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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평점 :
소소한 풍경 - 순수한 사랑의 원형에 대한 고찰
한국 문학에 있어서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내게 있어서, 박범신 작가의 ‘은교’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노년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욕구에 대한 고민 앞에서 마치 내 자신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고, 때문에 나는 ‘은교’에 대한 품평을 쓰면서 내 사랑에 대한 갈망과 음심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거의 텍스트의 맥락과 관계도 없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이후 박범신 작가의 다른 작품을 특별히 찾아본 적은 없다. 어쩌면 이번 ‘소소한 풍경’의 경우에도, 모임에서 연말행사로 도서교환 이벤트를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제비뽑기로 ‘소소한 풍경’을 뽑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박범신 작가의 최근작인 이 책을 굳이 사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사실 언제나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는 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들에 애당초 무관심한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박범신 작가의 경우는 ‘은교’에 대한 강렬한 기억 때문에, ‘소소한 풍경’이 제비뽑기로 뽑혔을 때 내심 만족스러운 기분이었고, 그 때문인지 쉽게 다가설 수가 있었다.
처음 이야기는 소설가이자 전직교수였던 저자에게 옛 제자인 ㄱ으로부터 뜬금없이 온 전화통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 웬 생뚱맞은 인사말인가? 거의 10년 만에 전화해서 이게 어디 꺼낼 법한 대화인가? 게다가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라니? 너무 끔찍하여 상상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렇지만 저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이야기에 어떤 홀림을 느낀다.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는 곧 저자가 아닌, 저자의 제자 ㄱ으로 넘어간다.
ㄱ은 저자인 소설가의 제자 중 특이한 제자였다. 저자가 기억하는 그녀의 소설 ‘우물’은 말 그대로 몽환의 덩어리였다. 때문에 합평 시간에 독설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소설에 대한 동기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단답형일 뿐, 도통 소통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소설을 쓰는 것보다는 젊은 시절 내내 한 남자에게만 골몰했다. 남자1이라는 존재, ㄱ에게 있어 남자1은 반짝이는 청춘의 모든 것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모든 존재가 사라지고 그와 그녀 자신만 남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다. 불우했던 그녀의 유년시절의 기억인 오빠와 소녀시절의 기억인 아버지란 거대한 존재를 그녀는 그렇게 남자1을 통해 모두 상쇄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사랑이 지속될 순 없는 법이다. 아니, 연애라는 관계에서 결혼이라는 독점과 소유욕이 지배하는 관계 속에 놓이게 되면, 젊은 날 믿었던 모든 사랑이라는 감정의 허울은 지워지고, 결국엔 남는 것은 상처뿐인지도 모른다. 최소한 ㄱ에게는 그랬다. 자신의 아버지와의 유년의 고리인 선인장을 남자1이 싫다고 말하는 순간, 그 모든 젊은 날의 환상에 금이 가기 시작하리라는 사실을 어찌 그녀가 예감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이라 믿었던 남자1이 자신을 그저 소유하고 독점하기 위해 안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청춘의 찬란한 봄날 어떻게 미리 감지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남자1은 그녀가 꿈꾸던 모든 사랑을 짓밟고 능욕해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남자1과 ㄱ의 관계는 끝이 난다. 그렇게 남자1과 이혼하게 된 후 ㄱ은 다시 그녀의 유년의 장소였던, 오빠-아버지-어머니가 같은 절벽으로 떨어졌던, 그래서 도망쳤던, 구소소로 되돌아온다. 그곳은 그녀에게 있어선 오빠-아버지-어머니란 이름의 묘지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그곳으로 되돌아간 것일까? 그 묘지에서 스스로 옛집에 혼자 살면서 마치 스스로에게 유배라는 형벌이라도 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지만 도리어 그러한 유배생활이, 그러한 그녀 스스로의 감금이, 혼자라는 그 삶이, 그녀는 왜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혼자 사니 참 좋다고. 