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없는 자의 편지

 

 

당신의 영혼에 한없이 흔들리는

흐느낌이고 싶었습니다.

영혼이 없다면 당신의 마음에

끈덕지게 눌어붙은 눈물이고 싶었습니다.

그마저 없다면 가난한 거지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뿌리쳐진 제 손길은

어디에 가 닿아 미끄러져야만 하는 건지요?

세상이 아닌 당신을 전부가 아닌 하나를

가질 수가 없고 찾을 수가 없어

그 무엇도 드릴 수가 없고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어

아무런 믿음 없이

아무런 바람 없이

메마른 당신께

안부를 묻고 또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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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이야기 - 2015년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숨 외 지음 / 문학사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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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이야기 - 아프고 느린, 그래서 어쩌면 너무 오래된 접근방식에 대한 의문

 

 

  저자가 글속에서 밝힌 대로 뿌리라는 오브제가 지닌 한계 때문이었을까? 글속 화자의 남자친구의 뿌리에 대한 깊은 천착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처음 쓰일 때부터 일정부분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될지 예정된 부분이 있었다. 뿌리를 통째로 뽑힌 어느 한 인간의 자아성찰적인 고백과 그를 바라보는 한 여인의 뿌리 찾기, 이 글은 이렇게 두 남녀의 뿌리라는 존재 찾기의 작업을 실제적인 뿌리를 사용한 설치미술 이야기로 오롯하게 풀어내고 있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글속 남자주인공이 거대하고 무거운 뿌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수십 개의 못을 박고, 촛농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처럼 아릿하고 느리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방식이 뿌리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훌륭한 방식이라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글을 읽는 내내 이러한 방식에 대해 구태의연하다고, 그래서 무언가 아쉽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일까? 물론, 여기엔 내 개인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다른 철학적 접근방식과 선입견이 작용한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이 글을 온전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지금부터 나는 글을 내 나름대로 재구성해본 후, 읽는 동안 떠올렸던 내 개인의 뿌리의 접근방식과 대비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먼저, 글을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저자의 뿌리를 묘사하는 세밀한 방식이었다. 마치 실제로 뿌리를 마주대하고 있는 착각이 일게끔 김 숨 작가는 뿌리에 대한 묘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던 부분은 거의 첫 서두에 나오는 복숭아나무 뿌리에 관한 묘사이다. 사람의 얼굴 표정과 비교하면서, 그 중에서도 특별히 모나리자의 얼굴 표정과 비교하면서, 복숭아나무 뿌리에 빗댄 인간 감정의 복잡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을 처음부터 빠져들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자국 나아가, 포도나무 뿌리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천근성을 지닌 뿌리에 대해 접근한다. 천근성을 지닌 뿌리는 깊게 뿌리를 내리는 심근성의 뿌리와 달리 넓게 퍼지는 뿌리를 의미한다. 즉, 어떤 면에서 언제든지 쉽게 뽑힐 수 있는 존재의 불안정성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이 글속 화자와 그리고 그 남자친구와도 같이. 물론, 어떤 면에서 집요하게 뿌리에 집착하는 글속 주인공의 남자친구는 심근성의 뿌리의 특질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고아였기에, 태생부터 뿌리가 뽑혀진 인간이 지닌 안정에 대한 강박을 오히려 더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즉, 주인공의 남자 친구는 글속 화자보다 오히려 훨씬 더 천근성의 특질을 지닌 인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속 천근성의 특질을 지닌 포도나무 뿌리라는 오브제와 글속 남자친구 그리고 글속 화자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결국, 글속 화자의 경우도 일제 강점기 때 종군위안부가 됨으로써 원치 않게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통째로 뽑힌 고모할머니의 손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할머니의 손금은 남자친구의 포도나무 뿌리 작품에 ‘남귀덕’이란 고모할머니 이름으로 고스란히 되살아나, 그녀와 남자친구를 정신적으로 연결시켜주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글은 뿌리라는 오브제와 글속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잘 맞물려진 구성과 의미를 갖춘 글로 보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내 개인의 의문은 서두에도 밝혔지만, 그 접근방식에 있어서의 구태의연함이다. 즉, 또 다른 접근방식들에 대한 내 개인적 질문들이다.

