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 첫사랑에 관한 너스레

 

 

 

 세상엔 참 많은 첫사랑 이야기가 있다. 아니,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존재하고 있고,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잊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때론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처럼 고통스럽고, 때론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처럼 숭고하며, 때론 영화 '몽정기'에서처럼 풋풋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그러나 과연 맨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는 그 현상이 첫사랑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걸까? 갈민휘의 경우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첫사랑은 배가 뒤집혀지도록 보고 싶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물론, 순전히 그것은 갈민휘 개인적인 정의지만. 여하튼...

 

 

  오랜 왕가위 팬으로써 나는 그의 모든 영화를 다 보아왔지만, 선뜻 '첫사랑'이란 영화는 손에 가질 않았다. 일단, 소문이 왕가위가 실제 감독이 아니라 제작만 한 거라서 그런 지 영 이상하다는 둥, 내용이 산만하다는 둥, 일반적인 평이 좋지가 않았고, 개인적으로도 귀여운 금성무와 이유유가 곁눈질로 흘끔흘끔 웃고 있는 비디오 케이스를 고르려 할 때마다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첫사랑이라는 말 그 자체가 좀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만 동생이 빌려다 놓은 영화 '첫사랑'을 우연히 보고 난 지금, 나는 내 첫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첫사랑이라는 지울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다시금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단,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 기본적으로 염두 해 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왜냐하면 영화가 실험적인 정신이 투철한 까닭으로 다소 산만한데다, 순전히 농담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구성방식 또한 매우 특이하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영화는 크고 작은 6가지의 에피소드로 나뉘고 있는데, 앞에 부분에 등장하는 4개의 에피소드가 뒤에 등장하는 2개의 에피소드를 만들기 전 실패한 시나리오로써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어이없는 것은, 정말 실패한 시나리오라서 그런지, 전혀 이야기 할 어떤 건더기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여기서 나는 이 네 가지의 에피소드에 대해선 전혀 다루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영화의 시작부터 중간 중간에,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이 영화의 감독인 갈민휘가 등장하는데 (이 영화는 왕가위에 대한 갈민휘의 오마주 영화라고 보면 될 거 같다), 이야기를 정리하는데 필요한 부분에 한에서만 대사를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여하튼 처음 영화는 해설자인 갈민휘가 등장하면서,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마구 남발하는 가운데, 본 에피소드로 넘어가고 있다.

 

 

 

본 에피소드 1. 첫 만남-정신병자와 몽유병자의 세계

 

 

  청소부인 임가동(금성무)은 정신병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몽유병에 걸려 돌아다니는 황유유(이유유)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매일 밤, 임가동은 황유유를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난 3개월 전 만자에서 동니만으로 이전 배치 받았다. 이 3개월 동안 난 매일 밤마다 몽유병 소녀를 만났다. 그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방을 헤맨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 가끔은 깨어있는 듯도 하다. 그녀가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임가동은 유유를 깨우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가해본다. 눈을 감은 채 넋이 나간 유유의 머리채를 잡고서 흔들어도 보고, 목을 졸라도 보고,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도 보고^^;; 그렇지만 유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깨어나질 않는다.

 

 

  "정말 알고 싶어요. 밤에 무엇을 하는지... 최근에 캠코더를 샀는데 자기 전에 몸에 고정시키죠. 그러면 밤에 한 일을 알 수 있겠죠. 치료가 안 되더라도 뭔가 찍히면 기분이 달라지겠죠."

 

 

  평소, 자신의 몽유병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유유는 어느 날 캠코더를 구입한다. 그리고 자신의 배에 부착하여, 자신의 몽유 상태에서의 삶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녀는 임가동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매일 밤, 그와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임가동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 그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몽유의 상태 속에서, 자신이 임가동과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안심을 하게 된 이유로, 몽유병이 완치되게 된다. 그래서 유유는 그 때부터 거짓으로 몽유병 흉내를 내면서, 임가동과 만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 둘의 관계는 조금씩 미묘해진다.

 

 

  어느 날 둘은 같이 식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유유는 흘깃흘깃 눈을 뜨며, 임가동을 훔쳐본다. 왜냐하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임가동이 유유를 빤히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무언가 유유에게서 미묘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임가동의 시선을 유유는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유유 그 자신이 더 이상 몽유병 행세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로 인해 결국, 둘의 눈은 서로 마주치게 되어 버린다.

 

 

 

 

 

 

 

"이런 걸 시작이라 하죠.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시작은 끝을 의미하기도 하죠. 모르는 게 약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의식이 몽롱할 때가 더 행복하죠. 사랑은 그가 보낸 꽃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곁에 있어주고 부드러운 한마디와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면,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하고 사람을 취하게 하죠."

