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아이들 1 천국의 아이들 1
마지드 마지디 지음 / 효리원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천국의 아이들 - 웃기고 슬픈 아동의 세계로의 초대장

 

 

  만일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아마 이런 영화를 하나 만든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어떻게 아주 작은 물건 하나에 그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을까? 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바로 이런 영화이다. 신발이라는 아주 작고 하찮은 물건 하나로 삶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성찰하고, 더불어 유쾌한 행복까지 전해주고.. 물론 아마 내 기질 상 영화 찍으면 난잡한 내용에 판금 조치될 확률이 더 크겠지만-.- 뭐, 여하튼... 그럼에도 사람이 한 번쯤 자신과 반대되는 것을 꿈꿔 본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이렇게 간혹 글을 쓰지만... 아주 어둡고 칙칙한... (소설이나 시 경우;;) 사실 정말로 한 번 쯤 써보고 싶은 글은 난 ‘어린 왕자’ 같은 글이다. 그렇지만 아마 이 정도 되려면 인생을 한참 달관하고 나서 모든 것들을 하나로 오롯이 녹여낼 수 있는 황혼의 나이쯤이 아닐지...

 

 

  그럼 이제 삼천포는 이 쯤 해두고, 본격적으로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 영화는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가 잘 접하기 힘든 아랍 영화이다. 일단 먼저 여기서 떠오르는 건 아마도 ‘빈 라덴’과 무시무시한 ‘이슬람교도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후세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만약 영화를 조금 본 사람이라면 ‘올리브 나무 사이로’나 ‘체리향기’같은 영화를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영화와는 역시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영화이고, 우리가 떠올리는 그러한 아랍의 이미지를 여지없이 깨뜨리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영화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일단 사건의 전말은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신발 하나로 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시작부터 아주 작은 꼬까신^^; 하나를 요모조모 수선하는 데부터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있다. 그리고 좀 있으면 한 귀여운 남자아이가 그 신발 수리에 대한 가격을 치르고서 다시 야채 가게로 가, 감자를 외상으로 사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쯤 되면, 우리는 지레 아이가 엄마 심부름을 나와 여동생의 신발을 수선하고, 감자를 사러 나왔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돌연 여기서 발생한다. 이 귀여운 남자아이가 어머니의 과도한 심부름에 들 것이 하도 많아 깜빡했는지 동생의 신발을 야채가게에 놔두고 와버린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신발만 고쳐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여동생을 집에서 마주쳤을 때, 그 얼마나 당혹스러웠겠는가? 그래서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야채가게로 달려가, 야채가게 아저씨의 눈치를 봐가면서 여기저기 찾아보지만, 이미 신발은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닌가? 하나밖에 없는 신발을 잃어버린 여동생의 표정은 다시 일그러지고, 아빠에게 이르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한다.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 착하디착한 소년은 여동생에게 집안의 가난을 설명하면서, 당분간 비밀로 할 것을 간청한다.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당분간 그 둘은 소년의 신발을 함께 쓰기로 한다. 아직 저학년인 동생이 어차피 오전반이고, 오빠인 소년은 고학년이기에 오후반이니, 시간만 잘 맞추면, 그것은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웃지 못 할 에피소드들이 연일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수업이 ‘땡’하고 끝마치자마자, 여동생은 그 조금만 몸짓으로 사력을 다하여 뛴다. 빨리 오빠에게 신발을 건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조그만 걸음으로 아무리 뛰어도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것도 모르고 오빠는 초조하게 어서 동생만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동생이 겨우 도착하여 이제 신발을 체인지할 시점, 오빠인 소년은 화를 미처 내기도 너무 바빠 부랴부랴 학교로 미친듯이 뛰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어찌해도 지각을 면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몰래 학교로 들어가는데.. 왠지 학생주임 같은 표정 뚱한 선생 하나가 소년을 발견한다. 그리고 단단히 주의를 주며, 다음부터 그러면 학교에 못 오게 하겠다고 엄포를 한다. 하여, 다음부터 우리의 귀여운 여동생은 더욱 정신이 없다. 학교 시험을 치는데도 전속력으로 문제를 풀어 남들이 채 반도 풀기 전 나와 집으로 열심히 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만 너무 빠른 속력을 주체하지 못하는데다, 신발은 자신의 고사리 발에 비해 왜 이리 큰 지, 그만 발을 헛디뎌, 신발이 개울로 빠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물이 흐르는 속도를 따라 신발을 잡아보려 애쓰는 귀여운 여자아이의 처절한 몸짓... 그리고 그것도 모르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오빠의 신발... 것도 모자라, 어느 하수구 속으로 들어가 나오질 않으니... 그만 이 귀여운 소녀는 엉엉 울어버리고, 보는 사람들을 애처롭게 만든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벱! 이를 지켜보던 한 정의의 할아버지가 긴 막대를 들고 와 오빠의 신발을 꺼내주는 것이 아닌가? 비록 물에 젖고, 형편없이 헤진 신발이지만, 이거라도 없으면 학교에 신고 갈 신발도 없는 절실함에 소녀는 죽었다 살아나는 심정으로 신발을 신고서 다시 아장아장 오빠에게로 뛰어간다. 그러나 오빠 측에선 다시 늦는 여동생 때문에 속이 타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마구 화를 내는데, 귀여운 여동생 순간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오빠 신발이 너무 커서 그렇단 말이야. 그리고 너무 지저분해서 창피해 죽겠어. 오늘 다 아빠한테 일러 버릴 거야."