 

 

  첫째로, 뿌리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읽는 동안 내 머리에 스친 생각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읽었을 때 알게 된 덩이식물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덩이식물은 감자와 고구마와 같은 종류의 식물들로 나무들과 달리, 따로 줄기와 뿌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즉, 감자나 고무나 그 자체가 뿌리이면서 동시에 줄기이고 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식물들의 또 다른 특징은 나무 한 그루에 뿌리 하나 줄기 하나라는 방식으로 따로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는 나무와는 달리, 덩이라는 그 말 자체가 일컫듯이 뿌리가 수평적으로 엉켜 하나의 군집으로 존재하는 방식의 식물들을 의미한다. 즉, 감자와 고구마는 뿌리 하나에 수십 개의 감자와 고구마들이 뒤엉켜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뿌리에 대한 개념은 깨지게 된다. 왜냐하면 뿌리가 더 이상 존재의 근원을 찾는 접근방식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표현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선 더 이상 뿌리에 대한 물음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덩이식물이라는 한정적인 존재방식의 이야기이기에, 극단적인 설정이다. 그렇지만 뿌리에 대한 천착을 저자가 글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면, 심근성과 천근성이란 뿌리라는 설정보다 더 근원적인 이런 접근방식에도 물음을 가져야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두 번째는, 포도나무 뿌리라는 대상이었기에 글을 읽는 동안 떨쳐내기 힘들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들이었다. 무엇이냐면, 나무의 뿌리가 아닌 잘린 가지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사실, 신학생이었기에 신학을 포기하는데 있어 나는 내 나름의 화두와 이유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내가 찾았던 것은 성서에서 나온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의 비유에서였다. 성서에서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포도나무이기에 그 줄기에 접붙여지지 않은 가지는 말라비틀어질 것이라고, 그 때문에 잘려서 불태워질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 길로 가기를 거부하는 이라면 과연 이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게 될까? 내 경우엔 줄기가 아닌, 말라비틀어지고 잘려서 불태워질 가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내 자신이 너무나도 말라비틀어져, 그 이유로 목마른 가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까닭으로 잘리는 가지는 나무 전체가 말라비틀어지지 않게끔 하는 희생의 제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의 제물로 불타오르는 표징의 불꽃은 참 포도나무에게 자신이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생생한 증거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지극히 모순이고 역설이다. 그렇지만 애초에 이러한 자기 부인이라는 모순적인 자기 정체성의 논리로 자아를 구축한 내게 있어서, 뿌리에 대한 이 글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많았다. 왜 그토록 집요하게 뿌리에게만 집착한단 말인가? 잘리고 버려진 줄기와 가지는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란 말인가? 물론, 이 글이 처음부터 천근성이란 뿌리의 특질을 통해 쉽게 흔들리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쓴 글이기에, 이러한 물음은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와 같이 너무나도 다른 물음의 전제를 지닌 인간에게 있어선, 이 글의 그러한 점들이 너무나 구태의연하게만 느껴졌다. 만약 폭을 조금 더 넓혀 나 같은 인간에게도 질문할 수 있는 거리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자꾸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전체적으로 이 글에 대한 평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매우 잘 쓴 글이고, 잘 짜인 글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뿌리라는 문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무겁다. 그 이유로 늘 한 가지 방식으로 정형화되어 접근되어졌고, 질문이 던져져 왔다. 사실, 뿌리란 문제를 어떻게 쉬 가볍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하지 않을까? 조금 더 다양한 방식과 물음들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그러한 방식이 글을 방만하고 산만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여, 어쩔 수 없이 정공법을 택했다면, 최소한 남녀 주인공의 다소 신파적인 설정은 피했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뿌리의 문제로 재고해볼 수 있도록... 아니면 뿌리 오브제 그 자체에 조금 더 집중하여, 자연스럽게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뿌리의 문제로 환기하여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은 어땠을까? 잘 쓴 글이고, 좋은 글이었기에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아, 딴지 아닌 딴지를 자꾸 걸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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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는 풍경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은

해후 끝에 돌아서는 걸음만이

반드시 외로운 법은 아닐 게다.

일 년에 한두 번 겨우 보는

오래된 벗을 만날 요량이면

벌써 돌아오는 길목에 남겨진

자기 발걸음소리만  맴돌아

귓가에 얹히곤 한다.

그래도 터벅터벅 얼굴을 마주하는 까닭은

반드시 할 말이 많아서는 아닐 게다.

