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날 묻다

 

 

눈이 내린다.

하얗게 흩어지는 벚꽃처럼

봄날을 가장하며 눈이 내린다.

동네 꼬마 녀석들이 모두

밖으로 나온다.

강아지 새끼들도 신이 나

꼬리를 흔든다.

어여쁜 아가씨들도 좋아라고

미소를 띠운다.

그러나 모두 알고 있는 걸까?

정말로 모두 알고 있는 걸까?

이 날들이 다 지나가고 나면 반드시

지독히도 추워져

밟히고 밟힌 눈발은 단단히 굳은 채

검게 물들어 버린다는 사실을!

그 위로 지나가던 바로 그네들이

모두 미끄러져 내리고

자신 때문에 추악해진 눈발에

가혹한 침을 뱉어버린다는 사실을!

그렇게 스스로 녹아져 나리는 꿈

버리고서 나려지는 나락이라는 사실을!

그런 슬픔이라는 사실을

.

.

.

 

 

그러나 그 모든 슬픔이 이토록

황홀히 아름다운 것은

내.어.쩔.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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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클로 - [초특가판]
트란 안 홍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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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클로 - 죽은 시인의 사회에 바침

 

 

  트란 안 홍 감독의 "씨클로"...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선뜻 영화의 내용보다는 영화의 주제가였던 ‘Radio head’의 ‘Creep’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좀 더 기억을 끄집어내면, 몇 가지 강렬한 이미지 정도... 그러하기에 사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내러티브(이야기 구조)의 범주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몇몇 프랑스의 누벨바그 계열의 영화들처럼 아예 내러티브가 파괴된 영화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기엔 이 영화 속에 리얼리즘은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영화는 배경이 되는 어두운 이야기의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 ‘Creep’과 같은 강렬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그랬다. 분명히... 그래서 어쩌면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늘 다시 보고 싶으면서도 망설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다시금 마약에 흠뻑 젖어 취한 듯한 그 기억 속으로 들어가기가 선뜻 겁이 났기 때문이다.

 

 

  처음, 영화는 베트남의 한 가난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평생 씨클로를 운전하다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어, 이제 가난이라는 삶의 현실과 맞부딪쳐야 할 세 남매 그리고 할아버지...

 

  이제 18세가 되는 소년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씨클로(인력거)를 운전한다. 그리고 이제 갓 10살이나 지났을까 싶은 어린 여동생은 식당에서 구두를 닦는 일을 하고, 누나는 살림을 도맡아 보면서, 시장에서 물을 기르는 일을 하고 있다. 또, 연세가 지극하여 이제 좀 일손을 놓아야 할 것 같은 할아버지는 아픈 어깨 때문에 진통제 약을 먹어가면서, 자전거 고치는 일을 하고 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지독한 가난함... 그렇지만 역시 가난함이라는 말에서 절로 배어 있는 때묻지 않음이 아직 여기까지는 이 가족을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가난이라는 건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기에, 필연적으로 이 가족에게는 세속에의 찌듦이라는 불행한 전조가 드리우게 된다.

 

  사건의 발단은 마치 자연주의 소설 계열이나 리얼리즘 영화에서와 같이, 지극히 사소하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우연으로부터 출발한다. 가령 예를 들어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에서처럼 아내가 하루 빌린 값비싼 목걸이를 잃어버려, 평생 그 빚을 갚기 위해 돈의 노예가 되는 것과 같이... 혹은 리얼리즘 영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전거 도둑'에서처럼 가난한 노동자가 자전거를 도둑맞게 되어, 자전거를 훔치게 되는 과장과 같이... 소년은 하루하루 임대 받았던 씨클로를 도둑맞게 된다. 그러하기에 씨클로를 도둑맞은 소년은 원래 씨클로의 주인인 마님이라 불리는 한 여자에게로 간다. 한 30대 후반쯤... 소년의 나이 18세와 동갑인 정신지체아 아들을 품에 끼고서 애지중지 하고 있는 여자이자 범죄조직의 대모... 마님은 매정하게도 소년을 용서하지 않고, 아직 이 모든 현실이 버거워 보이는 소년에게 빚을 계산 받기 위해, 범죄를 알선한다. 그러면서 영화에선 처음 시인이 등장하게 된다.

 

  왠지 우울해 보이다 못해 창백해 보이기까지 한 시인(양조위)은 마님의 애첩이자 심복으로 보인다. 그러하기에 그는 소년에게 범죄를 지시하면서도, 괴로워한다. 그런데 철없는 소년은 처음의 두려움과 달리,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범죄의 묘한 매력에 차츰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소년은 이제 아예, 범죄조직 안에 발을 들여놓길 원하게 된다. 그렇지만 다시, 처음 예상과 달리, 깊이 들여놓으면 들여놓을수록 조여 오는 죄책감에 소년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소년은 다시 마님에게 찾아가, 자신의 원래 일인 씨클로로 이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새로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매정하기 짝이 없는 마님은 거절을 한다. 그리고 오히려 이제 소년에게 살인을 명령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한편 영화에서는 소년과 또 하나의 축으로써 소년의 누나가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소년의 누나 역시, 마님의 애첩이자 심복인 시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처음, 둘의 정확한 관계에 대해 영화는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둘은 서로 이전부터 알았고, 사랑하는 사이처럼 비추고 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소위 시인이라는 사람이 범죄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춘을 알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소년의 누나는 그런 시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매춘을 거부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 소년의 누나는 쉽사리 거기에 적응을 못할 것처럼 비추어진다. 그래서 시인은 소년의 누나에게 수치심을 버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사람을 고용한다. 아주 음흉해 보이는 40대 중후반 가량의 남자... 시인은 자신이 고용한 남자에게 저 여자는 이런 일이 처음이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소년의 누나와 같이 있던 방을 나온다. 그리고선 걱정이 되었는지 복도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몰래 난간을 타고 올라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고문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한다.