 

 

  서로 눈이 마주침으로써 서로에 대한 감정에 대해 두 사람은 슬며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 몽유의 상태 속에서의 밤이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낮에서의 만남을 꿈꾸게 된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급작스럽게 전혀 다른 반전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언제나 사랑에 있어서 남자는 서툴고 성급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임가동은 매우 조급하게도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바로 다음 날, 자신의 사랑을 유유에게 고백해 버린다. 아니, 너무나 어이없게도 청혼을 신청한다. 그것도 캠코더를 통해 일방적으로. 그리고 것도 모자라, 유유에게 자신의 고백이 담긴 캠코더와 함께 둘의 결혼 청첩장을 보낸다. 어디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그가 보낸 청첩장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결혼 청첩장에 자신과 유유에 이름을 대신 새겨 넣은 청첩장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은 결혼식장의 장소가 잘못 기입된 청첩장이었다. 그러하기에 둘은 엇갈리게 되어 버리고, 각자 다른 장소에서 서로를 기다리다, 결국엔 만나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날 싫어한다면 얘기 할 텐데... 난 그다지 무지막지하지도 않은데..."

 

 

  그 후, 임가동은 밤마다 유유를 다시 기다리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더 이상 그녀는 오지 않는다.

 

 

 

 

 

본 에피소드 2. 사랑이후 -이일평과 조미나의 사랑이 끝난 이후의 세상

 

 

  이일평(갈민휘)은 조미나(막문위)와 10년 전 결혼을 약속했고, 집안이 부유한 미나가 모든 결혼준비를 다 했었다. 그러나 일평은 그런 관계가 싫었다. 그녀가 이상형이 아니었거나, 부담스러워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식장에도 안 나타나고, 그녀가 준 결혼반지만 들고 도망쳐서 숨어 지내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서, 작은 구멍가게 하나를 꾸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무엇이냐면, 그가 10년 동안 거의 날마다 미나에 대한 악몽을 꾸어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는 미나와의 결혼을 배신하고 도망쳤을 뿐 아니라, 미나가 자신에게 준 결혼반지를 현재의 자신의 아내에게 결혼반지로 주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악몽은 항상 미나가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죽이거나, 아내의 손가락을 잘라, 자신의 결혼반지를 되찾아 가는 형상을 띠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전 애인이었던 그 공포스러운 미나 아니, 그에겐 사탄 그자체가 찾아오게 된다.

 

 

"콜라 하나 주세요."

 

 

 

 

 

 

 

  아무런 예감도 없이 자신의 가게에서 평화롭게 수박을 자르고 있던 일평에게 미나는 이렇게 갑작스러운 등장을 한다. 그래서 순간 놀란 일평은 자기도 모르게 수박을 자르던 칼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겨서 쥐어든다. 그러나 미나는 아무 말도 없이 일평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그대로 콜라를 마신 후, 계산을 하고선,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그녀의 심정은 사랑을 잊는 술을 마신 기분일 거다. 매정한 애인이 떠났는데, 그녀도 나도 서로 상관 않고, 왜 이리 간단하지? 첫 콜라 병을 시작으로 사탄은 되돌아왔다. 누군가가 감시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가게 일에 관심이 없어졌다. 혹시 내가 사랑을 잊는 술을 콜라에 타서 그녀에게 마시게 한다면 그녀가 알아챌까? 그러나 그게 어디서 파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녀가 진짜 마신다면 날 무시할까? 세상은 마음처럼 안 되던데 이번에 정말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뒤로 종종 미나는 일평의 가게에 들려, 똑같은 방식으로 콜라를 주문하고선, 그 자리에서 다 마신 뒤, 가버리곤 한다. 그리고 오직 일평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아직도 그녀가 그를 잊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며, 일평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일평의 아들을 예전에 자신과 일평이 자주 만나던 식당에 데리고 가서, 항상 일평과 자신이 즐겨 먹던 음식을 사주던가, 혹은 일평의 부인과 친해져서, 일평을 위해 만드는 옷 뜨개질 감을 미나 자신의 취향인 노란 조끼로 고르게 하던가... 이런 식으로 일평을 옥죄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 날 오후, 그녀는 가게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일평의 호주머니에 공포스러운 메모 하나를 남겨 놓는다.

 

 

  "오늘 밤 7시 30분 항상 만났던 그 식당에서 만나요."

 

 

  그러나 너무나도 그녀가 두려운 일평은 차마 나가질 못하고, 대신 그녀와 그를 잘 알고 있던 후배를 속여, 그 자리에 내보내버린다.

 

 

  "10년 동안 알고 지내 온 형이 나에게 이럴 줄 몰랐다."