더러는 각기 다른 기억으로

서로가 공유했던 추억을 짜맞추다

잠깐 적요해진 순간엔 어색하여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다 끝내 우리는

서로의 삶에 가장 시시껄렁한 이야기들로

농담 따먹기를 하며 시간을 때우겠지만

무엇이 그토록 아쉬운지

서로 각기 다른 정류소로 돌아서는 길

서로가 마중을 하겠다며 아옹다옹하다

누군가는 버스를 타는 뒷모습을

누군가는 인파에 가려진 얼굴을 찾아

서로 미덥게 내내 바라다볼지도 모른다.

그렇게 버스는 떠나고 인파도 밀려나겠지만

오래도록 남겨진 서로의 잔상을 안고

해후 같은 만남과 이별을 꿈꾸며

우리는 또 다시 외로운 버스 한 대와 

수없는 인파의 물결 속 사라질 한 얼굴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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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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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 순수한 사랑의 원형에 대한 고찰

 

 

 

 한국 문학에 있어서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내게 있어서, 박범신 작가의 ‘은교’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노년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욕구에 대한 고민 앞에서 마치 내 자신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고, 때문에 나는 ‘은교’에 대한 품평을 쓰면서 내 사랑에 대한 갈망과 음심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거의 텍스트의 맥락과 관계도 없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이후 박범신 작가의 다른 작품을 특별히 찾아본 적은 없다. 어쩌면 이번 ‘소소한 풍경’의 경우에도, 모임에서 연말행사로 도서교환 이벤트를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제비뽑기로 ‘소소한 풍경’을 뽑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박범신 작가의 최근작인 이 책을 굳이 사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사실 언제나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는 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들에 애당초 무관심한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박범신 작가의 경우는 ‘은교’에 대한 강렬한 기억 때문에, ‘소소한 풍경’이 제비뽑기로 뽑혔을 때 내심 만족스러운 기분이었고, 그 때문인지 쉽게 다가설 수가 있었다.

 

 

 처음 이야기는 소설가이자 전직교수였던 저자에게 옛 제자인 ㄱ으로부터 뜬금없이 온 전화통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 웬 생뚱맞은 인사말인가? 거의 10년 만에 전화해서 이게 어디 꺼낼 법한 대화인가? 게다가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라니? 너무 끔찍하여 상상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렇지만 저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이야기에 어떤 홀림을 느낀다.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는 곧 저자가 아닌, 저자의 제자 ㄱ으로 넘어간다.

 

 