 

  청순해 보이기 그지없는 여자는 두려움에 떨며, 의자에 앉아있다. 그리고 여자의 발밑에는 세수대아와 생수통이 보인다. 천천히 시인이 고용한 음흉한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서며 말한다.

 

  "오줌 마렵지? 오줌 마렵지 않아?"

  그리고 계속 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목마르지? 목마르지 않아?"

  그리고선 다시 여자에게 물을 먹이기 시작한다.

 

  "오줌 마렵지. 오줌 마렵다고 생각해."

  그리고 마침내, 끝내 거부할 것 같던 여자는 자신의 수치심을 버리고 소변을 보기 위해, 치마를 걷는다. 그리고 자신의 속옷마저 다리 사이로 빼낸다. 그러자 남자가 말한다.

 

  "앉아서 하지 말고, 서서 눠."

  서있는 여자의 벌린 다리 사이로 찔끔찔끔 내려오는 물줄기가 세수대아에 쏟아지고 있다. 그리고 난간에서 이 모든 과정을 훔쳐보고 있던 시인은 코피를 흘리고 있다.

 

  이렇게 수치심을 잃어버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소년의 누나인 여자는 차츰 매춘부로서 거듭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애인인 시인의 소개로 인텔리계층으로 보이는 한 삼십대 남자와 마주하게 된다.

 

  어두운 성인 나이트... 여자는 매춘부 특유의 속살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옷을 입고서, 한쪽 손에는 수갑을 찬 채, 유혹의 춤을 추고 있다.

 

  음악은 Creep.......

 

  시인은 남자에게 열쇠 키를 건넨다. 하지만 너무나도 괴로워 보이는 시인... 자신의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맡겨버리고서, 돌아선 시인의 코에선 다시 코피가 쏟아지고 있다.

 

  다시 장면이 바뀌어, 여자의 얼굴은 멍이 들어있다. 그리고 양손은 수갑을 찼던 흔적으로 빨갛게 핏줄기가 그어져있다. 그 양 옆으론, 같이 매춘을 하는 여자들이 소년의 누나인 여자의 상처를 매만지고 있다. 하지만 돌연 참을 수가 없는지.. 돌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시인에게 달려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이 얘는 처녀였단 말이야......."

 

  괴로워 보이는 시인...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시인은 자신이 매춘을 알선했던 남자를 살해해 버린다.

 

  그리고 이제 이야기는 거의 종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매춘부로 전락시킨 시인은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자살을 하고... 한편 마님에게 살인명령을 받은 소년 또한, 살인을 하기 전날 밤, 잔뜩 술과 마약에 취해,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술과 마약에 의한 환각이었는지 소년은 다음 날 죽지 않고 깨어난다. 그리고 그 소년 곁에는 이제껏 소년을 놓아주지 않았던 마님과 그 일행들이 서있다.

 

 

 

 

 

 

  맞은편으론 자신의 애첩이자 심복이었던 시인의 불타버린 집이 보이고... 전날, 돌발적 사고로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정신지체아 아들을 잃어버린 마님이라 불리는 여자는 소년을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선 소년을 범죄 세계에서 놓아준다.

 

  마지막 영화는 이런 복잡한 고통의 과정을 겪고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소년이 끄는 씨클로를 타고, 어딘 가로 떠나는 소년과 소년의 누나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모습을 비춰주며, 끝을 맺는다.

 

 

