우리의 귀여운 여동생은 더욱 정신이 없다. 학교 시험을 치는데도 전속력으로 문제를 풀어 남들이 채 반도 풀기 전 나와 집으로 열심히 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만 너무 빠른 속력을 주체하지 못하는데다, 신발은 자신의 고사리 발에 비해 왜 이리 큰 지, 그만 발을 헛디뎌, 신발이 개울로 빠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물이 흐르는 속도를 따라 신발을 잡아보려 애쓰는 귀여운 여자아이의 처절한 몸짓... 그리고 그것도 모르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오빠의 신발... 것도 모자라, 어느 하수구 속으로 들어가 나오질 않으니... 그만 이 귀여운 소녀는 엉엉 울어버리고, 보는 사람들을 애처롭게 만든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벱! 이를 지켜보던 한 정의의 할아버지가 긴 막대를 들고 와 오빠의 신발을 꺼내주는 것이 아닌가? 비록 물에 젖고, 형편없이 헤진 신발이지만, 이거라도 없으면 학교에 신고 갈 신발도 없는 절실함에 소녀는 죽었다 살아나는 심정으로 신발을 신고서 다시 아장아장 오빠에게로 뛰어간다. 그러나 오빠 측에선 다시 늦는 여동생 때문에 속이 타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마구 화를 내는데, 귀여운 여동생 순간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오빠 신발이 너무 커서 그렇단 말이야. 그리고 너무 지저분해서 창피해 죽겠어. 오늘 다 아빠한테 일러 버릴 거야."

 

 

  이 말에 다시 미안해진 오빠는 동생을 달래며,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고, 부랴부랴 학교로 뛰어간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학교에서 시험 성적 100점을 받아 선생님께 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여동생에게 고스란히 헌사하며, 다시 동생을 달랜다. 이렇게 다시 몇날 며칠이 지나고... 우리의 귀여운 여동생 ‘자라"-’(여동생의 이름^^)는 우연히 자신의 신발과 똑같은 신발을 누군가 신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재밌게도 신발은 보이는데, 신고 있는 주인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쭈뼛쭈뼛..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살펴보지만.. 수많은 인파에 묻혀 잘 보이지 않고.. 이 때 부터 쉬는 시간마다 ‘자라’의 추적이 시작된다. 얼굴도 필요 없고 오직 수많은 여자아이들의 발! 그 발만을 바라보며...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자신의 신발을 신은 그 발이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마침내, 하늘도 감동하여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하게 되고. 아니나 다를까 자라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여자아이의 집을 추적해 간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의 집 위치를 확인한 후 오빠에게 부랴부랴 그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서 다음 날, 우리의 귀여운 두 주인공은 다시 그 여자아이의 뒤를 조심스레 밟는다. 그리고 드디어 그 집 앞까지 갔는데, 웬 눈이 먼 장님이 나와 그 여자아이를 안아주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 눈이 먼 장님은 그 여자아이의 아버지인 것 같다. 그리고 왠지 아버지의 차림새로 봤을 때, 그 집은 형편없이 가난해 보인다. 즉, 여기서 두 착한 아이에게 사태는 애매모호한 해석을 띄게 된 것이다. 그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장님이고, 우리 보다 형편이 더 어렵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는 장님인 아버지를 인도하며 같이 일을 돕는다. 이 얼마나 처량한 모습인가? 그만 두 주인공은 풀이 죽어 차마 말 한 마디 꺼내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그리고 다시 삶은 계속 반복되어진다. 비가 오나, 때론 바람이 휘몰아 쳐도, 두 소년 소녀는 신발을 갈아 신기 위해 뛰고 또 뛰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하늘이 내린 절호의 찬스가 그들에게 찾아온다. 바로 무엇이냐면....... 짜잔! 전국 어린이 마라톤 대회!! 그것도 엄청난 부상이 주어지는데, 우리의 남자 주인공 ‘알리’(소년의 이름)에게는 3등에게 주어지는 상품에 유독 눈이 확 띄는 것이다.

 

 

  3등 상품- 운동화!!!

 

 

  이게 웬 하늘이 내리신 기회란 말인가? 여기에만 참가해서 3등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귀여운 여동생이 밤낮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걸 끝마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학교대표는 다 뽑혔다는 것이다. 그 동안 알리는 학교에 빨리 뛰어오고 가느라 미처 학교대표를 뽑을 때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너무나 결사적이었기에, 담당 체육 선생님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냉담한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아이의 서러운 눈물 앞에 어찌 마음이 약해지지 않으랴? 하여, 어쩔 수 없이 1000미터 기록을 재기로 하고, 측정을 하는데, 우리의 주인공 알리가 누군가? 밤낮으로 지각하지 않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속력으로 학교로 달리기를 하였던 아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 자연 남들 보다 눈에 띌 정도로 좋은 기록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 알리는 당당히 학교 대표로서 전국 어린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자신의 귀여운 여동생에게 알림으로써 둘은 손꼽아 그 날을 기다리게 되고, 드디어 운명의 아침이 밝아온다.

