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 백석 시집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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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집 오금덩이라는 곳을 중심으로

 

 

 ‘라는 한 단어에 가슴이 찌릿하게 저려온다. 맨 처음 소설 모임에 들어왔을 때 내가 무엄하게도 들이밀었던 한 단어는 시적인 무언가와 같은 소설이었다. 맨 처음 소설이 아닌 시로 시작한 까닭에, 그리고 오에 겐자부로 작품 영향으로 난 시적인 무언가와 같은 소설이 정말 쓰고 싶었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때부터 10년이 넘은 지금, 나는 시적인 무언가와 같은 소설을 과연 쓴 적이 있을까? 아니, 시라는 그 마음 자체도 이제는 잃어버려, 머릿속에 맴돌기만 할 뿐, 시 한 줄조차 제대로 못 쓰고 있지 않은가? 이런 때 백석의 시집을 읽으니, 가슴이 먹먹하고 울컥거렸다. 사실, 전체적으로 내 취향의 시집은 아니다. 너무 향토색이 짙고, 언어들도 옛말인 까닭에 쉽지 않은 시들이었다. 게다가 어떤 정취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시라는 건 공감하고 해석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하다. 다만, 시는 그저 한 단어, 한 단어 곱씹으면서 읽는 것이라고, 그렇게 한 문장을 읊는 것이라 배웠기에, 마음속으로 읊는 그 자체가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예전 시들의 어떤 시적 가치의 단초가 될만한 시를 살짝 보았기에 지금부터는 그 시를 중심으로 조금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오금덩이, 국어사전에 안 나온 이 단어는 과연 무슨 뜻일까? 사실, 거의 개인적 추측이지만 병이 있을 때 다섯 가지 음식을 금한다는 오금(五禁)에서 이 뜻이 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시적인 내용이 이러한 부분과 조금 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이유이다.

 

 어스름저녁 국수당 돌각담의 수무나무 가지에 녀귀의 탱을 걸고 나물매 갖

 추어놓고 비난수를 하는 젊은 새악시들

 -잘 먹고 가라 서리서리 물러가라 네 소원 풀었으니 다시 침노 말아라

 

 캄캄한 저녁이 되기 전 성황당 돌무더기 앞에서 제사를 받지 못한 귀신들에게 젊은 처자들이 왜 비는 것일까? 다시 오지 말라고, 이제 잘 먹고 잘 살라고.

 

 벌개눞녁에서 바리깨를 뚜드리는 쇳소리가 나면

 누가 눈을 앓어서 부증이 나서 찰거마리를 부르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피성한 눈숡에 저린 팔다리에 거마리를 붙인다

 

 벌건 빛깔의 늪가에서 주발 뚜겅 두드리는 쇳소리가 나면 왜 누군가는 눈을 앓고, 피멍이 든 그 눈덩이에 찰거머리를 붙어야 하는 것일까?

 

 여우가 우는 밤이면

 잠 없는 노친네들은 일어나 팥을 깔이며 방뇨를 한다

 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레히 흉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여우가 우는 밤, 노인들은 흉사를 막기 위해 팥을 뿌리고, 방뇨를 한다. 민간의 속신에서 팥과 오줌은 귀신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전해지는 까닭이다. 전염병이 다반사이던 그 옛날 여우는 다른 말로 그러한 재앙이 아니었을까? 그런 재앙에 어떤 의료적 대안이 없었던 그 시절 우리 선조들은 팥과 오줌으로 어떻게든 대처해보려고 자위했던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신화적 요인이 이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일까? 굳이 의학적으로 풀지 않더라도, 팥과 오줌엔 병을 이기는 속성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옛날 시라는 건 하나의 신화적인 풀이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연장선상으로 칠월 백중이라는 시도 개인적으로는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물론, 내 개인이 오정희 소설집 유년의 뜰에서 백중을 소설적으로 풀이하는 과정에 남달리 강한 인상을 받아 백중에 조금 더 집착하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시를 보지 못했다면, 백중에 예전에 평안북도에서는 친가로 가는 풍습이나, 약물맞이를 하면서 옷이 다 젖도록 논다는 그런 풍습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이 시도 거의 지역 풍토적인 해석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 안에 있는 신화적이고 민속적인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시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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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고 사소한 아픔에 관해

 

 

책장을 넘기다 손을 베었습니다

상처도 없고 그렇게 아프지도 않아

약도 바르지 않고 가만히 낫기를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나날이 날짜가 지나갔지만

샤워를 할 때마다 물건을 집을 때마다

책을 읽으려 할 때마다

엄지손가락 보이지 않는 상처가

아리고 저며왔습니다

때론 이렇게 보이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상처가 오래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대여 하루하루 무사히