 ㄱ은 저자인 소설가의 제자 중 특이한 제자였다. 저자가 기억하는 그녀의 소설 ‘우물’은 말 그대로 몽환의 덩어리였다. 때문에 합평 시간에 독설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소설에 대한 동기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단답형일 뿐, 도통 소통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소설을 쓰는 것보다는 젊은 시절 내내 한 남자에게만 골몰했다. 남자1이라는 존재, ㄱ에게 있어 남자1은 반짝이는 청춘의 모든 것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모든 존재가 사라지고 그와 그녀 자신만 남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다. 불우했던 그녀의 유년시절의 기억인 오빠와 소녀시절의 기억인 아버지란 거대한 존재를 그녀는 그렇게 남자1을 통해 모두 상쇄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사랑이 지속될 순 없는 법이다. 아니, 연애라는 관계에서 결혼이라는 독점과 소유욕이 지배하는 관계 속에 놓이게 되면, 젊은 날 믿었던 모든 사랑이라는 감정의 허울은 지워지고, 결국엔 남는 것은 상처뿐인지도 모른다. 최소한 ㄱ에게는 그랬다. 자신의 아버지와의 유년의 고리인 선인장을 남자1이 싫다고 말하는 순간, 그 모든 젊은 날의 환상에 금이 가기 시작하리라는 사실을 어찌 그녀가 예감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이라 믿었던 남자1이 자신을 그저 소유하고 독점하기 위해 안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청춘의 찬란한 봄날 어떻게 미리 감지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남자1은 그녀가 꿈꾸던 모든 사랑을 짓밟고 능욕해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남자1과 ㄱ의 관계는 끝이 난다. 그렇게 남자1과 이혼하게 된 후 ㄱ은 다시 그녀의 유년의 장소였던, 오빠-아버지-어머니가 같은 절벽으로 떨어졌던, 그래서 도망쳤던, 구소소로 되돌아온다. 그곳은 그녀에게 있어선 오빠-아버지-어머니란 이름의 묘지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그곳으로 되돌아간 것일까? 그 묘지에서 스스로 옛집에 혼자 살면서 마치 스스로에게 유배라는 형벌이라도 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지만 도리어 그러한 유배생활이, 그러한 그녀 스스로의 감금이, 혼자라는 그 삶이, 그녀는 왜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혼자 사니 참 좋다고. 하지만 그녀는 곧 동네 근방에서 물구나무를 하루 종일 서고 있는 ㄴ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어느새 ㄱ은 ㄴ에게 물구나무서기론 죽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둘은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서 그녀는 말한다. 둘이 사니 더 좋다고. 왜일까? 그녀가 남자1에게서 받은 상처를 ㄴ에게서 받지 않게 되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미리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남자1과 함께 살면서 찔린 가시는 그녀 손가락을 꿰뚫고 들어가 영원히 각인될 상처가 되었지만, ㄴ에게는 그 가시가 속으로 감춰져 있었음을 어떻게 그녀는 감지할 수 있었을까? 그저 마치 모든 운명처럼, 예정처럼, 모두 우연에 기인한 탓일까? 아니면 서로를 향한 홀림이었을까? 결국, 둘은 깊은 관계를 맺게 되고, ㄴ은 묘지 같은 그녀의 터전에 낙엽을 쓸고, 지붕을 수선한 후, 샘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그 둘은 서로가 하나가 되는 깊은 관계를 갖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섹스란 말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그 언어가 갖는 의미가 너무 한정적이다. 아니, 그것에 대한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러하기에 ㄱ은 스스로 ㄴ과의 그 행위를 하나의 ‘덩어리’라 규정짓는다. 그리고 그런 그 둘의 삶에 ㄷ이 어느 날 자기 몸채만한 큰 가방을 들고 찾아온다. ㄱ은 또 말한다. 셋이 사니 진짜 좋다고. 왜 그랬을까? ㄱ과 ㄴ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절정에 이르는 그 순간에 ㄷ이 자신들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왜 말리지 않았을까? 아니,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둘의 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ㄷ을 그들의 품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ㄱ과 ㄴ 그 둘에게, ‘자기들끼리만, 너무해요!’란 ㄷ의 외침이 팡파르이고 종소리가 될 수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누군가 함께 향유하고 있는 도락에, 특히 성적인 도락에, 다른 누군가가 저와 같은 소리를 한다면, 그것은 외마디 비명이거나 혹 지탄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그 외마디 비명에 놀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 이를 쫓아내거나 소외시키지 않아 왔던가? 그런데 ㄱ과 ㄴ은 어떻게 ㄷ의 그 소리를 팡파르와 종소리와 같은 울림으로 받아들이고, 같이 하나가 되어 더 큰 원을 그리고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 이것이 일반적인 현실에서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그 다음 삶은 또 어떠했던가? 너무 행복해서 갑자기 어느 날 연탄가스로 함께 공동자살을 꿈꿨던 ㄷ, 그리고 어느 날 그 둘로부터 도망치려했던 ㄴ, 그리고 마지막 절정의 순간 날개를 달아 우물 속으로 추락해버린 ㄴ!!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ㄴ이 ㄱ의 집으로 들어와 샘을 파기 시작한 그 기점으로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ㄱ과 ㄴ이 ‘덩어리’가 되고, ㄷ이 또 다시 들어가 셋이 함께 ‘덩어리’가 되어, 마지막 절정으로 치닫기까지. ㄱ의 묘지에 샘이란 생명을 남겨두고서, 자신은 절정 가운데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샘으로 날아 들어간 ㄴ, 그렇지만 그 꼭짓점엔 ㄴ의 날개에 버튼을 눌러줄 ㄷ이 필요했다. 아니, 어쩌면 내 개인적으론 이곳에서 ㄷ의 노래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으랴...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그런 사람 나는 못 잊네.’ 이 노래가사처럼 평생 동안 심장에 남겨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겨울 그 셋이 함께 누린 열락의 세계는 이생이라는 생애에서는 죽음이라는 절정에 들어서지 않고서는 담보되지 않는 불가능이기 때문일까? 마치 마침표를 찍듯이 우물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ㄴ의 등을 ㄷ이 꼭 누르는 그 순간, 이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실상 끝나버린다. 그렇지만 데스마스크로 되살아난 ㄴ은 마치 불멸의 사랑의 증표처럼 남아, ㄱ과 ㄴ의 삶에 끝없이 솟아오르는 샘의 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고 잠깐 생각해 본다.