 

 

  구간은 4km.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모든 아이들이 모였다. 그런데 우리의 알리가 여기서 과연 3등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과는 두고 봐야 아는 일. 경기는 시작되고, 알리는 힘에 겹지만 여동생의 귀여운 목소리를 떠올리며, 자신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여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결승점을 얼마 앞둔 상태에서 선두권을 형성하여 몇 아이들과 함께 달리고 있다. 그런데, 너무 여동생의 목소리의 힘이 컸을까? 알리의 스피드를 다른 아이들이 따라오질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알리는 속도를 조절하며 일등도 보내고... 이등도 보내고... 삼등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속력이 모두 엇비슷한 대여섯의 아이가 몰려 있어, 자칫하면 삼등도 어려운 판국이 아닌가? 이에 다시 쳐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안간힘을 다해 뛸 수밖에 없고... 영화의 영상은 여섯 아이가 거의 동시에 결승점으로 뛰어 들어오는 모습을 슬로우 비디오로 잡는다. 과연 알리는 삼등을 할 수 있을까?

 

 

  아주 느리게 온갖 힘을 다해 여섯 아이가 결승 테이프로 다가가고, 결승 테이프가 끊기는 순간. 그만, 알리는 놀라 버리고 만다.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처지지 않기 위해 달린 것이 그만 일등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주위에선 난리가 나고, 우리의 주인공 알리를 얼싸안으며 챔피언의 탄생을 축하하고, 여기저기 사진 플래시가 터지는데, 알리는 차마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있다. 그는 일등을 했기에 여동생에게 신발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바뀌고 이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여동생 자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빠가 신발을 가져 오겠지?’, 마치 서울 가신 우리 오빠 기다린다는 우리나라 노래처럼 자라의 표정은 들떠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들어오는 오빠의 모습은 개선장군이 아닌 패잔병의 모습이 아닌가? 사태를 파악해 버린 자라는 그만 실망해 버리고, 알리는 미안하단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신의 퉁퉁 붓고 피나는 발바닥의 상처를 물로 씻는다. 이제 이렇게 영화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려는 찰나... 다시 장면이 바뀌어, 두 소년소녀의 아버지의 자전거 뒷모습이 포착된다. 그리고 거기에 아주 예쁜 여자애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제 다시 대충 영화를 정리해 보아야겠다. 너무나 재밌게 본 영화였기 때문인지 글을 쓰는 내내 흥겨운 기분이 가시질 않는 거 같다. 그리고 연신 우리의 귀여운 ‘알리’와 ‘자라’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다. 3등을 위해 목숨 건 알리... 그러나 1등이 되어버려, 1등이 되고도 패잔병처럼 눈물을 삭히어야 했던 그 장면은, 보는 이들 모두에게 눈물과 함께 웃음을 선사하는 어이없는 감동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마치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가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아들 앞에서 즐겁게 연기하는 모습처럼. 이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페이소스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영화를 잘 모르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 했듯이 개인적으로 좋은 영화라는 건 이런 양면적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동시에, 아주 작고 사소한 일상의 포착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믿는다. 아주 가장 작은 일상 하나를 포착하여 그를 통해 삶의 모든 것을 대변할 만한 찐한 감동과 슬픔을 동시에 전해 줄 수 있는 것! 만일 이것이 글로 쓰여 졌다면 너무나 관념적인 언어의 현란한 잔치로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포착할 수 있다.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는 다른 여자아이의 발을 바라다보는 자라의 표정 그 하나만으로 우리는 신발이 지니고 있는 온갖 은유와 상징을 직감각적으로 바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이렇게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 없는 작업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삶의 애환, 그리고 아이들의 순진무구함, 그런 것들이 혼연일체 되어, 우리를 그리움을 넘어, 감정의 정화와 이입이라는 신세계로 데려가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것은 결코 간접적 체험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마치 생생히 체득한 하나의 삶처럼 자신을 고스란히 그 속으로 데려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역시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면 이것은 타인이 들려주는 옛날얘기와 같은 그 정도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결코 가질 수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런 까닭으로 역시 직접적인 체험과 경험의 체득을 위해, 난 지금까지의 이 모든 이야기를 우리 모두가 기억에서 말소시킨 후, 직접 영화를 보기를 권해보고 싶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뭐, 무협소설 영웅문에 나오는 주백통이 아닌 이상, 기억을 지운다는 건 ㅋㅋ) 그리고 너무 미안한 말이지만... 이미 쓰인 이상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세상이 다 그런 거다! ㅋㅋ-,-;;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는 그 자체가 분명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체험을 가져다 줄 것을 확신해 본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감정을 우리 모두가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한다. 찌든 삶의 때들이 정화되는 그 기분을. 아주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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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 첫사랑에 관한 너스레

