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풍경 - 박태원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10
박태원 지음, 장수익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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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사십 여 년 만에 청계천이 복원되었다. 하천을 살리는 작업이란 것이 삼사년만에 이루어질 성격의 작업이 아니고, 생태와 하천 본연의 기능을 살리는 자연적인 완벽한 복원을 위해서는 몇 십년이 걸린다는 비판과, 이명박 시장의 추진력 아니었으면 지금까지도 복원 작업은 시작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영웅주의적 업적 기리기 등등 아직까지도 말이 많다. 아무튼, 복개된 지 사십 여년 만에 청계천이 복원된 오늘날의 시점에서, 옛 청계천변의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그린 『천변풍경』을 읽는 과정은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했다고나 할까.

오늘날은 비단 토지, 노동, 자본 뿐만 아니라 지식도 전문 기술도 정보도 …사회경제적으로 유용한 모든 요소들이 자본의 성격을 갖고 있는 고도 자본주의 시대이다. 이러한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놀라울 정도로, 작가는 일제 강점기 하에서 이미 자본주의에 물든 세태를 치밀하게 잘 관찰하고 있다.  이런 세태를 천변이라는 공간 주변으로 서로 연계를 갖고 있거나 혹은 연계성이 없는 '도시'라는 공간 안에서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삶의 단면을 영화 카메라의 시점으로 옮겨가며 관찰하듯 비추어주고 있다.

'천변'을 중심으로 도시라는 공간이 지닌 속성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각박해지고 약아지는지 객관적인 눈으로 날카롭게 서술되고 있다(이런 사실을 가장 대표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시골에서 올라와 한약국 집에서 일을 하게 된 열 네 살 소년 창수가, 상경한지 육개월도 지나지 않아 순수성을 잃고 생존을 위해 약삭빨라지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한편, 작가는 이런 많은 인간 군상들 중에서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정과 지킬것을 지키려는 사람들 편에서 안쓰러우면서도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터치하면서도, '때묻은' 사람들은 인정사정없이 날카로운 풍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묘사하고 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로 흘러오면서 빠르게 삶의 풍속도가 바뀌어가는 모습도 흥미롭게 작품 전체에서 관찰할 수 있다.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작가 박태원은 부모의 강제로 얼굴도 못보는 신부와 혼인을 올렸다고 하며, 이런 사실 때문에 부모가 배우자를 정해주는 풍습을 매우 혐오하여 자유연애론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염두하고 작품을 훑어보면, 그런 풍습으로 두 살림 세 살림을 차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때문에 고달픈 삶을 사는 여인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특별한 주인공이 없이, 조금 오버해서 비교 적용하자면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처럼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여 천변이라는 공간에서 다양한 군상들의 삶을 보여주며 이런 시대적인 자화상을 자유로운 앵글을 지닌 카메라처럼 스케치하는 소설의 모습은 매력적이면서도 흥미롭다.  다만,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작품 뒤의 평론에서 지적하듯이 고전 소설적 우연적 요소들이 꽤 등장한다는 점이다(사족:개인적으로 개연성 없이 우연적으로 사건이 해결되는 플롯을 매우 싫어한다ㅡ그래서 하루키에게 관심을 갖고는 있지만 팬이라고 할 정도는 못 되는 것 같다). 사기당하고 인신매매당할 뻔한 금순이가 기미코의 제안으로 새 삶을 찾는다든지, 금순이와 헤어진 남동생이 우연히 백화점 앞에서 마주친다든지, 점룡이가 오입질을 하고 다니는 이쁜이의 남편 강가를 우연히 술집에서 만나 패주는 장면이라든지, 등등등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평론가는 그런 인물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요소가 '우연성'이라는 것을 암시함으로 더욱 암담함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효과를 노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논하고 있긴 하지만.

뱀발달기. 도시라는 공간을 카메라의 시점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시점은 이발소 소년 재봉이가 바라보는 천변의 풍경이다. 가장 재미있는 시점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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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haGreen 2006-02-01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문장이 지나치게 길어진 비문이 많습니다. 거슬리지만 지금은 지쳐서 나중에 고치려는 중;;;
 
세 명의 사기꾼 - 모세, 예수, 마호메트 패러독스 12
스피노자의 정신 지음, 성귀수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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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사기꾼 : 모세, 예수, 마호메트

라고 주장하는 이 책은 17세기에 떠돌던 괴문서들 중에서 가장 악명높은 문헌이라고 한다. 이 문서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에 대한 선전문구들을 보고 솔깃해서 읽어보았는데, 다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우선은, 기대만은 못하지만 시대적으로 큰 의의를 갖고 있는 텍스트라는 생각이었다.

