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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강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0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4월
구판절판


질식할 듯 화창한 봄날이었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마른 풀씨가 풀풀 날리고 바람이 스쳐가는 머리칼에도 드러낸 팔뚝에도, 깃폭처럼 늘어진 빨래에도 묻는 그대로 꽃으로 피어날 것 같은 봄날, 담 밖을 지나가는 도부장수 아낙네의 기침 소리는 꽃가루처럼 지분처럼 날리고 막연한 예감으로 공기 속에 뒤섞이는 것이었다.
나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마루에 길게 누웠다. 문틀에 걸친 발등으로 햇빛이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옆집 지붕의 물매가 역시 유연하게 하늘의 차양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감정의 표백 상태, 어떠한 느낌도 생각도 완벽하게 잃어버린, 단지 한 장의 흰 종이가 머릿속에 막처럼 펼쳐지는 상태의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햇빛 때문이었다.
─「봄날」-122쪽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 여섯 달째로 접어든 아이를, 더러운 종양을 제거하는 기분으로 용감하게 지워버렸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난 지금에도 나는 여섯 달짜리 태아의 망령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잠재성 간질이었다. 생활의 표면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결코 없었으나 보다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서 시시때때로 마치 비오기 전의 류머티즘처럼 민감하게 반응했다. 얇은 고무질의 피막을 벗기듯 일상의 표면을 한 꺼풀만 들치면 그 속에서 배태되고 자라는 새끼를 친 욕망과 회한의 기억들이 진득한 거품으로 부글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봄날」-124-125쪽

공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몸 전체를 사선으로 기울이고 넓게 팔을 벌렸다가 힘차게 밀어올리는 동작들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잔인했어. 단애에 서 있는 듯한, 곧 무너져내릴 듯한 정교함이었어. 기교가 더할 수 없이 섬세해지고 완벽해지면 그것은 극도로 단순화되어 이미 상징성밖에는 드러내지 않게 되지. 공을 치는 그애의 모습은 철망에 부딪히는 공의 이켠에서 튀어오르는 다른 한 개의 공처럼, 혹은 빛의 한 순간처럼 번득거릴 따름이었어.
그것은 바로 그애 나이 때의 내 모습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아 있었는지 몰라. 자신의 체력과 기교가 절정기에 도달해 있음을, 더 이상 공이 완벽하게 맞는 일을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찾아들던 절망감으로 나는 자살을 생각했었지. 죽음의 의식(義識)은 너무도 투명해서 한치의 빗나감도 용서치를 않지. 그 무렵 나는 꼭 절벽 끝에 선 듯한 기분으로, 라켓을 휘두름으로써 내 속에서 돋아나는 그 어찔어찔한 허무감을 죽이고 또 죽였어.
─「관계」-149-150쪽

당신이 쉬엄쉬엄 올라가는 언덕길가로 나무들이 서 있다. 나무가 휘어질 듯 달린 잎들은 은백양 나뭇잎처럼 반짝이고, 햇빛이 부딪치면 캐스터네츠의 우림처럼 쟁강쟁강 맑은 소리를 내었다. 언덕길은 희게 부풀어 솜을 깔아놓은 듯 보였다. 나는 숨이 가빠왔다. 언덕은 그리 가파르지도 않고 당신은 서두르는 품도 없이 걸어 올라가는데 나는 당신을 따라가기가 무척 어렵다. 구름 속을 걷는다면 이럴까, 다리가 무거워져서 걸음을 떼놓기가 힘이 든다. 나는 큰 소리로 당신을 부른다. 저 좀 보세요. 저 좀 보세요. 당신은 결코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이 더불더불한 뒤통수만 보여주며 올라간다. 나뭇잎들이 와아와아 흔들린다. 당신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저 좀 보세요오. 입에 두 손을 대고 길게 부르다가 나는 두 손을 들어 눈을 가려버린다. 쏘는 듯 강렬한 빛에 눈이 시었다. 손박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벌려진 손가락 새로 언덕을 살핀다. 햇빛은 어디에나 만연해 있다. -192쪽