 

 

 

 세상엔 참 많은 첫사랑 이야기가 있다. 아니,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존재하고 있고,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잊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때론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처럼 고통스럽고, 때론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처럼 숭고하며, 때론 영화 '몽정기'에서처럼 풋풋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그러나 과연 맨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는 그 현상이 첫사랑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걸까? 갈민휘의 경우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첫사랑은 배가 뒤집혀지도록 보고 싶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물론, 순전히 그것은 갈민휘 개인적인 정의지만. 여하튼...

 

 

  오랜 왕가위 팬으로써 나는 그의 모든 영화를 다 보아왔지만, 선뜻 '첫사랑'이란 영화는 손에 가질 않았다. 일단, 소문이 왕가위가 실제 감독이 아니라 제작만 한 거라서 그런 지 영 이상하다는 둥, 내용이 산만하다는 둥, 일반적인 평이 좋지가 않았고, 개인적으로도 귀여운 금성무와 이유유가 곁눈질로 흘끔흘끔 웃고 있는 비디오 케이스를 고르려 할 때마다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첫사랑이라는 말 그 자체가 좀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만 동생이 빌려다 놓은 영화 '첫사랑'을 우연히 보고 난 지금, 나는 내 첫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첫사랑이라는 지울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다시금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단,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 기본적으로 염두 해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왜냐하면 영화가 실험적인 정신이 투철한 까닭으로 다소 산만한데다, 순전히 농담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구성방식 또한 매우 특이하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영화는 크고 작은 6가지의 에피소드로 나뉘고 있는데, 앞에 부분에 등장하는 4개의 에피소드가 뒤에 등장하는 2개의 에피소드를 만들기 전 실패한 시나리오로써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어이없는 것은, 정말 실패한 시나리오라서 그런지, 전혀 이야기 할 어떤 건더기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여기서 나는 이 네 가지의 에피소드에 대해선 전혀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영화의 시작부터 중간 중간에,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이 영화의 감독인 갈민휘가 등장하는데 (이 영화는 왕가위에 대한 갈민휘의 오마주 영화라고 보면 될 거 같다), 이야기를 정리하는데 필요한 부분에 한에서만 대사를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여하튼 처음 영화는 해설자인 갈민휘가 등장하면서,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마구 남발하는 가운데, 본 에피소드로 넘어가고 있다.

 

 

 

본 에피소드 1. 첫 만남-정신병자와 몽유병자의 세계

 

 

  청소부인 임가동(금성무)은 정신병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몽유병에 걸려 돌아다니는 황유유(이유유)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매일 밤, 임가동은 황유유를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난 3개월 전 만자에서 동니만으로 이전 배치 받았다. 이 3개월 동안 난 매일 밤마다 몽유병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방을 헤맨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 가끔은 깨어있는 듯도 하다. 그녀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임가동은 유유를 깨우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가해본다. 눈을 감은 채 넋이 나간 유유의 머리채를 잡고서 흔들어도 보고, 목을 졸라도 보고,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도 보고^^;; 그렇지만 유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깨어나질 않는다.

 

 

  "정말 알고 싶어요. 밤에 무엇을 하는지... 최근에 캠코더를 샀는데 자기 전에 몸에 고정시키죠. 그러면 밤에 한 일을 알 수 있겠죠. 치료가 안 되더라도 뭔가 찍히면 기분이 달라지겠죠."

 

 

  평소, 자신의 몽유병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유유는 어느 날 캠코더를 구입한다. 그리고 자신의 배에 부착하여, 자신의 몽유 상태에서의 삶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녀는 임가동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매일 밤, 그와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임가동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그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몽유의 상태 속에서, 자신이 임가동과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안심을 하게 된 이유로, 몽유병이 완치되게 된다. 그래서 유유는 그 때부터 거짓으로 몽유병 흉내를 내면서, 임가동과 만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 둘의 관계는 조금씩 미묘해진다.

 

 

  어느 날 둘은 같이 식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유유는 흘깃흘깃 눈을 뜨며, 임가동을 훔쳐본다. 왜냐하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임가동이 유유를 빤히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무언가 유유에게서 미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임가동의 시선을 유유는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유유 그 자신이 더 이상 몽유병 행세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로 인해 결국, 둘의 눈은 서로 마주치게 되어 버린다.