16~17세기에 유럽에서 기독교 구체제의 모순에 대한 반발로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로, 종래의 문자주의적(성서에 실려있는 내용들을 비유적으로써가 아닌 문자 그대로 믿는 방식), 권의주의적 기독교에 대한 비평과 자성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거기다 이성적인 사유방식과 과학적 연구방식이 대두되며 학문의 기반을 쌓는데 그러한 방법론들이 확립되면서 양쪽의 결과로 종교철학, 고고학, 자연과학 등등의 학문 분야에서 기독교라는 종교의 실체를 찾기 위한 여러가지 연구들이 수행되었다. 18세기와 19세기가 지나면서 이러한 분야들의 연구 결과들이 점차로 누적되면서 신성불가침한 텍스트로 여겨졌던 성서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허구적인 신화적 서사문학이라는 결론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고, (한국 기독교를 제외하고) 대부분 서구의 구교와 신교들도 성서를 있는 그대로가 아닌, 비유로 가르침을 주는 텍스트로 받아들이고 있는 추세이다.

이런 오늘날의 시점에서 봤을 때,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으며, '세 명의 사기꾼'  플러스 하나 더 해서 '네 명ㅡ모세, 예수, 마호메트, 누마 폼필리우스ㅡ의 사기꾼'의 행동을 비판하는 내용도 날카로운 비판력으로 접근한다기보다는 기독교를 혐오하는 감정적인 면이 앞선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본인은 이러한 점이 이 책을 감상하는 포인트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이 텍스트 관전 포인트(?) 세 가지를 소개하겠다.

첫째. 이 저자가 이 문헌을 작성했을 당시의 시대상을 떠올리며 읽는 것이다. 그럼 저자가 보이는 태도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기독교의 제도적이나 그 밖의 다른 문화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교리 자체에서 이성을 마비시키고 인간을 끝없는 죄의식 속으로 몰아넣어 기독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종교에 빠져버릴 수 밖에 없는 교리적 모순을 아주 잘 인식하고 있다. 아주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으로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시대를 앞서서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렇기에(어느 정도 시대를 앞서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그 시대를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꽉 잡고 있는 기독교라는 세력에 매우 분노하여 이성적인 면에서 벗어나 감정적으로 기독교를 '씹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는 사실이다.

둘째. 문헌의 마지막 부분에서 종교를 초월한 대안으로 스피노자의 사상을 전개하는 부분에서는 다시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나는 스피노자의 사상에 대해 잘 아는 바가 없으므로 사상적으로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분의 전개도 매우 재미있다.

셋째. 오늘날 현대의 이성에서 기독교에 대해 이미 비판이 널리 행해지는 부분들을 '시대를 앞선' 이 문헌에서 찾아서 읽는 즐거움이다. 이성을 마비시켜 모두 신의 섭리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예화(우연히 돌이 떨어져 사람이 죽은 것도 하나님의 섭리다라는 내용의 예화 등)들이 보이면 독자들은 반가우면서도 매우 즐겁게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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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의 규방철학 바리에테 4
D.A.F. 사드 지음, 이충훈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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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진정으로 또라이같은 책. 사드 후작의 명성은 괜히 드높은 것이 아니었다.

집단 섹스에, 변태적 성행위에, 온갖 종류의 근친상간에, 비역질까지…, 인간의 상상의 끝은 어디인가 싶을 정도의 범주에서의 온갖 음탕한 행위가 다 나온다(글쎄, 포르노 자주 보시는 분들은 보셨을 지도 모르겠네, 피식). 아, 짐승이랑 교접하는 수간(獸姦)만 빼고.

특히 충격적인 결말 부분, 책장을 넘기는 손이 부들부들 떨려올 정도였다. 다섯 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서로를 물리적으로 학대하며 변태적 성행위를 벌이는 동시에, 끝 부분에 등장하는 한 가련한 여인을 인간의 잔인성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보여주려는 듯 물리적으로 그리고 성(性)적으로 온갖가지의 방법으로 학대하는데, …그녀는 여주인공 급 소녀의 어머니였다…. 게다가 그녀의 딸이 가장 앞장서서 자신의 어머니를 학대하는데, 이 부분에서 구역질과 심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인간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느끼지 않았다면 인간이 아니지.