  처음에 밝혔듯이 이 영화는 리얼리즘적인 요소를 다분히 갖추고 있다. 그러하기에 내용 중간에서 잠깐 소개한 모파상의 '목걸이'나, 비토리아 데 시카의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과 같이 이 영화를 본다고 해도 아무런 하자가 없다. 게다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베트남의 상황이 자본주의 체제로 돌입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기에 이는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린 파파야의 향기'와 같이 현대판 신데렐라 유형의 영화를 만든 트란 안 홍 감독에게서 왠지 리얼리즘은 어울려 보이지가 않는다. 특히, 영화를 본 이라면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이 영화는 이야기 줄거리보다는 분명, 장면 하나 하나에서 나오는 강렬한 이미지가 우리를 압도하는 영화이다. 가령 예를 들면, 소년이 살인하기 전 날, 자살을 기도하면서 파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금붕어를 입에 물고 있는 장면이라든가... 괴로울 적마다 코피를 흘리는 시인이 시를 읊조리며,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장면이라든가... 오히려 모든 장면 하나하나는 이렇게 하나의 시적인 형상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범죄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시인이라는 설정 그 자체가 이것을 대변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인과 이 악의 구렁텅이라는 리얼리즘이라는 세계가 어디 어울릴 법하단 말인가? 아니, 그러고도 정녕, 우리는 그를 영화에서처럼 시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젠 우리에겐 머나먼 신화가 되어버린 고대로부터 흔히 시인이란 족속들은 신을 찬미하고, 사랑을 노래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분명 시인이라는 설화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사랑과 순수의 대명사로 구전되어져 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왜 그들이 사랑과 순수의 대명사로 구전되었느냐는 것이다. 사실, 시인이 아니더라도 그 누군들 신을 찬미하고, 사랑을 노래하지 않고 싶겠는가? 그런데 왜 유독, 그들만 그런 영광의 딱지를 부여받았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순수하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는 세상 모든 다른 이들에 대한 예증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세상 모두가 당연히 신을 예찬하고, 사랑을 노래했다면 시인이라는 대명사 또한 필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언젠가부터 우리는 시인에게서 사랑과 순수 그리고 좀 더 나아가 낭만과 희망 대신 고통과 절망이라는 딱지를 부여해 왔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현대라는 곳에서는 그런 시인들이 고통과 절망에 허덕이다 못해, 모두 죽어버렸다는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순수하기 그지없던 고등학교 적, 나는 친구들과 함께 문학 소모임 비슷한 모임을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절대적인 영향은 그 당시 우리를 휩쓸고 간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뭐, 이 영화야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겠기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여하튼... 그 당시 우리는 키팅 선생을 부르는 학생들의 '캡틴 오 마이 캡틴'에 열광하였고, 그래서 실제로 문학 모임을 결성함과 더불어 교회를 다니며, 창작 연극을 해보기도 하고... 밤새 신과 인간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 보기도 하고, 각자 불같은 짝사랑의 열병에 앓아 괴로워해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마치 영화가 '캡틴 오 마이 캡틴'을 외치며, 키팅 선생을 떠나보내고, 더 이상 자란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듯이, 우리의 시인이었던 시절은 그 때로 모두 끝이 나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때 미처 시인의 고통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키팅 선생은 그렇게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 버린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우리에겐 키팅 선생이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고 실제론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가난 때문이었던지, 아니면 그 무엇 때문이었던지, 어쩔 수 없이, 아니 어차피, 범죄 세계로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던 시인은 소년을 범법자로 만들고, 자신이 사랑했던 처녀를 매춘부로 전락시킨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괴로움 끝에 자살을 해버린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이 모든 것을 예감할 수 있었을까? 아마 어쩌면, 자신이 괴로워 할 것이라는 사실은 당연히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거기에 쉬 적응하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한번쯤 생각해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달리 그에게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가 살고 있는 공간은 모두 사랑과 순수가 가득하여 시인이라는 대명사가 필요 없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 사랑과 순수에 대한 열망만 가득하여 시인에게 그 모든 고통을 전가시켜버리는 세상인 것을... 그러면서도 얼마나 그들은 자신의 타락과 동시에 시인으로서 태생적으로 지닌 자신의 고통을 갈망한단 말인가? 마치 자신이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의 타락을 바라보듯이... 그리고 소년의 타락을 바라보듯이... 게다가 어차피 그들은 자신이 아니더라도 이 험난한 세상에서 순결을 지켜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의 고통을 전염시키는 것이 그들에겐 덜 고통스러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자신은 한 때 사랑과 순수의 대명사였던 시인이니까... 아니, 소년과 처녀 모두 분명히, 다른 사람이 아닌 시인 그 자신에게서 절망과 고통을 배우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 모든 변명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범죄의 손에 물들었고, 처녀는 순결을 상실했고, 시인은 이미 죽어버렸다.

 

  그렇게 시인은 죽었다. 그리고 이제 소년과 처녀가 아닌 다른 그 누군가들은 시인이 없는 세상에 살아남았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의 마지막 떠나지는 모습은 또 다른 시인을 필요로 하는 우리들의 떠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진 그곳에 오늘도 또 다른 시인의 죽음이 있을지, 그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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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홍상수 감독, 김상경 외 출연 / 미디어마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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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생활의 발견 그리고 박하사탕 - 순수와 생활에 대한 접근방식의 차이

 

 

  경쾌하고 화려한 예고편 그리고 홍삼수 감독의 이제까지와는 매우 다른 유명 배우들의 출현 (오! 수정!을 제외하고), 하여 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무언가 다른 분위기를 기대했을 지도 모르겠다. 뭐랄까... 다소 빠른 박자의 스피디한 연애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의 홍상수만의 독특한 풍자 혹은 뉘앙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순간, 나의 기대는 무참히 짓밟혀지고 말았다. 여전히 홍상수 감독의 느릿하고 나른한 이야기 구성과 화면전개, 그리고 역시나 모든 흥미진진한 불륜의 소재를 아무런 미사어구 없이 지겨운 일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만의 저속한 언어 구사력과 표현력 등등... 그럼에도 무언가 이 영화에 대해 쓰고 싶은 생각이 든 건, 그가 하고 싶었던 그 한 마디 말, '우리 사람이 되기는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그 말이 머릿속에 자꾸 맴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춘천의 명소 회전문에 관한 설화가 다소 색다르게 가미되어, 기억에 남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홍삼수 감독 그 인간이 어떤 예술가들처럼 화려하게 신화와 일상을 대비시키지 않고, 너무 뻔히 보이게, 마치 농담하는 것처럼 툭 던진 것이지만, 이 상황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이청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의 명대사, '아직도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니?'라는 말과 함께 대비되어, 내내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지면을 빌려, 먼저 홍상수 감독이 어떻게 신화에서 생활을 발견해 내는 지를 살펴보면서, 차후에 박하사탕의 이야기를 약간 가미해 보고자 한다.