 

 

 

 

 

 

 

"이런 걸 시작이라 하죠.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시작은 끝을 의미하기도 하죠. 모르는 게 약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의식이 몽롱할 때가 더 행복하죠. 사랑은 그가 보낸 꽃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곁에 있어주고 부드러운 한마디와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면,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하고 사람을 취하게 하죠."

 

 

  서로 눈이 마주침으로써 서로에 대한 감정에 대해 두 사람은 슬며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 몽유의 상태 속에서의 밤이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낮에서의 만남을 꿈꾸게 된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급작스럽게 전혀 다른 반전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언제나 사랑에 있어서 남자는 서툴고 성급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임가동은 매우 조급하게도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바로 다음 날, 자신의 사랑을 유유에게 고백해 버린다. 아니, 너무나 어이없게도 청혼을 신청한다. 그것도 캠코더를 통해 일방적으로. 그리고 것도 모자라, 유유에게 자신의 고백이 담긴 캠코더와 함께 둘의 결혼 청첩장을 보낸다. 어디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그가 보낸 청첩장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결혼 청첩장에 자신과 유유에 이름을 대신 새겨 넣은 청첩장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은 결혼식장의 장소가 잘못 기입된 청첩장이었다. 그러하기에 둘은 엇갈리게 되어 버리고, 각자 다른 장소에서 서로를 기다리다, 결국엔 만나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날 싫어한다면 얘기 할 텐데... 난 그다지 무지막지하지도 않은데..."

 

 

  그 후, 임가동은 밤마다 유유를 다시 기다리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더 이상 그녀는 오지 않는다.

 

 

 

 

 

본 에피소드 2. 사랑이후 -이일평과 조미나의 사랑이 끝난 이후의 세상

 

 

  이일평(갈민휘)은 조미나(막문위)와 10년 전 결혼을 약속했고, 집안이 부유한 미나가 모든 결혼준비를 다 했었다. 그러나 일평은 그런 관계가 싫었다. 그녀가 이상형이 아니었거나, 부담스러워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식장에도 안 나타나고, 그녀가 준 결혼반지만 들고 도망쳐서 숨어 지내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서, 작은 구멍가게 하나를 꾸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무엇이냐면, 그가 10년 동안 거의 날마다 미나에 대한 악몽을 꾸어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미나와의 결혼을 배신하고 도망쳤을 뿐 아니라, 미나가 자신에게 준 결혼반지를 현재의 자신의 아내에게 결혼반지로 주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악몽은 항상 미나가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죽이거나, 아내의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결혼반지를 되찾아 가는 형상을 띠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전 애인이었던 그 공포스러운 미나 아니, 그에겐 사탄 그자체가 찾아오게 된다.

 

 

"콜라 하나 주세요."

 

 

 

 

 

 

 

  아무런 예감도 없이 자신의 가게에서 평화롭게 수박을 자르고 있던 일평에게 미나는 이렇게 갑작스러운 등장을 한다. 그래서 순간 놀란 일평은 자기도 모르게 수박을 자르던 칼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겨서 쥐어든다. 그러나 미나는 아무 말도 없이 일평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그대로 콜라를 마신 후, 계산을 하고선,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그녀의 심정은 사랑을 잊는 술을 마신 기분일 거다. 매정한 애인이 떠났는데, 그녀도 나도 서로 상관 않고, 왜 이리 간단하지? 첫 콜라 병을 시작으로 사탄은 되돌아왔다. 누군가가 감시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가게 일에 관심이 없어졌다. 혹시 내가 사랑을 잊는 술을 콜라에 타서 그녀에게 마시게 한다면 그녀가 알아챌까? 그러나 그게 어디서 파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진짜 마신다면 날 무시할까? 세상은 마음처럼 안 되던데 이번에 정말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뒤로 종종 미나는 일평의 가게에 들려, 똑같은 방식으로 콜라를 주문하고선, 그 자리에서 다 마신 뒤, 가버리곤 한다. 그리고 오직 일평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아직도 그녀가 그를 잊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며, 일평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일평의 아들을 예전에 자신과 일평이 자주 만나던 식당에 데리고 가서, 항상 일평과 자신이 즐겨 먹던 음식을 사주던가, 혹은 일평의 부인과 친해져서, 일평을 위해 만드는 옷 뜨개질 감을 미나 자신의 취향인 노란 조끼로 고르게 하던가... 이런 식으로 일평을 옥죄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 날 오후, 그녀는 가게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일평의 호주머니에 공포스러운 메모 하나를 남겨 놓는다.

 

 

  "오늘 밤 7시 30분 항상 만났던 그 식당에서 만나요."

 

 

  그러나 너무나도 그녀가 두려운 일평은 차마 나가질 못하고, 대신 그녀와 그를 잘 알고 있던 후배를 속여, 그 자리에 내보내버린다.