 

 

  이 말에 다시 미안해진 오빠는 동생을 달래며,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고, 부랴부랴 학교로 뛰어간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학교에서 시험 성적 100점을 받아 선생님께 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여동생에게 고스란히 헌사하며, 다시 동생을 달랜다. 이렇게 다시 몇날 며칠이 지나고... 우리의 귀여운 여동생 ‘자라"-’(여동생의 이름^^)는 우연히 자신의 신발과 똑같은 신발을 누군가 신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재밌게도 신발은 보이는데, 신고 있는 주인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쭈뼛쭈뼛..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살펴보지만.. 수많은 인파에 묻혀 잘 보이지 않고.. 이 때 부터 쉬는 시간마다 ‘자라’의 추적이 시작된다. 얼굴도 필요 없고 오직 수많은 여자아이들의 발! 그 발만을 바라보며...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자신의 신발을 신은 그 발이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마침내, 하늘도 감동하여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하게 되고. 아니나 다를까 자라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 여자아이의 집을 추적해 간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의 집 위치를 확인한 후 오빠에게 부랴부랴 그 사실을 알린다. 그리고서 다음 날, 우리의 귀여운 두 주인공은 다시 그 여자아이의 뒤를 조심스레 밟는다. 그리고 드디어 그 집 앞까지 갔는데, 웬 눈이 먼 장님이 나와 그 여자아이를 안아주는 것이 아닌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 눈이 먼 장님은 그 여자아이의 아버지인 것 같다. 그리고 왠지 아버지의 차림새로 봤을 때, 그 집은 형편없이 가난해 보인다. 즉, 여기서 두 착한 아이에게 사태는 애매모호한 해석을 띄게 된 것이다. 그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장님이고, 우리 보다 형편이 더 어렵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는 장님인 아버지를 인도하며 같이 일을 돕는다. 이 얼마나 처량한 모습인가? 그만 두 주인공은 풀이 죽어 차마 말 한 마디 꺼내지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그리고 다시 삶은 계속 반복되어진다. 비가 오나, 때론 바람이 휘몰아 쳐도, 두 소년 소녀는 신발을 갈아 신기 위해 뛰고 또 뛰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하늘이 내린 절호의 찬스가 그들에게 찾아온다. 바로 무엇이냐면....... 짜잔! 전국 어린이 마라톤 대회!! 그것도 엄청난 부상이 주어지는데, 우리의 남자 주인공 ‘알리’(소년의 이름)에게는 3등에게 주어지는 상품에 유독 눈이 확 띄는 것이다.

 

 

  3등 상품- 운동화!!!

 

 

  이게 웬 하늘이 내리신 기회란 말인가? 여기에만 참가해서 3등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귀여운 여동생이 밤낮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걸 끝마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학교대표는 다 뽑혔다는 것이다. 그 동안 알리는 학교에 빨리 뛰어오고 가느라 미처 학교대표를 뽑을 때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너무나 결사적이었기에, 담당 체육 선생님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냉담한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아이의 서러운 눈물 앞에 어찌 마음이 약해지지 않으랴? 하여, 어쩔 수 없이 1000미터 기록을 재기로 하고, 측정을 하는데, 우리의 주인공 알리가 누군가? 밤낮으로 지각하지 않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속력으로 학교로 달리기를 하였던 아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니 자연 남들 보다 눈에 띌 정도로 좋은 기록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 알리는 당당히 학교 대표로서 전국 어린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자신의 귀여운 여동생에게 알림으로써 둘은 손꼽아 그 날을 기다리게 되고, 드디어 운명의 아침이 밝아온다.