(이어서) 나는 플라타너스 같기도 하고 은백양 같기도 한, 잎을 휘도록 달고 있는 나무를 바라본다. 그것은 햇빛에 부딪혀 쟁강거리는 잎새로 가지마다 열매를 은폐하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를 좀더 넓히고 반짝이는 잎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아, 소리를 지르며 두 눈을 감아버렸다. 무성한 잎 사이로 얼핏얼핏 내뵈는 것은 풍작의 과일처럼 주렁주렁 달린 남근(男根)이었다.
─「직녀」--쪽

어머니와 관련된 최초의 가장 뚜렷한 기억은 익사의 공포에서 비롯됐다. 유년 시절 어머니와 갔던 바다에서 물에 빠졌을 때 나는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이젠 다시 어머니에게로 갈 수 없다는, 그녀의 자궁에서 떨어져나온 이래 가장 확실히 분리되었음을 막연한 느낌으로 자각하여 얼마나 외로웠던가. 어머니와 나를 갈라놓았던 수천 수만의 물결, 인처럼 묻어나던 번득거림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절대적인 힘으로 나를 떠밀어 내가 물에서 어머니의 손으로 끌어올려진 후에도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손에 십자가를 쥐고 타계했을 때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나는 그녀와 굳게 결합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친화력이 생겨 있었다. …(중략)… 그러나 밤바다 거듭되는 그와의 끈질긴 싸움 끝에 어느 날 문득 최초로 잉태의 기미를 손끝으로 느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서 완벽하게 떨어져나온 격렬한 충격을 맛보아야 했다. -174-175쪽

(이어서) 나는 내 속에 또 다른 하나의 알을 기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결심했다. 아이를 죽여버리기로 작정한 순간 나는 이미 두 손에 피를 잔뜩 묻힌 듯 섬뜩한 느낌이 들었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본 듯하였다. 나는 그 일을 조용히 은밀하게 해치울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도 쉽게 치러진 것이어서 오히려 어머니가 이러한 것을 제물로서 기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아할 정도였다.─「번제」--쪽

목 안의 양쪽 편도가 걷잡을 수 없이 부어오르는 느낌에 잠을 깨었다. 눈을 뜨는 순간 거대한 분홍빛의 봉오리 대신 다가드는 어둠에 나는 고통의 형태나 강도에 앞서 당황스레 고통의 기억만을 끌어들이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그다지 생소한 것은 아니다. 막사의 딱딱한 목침대 위에서도, 때때로 나는 셔츠깃이 바짝바짝 조이는 느낌에, 혹은 저고리 소매의 솔기가 우드득 뜯어지는 소리에 눈을 뜨곤 한다.
한밤중인데도 창의 격자 무늬가 또렷이 나타나는 건 달빛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끔씩 어두워지는 건 달을 가리는 구름 탓이라고 짐짓 확인한다. 강상을 뒤지는 밤낚시꾼들의 칸델라 불빛의 흔들림이 번득번득 이곳까지 미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도사리고 있는 건 뜨락 가득한, 어둠, 어둠뿐이고 나는 차차 통증이 되살아남을 감각한다. 꿈속에서의 고통이, 또는 후드득 후드득 실밥 터지는 소리의 불안이 흡사 의식의 솔기가 터지는 소리인 듯 느껴져오고 막막한 절망으로 실감되어오는 것이다.─「走者」-221-222쪽

그의 흰 손, 거기서 비롯한 끈끈한 기억에서 떠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밖의 어둠이 두텁게 버티고 있었다. 나는 폐에 가득 공기를 들이마셨다. 한 번, 다시 한 번, 다시, 다시. 그러나 공기는 조금도 신선하지 않았다. 어둠을 들이마신 듯, 다시 그것은 폐 속에서 응고하는 듯했다.─「走者」-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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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거실
배수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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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과 같은 대학원생들이 있다. 부모에게서 돈을 받아 비교적 큰 불편 없이 학구적 생활을 이어가는 아카데미커 계층. 그녀들은 사랑에 빠지더라도 함께 살기는 꺼려한다. 남자와 동거를 한다면 돈을 대주는 부모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중략) 린은 미숙하지만 독립적이었다. 그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않고 스스로 터득한 독립의 요령들로 반짝거렸다. 린과 같은 부류의 대학원생들이 생각하는 바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부모와의 관계는 겉보기와는 달리 자신의 내면을 짓누르는 큰 골칫거리이고, 하지만 독립을 원하면 원할수록 현재의 복종이 더욱 필수적이라는 점, 특히 자신의 계층은 부모 세대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파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모들이 보수적이고 엄격하지만 파렴치하지는 않고, 교육받은 지성인인 데다가 돈까지 갖고 있으므로─부모는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자식들은 그 세계를 산다, 등등. 그들에게 필요에 의한 복종은 더 이상 혁명의 대척점이 아니다. -56-57쪽