 

 

  "10년 동안 알고 지내 온 형이 나에게 이럴 줄 몰랐다."

 

 

  식당엔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일평의 후배와 미나가 앉아있다. 그리고 일평은 자신의 가게 앞에서 후배의 명복을 빌고 있다. 그런데 다행히도 후배는 살아 돌아온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며, 미나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일평에게 전해준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화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왜냐하면 미나가 일평을 어느 정도 체념한 것이 분명히 드러나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상하게, 일평의 공포감은 쉬 사라지질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공포감의 원인인 결혼반지를 어떻게 하든 미나에게 되돌려 주려고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자신의 부인의 손에 꼭 끼어져 있다. 그래서 여기서 영화는 약간의 위트를 발휘해, 일평이 자신의 부인 몰래 강탈하는 장면을 등장시킨다. 잠들어 있는 부인의 얼굴에 보자기를 뒤집어씌운 후, 막대기로 내리쳐 정신을 잃게 하게까지 하는 과격한 방법으로^^;; 그리고 이렇게까지 훔친 결혼반지를 일평은 두건을 뒤집어 쓴 채 미나에게로 달려가 되돌려준다. 그러나 며칠 후, 미나는 일평의 가게에 들려, 평소처럼 콜라를 마시는 가운데, 일평이 잠깐 다른 일을 보는 사이에, 가만히 결혼반지를 카운터에 놓고 나가 버린다. 그리고 이를 곧 알게 된 일평은 비 때문에 아직 떠나지 못하고, 처마 밑에 우두커니 서 있는 미나에게 다가간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그 날 밤을 기억한다. 그 날 갑자기 소나기가 왔다. 갑자기 용기가 생겨,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10년 만에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그녀 곁에 가서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우산이 있는데 차타는 곳까지 바래다 드리죠.’ 나중에 몇 번이고, 그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 말의 중요성을 몰랐다. 오히려 엉뚱하게 느껴진다. 평소에 기억을 잊는 술, 사랑을 잊는 물, 다리 없는 새 등을 썼는데, 그 순간에는 한 마디 아니, 반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우산을 받쳐 든 일평은 미나에게 씌어주며, 택시를 잡아준다. 그리고 미나가 택시에 들어서는 순간, 10년 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미나에게 이야기한다.

 

 

  "미안합니다."

 

 

  그 날 이 후, 일평은 자신의 부인에게는 새 결혼반지를 사주고, 미나의 반지는 자신만의 추억의 상자에 넣어둔다. 그리고 더 이상 악몽도 꾸지 않고, 다시 평소처럼 생활 할 수 있게 된다. 또, 평소 그녀가 좋아하던 노란 조끼를 입은 사진을 한 통 찍고서, 사진관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현상을 맡긴다.

 

 

  미나는 현상을 하면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일평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끝으로, 영화는 다시 처음처럼 갈문휘가 혼자 나와, 첫사랑과 영화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정리한다.

 

 

  "몇 편의 첫사랑 이야기를 찍고 나서야 내가 첫사랑을 찍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것을 알 게 되었죠. 지금 첫사랑이라는 영화를 찍었다고 쳐요. 내게 첫사랑이 주는 것은 눈물하고 과정을 그린 것들이었어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 느낌은 이래요. 힘들고... 2년 동안 알아낸 것이 아! 사랑은 이런 느낌이어야 하는 거구나. 그리고 나서 현실에서는 찾기 힘들죠."

 

  "아 좋다. 아 찡하다. 제 첫사랑의 느낌은 이런 감명 같아요. 냉정히 생각하면 그건 얻기도 힘들고 잊기도 힘들죠. 아무 때나 있지도 않죠. 사람은 이상적인 첫사랑의 느낌을 가질 수 없죠. 인간은 너무 더러운 존재고 조잡스러우니까요. 어느 날 불쑥 나타나고, 정말 그 애가 잘됐으면 하고 바라고, 둘이 잘됐으면 하고 바라고, 그 후에도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램인데, 잃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마음이죠. 그러다 보니 나도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다 찍었는데 시작할 때와 같은 기분이에요. 알고 보니 숙명적으로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하는 거였어요. 그래야 천천히 얻을 수 있는 건데..."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보고, 그게 이거였어? 여긴 이렇게 찍었어? 많은 일들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헤어지고 난 뒤, 그녀는 요즘 어때? 잘 있어? 또 뭐해? 이랬으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아직 하고 싶은 걸 다 못했는데... 괜찮아요."

