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짐승일기
김지승 지음 / 난다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한번도 세계의 주인공인 적이 없었다. 아니, 인간이었던 적이 없었다. 시혜적으로 인류의 부속품 정도로 끼워줬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이 번성하는데 자원을 제공하는 제2의 성으로서.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집어든다. 그는 의문한다. “진리를 여자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서문 첫 문장에서부터 한숨이 나온다. 실존에 대해 고민하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다시 집어든다. 부조리의 추론과 사유에 흠뻑 빠져 카뮈의 신랄한 냉소를 킥킥대며 즐기다 돈 후안의 사랑 운운하는 부분에서 미간에 힘이 들어간다. 편견을 버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나 열린 마음으로 들어보자. 이분 ‘사랑’에 대한 정의부터 다 잘못되었네. 아무리 봐도 사랑이 아니라 그냥 발정난 바람둥이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한데. 저승에서 불려와 벨 훅스 선생께 사랑학에 대한 나머지 수업좀 듣게 시켜야 하겠다. 아닌가, 내가 인류의 일원인 줄로 또 착각했네. 책 읽기와 사유하기를 좋아하는 여성으로서 misogyny의 포화에 정신이 폐허가 되어가며 글을 읽은 게 한두번인가, 이런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래서 여성주의 글 위주로 읽기로 다짐했는데, 기억력이 나쁘다.

여성적 글쓰기에 천착해온 김지승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의 최근작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가 인스타그램 피드에 많이 뜬다. 이전 작품부터 차근히 읽어야 할 것 같아 <짐승일기>를 먼저 주문했다.

#음악은 밤의 그림자, 꿈의 대변인. 아주 잠깐 음악이 표상의 세계에서 의지의 세계로 향하는 도구라고 했던 쇼펜하우어를 떠올린다. 동시에 그가 평생 여성과 동등하게 관계해본 적 없음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여성혐오의 문장들을 떠올린다. 음악에 묻은 쇼펜하우어를 털어낸다.
31쪽

#그들이 표현하게 놔둬라. 죽고 싶어, 살고 싶어, 멈추고 싶어, 잊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무서워, 아파, 힘들어, 행복해, 고마워…… 뭐든. 마땅한 출구의 표현을 막지 말고.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도 요원한 긍정적 사고를 아픈 사람에게 강요하는 일이 아픈 사람을 위해서가 아님은 분명하다. 완치의 시간을 향해 있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말들은 치료와 회복 기간을 마치 삶에서 재빨리 지나쳐야 할 어두운 시간으로만 규정한다. 64쪽

#놓친 물고기 같은 언어들이 있다. 적확하게 써본 적 없거나, 몸으로 경험한 적 없거나, 한동안 어둠 속에 있던 것들이 그렇다. 긍정적이란 말은 셋 모두에 해당된다. 사전적 의미로는 그러하거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 또는 바람직한 것. 나도 모르게 턱을 치켜든다. 옳고 바람직한 것이란 무엇인가. 철학에서는 사물의 존재 방식을 있 는 그대로 승인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반대로 그 존재 방식을 의심하고 비판을 가하면 부정을 실행하는 게 된다. 그러니까 아픈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란 말은, 당신이 앓고 있는 그 병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과 자신의 관계 방식이 어떤지 객관적으로 파악한 후 유지하려 애쓰십시오, 라는 말일 수 있다. 63쪽

#당신은 또 놀란다. 아픈 이를 수식하는 그 많은 말에. 수식에 앞선 평가들에. 강하다, 긍정적이다, 성격이 좋아 회복이 빠르다, 생의 의지가 남다르다, 씩씩하다, 씩씩한 척한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아프지 않은 그들의 안심을 위한 말임을 알게 되지만 그전까지는 이런 말들이 아픈 몸을 쉽게 억압할 수 있다는 걸 당신은 몰랐다. 76쪽

#당신은 유난히 놀란다. 아픈 몸에 깃드는 새 지도들과 언어에. 어떤 말은 영영 예전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걱정 어린 안부와 가벼운 호기심의 차이도, 기쁜 일과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함께하는 이들과 ‘도움이 되는 나‘에 취해 힘든 일에만 반응하는 이들의 차이도 더없이 선명하고 분명하지만 아픈 이의 감정적 반응은 대개 ”아파서“로 해석되므로 당신은 다만 조용히 기록한다. 통감 이외의 다른 감각을 놓치지 않도록. ‘긍정적‘이지 않은 모든 감정의 방에 램프를 켜둔다.
77쪽