누군가 혼자서 책 읽는 소리, 그러한 연습의 소리, 무대에서 들려오는 낭송극의 속삭임, 무대 특유의 울림과 음향 자체에 불과한 인상을 주는, 무형의 속삭임, 하나의 속삭임 위로 다른 하나의 속삭임이 중첩되고, 그렇게 하나씩 무한히 쌓여가는 불특정한 속삭임의 파도치는 덩어리들, 거대한 물살의 소리, 노래, 연설, 외침, 절규, 함성, 고함, 기도, 비명, 구호, 아우성, 저주, 고백, 구애, 탄식, 애원, 호소, 울음, 신음, 설교, 낭독, 독백, 고해, 지시, 명령, 설명, 선동, 웅변, 합창, 그리고 선언으로 이루어진, 동시적인 다언어 음악, 단 하나뿐인 목소리의 수많은 발자국들, 그 위를 걸어가는 무거운 나의 몸들, 아직, 한 번도 말해지지 않은, 한 번도 읽혀지지 않은, 그런 길이 있다면, 나는, 그 길로, 가고 싶다고 했다. 무거운 몸, 잘려나간 발가락, 튀어나온 눈동자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시곗바늘, 환상곡, 물방울, 눈물, 타이핑, 향수 뿌리기, 전화벨, 책 펼쳐들기, 입맞춤, 팥, 좌절하여 문 앞에서 멈추어 서기, 잠, 아침, 종소리, 그리고 작별, 울림을 만드는 것들. 모든 종류의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들. 모든 종류의 목소리를 갖는 일과 사물들.-104쪽

(이어서) 나는 그것들과도 작별한 걸까. 수니는 귀를 기울인다. 나는 밤이면 부엉이가 되어야 해. 그리고 일단 부엉이가 되면, 내게는 항상 커다란 귀와 밤뿐이지. 귀는 텅 빈채 조용하고 밤은 울림으로 가득하다. 모든 떨림이 저마다 다른 파장을 갖는, 무한한 파장들의 비연속적인 밤. 희태는 그런 밤 수니의 모습을 연상할 수가 있다. 어두운 밤의 분수, 흰 물줄기가 외롭게 수직으로 솟아오른다. 오직 물의 내부만을 비추는 어딘가로부터의 빛. 그토록 고집스럽고 배타적인 빛.-104-105쪽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사실적 존재 방식은 여전히 내 관심의 대상은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내가 환상하는 방식이 곧 나의 실재, 내 세상의 실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 나는 오직 환상을 사랑하고, 그것이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고 싶어요. 앞으로 시간이 흘러 나이와 이성이 나를 침범하여 나를 현실의 인간으로 만들어놓을지라도, 나는 지금의 이 환상과 헤어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하고 린이 다시 물었다. 만일 네가 네 환상을 기록한다면, 네가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네가 꿈으로 꾸는 묘사 불가능한 것들을 기록한다면, 그런 것들을 기록하기 위해서 네 언어를 만들어낸다면, 하루하루 네 꿈을 기록한 노트를 당나귀처럼 어디든 짊어지고 다닌다면, 너는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동시에 다른 모든 사물들과 안과 겉처럼 다를 수가 있지. 네 환상은 네가 기록하는 만큼 성장하고 우거질 것이며, 그래서 너만이 산책할 수 있는 검은 숲을 이루게 될 것야. 오, 나는 바란다. 네가 숲이 무엇인지 알기를…… 언젠가는 숲이 무엇인지, 그 속을 산책한다는 게 인간의 어떤 상태를 말하-118-119쪽