 

 

  먼저, 영화는 그의 전 작품 '오! 수정!' 때와 같이 자막을 통해 진행될 이야기의 결과를 미리 툭 던져지고 나서, 전개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줄거리의 핵심인 자막은 7번 등장하고 있는데, 거기에 연루되어 있는 주요 등장인물은 크게 경수, 성우, 명진, 선영 이렇게 네 명으로 압축된다. 또 내용이라는 것은 매우 간단해서 웬만한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난히 이해할 수 있는 줄거리이다. 그러하기에 우선, 간단 간단하게 해서, 부제 1번에서 7번까지의 줄거리를 차례대로 언급해 보고자 한다.

 

 

1. 아마 글을 쓰는 걸로 추정되는 경수의 학교 선배 성우가 경수에게 전화를 건다. 이유인 즉, 연극배우였던 경수가 영화배우로 전향을 하면서 유명해짐에 따라, 얼굴 보기가 힘드니 한 번 보고 싶기도 하고, 그의 주변사람들도 그를 보고 싶어 하니, 한 번 춘천으로 놀러 오라는 것이다. 하지만 경수는 피곤한지 별로 흥미 있어 보이진 않는다.

 

2.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경수는 영화로 전향한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진 않는 듯하다. 출연했던 영화가 흥행이 안 되어, 예정되었던 후속작품의 배역도 취소되고, 자신이 소속한 소속사에서 개런티도 제대로 못 받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월급을 받으려 소속사에 가서, 그는 그의 잘 아는 선배라 추종되는 어떤 사람과 말다툼을 벌인다. 그런데 거기서 그는 그 선배로부터 자신의 돈과 입장만 생각하는 옹졸함을 질책당하며, '우리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라는 말을 듣는다.

 

3. 아마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 경수는 갑자기 어딘 가로 떠나고 싶어졌나보다. 그런데 문득, 춘천에 사는 선배 성우가 자신에게 전화했던 걸 기억하고서, 그날로 바로 춘천에 당도한다. 오랜만에 만난 둘은 첫날 창녀촌에 가서 밤을 지새우는데, 그곳에서 경수는 갑작스레 역겨움을 느낀다. 그리고 선배 성우에게 '우리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다음 날 아침,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둘은 춘천의 명소 회전문으로 배를 타고 들어간다. 그 와중에 우연히 경수는 이제 갓 대학 초년생으로 보이는 혼자 여행 온 여자에게서 어떤 아련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회전문에 당도하여, 성우에게서 회전문에 관한 전설을 듣는다. 회전문에서 돌아와 성우의 소개로 경수는 평소 영화 속 자신을 동경하던 명진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명진은 대담하게도 만나자마자 경수를 은근히 유혹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만난 지 이틀 만에 여관으로 끌고 가, 둘은 관계를 맺게 된다.

 

 

*회전문 전설 이야기

 

=>옛날에 한 공주와 한 남자가 사랑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왕이 그 남자가 맘에 안 들었는지, 남자를 죽여 버렸다. 때문에 미련이 남은 남자의 혼은 뱀으로 환생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 사모하던 공주에게로 가, 공주의 온몸을 칭칭 휘감아, 공주를 괴롭힌다. 이에 왕의 청탁으로 등장한 어떤 영험한 도사가 공주에게 뱀을 떨쳐내는 법을 가르쳐 준다. 공주는 그 영험의 도사의 말대로 춘천의 한 절로 가서, 뱀에게 거짓말을 한 후, 절 안으로 숨어 버린다. 뱀은 그 앞에서 공주를 기다렸지만, 내리치는 천둥 번개가 무서워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뱀이 돌아섰다고 하여 회전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4. 관계를 맺은 다음 날, 경수와 명진은 성우에게 밤새 어느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성우는 뭔가를 직감한 듯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명진은 어이없게도 만난 지 이틀 만에, 자꾸 경수에게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 조른다. 하지만 경수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런데 다시 어이없게도 명진은 성우와 같이 여관으로 들어가서, 경수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다. 즉 경수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지만, 성우와 명진은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경수는 너무나 황당하여, 명진에게 다시 '우리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이 되지는 말자'라고 이야기하고, 다음날 곧장 춘천을 떠난다.

 

5. 경수는 춘천을 떠나 자신의 부모님이 계신 부산으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옆자리에 우연히 앉은 선영이 경수가 배우임을 알아보게 된다. 그리고 경수에게 은근한 관심을 표명한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경수는 선영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부산으로 가지 않고서, 선영을 따라 경주에 내린다. 그리고 몰래 선영의 뒤를 미행해, 선영이 살고 있는 집까지 알아내어, 그 근처에서 숙박할 장소까지 정한다. 그리고 급기야 선영의 집에서 선영을 불러 내, 선영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다. 그렇지만 선영의 어머니의 약간은 엄중한 경계 때문에 제대로 선영과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연락처만 받게 된다.

 

6. 전화 연락을 했는지 경수와 선영은 경주 시내에서 다시 만난다. 그러면서 경수는 선영이 자신의 고등학교 적 첫사랑인 것을 뒤늦게 알아보게 된다. 그리고 선영이 처녀가 아니라 유부녀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하지만 둘은 자연스레 관계를 맺게 되고, 선영은 관계 후 경수에게 다시 호텔로 오겠다고 거짓말하고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7. 호텔에서 돌아오겠다고 약속해놓고선 돌아오지 않은 선영에 대한 미련을 경수는 떨치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몰래 선영의 집으로 들어가 선영을 불러내, 다시금 관계를 맺는다. 관계 후 대화를 하다, 선영이 대학 초년 때 혼자 춘천 회전문까지 여행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성우와 함께 황홀히 쳐다본 회전문에서의 여대생을 떠올린다. 그리고 더욱 선영에게 집착하게 된다. 그렇지만 남편이 있는 선영은 계속 거짓말을 하며, 경수를 따돌린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서 경수는 선영의 집 앞까지 다시 찾아간다. 그렇지만 계속 내리치는 빗속에 들리는 천둥 번개 소리에 회전문 이야기를 떠올리며, 쓸쓸히 돌아선다.