옷을 갈아입다가 가구 모서리에

팔뚝이 부딪히지 않기를

문을 열고 지나가다가 문턱에

발가락이 부딪히지 않기를

그렇게 그대의 무사하고 무난한 하루가

내내 지속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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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이야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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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홉 가지 이야기 다채로운 이야기들

 

 

 J.D.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은 적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사실은 영어 공부를 목적으로 손을 댄 책인데,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런 순수한 감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이 책을 덮자마자 아니, 거의 중후반쯤부터 내내 들었다. 그래서 나름 정말 많은 기대를 했다. 다시 그 감성을 만날 수 있을까? 어른을 위한 동화 같던 그 순수한 마음을? 글쎄, 반쯤의 기대는 채웠다. 하지만 반쯤은 조금 난해한 구석도 있었다.

 

 처음,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의 경우, 읽으면서 뭐 이런 이야기가 있어,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이따위 이야기를 하는지 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뒤늦게 뒤통수를 때리는 무언가 아린 슬픔이 전해졌다. 애초에 바나나피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이 이야기 속에 상황으로는 그것은 하나의 암시일 뿐이다. 사실 그 암시를 위해 앞에 쓸데없이 늘어놓은 여자의 통화 내용은 일종의 복선이었다. 결국, 마지막 총성을 올리기 위한 하나의 조곡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왜 완벽이라는 말이 붙었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웃는 남자는 야구팀 코만치의 추장이(주장을 코만치 부족의 입장으로 해석하여) 들려주는 웃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더불어 추장의 연인과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일단,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고, 재밌는데, 상상력이 기발하다. 그리고 웃는 남자이야기는 생각할 거리도 있어, 그냥 흘려보낼 순 없는 글이란 생각이 든다.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는 전형적인 셀린저의 감성이 드러난 글이 아닐까, 잠깐 생각해본다. 어린아이에 대한 동경, 그리고 젊음에 대한 절망감, 이 두 가지 의식이 교차하면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잠깐 떠올려보았다.

 

 ‘드 도미에 스미스의 청색 시대는 약간은 종교적인 냄새를 흘리지만, 작가 자신의 예술에 관한 입장을 보여준 글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아쉽게 수녀의 종교적 문제로 이 모든 희망은 아스러지지만,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웠다.

 

 마지막 이야기 테디는 읽는 내내 관심이 갔다. 물론, 처음은 조금 산만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이 글뿐 아니라, 아홉 가지 이야기 전체가 서두가 산만한 부분이 있어서, 읽는데 약간의 진입장벽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글의 경우 그 서두 부분만 잘 넘어가면, 우주를 넘나드는 정신세계를 가진 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동시에 그 마지막 예언은 잔혹하지만, 아름답다고 말하면, 조금 인간미가 없을까?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조금 산만한 구석이 있다. 정서적인 차이인지, 아니면 이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래도 좋은 작품은 확실히 몇 작품 눈에 띈다.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한 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란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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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강 오정희 컬렉션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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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강 그토록 생생한 적의에 관하여

 

 

 정말 오랜만에 오정희 작가를 마주한다. 한때 유년의 뜰의 단편집에 푹 빠졌던 적이 있었다. ‘별사어둠의 집이 내 숨통을 조여오듯 읽는 내내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 후 몇 권의 책을 사고, 그중에 이 불의 강도 사두었다. 10년만일까? 10년 전보다 더 강하게 불의 강적요가 내 가슴속에 섬뜩한 살의이거나 혹은 어딘가로 분출하지 못한 욕망의 탈출로를 꿈꾸게 했다.

 

 강둑이 강줄기를 따라 U자로 휘어 도는 구비에 발전소의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작은 규모의 화력발전소를 만들 계획이었던 것 같은데, 어찌 된 영문인지 공사를 하다 그만두었다. 그냥 놀릴 순 없었는지, 한때는 해산물의 하치장으로 쓰였다가, 지금은 영화 세트장으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쓸데도 없고 별 특징도 없는 건물에 왜 그토록 생생한 적의를 느꼈는지 모르겠다는 사실이다. 활활 타올라야 하는 화력발전소는 전혀 제 모습을 갖추지도 못하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는 남편은 불에 대한 동경으로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 여자는 알고 있다. 남편이 피우지 못한 불은 자신의 낙태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혹은 평생 재봉틀에 갇힌 그 자신의 삶 속에 또 하나의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쩌면 남편은 어떤 생명도 피울 수 없고 그저 담뱃불만 피우는 자신에 대한 동경을 대신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느 날 밤 화력발전소는 자신의 원래 역할인 불꽃을 피운다. 남편에게서는 심한 탄 냄새가 난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불꽃이다. 그런데 왜 눈물이 피어나는지 모를 일이다.