 

 

  사실, 이야기를 나름 재구성해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재구성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ㄱ의 관점에서 소설의 전반부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에는 광주혁명에서 죽은 형과 아버지를 가슴 속에 가시로 숨긴 ㄴ의 이야기도 없고, 북한에서 어머니와 오빠와 넘어와 어린 나이에 중국인 사씨에게 능욕당하고 오빠를 뺏긴 ㄷ의 가시 이야기도 없다. 그렇지만 애초에 이 소설이 소설가 자신의 말대로 서사가 없는 소설을 지향했던 이유로 서사를 잡을 수 없는 까닭도 있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서사를 중심으로 탄탄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소설이 아닌, ㄱ과 ㄴ, 그리고 ㄷ이 완전하게 합일되는 순간인, ㄴ이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그 순간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즉, 그 순간에 대한 묘사 그 자체로 완성을 구가하고자 쓴 소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하기에 처음에 다 읽고서 나는 무언가 아련하고 먹먹한데 그 감정을 표현할 길이 당최 없었다. 그리고 품평을 하기 위해 글의 서사를 떠올려보려 했을 때도 전혀 서사 자체가 떠오르지 않고, 그 절정의 장면만 떠올라, 다시 발췌독으로 ㄱ,ㄴ,ㄷ에 대한 개인적 서사를 다시 읽어야만 했다. 아니, 거의 다시 내용을 훑어야만 했다. 대체 왜일까? 왜 쉽사리 나는 처음에 읽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을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먹먹한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그리고 왜 읽은 지 한 달도 채 안된 소설의 모든 서사를 깡그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오직 그 절정만을 기억하게 된 것일까? 지금 이 순간도 이 기묘한 현상을 설명하기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최대한 내 정직성을 담보로 한 내 마음속 소리에 귀를 기울여, 지금부터 설명해보고자 한다.

 

 

  먼저, 내 마음의 내밀한 소리를 듣기 전, 나는 이 소설이 분명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거라는 예상을 가져본다. 사실, 줄거리를 재구성함에 있어서도 나는 내내 의문투성이이었다. 그래서 거의 내용의 재구성 전반이 질문형으로 되어있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적 품평 글쓰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의문형과 질문형으로 줄거리 자체를 재구성할 정도는 아니다. 즉, 그만큼 내 개인에게도 이 소설의 지향점들은 도무지 와 닿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소설의 인과구성의 개연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거의 깡그리 그 체계를 무시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만큼 많은 우연과 몽환으로 점철되어져 있다. 게다가 사회 상식선에서 남자 한 명과 여자 둘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난감하다. 물론, 이보다 더한 성적인 실험을 하는 소설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이 행위 묘사 자체에 대한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이유로 정말 야하게 이 행위들을 묘사했다면, 나는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엔 저자 표현대로 단순히 섹스라고 표현되는 단어로 담기엔 한정적인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저자의 표현방식대로 일단 ‘덩어리’라고 하자. 그런데 그 ‘덩어리 됨’이 왜 둘에서 셋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을 안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둘에서 셋으로 확장이 되어 원이 되어간다면, 셋에서 넷, 넷에서 다섯으로 확장되어가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겠는가? 물론, 소설이 점점 그렇게 확장되어 가다보면, 가뜩이나 서사도 없는데, 점점 더 사공이 많아져 산으로 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소설이 셋으로 확장된 관계가 넷에서 다섯으로 확장되어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소설이라는 점을 굳이 상기시키고 싶어서였다. 즉, 이 소설은 관계에 대한 소설이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 중에서도 아마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둘이 아닌 셋, 넷, 다섯으로 확장되어가는 덩어리 같은 사랑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 소설 가운데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는 가시이다. 특히, 저자는 ㄱ,ㄴ,ㄷ, 이렇게 세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서 가시를 안으로 숨긴 선인장 비유를 들고 있다. 그리고 굳이 상징성을 찾자면, ㄱ은 아버지-오빠-남자1로 이어지는 남자에 대한 가시, ㄴ은 광주혁명에서 비롯된 아버지-형이라는 가시, ㄷ은 북한에서 넘어왔다는 가시와 더불어 자신을 능욕한 것도 모자라 오빠를 공안에 팔아넘긴 중국인 사씨를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가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이 가시들이 이 소설에서 굳이 꼽자면 서사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뭐랄까? 가시들 자체는 어떤 면에서 진부한 면이 있다. 저자가 굳이 ㄱ이라는 축을 통해 (그 축이 아마도 남자로 대변되는 모든 폭력의 가시를 숨긴 우리를 대변하고 있으리라 추정해보지만 여하튼), ㄴ의 광주혁명의 가시와 ㄷ의 북한이라는 가시까지 하나로 덩어리져 품어보려 했다고 한정짓는다면, 이 소설은 그냥 일종의 풍유적 상징성을 지닌 사회소설로 보아야할 것이다. 물론, 이 지점에 대해 내 개인이 부인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다만, 내 개인이 이 소설을 읽어 내려감에 있어서는 이면에 숨겨진 이러한 코드가 드러나기엔, 이 소설이 너무 소설의 절정의 한 순간 장면으로 집약되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그냥 도무지 사회적 소설로 읽히지가 않았다. 실상, 내가 소설의 내용을 재구성하려 했을 때도 그 때문인지 ㄱ,ㄴ,ㄷ의 어떤 가시의 내용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저 가시가 안으로 숨겨져 있다는 강렬한 기억과 더불어, 그 가시들이 응축되었다 폭발되는 지점으로써, 날개로 돋아나는 장면인 ㄴ의 우물에서의 추락장면이 내내 떠올랐을 뿐이다. 왜 ㄴ은 우물 안에 떨어짐으로써 남겨진 ㄱ,ㄷ의 샘이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왜 그 순간을 더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다른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셋으로 확장된 사랑이란 게 대체 이 세상에서 가능한 사랑이란 말인가?