 

 

 

  어쩌면 누구에게나 첫사랑이란 것은 심각한 병적 증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각하면, 몽롱하면서도 아리고, 때론 공포스럽기까지 한... 물론,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것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 마련이고,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쉬 첫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잊지 못하고, 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순수에로의 집착이며, 우리들의 잃어버린, 그러나 되찾고 싶은 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세상에 온갖 시간과 물질들로 찌들어버린 우리는 첫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스럽고, 괴롭다. 이미 너무나 멀어져, 다시는 다가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여, 언제까지나 첫사랑에 얽매어 있을 순 없는 법이다. 그러하기에 아마도 갈민휘는 자신의 그 첫사랑에 대한 이러한 집착과 모순을 그 동안의 왕가위를 오마주하면서 왕가위 영화의 내용을 빌려 정리해 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 영화를 보았거나, 지금 이 영화에 대한 내용을 읽어 본 이라면 위의 물음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첫 편의 에피소드에서 보여주었듯이, 첫사랑은 처음부터 병적 증상이며, 또한 너무나도 성급하며, 그러하기에 모든 것은 오해가 되어버린다. 그러니 사랑이후에 관한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처럼 우리는 첫사랑에 대해 터무니없는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터무니없는 것이며, 오.해.다. 그러하기에 결국, 첫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해인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잘못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 아닌 것이다. 그저 오해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코 공포의 대상도, 고통의 대상도 될 수가 없다. 그러니 아주 당연하게, 그것은 자신만의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밖에 없다. 추억이란 이름의 보물 상자에 언제나 곱게 접어서 가끔씩 열어보면 그만인...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주 당연한 이 이야기들을 하기 위해서 영화는 왜 그토록 부산스러운 너스레를 떨었던 것일까?

 

 

  너.스.레.를. 떨.다... 수다스러운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능청을 떤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면서 아주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나는 바로 이 부분이 내내 걸렸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 왕가위가 보여준 영화 속에서의 사랑이야기는 주로 아비정전에서의 '다리 없는 새'와 동사서독에서의 '취생몽사'로 대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그의 영화를 빌린 이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즉, 그 동안의 왕가위 영화 속에선 어떤 너스레가 없었다고 갈민휘는 생각한 것 같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 속에서도 그는 너스레라기보다는 아주 뻘쭘한 대사 한 마디를 던지고 있다.

 

 

  "우산이 있는 데 차 타는 곳까지 바래다 드리죠."

 

 

  정말로 엉뚱하기 그지없고, 생뚱맞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이 말은 무언가 너스레다운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일평은 미나에게 아주 뻔한 능청을 떨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전혀 모르는 척, 그리고 그 동안 서로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가 분명히 무언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이 능청을 통해,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모든 말을 다 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때는 분명히 하나의 너스레가 우리들의 그 온갖 공포와 고통을 감추고서도 그것들을 씻어 내리며, 동시에 그것들을 정리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하기에 갈민휘는 너스레를 떨기엔 다소 커 보이는 첫사랑의 문제를 그렇게 영화를 통해서 줄곧 너스레를 떪으로써, 씻어내고, 정리해 간 것 같다. 물론, 너스레로만은 부족하기에 영화 속에선 분명히 일평이 미나에게 사죄를 하며, 또 마지막에 이야기의 총 해설자로써 그 스스로 눈물을 뿌리기도 하지만... 여하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시종일관 고수한 이러한 너스레가 그의 첫사랑의 문제를 정리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의 문제도...

 

 

  어쩌면 너무나도 무겁고, 심각한 나는 아직도 너스레를 떨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하기에 내게 있어 첫사랑이란 것은 누군가의 말들처럼 명치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저린 기억이며,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제는 그런 기억과 고통일지라도, 너스레를 떨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이며, 또 나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때는 누군가의 너스레가 참으로 부담스럽고, 측은해 보이기 짝이 없을 때가 있다. 그리고 때론 정도를 지나친 너스레 때문에 진실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나 진실한 너스레 속에는 상대와 자신에 대한 배려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리 무겁거나 심각하진 않지만, 무언가 분명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스레 그 자체는 언제나 비극적인 것을 비극적이지 않도록 하는,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을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는, 힘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첫사랑과 같은 순수에로의 집착과는 양립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순수에로의 집착은 분명 고귀하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똬리를 틀고 감아 들어가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도록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혹은 불변할 것이라 믿은 그 모든 것들이 배신하는 것처럼. 그러하기에 오히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순수에로의 집착은 언제나 늘 무겁고, 위험해 왔다. 그러나 순수라는 것을 동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동경할 수 있단 말인가?