 

 이쯤하면 벌써 대강 눈치 챘겠지만, 이 영화는 회전문이라는 곳에 얽힌 신화를 통해 우리의 아름다웠던 첫사랑에 대해 잊지 않고서 집착했을 때, 어떻게 처참하게 부셔지는 데에 대해 은근히 돌려서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이다. 그리고 더불어 그런 집착이 우리를 사람이 아닌 뱀이라는 괴물로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홍상수는 다시 별로 재밌지도 않은 농담을 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영화는 신화의 발견이 아니라 생활의 발견이 되는 것이고,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사랑이 아니라 유부녀와의 짧은 치정극으로 끝나고 있다. 그렇지만 이 홍상수식의 무언가 씁쓸한 뒷맛은 영화를 다시금 바라다보게 한다.

 

  먼저, 왜 경수는 자신이 그토록 '사람이 되긴 어려워도 괴물은 되지 말자.'라고 성우와 명진에게 외쳤음에도, 선영에게 뱀이라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영화 속에서 경수는 마치 바람둥이처럼 보이면서도 매우 어수룩하고, 진지한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하기에 명진의 대담한 유혹에 성우를 의식하지 못한 채 아주 쉽게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신에게 집착하는 명진에게 아주 냉정한 모습을 보인다. 반면에, 선영에게는 귀신에라도 홀린 양,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동경의 흔적들을 발견하고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치 어리석은 순진남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비록 경수는 바람둥이이기는 하여도, 아직 사람이 되고픈 순수한 의식을 버리지 않은 우리네 평범한 보통 남자인 것이다. 사실,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아도 경수의 여행은 순수를 되찾기 위해 떠난 여행처럼 보이는 점이 여러 가지 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다시 영화 속에선 경수의 이런 순수한 의식 때문에 뱀이라는 괴물이 되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선영은 자신의 잃었던 가장 순수할 적의 첫사랑이다. 그리고 자신이 춘천의 소양호에서 본, 늘 동경해 오던 여자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자신에게 먼저 관심을 표명하고, 은근히 계속 유혹의 향기를 드리운 것은 분명히 선영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남자가 선영을 내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유부녀라는 상황과 성인 된 남녀 사이에 이제 피할 수 없는 섹스라는 욕망, 그리고 경수의 선영에 대한 지나친 동경은, 결국엔 경수를 자신도 모르게 선영을 칭칭 휘감아 괴롭히는 뱀으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선영의 집을 돌아서는 경수의 모습을 통해, 너무도 간단하게 순수를 내치고서, 거기서 인간과 괴물의 중간쯤으로 여겨지는 생활(현실)을 발견해 낸다. 그렇지만 우리의 순수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내쳐질 수 있는 것일까?

 

  영화 박하사탕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순수로 돌아가는 회귀본능을 그린 영화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순수에서 생활, 그리고 그 생활 가운데 괴물로 변해간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떤 면에선 합리화하고, 어떤 면에선 동정을 자아낸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론 그런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순수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을 박하사탕은 영화 내내 아리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중간에 우리에게 쉬 건너 띌 수 없는, 잔혹하면서도 슬픈 물음을 하나 던지고 있다.

 

  "인생이 아직도 아름다워 보이니?"

 

  개인적으로 홍상수 감독에게 이청동 감독과 같은 순수로의 회귀를 바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을 한다. 당연히 그것은 각자의 색깔이고, 각자가 삶을 살아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뉘앙스의 차이에 있어서, 어떤 여운도 거부하고서, 인간과 순수 그리고 생활과 신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소 위험함과 더불어,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비록 홍상수 감독이 ‘회전문’이라는 신화를 차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신화를 통해 ‘신화’에 대한 명백한 거부와 부인을 표명한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신화의 기능은 생활을 발견해내기 위한 과거의 어리석은 우리의 자화상일 뿐, 신화 그 자체로써의 기능과 유용성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치 서구의 고대 그리스 철학이 그들의 모든 신화를 부인하고서 생겨난 것처럼. 하지만 그들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신화가 담고 있는 인간의 공통적인 무의식의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시적인 인식의 시선을. 아니, 신화 속에 담긴 우리 인간의 강렬한 순수에로의 회귀라는 욕망과 비원을! 그러하기에 여기서 우리는 한 번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록 경수가 뱀이 될 수 없을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리고 오직 생활을 발견해 내야 하는 것만이 우리의 버거운 순수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일지라도, 우리의 생활에 어떤 신화와 신비도 없다면, 그리고 어떤 가능성으로의 여운조차 없다면, 각박한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물론 참으로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사람이 되기 위한 집착은 홍상수 감독 말대로 신화적 괴물의 형상을 만들어 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사람임을 포기해야만 한단 말인가? 아니, 사람이 되기가 불가능하기에 꿈꿔보는 사람에 대한 순수한 열망, 그 사람에 대한 끊임없는 모든 질문들을 내쳐야만 한단 말인가? 설령, 그의 말대로 그 중간지점인 생활을 발견해 냈다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인생이 아름다워 보이냐?’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아마 박하사탕의 그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오금을 저리거나, 그 질문을 한 설경구처럼 섬뜩한 건조함만이 남아, 아무런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 그러하기에 너무나도 신화적이고 동화적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순수에게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차를 타고, 인생이 아름다운 것인지 아닌지 되물어 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도 있을 것만 같다. 비록 단 두 시간 정도에, 길어야 며칠 만에 사라질 여운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쩌면 아직도 내가 이렇게 신화적 괴물에 진저리치면서도 집착하는 것은 진정한 생활을 발견해 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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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묘지 민음사 세계시인선 4
발레리 지음, 김현 옮김 / 민음사 / 197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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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친 마파람을 맞으며

