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의 마음



진창에서만 피어나는

천한 태생의 꽃이라고

깊고 어두운 수렁 안에서만

절 찾지 마세요.


당신 곁에 가까이 피어나

가닿을 순 없어도

화사한 꽃밭에 어여삐 피어나

고이 드리울 순 없어도

여기저기 모르게 피어나

당신 발치에 부딪치는

옅은 파문처럼

고요히 물결치고 싶어요.

바람에 흔들려 흩날리는 벚꽃처럼

발그레 부끄러운 당신 머리 위로

황홀히 화환을 씌울 순 없지만

당신 머리맡을 밝히는

은은한 촛불처럼

고요히 흔들리고 싶어요.


진창에서만 피어나는

천한 태생의 꽃이라고

깊고 어두운 수렁 안에서만

절 찾지 마세요.

당신 가슴 안에 먼저

놓여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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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과 길옆 사이



어느 좁고 긴 길

후미진 가장자리

이름 모를 빌딩 아래

반짝이는 은색 테라칸

차가운 금속 커버 위로

고요한 바람이 머물고

흔들리는 잔 나뭇가지 잎사귀들

한 폭의 수묵화가 되어

반짝반짝 춤을 추며

덩실덩실 빤짝인다

내 이곳이 마냥 좋사오니

하나는 당신을 위하여 집을 짓고

하나는 나를 위하여 집을 지어

당신과 함께

내내 이곳에 머물며

반짝반짝 춤을 추며

덩실덩실 반짝이며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겨지고 싶사오니

영영 이곳을 떠나가지 마소서

찰나의 오롯한 꿈을 꿀 때

콧등을 스치며 떨어지는 나뭇잎들

고개 들어 바라보니

온통 벌레 먹어 숭숭 뚫려버린

잎사귀들

멀리서 들려오는 전기 조명공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들

좁은 골목골목을 누비는

작은 용달차의 시동이 꺼지고

서둘러 짐을 내리는 짐꾼들의

땀방울들

쇠붙이를 용접하는 용접공들로부터

붉게 빛나 오르는

수십 개의 작은 불티들

내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지만

그 좁고 긴 길옆으로

다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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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청국장



조각조각 나누어진 파티션 아래

갈래갈래 찢겨진 마음 다잡아 봐도

마디마디 새어나오는 타자소리에 섞여

툭툭 어둠에 깔려오는 바람소리 창문을 치고

후두둑후두둑 굵은 빗줄기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각기각기 모두가 제 갈길 찾아 걸어가고

추적추적 이 내 걸음도 모두를 따라 결국

걸어가야 하겠지요. 당신께로...


어머니! 당신께선 청국장을 또 끓여 놓으셨군요.

시궁창 냄새나는 이 세상 억척같이 살아낸

그 끔찍함으로 허옇게 파르르 떨리는

비 맞은 아들내미 허한 속 어떻게든 데워보시려고

또 끓여 놓으신 건가요?

그러나 어머니! 이 시궁창 냄새나는 청국장도

시뻘겋게 찢어지는 피 같은 김치도

한 알 한 알 꿈틀거리는 좀 벌레 같은 밥알들도

모두모두 지긋지긋해요. 아니, 모두모두 역겨워요.

그런데 이 지겹고 역겨운 것들을 한데모아

어떻게 묵히고, 삭혀서, 고아 내셨기에

이렇게 오롯하게 달콤할 수 있는 건가요?

한 숟갈 한 숟갈 뜰 때 마다 울컥거리는 마음 때문에

자꾸 빗줄기보다 굵은 눈물이 떨어지려고 해요.

한 숟갈 한 숟갈 뜰 때 마다 울렁이는 마음 때문에

자꾸 구역질보다 찐한 설움이 넘어오려고 해요.


어머니! 청국장이 너무 짠하게 맛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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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시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오면

당신의 이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도통 새하얀 빛투성이어서

내 보이는 건 야위고 주린

당신 먹어치우지 못하면

늑탈처럼 말라비틀어지는 

내 몸뚱이 뿐,

형광등처럼 너무 밝고

초롱불처럼 쉬 꺼져버리는

허기 뿐,

당신 모양 같은 거짓 뿐,

내 모양 같은 나일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내려오지 않으면

온통 나밖에 보이질 않아

당신 생각 할 수 없어

저는 아직

당신의 이름 부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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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煙



그러니까 스무 살, 아마 그때쯤이었을 거야.

무수히 박힌 사람들 가운데 카인의 표식을 드리운 네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어.

섬뜩한 충동으로 도리질하며, 가슴 깊은 곳에 숨겨진 내 폐부를 노려보고 있었어.

번쩍번쩍 빛나는 생선비늘처럼 파닥거리기보다는

검게 그을려 질펀하고 끈적끈적하게 버텨내는 것이 생이라고 소곤거리며

너는 독한 입맞춤을 하였고

더욱 깊게, 깊게 내려앉아 모든 신경을 마비시키고 정신을 갉아먹으며

미쳐지지 않는 관능 속으로 나를 옥죄어 들어왔어.


결.코.벗.어.날.수.없.었.어.


그런데 어느 날 이런 내게도 그녀가 생겼어.

너는 여전히 무심했지만

그녀는 나를 지독히도 사랑하였고,

또 내게 드리운 지독한 너의 향기를 싫어하였어.

아니, 너의 모든 것을 끔찍해했어.

그녀는 내게 선택을 강요하였어.


'나야? 아니면 그야?'

'오랜 친구와 의절할 순 없어.'


그녀의 떠나가는 등 뒤에서

나는 너와 오래도록 휘감겨 깊은 키스를 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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