 

 

  종이를 접는다고 하여, 종이의 부피와 무게가 줄어드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그 종이 자체가 다른 물질로 전이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첫사랑이라는 순수에 대해 다소, 너스레를 떤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너스레를 통해 우리가 부피와 무게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크기가 다소 작아진, 첫사랑의 문제와 순수의 문제를 대면 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를 그 무서운 첫사랑의 공포로부터, 순수에로의 집착에로부터, 좀 더 한 발짝 나아가, 다시는 대면할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또 다른 첫사랑의 순수에게로 데려다 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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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 프랑스 문학에 대한 추억여행 혹은 긴 여정에 대한 예감

 

 

  몇 년 전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방송대 불문과의 프랑스 단편이라는 과목에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텍스트로 해서 시험을 치룬 적이 있다. 그리고 ‘천국으로 간 집달리’는 이십대 때 대학시절 신학이 전공이었던 탓에 아마 다른 서적으로 얼핏 접했던 거 같다. 물론, 이 때문에 두 작품이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읽기까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천국으로 간 집달리’의 경우는 거의 종교우화서적에서 본 아슴푸레한 기억이라, 제목만 기억날 뿐 내용 자체가 거의 흐릿하기조차 했다. 그렇지만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경우는 읽는 순간, 내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져, 읽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었다. 비록 시험 때문이긴 했지만, 그 까닭에 원어로 본 이유도 각인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 기억에 그 시험은 기말시험으로 프랑스 단편 과목의 거의 300페이지 분량 가까운 책 전체를 범위로 했는데, 다른 단편은 사실 지금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만큼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다. 뭐랄까? 그 독특한 상상력과 더불어, 아릿한 프랑스 특유의 서정성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고 할까? 사실, 이십대 때부터 줄곧 프랑스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특히 프랑스 문학에 동경이 강했던 나는 그 이유 때문에 삼십대가 넘어서 굳이 방송대 불문과에 들어갔고, 불어를 공부하기 위해 또 굳이 별로 좋아하지 않던 영어를 먼저 공부했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프랑스 특유의 서정성과 어둠에 대한 동경이 함께 공존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프랑시스 잠 작품들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상상력과 서정성, 동시에 기독교 문학을 공부하면서 접하게 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사탄의 태양 아래서’와 여타 다른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현학적이면서도 몽환적인 광기의 향연들, 이 양극의 기묘한 유혹은 프랑스 문학에 대한 동경으로 내 이십대와 삼십대 초반을 채워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때문일까? 이번에 마르셀 에메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나는 특히,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와 ‘생존 시간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먼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싶다. 한 마디로 기막힌 상상력이다!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상상력! 그렇지만 결코 가볍지 않게, 발랄하고 경쾌한 서곡에서 씁쓸하고 여운이 있는 비극의 전조로 뒤바뀌는 서정적 변주곡! 만약 나라면 같은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작업을 했을까, 글을 읽는 내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 상상력이란 건 고작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AV동영상 수준의 상상력이었다. 몰래 여자의 알몸이나 훔쳐보거나 강간하고 도망가는 그런 식, 혹은 그러다 문득 회의에 빠져 성적인 담론에 대해 내 나름의 개똥철학이나 진부하게 늘어놓을 게 뻔한 졸작으로 전락해버렸을 것이다. 곡으로 따지만 실험적이고 전위적이지만 불쾌하기 짝이 없는 불협화음들로 듣는 사람들의 귀에 민폐를 끼치는 그런 곡이었을 것이 다. 그렇지만 마르셀 에메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 우리를 동화적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신화적인 세계로까지 데려간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구성은 흔한 신화적 구성을 차용하고 있다. 어떤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초인적인 능력을 얻게 되어, 그것을 만용하게 되었을 때 결국엔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의 날개에서부터 혹은 마이더스 손 이야기와 같은 신화이거나 우화와 같은 구성, 거기에 그 시대의 현대성을 가미시킨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첫째로 그러한 신화적 구성에 단초를 제공한 획기적인 상상력인 ‘벽을 드나드는 남자’라는 설정과, 둘째로 그 설정을 현대적으로 재가공하여 새로운 신화의 옷을 덧입혔다는데 있다. 만약, 작가가 마지막 벽으로 드나들던 남자를 그저 벽속에 갇혀버린 것으로 끝내고, 교훈적으로 마무리했다든가 혹은 재미를 위해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비약적인 능력을 한껏 치장했다면, 글은 신화적이도 동화적이지도 못하고 한없이 졸렬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적절하게 벽으로 드나들던 남자를 벽에 가두어 놓고, 또 그 남자를 위해 담벽으로 스며드는 기타의 선율을 남겨둔다. 그리고 그 선율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들어버린 야심한 새벽 홀로 남겨진 이들의 귓가에 잔잔하게 울려 퍼질 위로의 선율이 되고, 혹은 누군가를 애타가 사랑했지만 끝내 사랑하지 못하고 마음속 담벽 안에 가둬버린 우리 모두를 위한 위로의 슬픈 발라드로 남게 된다.