 

 

  우리에게 시인 그 자체보다 ‘바람이 분다. 이제 살아야겠다.’라는 경구로 더 잘 알려진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이해하는 것은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동양인의 사고구조로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시라는 것이 어떤 아름다움과 서정성 그리고 진실을 향한 외침이거나 사회적 개혁을 위한 울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프랑스 시인들, 특히 이 발레리의 사변적인 사고들을 어떻게 시로 받아들여야만 할까? 게다가 이 종자들은 어떻게 된 게 사변을 그냥 사변으로 말하지 않고 풍경을 빌려 사변을 표현한다던가, 갑자기 전혀 이해도 되지 않는 사물에 상징성을 부여한 후, 그것을 시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물론, 해변의 묘지에서 죽음을 상징하고 있는 ‘바다’는 우리도 자주 사용하는 아주 흔한 상징이다. 그렇지만 그 풍경과 어울려져 세세히 표현한 상징들과 흐름들을 잡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것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

  바다를, 쉼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로다!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중략)....................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신전,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지붕!

 

 

  단 한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경에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 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극도의 경멸을 뿌린다.

 

 

 

  비단, 자신의 선조들이 묻혀 있고, 자신도 묻혔다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해변의 묘지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문득 사유로 가득한 삶에 지쳐 바다로 아무런 이유 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바다가 무엇을 줄 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 지, 기대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바다 앞에 선 순간 우리는 고요해 진다. 그리고 바다의 풍경 앞에 매료된다. 시인은 여기 3연까지 그러한 시인의 마음과 바다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4연에서 그는 불현듯, 그 계속되는 파도의 잔잔함에 경멸을 뿌린다. 왜? 대체 바다의 무엇이 그에게 어떤 경멸을 품게 만든 것일까?

 

 

 

  과일의 향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미시고,

  천공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가는 기슭의 변모를.

 

  .....................(중략)......................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가여린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일의 횃불에 노정된 영혼,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화살을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순수한 너를 네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 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그림자의 음울한 반면을 전제한다.

 

 

 

  그렇다! 우리의 벅찬 가슴으로 달려간 바다에서 우리는 때론 신물을 느낀다. 비단, 그것은 우리가 전날 얼굴도 모르는 우리와 같은 여행객과 밤새 술을 마시며, 자기도 모를 가슴 속의 말들을 지껄이며 회포를 풀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바다의 짭조름한 내음, 생선의 비린내,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 때론 욕지기를 일으키게도 하지만, 정작 우리가 바다에게서 느끼는 욕지기는 그런 사소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응시하게 된다. 바다의 잔잔한 파도 위에 튕겨져 나온 반짝이는 눈부신 햇살에 눈을 감으며, 우리의 그 음울한 내면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오 나 하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허공과 순수한 도래 사이에,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중략)...................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여기선 충실한 바다가 나의 무덤들 위에 잠잔다!

 

 

  찬란한 암캐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내쫓으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띄우고 외로이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헛된 꿈들을, 조심성 많은 천사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나태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만상은 불타고, 해체되어, 대기 속

  그 어떤 알지 못할 엄숙한 정기에 흡수된다.......

 

  ...................(중략).................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네 속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이 내 뉘우침도, 내 의혹도,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잠에,

  나무뿌리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시인은 그리고 우리는 바다가 주는 근원적 고요함 속에서 명상에 잠긴다. 이곳에서 미래에 대한 헛된 열망들과 두려움들은 모두 나태이거나 거짓일 뿐이다. ‘가장 본질적이다.’라는 그 말, 그 자체는 어쩌면 향수적인 언어이다. 고향을 그리고 있는 과거적인 언어이다. 그리고 그 과거의 근원은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늘 숙연하다. 그리고 명료해 진다. 그러나 그 감당할 수 있는 깊이는 때론 우리를 너무 휘감아 우리는 산 자의 편이 아닌 죽은 자의 편이 되기도 한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종족을 삼켜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중략)...................

 

  간지린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젖은 눈시울,

  불과 희롱하는 어여뿐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반짝이듯 빛나는 피,

  마지막 선물, 그것을 지키려는 손가락들,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작용에 회귀한다.

 

  .......................(중략)......................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나르고 또 날지 않는 화살로!

  화살 소리는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이는도다!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이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

킬레스여!

 

 

 

  시인과 우리는 무력하다. 모든 것을 갉아먹는 구더기의 힘 앞에서 그리고 모든 시간을 정지시켜 버리는 제논의 화살에게서. 우리는 그것을 피할 길이 없다. 심지어 이미 우리는 그것에 소속되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잔인한 시시포스 신화의 마치 다른 버전처럼 매일 구더기에게 갉아 먹히고서 다음 날은 새로운 육체로 또 갉아 먹히기 시작하거나, 혹은 매일 제논의 화살을 맞고서 심장의 구멍이 났다가, 다음 날이면 다시 화살을 맞기 위해 심장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아니, 아니야!........ 일어서라! 이어지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 오 엄청난 힘이여!