는 것인지 알게 되기를 가슴속 깊이 바란다…… 그때가 되면 너는 지금의 내 말을 더욱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네 환상은 네가 기록하는 만큼의 육체를 갖게 되며, 네가 기록하는 만큼의 고유한 현실성을 얻게 된단다. 환상이야말로 여섯번째 감각의 실체인 셈이지. 눈을 감고 상상해보아라. 안개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흰 나무들을, 그들의 시적인 흰 몸들을, 검은 흙과 찬란하게 너울대는 저 세계의 빛을. 무의식 속에서만 살고 있는 꿈은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고요하나, 그런 꿈을 꾼 다음, 정체불명의 매혹적인 우수와 생각에 잠긴 무거움이 네 피부 아래로 파고 들어가 너의 내부에서 폭풍우 치며, 너를 근본부터 바꾸어놓을 테지. 그러면 너는 꿈의 성분으로 다시 태어나며, 네 안에서는 환상 나무가 자라날 거야. 주저 없이 가거라. 그토록 오랫동안 아무도 이름을 모르고 있었던 꿈속의 정원 파라다이스로. -119-120쪽

사실, 대개는 드러내서 말하기를 꺼리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외모’라는 것이 있다. 겨울이나 쇼윈도 앞을 지나갈 때마다 자신을 응시하게 되는 말 없는 존재, 육신 말이다. 그것은 나 자신과 얼마만큼의 연관이 있으며 그 연관은 또한 얼마만큼이나 필연적일까, 우리는 간혹 궁금하다. 단순히 순수한 호기심에서 남자는 거울 속에 비친 수니의 외모를 관찰한다. 외모들은 대개 그 소유자보다는 심술궂으며, 엄격한 인상을 주고,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들은 언어 습관상 자신들이 스스로의 외모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우리의 외모가 우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수니의 외모에는 어떤 종류의 독특한 자세가 들어 있다. 얼핏 건조한 행동가 같은 차림새지만 실제로는 셔츠의 깃 모양이나 단순한 형태의 목걸이 등을 상당히 까다로운 기준으로 선택했을 것만 같다. 담배를 들고 있는 손가락의 모양이나 얼굴 표정의 남다름은 물론이고. 어색하고 고집 센 자기 자신으로 보이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사실에 만족하고 있는 그런 외모는 사진 찍힌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그리고 그 사진이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긴 세월이 흐른 -208-209쪽

다음에도 외모의 장본인을 판단하는 우연한 척도가 될 수도 있음도 알고 있다. 외모는 그런 식으로 살아남아 자아의 일부가 된다.-209쪽

수니는 비명을 질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꿈을 꾸었다. 악몽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악몽. 그러다가 잠에서 깨어났고, 아, 모든 것은 꿈이었어, 하고 꺼질 듯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참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덩어리진 하얀 불빛들이 방 한가운데 흐릿한 형체로 둥실 떠 있다. 밤의 씨앗들이다. 악몽에서 깨어나는 그 순간은 세상에서 가장 환희로우며, 안도와 평화, 감사의 마음, 심지어 대상이 불분명한 격한 신앙심까지도 우리의 가슴속에서 불타오른다. -237쪽