 

 

  두 번째로 나는 ‘생존 시간 카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역시 정말 기막힌 상상력이다! 물론, 나는 이 글을 읽을 때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 창작활동을 했던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작품 ‘인간은 모두 죽는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작품의 경우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영원한 삶을 지니고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보부아르의 작품의 경우 1946년이고,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경우가 1943년이니까 서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보부아르의 작품의 경우는 장편이고, 이 작품은 단편집으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서로 구상했던 시기는 비슷했을 것이라 예상해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 지식인층에서 가장 유행했던 사상기조가 ‘실존주의’임을 떠올려 볼 때, 그 시기 이런 비슷한 작품이 다수 쏟아졌다고 하더라도 하등 기이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두 작가가 비슷한 소재임에도 이야기의 초점과 중심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보부아르의 경우엔 삶과 죽음의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춤으로써 보다 실존주의적인 성격이 짙은 이유로 다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였던 반면에, 마르셀 에메는 그 특유의 유머와 함께 시간의 상대성과 사회적인 구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마치 블랙코미디의 분위기를 연출해야했다고 말하면 좋을 것 같다. 아니, 이 역시 초반 가벼움을 가장하면서 부드럽게 다가와 자신의 사변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고 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특히, 시간의 상대성에 관해서.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야기하는 시간의 상대성은 철학적인 관념으로 독자에게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력의 여지를 독자에게 준다. 왜냐하면 작가 자체는 글속에서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 어떤 자신의 철학적인 주관을 관철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한 달에 15일을 사는 남자, 혹은 36일 사는 남자와 같이, 사실은 밑도 끝도 없는 가정을 진짜처럼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면서,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해 객관적으로 표현해내고, 그 속에 처한 작가로 대변되는 주인공 자신의 느낌을 간결하게 적어 내려갈 뿐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이 좋은 소재가 단편으로 종결된 까닭에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묻어둔 것은 아닐까하는 아쉬움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내 개인도 그러한 부분은 조금 아쉽긴 하다. 하지만 만약에 그렇게 이야기가 길게 늘어졌다면 작가는 조금 더 많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에 그러한 소재로 시몬느 드 보부아르를 비롯해 당대의 석학들인 사르트르, 알베르트 까뮈 등이 충분히 무겁고 진지하게 많은 글들을 쏟아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 보태서 마르셀 에메가 현학적인 이야기들을 마구 늘어놓았다면 지금의 아름다운 단편들을 우리는 결코 지금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대충 이야기를 갈무리해봐야겠다.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마르셀 에메는 역시 내가 처음 마주한 그 느낌 그대로 내 상상력에 자극을 주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프랑스에 대한 동경과 프랑스 문학에 대한 나의 오랜 동경을 다시금 떠올려 볼 수 있었다. 물론, 내게는 이 글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프랑스 문학 특유의 서정과 더불어 양극에 서있는 어두운 관념에 대한 환상이 아직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내가 어릴 적 처음 마주했던 ‘어린 왕자’와 같은, 그리고 지금 마주하고 있는 ‘벽을 드나드는 남자’와 같은, 이런 간결하고 아름다운 동화와 신화의 세계로 회귀하기 위해선 아직도 많은 어둠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분명 이런 아름다운 단조의 변주곡을 하나쯤 써내고 싶다. 쓸쓸하지만 여운 있는 서정성 가득한 발라드풍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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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엘리베이터에 갇히다

 


안녕하십니까? 본 엘리베이터는

지하 69층에서부터 지상 33층까지

초고속으로 수직상승하는 엘리베이터입니다.

원하시는 층수를 눌러주세요.

16층 버튼을 누른다.

네. 16층 올라갑니다.

엘리베이터가 알 수 없는 속도로 올라가고

올라가는 층마다 차례로 불이 켜진다.

지하 68층, 지하 67층, 지하 66층......

지상 1층, 지상 2층, 지상 3층......

지상 13층, 지상14층, 지상 15층.

불이 꺼진다.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진다.

같이 있던 여자의 뒤척이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가 무언가를 꺼내든다.

섬뜩하게 반짝이는 빛깔이 눈에 들어온다.

은장도일까? 너무 고전적이다.

그렇다면 가스총일까?

바닥에 옷깃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다.

지퍼를 여는 강한 소리가 공간에 부딪친다.

라이터를 켠다.

거울에 발가벗겨진 내 모습이 비췬다.

그럼 여자는 원래 없었던 것일까?

라이터를 떨어뜨린다.

숨이 막혀온다. 점점 더워진다.

환각 속에 가스총의 총구가 보인다.

어쩌면 은장도의 예리한 빛깔일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 문을 두드린다.

소리가 되돌아온다.

'거기 누구 없어요. 누가 나 좀 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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