 

 그토록 생생한 적의란 무엇일까? 잠깐 생각해본다. 과연 건물 자체에 적의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아니, 절대 그럴 수 없다. 적의는 말 그대로 인간의 감정이며, 특히나 마주 대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주인공은 처음부터 그 우뚝 솟은 화력발전소의 굴뚝에 혹은 그 건물에 그런 적의를 느낀 걸까? 맥락으로 살펴보았을 때 제 역할을 못 하는 화력발전소에 대한 원망의 발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문명에 대한 까닭 없는 적의도 배제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왜 우리는 활활 불타오를 수 없는 걸까? 남편은 평생 재봉틀에 갇혀 살 것이다. 여자는 그저 남편을 기다리면서 담배만을 하염없이 피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서글픈 삶이다. 하지만 한번 폭발해보고 싶은 게 삶 아닌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911테러의 희생자들에게는 너무나 미안한 이야기지만,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을 들이박는 순간, 그 오색 찬연함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굳이 이런 방식은 아닐지라도, 가끔 어떤 방식으로든 불타올라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정말 더욱 잔인한 적요의 공포를 맛볼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야기는 별 내용이 없다. 가정부를 두고 혼자 사는 괴팍한 노인이 놀이터에서 한 모자란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 왜 노인은 아이가 집에 가지 못하도록 수면제를 탄 것일까? 어떤 외로움이 그토록 숨 막히는 적요를 피할 길 없게 한 걸까? 나는 왜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조바심 비슷한 공포감이 드는 걸까? 누구도 혼자 되는 삶은 피할 수 없다. 그 공포는 마주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런데 그 예감과 기시감이 사람을 홀리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 같다. 잔인한 글이다. 너무나 무섭고 잔인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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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찍는 사진사
박완서 지음 / 문학판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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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찍는 사진사 과실치사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며

 

 

 오랫동안 한국 소설의 여류 작가로 기억되는 인물, 대표적인 사람 두 사람을 꼽자면 내 개인적으로는 박완서와, 신경숙 작가다. 물론, 신경숙 작가는 표절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내 젊은 시기 가장 먼저 접한 여자 작가들이 이 두 사람이기 때문에, 기억에 각인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꼭 이 두 작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한국의 여성 작가 하면 떠오르는 작가일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고 느낀 것은, 역시 한국을 대변하는 여성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꿈꾸는 인큐베이터가 좋았다. 전에 읽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읽으면서 왜 내가 이 작품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약간 처음엔 진입 장벽이 있었다. 너무나 올드한 여자 주인공의 사고방식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찬찬히 읽어가면서 그 가슴 안에 아픈 사연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런 게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글을 통해 한을 풀어내는 방식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꿈을 찍는 사진사의 경우, 처음부터 옥순이의 한 옥타브 높을 것 같은 음성처럼 문장이 지지배배 리듬을 타서, 술술 잘 읽혔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공의 사고 의식이었다. 웬 홍길동 흉내? 촌지를 받는 행위 자체가 부정한데, 거기서 홍길동의 논리를 펴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 난감했다. 물론, 홍길동도 어떻게 보면 잡도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방법적인 측면에서 옳다고 말하는 건 분명 어폐가 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는데, 홍길동의 논리를? 물론, 그 시대가 모두가 촌지를 받는데, 혼자 잘났다고, 떳떳한 척하는 일도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하튼 여기서부터 삐끗거리기 시작하더니, 주인공의 생각들과 감정들이 쉬 정리되지 못하고, 부산을 떨며 어수선한 모습을 보인다. 우선, 옥순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몸은 왕성한 정욕으로 차 있는데,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여자를 제대로 건드릴 수도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고. 여기에 주인집 여자는 과외를 핑계로 자꾸 들이대는데. 결국 넘지 못할 선을 넘어버리게 되고, 그 광경을 옥순에게 들켜버리게 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 무얼 어떻게 했어야만 했던 것일까? 이 글은 마지막 옥순으로 죽음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허무하게 매조지 한다. 옥순은 죽음은 그냥 과실치사이다. 그의 잘못도, 시대의 잘못도 아닌, 누군가의 과....

 

 마지막 과실치사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본다. 왜 이런 식으로 끝을 맺은 걸까?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꿈꾸는 파랑새가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비극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왜 과실치사일까? 아무래도 서울은 너무 무서운 곳인가 보다. 너무 많은 차들과, 너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쉽게, 그리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사라져 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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