 

 

  구간은 4km.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모든 아이들이 모였다. 그런데 우리의 알리가 여기서 과연 3등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과는 두고 봐야 아는 일. 경기는 시작되고, 알리는 힘에 겹지만 여동생의 귀여운 목소리를 떠올리며, 자신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여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제, 결승점을 얼마 앞둔 상태에서 선두권을 형성하여 몇 아이들과 함께 달리고 있다. 그런데, 너무 여동생의 목소리의 힘이 컸을까? 알리의 스피드를 다른 아이들이 따라오질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알리는 속도를 조절하며 일등도 보내고... 이등도 보내고... 삼등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속력이 모두 엇비슷한 대여섯의 아이가 몰려 있어, 자칫하면 삼등도 어려운 판국이 아닌가? 이에 다시 쳐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안간힘을 다해 뛸 수밖에 없고... 영화의 영상은 여섯 아이가 거의 동시에 결승점으로 뛰어 들어오는 모습을 슬로우 비디오로 잡는다. 과연 알리는 삼등을 할 수 있을까?

 

 

  아주 느리게 온갖 힘을 다해 여섯 아이가 결승 테이프로 다가가고, 결승 테이프가 끊기는 순간. 그만, 알리는 놀라 버리고 만다.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처지지 않기 위해 달린 것이 그만 일등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주위에선 난리가 나고, 우리의 주인공 알리를 얼싸안으며 챔피언의 탄생을 축하하고, 여기저기 사진 플래시가 터지는데, 알리는 차마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눈물을 머금고 있다. 그는 일등을 했기에 여동생에게 신발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장면이 바뀌고 이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여동생 자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빠가 신발을 가져 오겠지?’, 마치 서울 가신 우리 오빠 기다린다는 우리나라 노래처럼 자라의 표정은 들떠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들어오는 오빠의 모습은 개선장군이 아닌 패잔병의 모습이 아닌가? 사태를 파악해 버린 자라는 그만 실망해 버리고, 알리는 미안하단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신의 퉁퉁 붓고 피나는 발바닥의 상처를 물로 씻는다. 이제 이렇게 영화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려는 찰나... 다시 장면이 바뀌어, 두 소년소녀의 아버지의 자전거 뒷모습이 포착된다. 그리고 거기에 아주 예쁜 여자애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제 다시 대충 영화를 정리해 보아야겠다. 너무나 재밌게 본 영화였기 때문인지 글을 쓰는 내내 흥겨운 기분이 가시질 않는 거 같다. 그리고 연신 우리의 귀여운 ‘알리’와 ‘자라’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다. 3등을 위해 목숨 건 알리... 그러나 1등이 되어버려, 1등이 되고도 패잔병처럼 눈물을 삭히어야 했던 그 장면은, 보는 이들 모두에게 눈물과 함께 웃음을 선사하는 어이없는 감동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마치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가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아들 앞에서 즐겁게 연기하는 모습처럼. 이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페이소스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영화를 잘 모르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 했듯이 개인적으로 좋은 영화라는 건 이런 양면적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동시에, 아주 작고 사소한 일상의 포착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믿는다. 아주 가장 작은 일상 하나를 포착하여 그를 통해 삶의 모든 것을 대변할 만한 찐한 감동과 슬픔을 동시에 전해 줄 수 있는 것! 만일 이것이 글로 쓰여 졌다면 너무나 관념적인 언어의 현란한 잔치로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포착할 수 있다.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있는 다른 여자아이의 발을 바라다보는 자라의 표정 그 하나만으로 우리는 신발이 지니고 있는 온갖 은유와 상징을 직감각적으로 바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이렇게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 없는 작업이다.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삶의 애환, 그리고 아이들의 순진무구함, 그런 것들이 혼연일체 되어, 우리를 그리움을 넘어, 감정의 정화와 이입이라는 신세계로 데려가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이것은 결코 간접적 체험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마치 생생히 체득한 하나의 삶처럼 자신을 고스란히 그 속으로 데려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역시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면 이것은 타인이 들려주는 옛날얘기와 같은 그 정도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결코 가질 수도 없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런 까닭으로 역시 직접적인 체험과 경험의 체득을 위해, 난 지금까지의 이 모든 이야기를 우리 모두가 기억에서 말소시킨 후, 직접 영화를 보기를 권해보고 싶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뭐, 무협소설 영웅문에 나오는 주백통이 아닌 이상, 기억을 지운다는 건 ㅋㅋ) 그리고 너무 미안한 말이지만... 이미 쓰인 이상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세상이 다 그런 거다! ㅋㅋ-,-;;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는 그 자체가 분명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체험을 가져다 줄 것을 확신해 본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 감정을 우리 모두가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한다. 찌든 삶의 때들이 정화되는 그 기분을. 아주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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