여성. 비혼인. 싱글. 관병중(‘투병중‘ 아님 주의, 224쪽 참조). 소수자성이 겹겹이 덧씌워져 명명되는 일종의 인식적 폭력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글쓰기. 함부로 명명되고 정의되지 않은 나 자신으로서 존재함을, 살아있음을 소리내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전체집합에서 주류 집합이 쓰는 언어를 덜어 내고, 그 여집합 속에서 또 다른 주류에서의 여집합과의 교집합을 살펴보고, … 몇 차례 이를 반복하며 여집합들의 교집합을 뒤져보면 거름망 사이로 다 주르르 새어나가 나 자신을 상처내고 찌르는 칼날같은 단어들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여집합인 여성으로서의 언어도 이처럼 한계가 뚜렷한데. 그의 관병일기를 이루는 문장들은 언어를 고르고 골라 신중하고 성실하게, 고통스럽게, 장인처럼 갈고 닦은 문장들임이 분명하다. 관병중인 자에 대한 예리하고 정교한 추체험을 가능케 하는, 마치 카프카가 말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와 같은” 벼르고 벼른 언어들이다. 인류의 주인공인 남성들이 인식론적으로 결코 경험해봤을 리 없는 감정들이 해소된다. 타자화. 소외. 예외로서의 존재. 잉여. 그런 해묵은 감정들이.

#명사는 권력이고 권력 가까이 선 것들이고 권력으로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것들이다. 명명은 명사가 권력과 손잡고 하는 행위의 핵심. 너는 여자다. 그러면 나는 그들의 필요에 따라 긴 시간 조형된, 여자라는 개념 안에 갇힌다. 118쪽

여성주의적 글 읽기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집요하고 성실한 사유를 따라가며 고통스럽게 맞닥뜨리는 인식적 해방의 달콤한 쾌감 때문이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이런 문장들은 더 많이 쓰여야 하고,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소리내어 말해져야 해요. 그래서 별볼일 없지만 저도 제 공간에나마 씁니다.
수요일의 문장들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술래 바꾸기>가 도착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미안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최신 원전 완역본 코너스톤 착한 고전 시리즈 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미영 옮김, 김선형 / 코너스톤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명한 작품이지만 스포일러 주의🚨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16세였던 나의 내면을 묘한 흥분, 갈망, 설렘 등의 낯선 파동으로 어지럽혔던 문구.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소녀는 알을 깨뜨리고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가는 새가 자신의 알레고리인 듯 괜스레 비장한 마음으로 일기장이나 책상 앞 메모지, 교과서 여백 귀퉁이에 글귀를 반복해서 옮겨 적곤 했다.

정작 소녀는 <데미안>이라는 작품을 다 읽고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외려 맘 한구석 미세한 균열을 내는 이물감이 섬뜩하고 불편했다. 종교적 계율이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다. 신성모독의 묘한 흥분을 단죄하는 내면의 단호하고 끈질긴 죄의식 때문이었을까, 작품에서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마치 주인공 싱클레어의 뒷걸음질처럼, 어릴적 최초의 성장통의 원흉인 프란츠 크로머로부터 구원해준 데미안을 뒤로 하고 안온한 유년의 세계로 달아나버렸듯이.

이십여 년전 느꼈던 이물감이 남아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데미안>을 집어들었다. 매혹적이고 아름답다. 정신을 고양시킨다. 성장기의 고뇌가 발원하는 지점을 적확하게 파악해서 묘사한다. 균열에서 찬란한 빛 한줄기가 매혹적으로 새어나와 익숙함과 낯섦에 주저하게 되나 이물감은 더 이상 없다.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 신이다. 선/악 또는 이성/본능을 절대적으로 구분하고 서구 세계를 이천 년간 지배해온 이원론적 세계관을 철학적 독단론이라 비판하고 의문을 던지며 도전한 니체의 사상이 떠오른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인도하는 세계이다. 역시나 니체의 이름이 작품 곳곳에서 자주 짧게 언급된다.