  그래! 일렁이는 헛소리를 부여받은 대해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외투여,

  짙푸른 너의 살에 취해,

  정적과 닮은 법속 속에서

  너의 번뜩이는 꼬리를 물고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서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수많은 생명을 품고서, 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을 근원의 공간, 그래서 죽음과도 너무 닮아 있는 이 공간은 때론 너무 고요하여, 우리는 착각을 하곤 한다. 우리가 이미 바다 속에 있거나, 아니면 태초에 바다에서 어떤 생물이 기어 나오기 전, 그 생물이 지느러미 같은 형상도 갖추기 전, 그 전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었노라고. 그러나 진짜 바다를 겪어 보게 되면 안다. 바다는 그런 추상적인 공간이 결코 아니다. 거센 바람이 일고, 그 바람에 맞부딪쳐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만 하는 곳이다. 그러하기에 그곳의 시간은 결코 미래일 수 없지만, 결코 과거도 아닌 것이다. 그러하기에 바다의 표상을 우리는 쉬 죽음으로만은 단정시킬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시인은 이제 그러했던 바다의 표상 그 자체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바다는 결코 죽음의 공간이 아닌, 삶의 공간이다. 그리고 몸부림의 공간이다.

 

 

 

 

P.S.

 

  여름부터 가을 내내 무언가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봉착했다. 처음으로 느낀 거 같다. 외로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혼자 삼 시 세 끼 밥을 먹고, 혼자 산책을 하고, 혼자 영화를 봐도, 그 게 외로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외롭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외로움 앞에서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된, 사춘기적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는 파도가 거꾸로 들이치는 수평선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의 열망들 때문에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문득 아무런 까닭도 없이 나는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앞에서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기간 동안 일종의 공황상태에 있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번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통해 이러한 나를 극복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너무 급하게 글을 써내려가느라 정작 내 자신에 관해 돌이켜 볼 수 있었는지 아무런 확신이 서질 않는다. 다만, 이제 기대는 것은 이 차가운 바람의 느낌이다. 볼 살로 느껴지는 이 겨울의 느낌.......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본다. 온 몸으로 온 감각으로 느껴보기 위해....... 그렇다! 볼 살을 찢을 듯한 차가운 바람이 분다! 어떡하든 살아내야 할 겨울이란 이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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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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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 그 참을 수 없는,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스무 살이라는 새로운 경험, 기대, 사랑 그리고 절망. 그 모든 상징과 더불어 줄곧 내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가지 이름이 있었다. 실존주의. 그 이름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통과 고뇌의 아우라! 그리고 ‘삶이 본질보다 우선 한다’는 경쾌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경구! 키르케고르, 까뮈, 사르트르, 사무엘 베케트 등등, 마치 윤동주가 별 헤는 밤에서 숱한 이름을 헤며 그 이름들을 동경하였듯, 나 또한 그 이름들을 동경하며,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실존주의의 깊은 사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단지 햇볕의 따가움으로 총성을 울리던 날, 나는 실존주의의 끔찍한 모순을 보았고, 동시에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엇이, 그 어떤 점이 나를 두렵게 만든 것일까?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은 무력한 지식인이다. 비록 중앙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극동 지방까지 여행을 다니며 연구를 하고, 몇몇 저서들로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쌓았지만, 그 자신은 정작 허무하기 그지없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서 만진 조약돌을 통해 그는 구토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3년 동안 지내왔던 부빌의 삶 하나, 하나에 대한 구토증으로 확장되어져간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말들을 내뱉어 대는 상류사회의 인간들, 일요일마다 대성당에 가기위해 광장으로 군집하는 군중들....... 그 구토의 덩어리들을 뒤로 하고, 그는 어느 카페에서 한 여자 종업원의 자연스러운 존재를 통해 그곳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충실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하나의 현실이 아닌, 얼마나 모험의 감정에 집착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떠나가 버렸을 때 얼마나 허무한 존재이었는지, 그러하기에 그의 모든 삶이 온통 가짜이거나 실패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으로 점점 천착해 들어간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자각에 빠지면 빠져들수록 그는 그동안 그를 지탱해 왔던 그 무언가 의미를 계속 상실하게 된다. 이제 오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연명하는 일뿐! 비록, 잠시 그의 옛 여자친구인 안니에게서 온 갑작스러운 편지로 인해 그녀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가 그의 부빌에서의 삶을 지속시켜 나가지만, 결국 안니 또한 삶을 연명할 뿐,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그녀에게 기대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부빌을 떠나며 소설은 끝을 마친다.