하지만 그녀는 곧 동네 근방에서 물구나무를 하루 종일 서고 있는 ㄴ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어느새 ㄱ은 ㄴ에게 물구나무서기론 죽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둘은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서 그녀는 말한다. 둘이 사니 더 좋다고. 왜일까? 그녀가 남자1에게서 받은 상처를 ㄴ에게서 받지 않게 되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미리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남자1과 함께 살면서 찔린 가시는 그녀 손가락을 꿰뚫고 들어가 영원히 각인될 상처가 되었지만, ㄴ에게는 그 가시가 속으로 감춰져 있었음을 어떻게 그녀는 감지할 수 있었을까? 그저 마치 모든 운명처럼, 예정처럼, 모두 우연에 기인한 탓일까? 아니면 서로를 향한 홀림이었을까? 결국, 둘은 깊은 관계를 맺게 되고, ㄴ은 묘지 같은 그녀의 터전에 낙엽을 쓸고, 지붕을 수선한 후, 샘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그 둘은 서로가 하나가 되는 깊은 관계를 갖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섹스란 말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그 언어가 갖는 의미가 너무 한정적이다. 아니, 그것에 대한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러하기에 ㄱ은 스스로 ㄴ과의 그 행위를 하나의 ‘덩어리’라 규정짓는다. 그리고 그런 그 둘의 삶에 ㄷ이 어느 날 자기 몸채만한 큰 가방을 들고 찾아온다. ㄱ은 또 말한다. 셋이 사니 진짜 좋다고. 왜 그랬을까? ㄱ과 ㄴ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절정에 이르는 그 순간에 ㄷ이 자신들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왜 말리지 않았을까? 아니,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둘의 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ㄷ을 그들의 품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ㄱ과 ㄴ 그 둘에게, ‘자기들끼리만, 너무해요!’란 ㄷ의 외침이 팡파르이고 종소리가 될 수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누군가 함께 향유하고 있는 도락에, 특히 성적인 도락에, 다른 누군가가 저와 같은 소리를 한다면, 그것은 외마디 비명이거나 혹 지탄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그 외마디 비명에 놀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 이를 쫓아내거나 소외시키지 않아 왔던가? 그런데 ㄱ과 ㄴ은 어떻게 ㄷ의 그 소리를 팡파르와 종소리와 같은 울림으로 받아들이고, 같이 하나가 되어 더 큰 원을 그리고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 이것이 일반적인 현실에서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그 다음 삶은 또 어떠했던가? 너무 행복해서 갑자기 어느 날 연탄가스로 함께 공동자살을 꿈꿨던 ㄷ, 그리고 어느 날 그 둘로부터 도망치려했던 ㄴ, 그리고 마지막 절정의 순간 날개를 달아 우물 속으로 추락해버린 ㄴ!!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ㄴ이 ㄱ의 집으로 들어와 샘을 파기 시작한 그 기점으로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ㄱ과 ㄴ이 ‘덩어리’가 되고, ㄷ이 또 다시 들어가 셋이 함께 ‘덩어리’가 되어, 마지막 절정으로 치닫기까지. ㄱ의 묘지에 샘이란 생명을 남겨두고서, 자신은 절정 가운데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샘으로 날아 들어간 ㄴ, 그렇지만 그 꼭짓점엔 ㄴ의 날개에 버튼을 눌러줄 ㄷ이 필요했다. 아니, 어쩌면 내 개인적으론 이곳에서 ㄷ의 노래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으랴...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그런 사람 나는 못 잊네.’ 이 노래가사처럼 평생 동안 심장에 남겨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겨울 그 셋이 함께 누린 열락의 세계는 이생이라는 생애에서는 죽음이라는 절정에 들어서지 않고서는 담보되지 않는 불가능이기 때문일까? 마치 마침표를 찍듯이 우물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ㄴ의 등을 ㄷ이 꼭 누르는 그 순간, 이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실상 끝나버린다. 그렇지만 데스마스크로 되살아난 ㄴ은 마치 불멸의 사랑의 증표처럼 남아, ㄱ과 ㄴ의 삶에 끝없이 솟아오르는 샘의 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고 잠깐 생각해 본다.