그럼 왜 읽었냐? 라고 묻겠지들. 우습게도 내가 사드에 접근한 이유는 지적 호기심이었다. 인간 내면의 본성, 쾌락에 대한 열정과 잔혹성을 최초로 끄집어낸 천재라고, 굳이 '사디즘'이나 '사디스트'를 들지 않더라도, 수많은 문학가와 철학가,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이 사드를 언급하니깐, 도대체 어떤 작품을 쓴 사람일까, 하고 매우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사드 자신을 투영한 듯한 작중 주요 인물인 돌망세 씨는 자신의 쾌락주의와 무신론관을 제법 조리있게 설명하면서 자신의 제자(?) 으제니 양을 교육시키는데, 15세의 소녀 으제니는 별 비판도 없이 "당신의말이 옳아요"라고 하면서 감탄하며 그의 충실한 제자가 되어간다. 기독교에 대한 강렬한 비판과 여성의 성적(性的) 해방을 주창하는 부분은 상당히 설득력있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도 있다. 물론 살인의 정당화를 주장하는 충격적인 부분은 당연히 동의할 수 없었고, 여성의 성적 해방을 주장할 것이면 여성 주체적으로 그렇게 되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여성의 아름다운 몸은 남성들에게 사랑을 받으라고 있는 것이다'라는 주장으로 성적 해방의 근거를 드는 것에서는 한계가 느껴지기도 했다ㅡ그가 남자였으니 당연한 거지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인가?-ㅁ-;ㅋ

아무튼 논할 것도 많고 상당히 충격적이고 민감한 내용들도 많아 격렬한 토론의 장으로 흘러갔으면 훨씬 흥미진진하고 완성도가 높았을 텐데, 별 비판없이 돌망세의 충실한 사도가 되어가는 으제니의 모습을 보면서 작품에 많이 실망했다. 그나마 생땅유 부인의친동생인 미르벨 기사가, 주인공들의 항문 성교 예찬이나 마지막에 생모를 온 세상의 호로자식 저리가라 할 정도로 학대하는 으제니의 모습에 조금은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돌망세가 빈민 구제는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부분에서 "그러는 당신은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의 수고로 따뜻한 이불에서 잠들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지내지 않느냐"고 조금은 설득력 있게 반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서 논의가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워낙 강렬한 돌망세의 카리스마에 묻혀버려 정상적인 인간의 주장일 미르벨의 주장이 완전히 조롱당하는 느낌이고, 미르벨은 조심스럽게 (그것도 아주 가끔) 반대를 하거나 조금 불평을 할 뿐, 등장인물이 벌이는 온갖 엽기 행각에 자신도 동참을 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사의 의견이 더욱 우습게 여겨진다. 음, 처음에는 이런 논의의 부실함에 매우 실망스러웠지만, 사드는 이런 구조를 통해 오히려 기성 사회를 더욱 조롱하고비꼬는 효과를 극대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그의 생애 자체가 엽기적인 변태적 성행위를 추구한 삶이었기 때문에 '새디스트'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하지만, 나는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그는 진정한 사디스트였다는 생각이 든다. 불편하다. 괴롭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 말이다. 나같은 독자들을 상상하며 그는 쾌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는 진정한 문학적 새디스트인 것이다!!!

 

보태기. 역주는 당시 프랑스의 사상적, 역사적 배경에 대해 연관지어 더욱 심층으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게 돕긴 하지만, 많은 내용들이 각주로 붙어있어 독서의 흐름을 끊는다. 미주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리고 하나만 더 보태자면, 이 작품 별점 주는데 무지 애먹었다;;;;) 지금 준 점수도 잘 준 건지 못 준건지 조차 잘 모르겠다. (실은 잘 몰라서 중도의 점수를;;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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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서설 박영신서 9
R.데카르트 지음 / 박영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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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씨... 주제넘은 제 생각이오만은 당신의 사상들은 매력적이고 훌륭하지만 뭔가 어설프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5장 심장 생리학에 관한 내용이야 17세기 내용이니 지금보다 밝혀진 바가 적어서 그렇다는 것까지야 뭐라고는 안하겠지만, 신존재를 증명하는 부분이 상당히 뭔가 그렇습니다. 논리적으로 딴지 걸 수준도 안되고 저야 뭐 데카르트씨 발꼽의 때만큼도 못한 지적수준을 가진 자이지만, 우리가 완전하지 못한 존재임을 아는데 우리보다 완전한 그 무엇인가를 체득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우리에게서 인한 것이 아니므로 그 완전한 것은 신이라는 증명... 제 머리가 딸려서 납득이 안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설픈 듯한 느낌이 드네요;;; 뭐 반론할 수준까지 되지 않으니 더 이상 뭐라고는 않겠지만은...암튼 그렇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겠다고 말씀하신 당신이 3장에서 그래도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따를 도덕률이라는 것은 필요한 것이니 그것을 당신이 섬기고 있는 ‘위대한’ 국가와 교회가 정한 바에 따르겠다고 예외를 두신 것도 조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거기의 도덕기준을 빌려와서 준칙으로 삼았다는 근거가 없고 모호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렇게 치열하게 진리를 찾으려는 당신의 의도와는 오히려 모순된 내용이 아닙니까?