 

 

  식당엔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일평의 후배와 미나가 앉아있다. 그리고 일평은 자신의 가게 앞에서 후배의 명복을 빌고 있다. 그런데 다행히도 후배는 살아 돌아온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며, 미나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일평에게 전해준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화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왜냐하면 미나가 일평을 어느 정도 체념한 것이 분명히 드러나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상하게, 일평의 공포감은 쉬 사라지질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공포감의 원인인 결혼반지를 어떻게 하든 미나에게 되돌려 주려고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자신의 부인의 손에 꼭 끼어져 있다. 그래서 여기서 영화는 약간의 위트를 발휘해, 일평이 자신의 부인 몰래 강탈하는 장면을 등장시킨다. 잠들어 있는 부인의 얼굴에 보자기를 뒤집어씌운 후, 막대기로 내리쳐 정신을 잃게 하게까지 하는 과격한 방법으로^^;; 그리고 이렇게까지 훔친 결혼반지를 일평은 두건을 뒤집어 쓴 채 미나에게로 달려가 되돌려준다. 그러나 며칠 후, 미나는 일평의 가게에 들려, 평소처럼 콜라를 마시는 가운데, 일평이 잠깐 다른 일을 보는 사이에, 가만히 결혼반지를 카운터에 놓고 나가 버린다. 그리고 이를 곧 알게 된 일평은 비 때문에 아직 떠나지 못하고, 처마 밑에 우두커니 서 있는 미나에게 다가간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그 날 밤을 기억한다. 그 날 갑자기 소나기가 왔다. 갑자기 용기가 생겨,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10년 만에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그녀 곁에 가서 아주 중요한 말을 했다. ‘우산이 있는데 차타는 곳까지 바래다 드리죠.’ 나중에 몇 번이고, 그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 말의 중요성을 몰랐다. 오히려 엉뚱하게 느껴진다. 평소에 기억을 잊는 술, 사랑을 잊는 물, 다리 없는 새 등을 썼는데, 그 순간에는 한 마디 아니, 반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우산을 받쳐 든 일평은 미나에게 씌어주며, 택시를 잡아준다. 그리고 미나가 택시에 들어서는 순간, 10년 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미나에게 이야기한다.

 

 

  "미안합니다."

 

 

  그 날 이 후, 일평은 자신의 부인에게는 새 결혼반지를 사주고, 미나의 반지는 자신만의 추억의 상자에 넣어둔다. 그리고 더 이상 악몽도 꾸지 않고, 다시 평소처럼 생활 할 수 있게 된다. 또, 평소 그녀가 좋아하던 노란 조끼를 입은 사진을 한 통 찍고서, 사진관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현상을 맡긴다.

 

 

  미나는 현상을 하면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일평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끝으로, 영화는 다시 처음처럼 갈문휘가 혼자 나와, 첫사랑과 영화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정리한다.

 

 

  "몇 편의 첫사랑 이야기를 찍고 나서야 내가 첫사랑을 찍기에는 부적당하다는 것을 알 게 되었죠. 지금 첫사랑이라는 영화를 찍었다고 쳐요. 내게 첫사랑이 주는 것은 눈물하고 과정을 그린 것들이었어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 느낌은 이래요. 힘들고... 2년 동안 알아낸 것이 아! 사랑은 이런 느낌이어야 하는 거구나. 그리고 나서 현실에서는 찾기 힘들죠."

 

  "아 좋다. 아 찡하다. 제 첫사랑의 느낌은 이런 감명 같아요. 냉정히 생각하면 그건 얻기도 힘들고 잊기도 힘들죠. 아무 때나 있지도 않죠. 사람은 이상적인 첫사랑의 느낌을 가질 수 없죠. 인간은 너무 더러운 존재고 조잡스러우니까요. 어느 날 불쑥 나타나고, 정말 그 애가 잘됐으면 하고 바라고, 둘이 잘됐으면 하고 바라고, 그 후에도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램인데, 잃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마음이죠. 그러다 보니 나도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다 찍었는데 시작할 때와 같은 기분이에요. 알고 보니 숙명적으로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하는 거였어요. 그래야 천천히 얻을 수 있는 건데..."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보고, 그게 이거였어? 여긴 이렇게 찍었어? 많은 일들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헤어지고 난 뒤, 그녀는 요즘 어때? 잘 있어? 또 뭐해? 이랬으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아직 하고 싶은 걸 다 못했는데... 괜찮아요."