사실, 이야기를 나름 재구성해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재구성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ㄱ의 관점에서 소설의 전반부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에는 광주혁명에서 죽은 형과 아버지를 가슴 속에 가시로 숨긴 ㄴ의 이야기도 없고, 북한에서 어머니와 오빠와 넘어와 어린 나이에 중국인 사씨에게 능욕당하고 오빠를 뺏긴 ㄷ의 가시 이야기도 없다. 그렇지만 애초에 이 소설이 소설가 자신의 말대로 서사가 없는 소설을 지향했던 이유로 서사를 잡을 수 없는 까닭도 있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서사를 중심으로 탄탄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소설이 아닌, ㄱ과 ㄴ, 그리고 ㄷ이 완전하게 합일되는 순간인, ㄴ이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그 순간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즉, 그 순간에 대한 묘사 그 자체로 완성을 구가하고자 쓴 소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하기에 처음에 다 읽고서 나는 무언가 아련하고 먹먹한데 그 감정을 표현할 길이 당최 없었다. 그리고 품평을 하기 위해 글의 서사를 떠올려보려 했을 때도 전혀 서사 자체가 떠오르지 않고, 그 절정의 장면만 떠올라, 다시 발췌독으로 ㄱ,ㄴ,ㄷ에 대한 개인적 서사를 다시 읽어야만 했다. 아니, 거의 다시 내용을 훑어야만 했다. 대체 왜일까? 왜 쉽사리 나는 처음에 읽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을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먹먹한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그리고 왜 읽은 지 한 달도 채 안된 소설의 모든 서사를 깡그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오직 그 절정만을 기억하게 된 것일까? 지금 이 순간도 이 기묘한 현상을 설명하기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최대한 내 정직성을 담보로 한 내 마음속 소리에 귀를 기울여, 지금부터 설명해보고자 한다.
먼저, 내 마음의 내밀한 소리를 듣기 전, 나는 이 소설이 분명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거라는 예상을 가져본다. 사실, 줄거리를 재구성함에 있어서도 나는 내내 의문투성이이었다. 그래서 거의 내용의 재구성 전반이 질문형으로 되어있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적 품평 글쓰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의문형과 질문형으로 줄거리 자체를 재구성할 정도는 아니다. 즉, 그만큼 내 개인에게도 이 소설의 지향점들은 도무지 와 닿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소설의 인과구성의 개연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거의 깡그리 그 체계를 무시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만큼 많은 우연과 몽환으로 점철되어져 있다. 게다가 사회 상식선에서 남자 한 명과 여자 둘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난감하다. 물론, 이보다 더한 성적인 실험을 하는 소설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이 행위 묘사 자체에 대한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이유로 정말 야하게 이 행위들을 묘사했다면, 나는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엔 저자 표현대로 단순히 섹스라고 표현되는 단어로 담기엔 한정적인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저자의 표현방식대로 일단 ‘덩어리’라고 하자. 그런데 그 ‘덩어리 됨’이 왜 둘에서 셋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을 안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둘에서 셋으로 확장이 되어 원이 되어간다면, 셋에서 넷, 넷에서 다섯으로 확장되어가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겠는가? 물론, 소설이 점점 그렇게 확장되어 가다보면, 가뜩이나 서사도 없는데, 점점 더 사공이 많아져 산으로 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소설이 셋으로 확장된 관계가 넷에서 다섯으로 확장되어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소설이라는 점을 굳이 상기시키고 싶어서였다. 즉, 이 소설은 관계에 대한 소설이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 중에서도 아마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둘이 아닌 셋, 넷, 다섯으로 확장되어가는 덩어리 같은 사랑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 소설 가운데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는 가시이다. 