꿈을 꿀 때 우리의 정신은 활발한 반면, 근육은 움직이지 못하므로 꿈속에서 우리는 육체적으로 그토록 무력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래서 꿈속에서 우리는 쫓기거나 느린 속도로 하늘을 날며 움직임에 대한 초조한 열망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물에 잠긴 것처럼 무겁고 힘겨운 육체를 감지할 뿐인 거죠. 반면에 꿈 자체의 육신은 어둡고 투명해요.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겹을 뚫고 꿈의 꿈속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답니다. 예를 들자면, 꿈속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아는 것들, 당신들이 해변으로 갈 것임을 알았어요, 하고 당신은 말했죠? 그 앎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런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현실에서는 알 수도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것들 말이에요. 그렇게 낯선 인식이 우리의 꿈으로 찾아오지요. 우리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며, 과연 우리가 누구의 의지로 그것을 만나게 되는지도 짐작하지 못해요. 우리는 단지 앞뒤 설명도 없이 세계의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어, 단순히 그것을 알 뿐이죠.-239-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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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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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 혹은 프로방스의 햇빛 찬란하고 위대한 풍경들 속에서는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광대한 평원들이 보이지만 자세한 구석구석 또한 모두 다 글씨로 쓴 듯이 확연하다. 클로드 로렝의 그림을 상기시키는 이런 풍경에는 무엇보다도 내가 앞서 말한 그런 계시들이 가득하다. 어떤 친구가 편지하기를, 한 달 동안의 즐거운 여행 끝에 시에나에 당도하여 오후 두시에 자신에게 배정된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열린 덧문사이로 나무들, 하늘, 포도밭, 성당 등이 소용돌이치는 저 거대한 공간이─그렇게 높은 곳에 위치한 시에나 시가 굽어보는 저 절묘한 들판이─보이자 그는 마치 어떤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어서(그의 방은 하나의 깜깜한 점에 불과했다) 그만 눈물이 쏟아져나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찬미의 눈물이 아니라 〈무력감〉의 눈물이었다. 그는 깨달았다(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의 동요라기보다는 정신의 동요였음이 분명하니까)/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일순간에 그의 염원들의, 그의 사상의, 그의 마음의 무(無)를 깨달은 것이다.-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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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문제 - 강경애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7
강경애 지음, 최원식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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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있은 후 며칠 만에 장자 첨지는 관가에 고소장을 들여 이 근처 농민들을 모두 잡아가게 하였다. 그래서 무수한 악형을 하고 혹은 죽이고 그나마는 멀리 쫓아버렸다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혹은 아들딸을 잃어버린 이 동네 노인이며 어린 것들은 목이 터지도록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혹은 아들과 딸을 찾으며 장자 첨지네 마당가를 떠나지 않고 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울고 울고 또 울어서 그 눈물이 고이고 고이어서 마침내는 장자 첨지네 고래 잔등 같은 기와집이 하룻밤 새에 큰 못으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그 못이 즉 내려다보이는 저 푸른 못이다.-8-9쪽

신철이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숨이 차서 대답도 못 하였다. 그리고 자꾸 꺼꾸러지려고만 하였다. 외눈까풀이는 뒤에서 벽돌을 받들어주었다. 신철이는 그만 이 짐을 벗어던지고 달아나고 싶었다.

…(중략)…

신철이는 외눈까풀이를 잃어버리고 한참이나 찾다가 그만 나와버렸다. 그는 수없이 깜박이는 저 전등을 바라보며 잉여노동의 착취! 하고 생각하였다. 그가 책상에서 『자본론』을 통하여 읽던 잉여노동의 착취보다 오늘의 직접 당하는 잉여노동의 착취가 얼마나 무섭고 또 근중이 있는가를 깨달았다.-276-277쪽

그도 모르게 그는 소리를 지르고 나서 우뚝 섰다. 그의 앞은 아득해지며 어떤 암흑한 낭 아래로 채여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어려서부터 그리워하던 이 선비! 한번 만나보려니…… 하던 이 선비, 이 선비가 인전 저렇게 죽지 않았는가! 찰나에 그의 머리에는 아까 철수에게서 들었던 말이 번개같이 떠오른다.
"돈 많은 계집을 얻구, 취직을 하구……."
그렇다! 신철이는 그만한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가 그로 하여금 전향을 하게 한 게다. 그러나 자신은 어떤가? 과거와 같이, 그리고 눈앞에 나타나는 현재와 같이 아무러한 여유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신철이는 길이 많다. 신철이와 나와 다른 것이란 여기 있었구나!
-389쪽