딴지걸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하;; 다만 제가 당신의 저서를 읽어나가면서 마음 속에 생길 수 밖에 없었던 의문을 좀 이야기해본 것에 불과하니까요. 저야 뭐 아직 당신의 저서를 수박 겉핥기 정도로 밖에 읽어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도 1, 2장에서 대수학에서 좌표평면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여러 다방면에 뛰어난 학자였던 당신이 그것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절대 진리를 찾기 위해서 눈물겹도록 그것을 갈구하고 노력하는 학자의 정신을 보여주고, 탐구해 나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습니다. 다만 저는 절대진리라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편이기 때문에 저와는 맞지는 않았지만 진정한 학자의 자세를 당신에게서 발견했다고 느낀 것일까요? 아무튼 당신의 저서는 어설픈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매력적이네요.

아직 한번도 다 못 읽어본 주제에 조심스레 제 생각을 써 보았습니다. 이제 마저 남은 장을 다 읽고 한 번 더 정독해봐야겠군요. 한 번 읽었다고 해서 진정으로 그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2004.11.21.


나에겐 상당히 나쁜 독서 습관이 있다. 한 권의 책을 진드감치 읽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책을 읽다가도 다른 책이 재미있게 보이면 그 책을 읽었다가 이 책을 손댔다가 저 책을 손댔다가 하는 아주 좋지 않은 습관이다. 그래서 반 정도 읽었거나 심한 경우는 80%이상 읽었음에도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현재도 매우 많다.놀랍게도 데카르트의《방법서설》을 읽는 데는 정확히 1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방금 발견했다;; 구입시 서점에서 찍어준 도장에 2004.09.07이라 적혀있었으니 말이다.

각설하고, 작년에 읽다가 쓴 위의 감상문에도 나타나듯이, 어쩌면 이 책은 300여 년 전의 낡은 주장을 담고 있는 저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이 21세기의 시대에 왜 뜬금없이 데카르트를 읽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아! 떠올랐다. 재수학원에 다니던 시절, 내가 정말로 존경하던 나이 지긋하신 국어 선생님께서 권장하셨었지. 그래, "여러분 대학에 입학하시면 다른 책은 몰라도 이 책은 꼭 읽어봐야 할 것이다."라면서 적어주신 예닐곱 권의 고전 목록 중에 방법서설이 속해 있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면 꼭 읽어보리라 생각만 하다가 작년에 서점에서 구입했더랬지. 유명한 저서이니만큼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지만 박영사에서 출간된 이 책을 선택한 데에는 책 후반부에 뽈 발레리의 논평이 실려 있었다는 것이 큰 이유이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나는 존경하던 선생님께서 이 책을 꼭 읽으라고 권해 주셨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늘날, 상대론이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이 책이 주장하는 것들은 귀엽기까지 할 정도로 낡은 주장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랴. 최초로 '자아'의 '존재'라는 것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인간의 이성으로 절대 진리를 탐구하여 추구하겠다는 학자의 자세. 뼈를 깎는 철두철미한 진리추구를 위한 고결한 자세, 그리고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과 한계를 인식하는 자세, 비판을 받아들이려는 자세와 후세인들이 자신의 주장을 이해하고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를 원하는 소망. 이것이 진정한 학자의 자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마지막 6장에서 데카르트 본인이 밝혀서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학술에 관한 저서는 모두 라틴어로 발표되곤 했었는데, 데카르트는 프랑스어로 이 책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 다음 내가 이것을 우리 스승들의 언어인 라틴어로 쓰지 않고 나의 모국어인 프랑스말로 쓰는 이유는, 아주 순수한 천부의 이성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고서만을 믿는 인사들보다 더 잘 내 의견을 판단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나는 연구와 양식을 겸전한 분들만을 나의 판관으로 삼고 싶다. 그러한 분들은 내가 속어로 설명한다고 해서 나의 논증을 듣기를 거부할 만큼 라틴어를 편중하지는 않을 줄로 믿는 바이다.   (p129.) ]

이러한 사실에서도, 이 저서에서 자신이 연구한 내용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더욱 발전되어 나가며, 혹시 있을 비판까지도 받아들이고픈 저자의 진정한 학문 도야의 자세가 여실히 잘 드러나고 있다. 철학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학문을 닦아온 나날들을 커다란 자부심으로 성찰한 회고록같은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그래서 명성에 비해 몇 장 안 되어(190쪽의 이 저서의 2/5가 발레리의 비평이다;;) 독자를 놀라게 하는 이 17세기의 저서가 300년도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자연스런 수긍이 들게 되었다.