특히, 저자는 ㄱ,ㄴ,ㄷ, 이렇게 세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서 가시를 안으로 숨긴 선인장 비유를 들고 있다. 그리고 굳이 상징성을 찾자면, ㄱ은 아버지-오빠-남자1로 이어지는 남자에 대한 가시, ㄴ은 광주혁명에서 비롯된 아버지-형이라는 가시, ㄷ은 북한에서 넘어왔다는 가시와 더불어 자신을 능욕한 것도 모자라 오빠를 공안에 팔아넘긴 중국인 사씨를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가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이 가시들이 이 소설에서 굳이 꼽자면 서사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뭐랄까? 가시들 자체는 어떤 면에서 진부한 면이 있다. 저자가 굳이 ㄱ이라는 축을 통해 (그 축이 아마도 남자로 대변되는 모든 폭력의 가시를 숨긴 우리를 대변하고 있으리라 추정해보지만 여하튼), ㄴ의 광주혁명의 가시와 ㄷ의 북한이라는 가시까지 하나로 덩어리져 품어보려 했다고 한정짓는다면, 이 소설은 그냥 일종의 풍유적 상징성을 지닌 사회소설로 보아야할 것이다. 물론, 이 지점에 대해 내 개인이 부인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다만, 내 개인이 이 소설을 읽어 내려감에 있어서는 이면에 숨겨진 이러한 코드가 드러나기엔, 이 소설이 너무 소설의 절정의 한 순간 장면으로 집약되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그냥 도무지 사회적 소설로 읽히지가 않았다. 실상, 내가 소설의 내용을 재구성하려 했을 때도 그 때문인지 ㄱ,ㄴ,ㄷ의 어떤 가시의 내용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저 가시가 안으로 숨겨져 있다는 강렬한 기억과 더불어, 그 가시들이 응축되었다 폭발되는 지점으로써, 날개로 돋아나는 장면인 ㄴ의 우물에서의 추락장면이 내내 떠올랐을 뿐이다. 왜 ㄴ은 우물 안에 떨어짐으로써 남겨진 ㄱ,ㄷ의 샘이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왜 그 순간을 더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다른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셋으로 확장된 사랑이란 게 대체 이 세상에서 가능한 사랑이란 말인가?
내 개인적으로 박범신 작가가 종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런 사랑에 관해 둘이 아닌 셋이어야만 완벽한 사랑을 이루고, 그 중에서도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그 사랑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사상과 그리스도 사상에 입각하여 이 소설이 쓰였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하기에 그저 순수하게 문학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바라보고 싶다. 일단, 소설이라는 공간 하에서는 어떤 실험도 가능하다는, 그러하기에 어떤 사랑도 가능하다는,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가능성은 작가의 바람이며, 그 바람은 독자에게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이며 샘물이라는, 이러한 관점으로 이 소설을 바라보고 싶다. 그렇다면 내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저자는 어떤 면에서 철저하게 ‘늙음’의 미학이란 관점 하에서 사랑을 재해석하여, 욕망과 소유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근원적인 사랑의 형태에 대해 고민하고 고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둘이 아닌 셋, 넷으로 확장될 수 있는 ‘덩어리 되어감’의 사랑에 대해선 일정부분 수긍할 수 있다 치더라도, 왜 누군가의 희생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일까? 굳이, 사랑의 불멸에 대해 말하진 않더라도, 무언가 더 오래 지속 가능한 사랑에 대해 고찰할 필요는 없었을까? ‘자기들끼리만, 너무해!’란 소설 속 대사로 ‘사랑의 관계가 단순히 둘이란 법은 없다!’하고 팡파르와 종소리를 울린 것처럼, 사랑의 시간도 단순히 영속이거나 순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다변적 사고로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은 없었을까? 꼭 순간으로 완성되는 사랑만이 심장 속에 남아 잊을 수 없는 걸까? 우리 생이란 한계 때문에? 하지만 이런 숱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나는 미리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침표가 없는 여운은 없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