이렇게 생각한 첫째는 눈을 부릅뜨고 선비를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사모하던 저 선비! 아내로 맞아 아들딸 낳고 살아보려던 선비! 한번 만나 이야기도 못 해본 그가 결국은 시체가 되어 바로 눈앞에 놓이지 않았는가!
이제야 죽은 선비를 옜다 받아라! 하고 던져주지 않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첫째의 눈에서는 불덩이가 펄펄 나는 듯하였다.
그리고 불불 떨었다. 이렇게 무섭게 첫째 앞에 나타나 보이는 선비의 시체는 차츰 시커먼 뭉치가 되어 그의 앞에 칵 가로질리는 것을 그는 눈이 뚫어져라 하고 바라보았다.
이 시커먼 뭉치! 이 뭉치는 점점 크게 확대되어가지고 그의 앞을 캄캄하게 하였다. 아니, 인간이 걸어가는 앞길에 가로질리는 이 뭉치…… 시커먼 뭉치, 이 뭉치야말로 인간 문제가 아니고 무엇일까?
이 인간 문제!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간은 이 문제를 위하여 몇 천만 년을 두고 싸워왔다. 그러나 아직 이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앞으로 이 당면한 큰 문제를 풀어나갈 인간이 누굴까?-389-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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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앙드레 말로 지음, 김붕구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1월
절판


‘조금 전 메이는 마치 미치광이나 장님 같았지. ……내가 알고 있던 메이는 아냐. 나는 오직 내가 사랑하는 정도밖에는 메이를 알지 못하며, 그것도 내가 메이를 사랑하는 방법 안에서만 알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곧잘 이런 말씀을 하셨지. 어떤 사람을자기 것으로 만든대도 결국 자기가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밖에 소유할 수 없는 법이라고. 그러면 그 다음은?’-71쪽

그는 레코드를 들으면서 느꼈던 놀라움(*녹음된 목소리가 자기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아 이질감을 느꼈던 놀라움)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
"나도 전에 무심코 거울을 들여다보고 통 내 얼굴같이 보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지……."
그의 엄지손가락은 마치 추억의 가루를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오른손 손가락들을 조용히 매만지고 있었다. 그는 아들이 앞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듯 자기 생각을 쫓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건 틀림없이 방법의 문제야. 우린 딴 사람의 목소리는 귀로 듣거든."
"그럼 자기 목소리는요?"
"목구멍으로 듣는 거지. 왜냐하면 귀를 막아도 자기 목소리는 들리거든."-57-58쪽

당신은 페르시아 여자들이 화가 나면 남편을 징이 박힌 슬리퍼로 두들긴다는 애기를 아세요? 그래도 그 여자들에게는 책임이 없대요. 그러고는 다시 예전 같은 생활로 돌아간대요. 남자와 같이 울고불고 하는 생활은 문제가 아니지만, 남자와 같이 잘 때는 노예가 되는 생활 ㅡ 그렇죠? ㅡ 말하자면 여자들이 소유당하는 생활이 다시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나 저는 소유당하는 여자는 아니예요. 당신이 흡사 어린애나 환자를 대하듯이 거짓말이나 슬슬 해가며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그런 육체는 아니에요. …(중략)… 그렇지만 당신은 아마 여자도 '역시' 인간이라는 걸 끝내 깨닫지 못하고 저승에 가실 것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부딪친 남자들은 ㅡ 아마 앞으로도 그런 남자들밖에는 만나지 못할 테죠. 할 수 없어요. 제가 '할 수 없지'라는 한탄을 얼마나 자주 되풀이하는지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ㅡ 그 남자들은 제 매력을 발견하고 제 변덕을 미덕으로 고쳐주려고 제가 감동되리만큼 무척 애를 쓰곤 하더군요. 그렇지만 어떤 참다운 인간적인 문제가 생길 때면 그들은 으레 남자 친구를 찾아가 버리는 거예요 ㅡ 물론 위안을 받고 싶을 때는 제외하고요. …(중략)… 당신이 자기가 한갓 수표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내가 한갓 육체로 되기를 거부하는 거예요.-279-280쪽

페랄은 지조르의 투철한 통찰력이 어디서 오는 것이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을 대할 때 그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단편적인 모습을 알아내는 힘에 있는 것이다. 그 예리한 관찰을 종합함으로써 지조르라는 인간의 가장 정묘한 모습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페랄은 모르고 있었다.-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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