 

아, 그리고, 자신은 철학자가 아니므로 내용보다는 르네 데카르트라는 인간상에 대해 더 관심을 두고 논평을 했다는 뽈 발레리의 촌철살인적인 글도 매우 인상적이다ㅡ그의 비평을 읽으면서 나는 폭소를 터뜨리기도 해고, 많은 부분에서 가슴깊이 공감하기도 하였다. 내용이랑은 꼭 상관은 없이 정말 재미있었던 구절을 한 부분만 올린다면...

[대중이 요행 어떤 사색인과 그의 작품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대중을 가장 감동시키고 가장 자극을 주는 것은 항상 따로 떼어진 어떤 관용구나 혹은 단언(斷言) 따위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이 가지는 충격적 힘 또는 부조리에 의한 단순화의 코믹한 힘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다윈의 온 노작도 전세기 후엽 30년 동안 그의 이름을 알고 있던 대중의 정신 속에는 결국 다음 몇 마디의 무게로 귀착되는 것이다ㅡ"인간은 원숭이의 후예이다"라고. 마찬가지로 17세기에는 데카르트라는 이름이 허다한 사람들에게 '동물=기계'라는 말을 생각케 했던 것이다.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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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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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소설의 재미를 더 느끼고 싶은,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이 리뷰를 읽지 말아주세요^^

최근 읽은 현대 한국 소설가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작품이다.

소설의 첫 부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놀라운 흡인력. 여성 작가임에도 남자 주인공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 능력. 서안 조씨 가문과 효계당을 둘러싼 조손과의 갈등과 소산 할매의 서간의 번갈아간 제시가 퍼즐처럼 맞물려 소설의 주제를 더욱 심도있게 드러내며 전개되는 설정. 철저한 사전조사를 한 듯한, 전통 제례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옛 서간체 문투를 능수능란하게 다룬 표현력. 어느 하나 감탄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해월당 어머니, 달시룻댁과 정실 등 한많은 삶을 살아간 여성들과, (여러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는) 소설의 말미에서 충격적으로 밝혀지는 소산할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놀랍게도 열쇠구멍과 열쇠의 이가 맞물리듯이 맞아 떨어지고 있다. 현대의 '할아버지'와 옛 판서 벼슬을 지낸 조원찬 대감 등의 가문의 후계자들은 종가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많은 여성들의 삶을 짓밟고 유린한다. 끝내는 계집 아이를 출산하고 자진하게 되는 소산할매의 조모는 가슴아프게도 "애고애고 내 아가야 자진하지 말거라"고 설득하지만 가문의 후계를 지키고자 하는 지독한 관습 아래에선 무력할 뿐이다.

한편, 삶의 평생을 바쳐온, 자기 존재를 규정지어 온 '신념을 지키려는 의지'라는 것이 고결한 한편 허무하다는 양면성을 작가는 주인공의 할아버지를 통해 탁월하게 드러내었다. 그렇기에 왜곡된 진실이 드러나도 믿지 않으려고 하며 추악한 가문사가 드러난 서간을 불태우려는 할아버지의 완고함, 그로 인해 그가 평생을 바쳐 지켜오려 한 효계당이 불타버린 마지막 장면은 많은 것을 느끼게끔 한다.

또한, 주인공 상룡의 희극적인 연인 정실과의 사랑은 충격적이었지만 '병신'이었던 정실이 상룡의 사랑으로 인해 그 일그러진 태내에 새 생명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설정은 가슴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정실이 임신하여 자기 태내의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상룡에게 호소하는 장면은, 그녀가 희극적이고 매우 모자란 캐릭터였던 까닭에 더욱 설득력있고 감동을 주는 효과를 나타내게 되는 아이러니가 감탄스럽다.

이렇게 많은 인물들의 갈등과 수난의 역사가 제시되지만ㅡ특히 가문을 잇는다는 명목하의 남아선호사상에 희생된 여성들의 수난ㅡ작가는 따끔하게 꾸짖는 것도 아니고, 한편으로는 전통을 지킨다는 것과 현대적으로 어떻게 그것을 계승해나가는지에 대한 제시도 조심스레 하면서 양편의 입장을 모두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제목은 왜 《달의 제단》일까? 원형상징으로서 여성을 드러내는 '달'의 제단이라는 제목은, 몇 백년을 내려온 가문의 '제단'ㅡ뿌리ㅡ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희생된 여성들의 우여곡절 많은 역사를 상징하는 것일까, 하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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