 

 

  찾을 수 없는 스토리라인, 그리고 산재해있는 생각의 흔적들, 그리고 작가 본인이 추구했던 삶과는 너무나도 괴리감을 주는 존재에 대한 천착적인 소설....... 아마, 이러한 점들로 인하여 이십대 초반 이 소설을 접했을 때 나는 구토증 말고는 다른 그 어떤 말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소화가 되지 않아,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도 이 난해한 소설을 미필한 몇 자로 정리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모한 도전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지식인을 위한 변명’ 등을 토대로 구토에서의 그의 생각들을 조금은 들쳐볼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먼저, 구토증에 관한 이야기이다. 비단, 이 소설 뿐 아니라 사르트르는 여러 다른 단편에서도 그의 참을 수 없는 구토증에 대해 종종 화두를 꺼내고 있다. 인간 자체에 대해 환멸을 느껴 어느 날 권총을 구입하여 사람을 죽이는 ‘에로스트라트’에서도 그는 인류가 말하는 휴머니즘에 대해 인간애에 대해 구토를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사형 당하기 전날 밤의 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그린 ‘벽’에서도 그는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을 통해 슬며시 구토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즉, 그의 소설의 전반적인 시작은 바로, 이 ‘구토증’, 혹은 ‘인간이나 살아있는 것에 대한 욕지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바로, 존재에 대한 의문의 시작이며, 의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구토에서 시작된 사르트르의 의문부호는 결국 존재라는 문제로 귀결하게 된다. 그리고 이 존재로 귀결하는 과정은 데카르트의 코키토와 매우 흡사하다. 그러하기에 ‘구토’에서도 역시 로캉탱은 한 마로니에 나무뿌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유추를 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계속 반복한다. 그리고 동시에 ‘드 롤르봉 후작 역사연구’를 하고 있는 자신의 무용한 행위에 대해 깨닫는다. 아니, 모든 존재 이면에 감추어진 무용성을 그는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생각하고 있고, 고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어쩔 수 없는 문제 존재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에서 로캉탱은 자신의 분명한 존재의식을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어떠한 존재의미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생각은 존재의 무용성에 오히려 더욱 가닿아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어쩔 수가 없다. 그러하기에 소설 말미에 그는 그저 연명하노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굳이 왜 존재의 의미에 의문을 느끼는 구토를 하고, 존재에 대한 숱한 고뇌들 끝에 존재의 자각을 밝혀낸 것일까? 아무 소용이 없는데....... 사실, 소설 속에서 해답을 찾기란 어렵다. 아니, 기실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로캉탱은 그저 무력하고, 모순적인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한계이며, 이 소설 속에서 부여받은 그의 임무이자, 역할이다. 그러나 이는 사르트르 그 자신의 삶에 비추어 봤을 때, 매우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사르트르가 어떠한 인물이었던가? 세계대전에 몸소 참전하고, 이 후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드골의 독재 정치에 당당하게 맞섰고, 1960년대 베트남에서 자행되는 미국의 만행을 고발하였으며, 말년 실명했으면서도 68혁명 운동정신을 통해 혁명정신을 고무하려하였던 행동하는 지성인, 앙가주망의 대표이자 분신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그이기에 그의 분신이라 칭해지는 로캉탱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써 여기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바로 이러한 모순-로캉탱 자체의 모순 그리고 로캉탱과 사르트르 사이의 모순-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실존주의 그리고 지식인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사르트르는 한 가지 실례를 들고 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한 학생이 고민이 있어 찾아 왔는데, 그의 모든 형제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자식인 자신에 대해 끔찍하게 염려하고 있고, 늘 자신이 전쟁에 나설까 노심초사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로서 그 또한 조국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전쟁터에 나서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까지 어머니 곁을 떠나게 되면, 이미 두 아들을 전쟁터에 잃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어머니가 그만 돌아가시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어떻게 할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다고 사르트르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때 사르트르는 그에게 답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쟁터에 나서는 것도 옳고, 어머니를 곁에서 돌보는 것도 옳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진정 원했던 답은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이기에 만약 그가 전쟁터에 가고 싶었다면, 어떤 장군에게 상담하러 갔을 것이고, 만약 어머니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면, 신부를 찾아갔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즉, 그는 이러한 선택의 모순적 상황 속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며, 그러하기에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인류애로써의 선택은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그 학생은 어머니 곁에 남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르트르는 같은 혁명이라는 노선을 추구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들어야만 했다. 왜 인간을 허무하고 부패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규명하여, 인류애가 아닌 어떤 여지의 가능성을, 개인적 선택의 모순성을 남겨둔단 말인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상류층의 이데올로기에 따르지 않고, 하급계층의 사상을 대변하는 자로서, 그러나 하급계층의 근시안적인 시각이 아닌,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초월에 대한 희망을 가진 자로서, 그렇지만 어떤 노동력의 기능을 상실한 모순적인 존재로서 규명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순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식인은 실제로 태생이 하급계층이 아니기에 어떤 노동력이 없고, 그러하기에 늘 초월적인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표명하면서도,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상류층에 의해 조정당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지닌 이러한 태생적인 모순이야말로 그들의 기능이며, 역할이라는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과 소설로 돌아와 보자. 로캉탱은 무력하고 모순적인 지식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르트르라는 이제는 고전이 된 그 이름과 더불어 우리들에게 그러한 무력함과 모순을 계속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무력함 혹은 무용성이라는 모순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인간조건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사르트르가 그 말을 싫어할지라도.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무력하고 모순적인 인간존재 속에서 나온 인류애를 향한 앙가주망의 선택이야말로 분명 고귀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 이는 우리에게 늘 허무와 무의미라는 공포를 그 밑바탕으로 삼게 한다. 까뮈의 ‘이방인’의 뫼르소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것은 누군가 말한 어떤 반항이나, 모든 법칙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한 인간 생명에 관한 무의미, 허무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늘 우리를 공포스럽게 한다. 아니, 나를 공포스럽게 한다. 비록, 이러한 모순 속에서만이 어떠한 우리 삶의 신비, 선택의 거룩함이나 정당성을 확증 받을지라도, 그 언치에 맴도는 허무와 무의미를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나와 당신이 인간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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