 

 

  내 개인적으로 박범신 작가가 종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런 사랑에 관해 둘이 아닌 셋이어야만 완벽한 사랑을 이루고, 그 중에서도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그 사랑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사상과 그리스도 사상에 입각하여 이 소설이 쓰였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하기에 그저 순수하게 문학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바라보고 싶다. 일단, 소설이라는 공간 하에서는 어떤 실험도 가능하다는, 그러하기에 어떤 사랑도 가능하다는,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가능성은 작가의 바람이며, 그 바람은 독자에게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이며 샘물이라는, 이러한 관점으로 이 소설을 바라보고 싶다. 그렇다면 내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저자는 어떤 면에서 철저하게 ‘늙음’의 미학이란 관점 하에서 사랑을 재해석하여, 욕망과 소유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근원적인 사랑의 형태에 대해 고민하고 고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둘이 아닌 셋, 넷으로 확장될 수 있는 ‘덩어리 되어감’의 사랑에 대해선 일정부분 수긍할 수 있다 치더라도, 왜 누군가의 희생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일까? 굳이, 사랑의 불멸에 대해 말하진 않더라도, 무언가 더 오래 지속 가능한 사랑에 대해 고찰할 필요는 없었을까? ‘자기들끼리만, 너무해!’란 소설 속 대사로 ‘사랑의 관계가 단순히 둘이란 법은 없다!’하고 팡파르와 종소리를 울린 것처럼, 사랑의 시간도 단순히 영속이거나 순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다변적 사고로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은 없었을까? 꼭 순간으로 완성되는 사랑만이 심장 속에 남아 잊을 수 없는 걸까? 우리 생이란 한계 때문에? 하지만 이런 숱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나는 미리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침표가 없는 여운은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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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이들에게 띄우는 편지

 

 

 

그때 우리가 동아리 방

습작집에 치열하게 쓰던 시들과

서로를 향해 뜨겁게 묻던 안부들은

글이 아닌 우리들의 낭만이었다.

그때 우리가 학교 근방에서

허공에 붕 뜬 말들로 미열에 들떠

떠들었던 사상들과 생각들은

언어가 아닌 우리들의 꿈이었다.

그때 우리가 젊음이란 멍에에

치기 어린 감정으로 쏟아낸 독설들과

감당할 수 없는 열정으로 자학했던 몸짓들은

방황이 아닌 우리들의 숨결이었다.

그때 우리가 밤새 마신 술과

그때 우리가 아침에 게워낸 토사물과

그때 우리가 내내 안달했던 사랑은

모두 거짓이 아닌 진실이었다.

그때 우리의 글들과 언어와 숨결이

모두 거짓이 아닌 진실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도 진실로 살아있고

꿈꾸고 있다.

 

 

간혹 서로의 안부를 담담하게 물으며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또 다시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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