 

 

 

  어쩌면 누구에게나 첫사랑이란 것은 심각한 병적 증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각하면, 몽롱하면서도 아리고, 때론 공포스럽기까지 한... 물론,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것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 마련이고,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쉬 첫사랑에 대해서만큼은 잊지 못하고, 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의 순수에로의 집착이며, 우리들의 잃어버린, 그러나 되찾고 싶은 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세상에 온갖 시간과 물질들로 찌들어버린 우리는 첫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스럽고, 괴롭다. 이미 너무나 멀어져, 다시는 다가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여, 언제까지나 첫사랑에 얽매어 있을 순 없는 법이다. 그러하기에 아마도 갈민휘는 자신의 그 첫사랑에 대한 이러한 집착과 모순을 그 동안의 왕가위를 오마주하면서 왕가위 영화의 내용을 빌려 정리해 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 영화를 보았거나, 지금 이 영화에 대한 내용을 읽어 본 이라면 위의 물음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첫 편의 에피소드에서 보여주었듯이, 첫사랑은 처음부터 병적 증상이며, 또한 너무나도 성급하며, 그러하기에 모든 것은 오해가 되어버린다. 그러니 사랑이후에 관한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처럼 우리는 첫사랑에 대해 터무니없는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터무니없는 것이며, 오.해.다. 그러하기에 결국, 첫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해인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잘못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 아닌 것이다. 그저 오해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결코 공포의 대상도, 고통의 대상도 될 수가 없다. 그러니 아주 당연하게, 그것은 자신만의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밖에 없다. 추억이란 이름의 보물 상자에 언제나 곱게 접어서 가끔씩 열어보면 그만인...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주 당연한 이 이야기들을 하기 위해서 영화는 왜 그토록 부산스러운 너스레를 떨었던 것일까?

 

 

  너.스.레.를. 떨.다... 수다스러운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능청을 떤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면서 아주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나는 바로 이 부분이 내내 걸렸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 왕가위가 보여준 영화 속에서의 사랑이야기는 주로 아비정전에서의 '다리 없는 새'와 동사서독에서의 '취생몽사'로 대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그의 영화를 빌린 이 영화 속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즉, 그 동안의 왕가위 영화 속에선 어떤 너스레가 없었다고 갈민휘는 생각한 것 같다. 그러하기에 이 영화 속에서도 그는 너스레라기보다는 아주 뻘쭘한 대사 한 마디를 던지고 있다.

 

 

  "우산이 있는 데 차 타는 곳까지 바래다 드리죠."

 

 

  정말로 엉뚱하기 그지없고, 생뚱맞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이 말은 무언가 너스레다운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일평은 미나에게 아주 뻔한 능청을 떨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전혀 모르는 척, 그리고 그 동안 서로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가 분명히 무언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이 능청을 통해,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모든 말을 다 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때는 분명히 하나의 너스레가 우리들의 그 온갖 공포와 고통을 감추고서도 그것들을 씻어 내리며, 동시에 그것들을 정리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하기에 갈민휘는 너스레를 떨기엔 다소 커 보이는 첫사랑의 문제를 그렇게 영화를 통해서 줄곧 너스레를 떪으로써, 씻어내고, 정리해 간 것 같다. 물론, 너스레로만은 부족하기에 영화 속에선 분명히 일평이 미나에게 사죄를 하며, 또 마지막에 이야기의 총 해설자로써 그 스스로 눈물을 뿌리기도 하지만... 여하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시종일관 고수한 이러한 너스레가 그의 첫사랑의 문제를 정리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의 문제도...

 

 

  어쩌면 너무나도 무겁고, 심각한 나는 아직도 너스레를 떨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하기에 내게 있어 첫사랑이란 것은 누군가의 말들처럼 명치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저린 기억이며,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제는 그런 기억과 고통일지라도, 너스레를 떨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이며, 또 나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때는 누군가의 너스레가 참으로 부담스럽고, 측은해 보이기 짝이 없을 때가 있다. 그리고 때론 정도를 지나친 너스레 때문에 진실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나 진실한 너스레 속에는 상대와 자신에 대한 배려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리 무겁거나 심각하진 않지만, 무언가 분명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스레 그 자체는 언제나 비극적인 것을 비극적이지 않도록 하는, 그리고 고통스러운 것을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는, 힘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첫사랑과 같은 순수에로의 집착과는 양립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순수에로의 집착은 분명 고귀하지만, 그 자리에 그대로 똬리를 틀고 감아 들어가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도록 고인 물이 썩는 것처럼, 혹은 불변할 것이라 믿은 그 모든 것들이 배신하는 것처럼. 그러하기에 오히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순수에로의 집착은 언제나 늘 무겁고, 위험해 왔다. 그러나 순수라는 것을 동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무엇을 동경할 수 있단 말인가?

 

 

  종이를 접는다고 하여, 종이의 부피와 무게가 줄어드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그 종이 자체가 다른 물질로 전이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첫사랑이라는 순수에 대해 다소, 너스레를 떤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너스레를 통해 우리가 부피와 무게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크기가 다소 작아진, 첫사랑의 문제와 순수의 문제를 대면 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를 그 무서운 첫사랑의 공포로부터, 순수에로의 집착에로부터, 좀 더 한 발짝 나아가, 다시는 대면할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또 다른 첫사랑의 순수에게로 데려다 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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