성장 소설인만큼 십대 혈기 왕성한 청소년의 성욕 문제가 자연스레 언급된다. 허나 성욕과 정욕으로 괴로워한다고 건조하게 서술될 뿐, 정욕의 발현에 대해 연대기적 혹은 포르노적으로 소비하게끔 묘사하지 않았고 십대 때 읽을 때에도 이점이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다—거의 모든 남류작가의 작품들이 정도의 차이일 뿐 성장통에 여체를 소비하는 성행위 묘사 최소 한 줄쯤은 넣어주지 않았던가. 성욕의 고뇌가 음탕하게 포르노적으로 여성을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개진되지 않도록 섬세하게 설계되어 있다.

이십여 년 전보다 울림은 훨씬 크고, 이해도도 깊어 왜 두루 사랑받는 걸작인지 새삼 절감한다. 도덕, 종교, 성애, 사랑, 모든 것에서 이원론을 거부하기에 싱클레어의 사랑은 성별의 이분법도 초월하여 베아트리체에서 데미안, 자기 자신, 에바 부인의 형상을 넘나든다. 유년시절, 피스토리우스와 각각 결별했듯이 결국은 데미안도 극복하고 싱클레어 홀로 서는 과제를 이룩해야 하기에 작품 말미에서 데미안과 이별의 입맞춤을 나누는데 해석이 분분한 모양이다. 궁극적으로 에바 부인과의 사랑인 것처럼 위장되어 있지만, 나는 결국엔 데미안이라는 어떤 초월적인 인간과의 사랑과 이별, 극복과 성장의 서사라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가진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 최인아 대표가 축적한 일과 삶의 인사이트
최인아 지음 / 해냄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년쯤 전에 친한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책이다. 잊고 지내다 얼마전 눈에 띄어 친구에 대한 부채감으로 한 자리에서 다 읽어버림. 내가 서점에서 직접 구매할 타입의 책이 아니긴 하나, 다 읽고 나서의 소감은 기대 이상으로, 일과 커리어에 대한 통찰력으로 빛나 소장가치 충분한 책이라 하겠다. 선물로 준 친구에게 고마웠다.

“일 너무 잘하면 부려먹기 때문에 적당히 묻어가면서 해야지 열심히 일하면 등골 빨리는 바보다”라는 말을 주변에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다. 나는 그런 식의 교훈을 가르치시는 것과는 거리가 먼 부모님 밑에서 자라서 항상 강한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했고 한편 내가 너무 우직하고 바보같이 살아왔나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다. 최인아 대표의 공감이 가는 일화중 하나는 나도 비슷하게 겪었는데, 대학원 시절 700페이지가 넘는 한 교양서를 읽고 독후감을 써오는 과제였다. 다들 요약본을 읽고 과제를 끝내서 내기만 한 반면 나는 몇날 몇밤 무식하게 그 책을 끙끙거리며 다 읽고 써서 냈다. 최인아 대표처럼 내게는 읽거나, 안읽거나 둘 중 하나다. 요약본을 보는 선택지는 없었는데 다들 그렇게 시간 절약하고 학점을 더 받기 위해 다른 시험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었다. 이런 나만 똥멍청인줄! 하지만, 한편 그로 인해 쌓인 경험들이 나의 자산이 되어왔다고 믿는다. 최인아 대표의 책에서 다시 한번, 내가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용기를 얻어 기쁘다. 코모디티가 아닌 나라는 독특한 브랜딩에 이후 걸맞을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왔으니까. 또한, 행복이나 열정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불편해하고 (정의의 모호성, 폭력성이 수반될 수 있다) 소소한 성취와 같은 순간의 기쁨에 집중한다는 이야기도 좋았다.

최인아 대표는 주변의 내면의 진솔한 소리를 듣고 삶의 중요한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무엇이 중헌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결정하고는 뒤도 보지 않고 잘 밀고 나가며 살아온 것 같다. 아쉬운 점은 그의 삼성그룹 최초의 여성 사장 기회 거절이다. 물론 부회장에서 승진이 목전에 있던 당시, 회사의 혁신에 필요할 시점에 도움이 될 리더감이 아니라는 내면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퇴사하는 결단을 내린 것은 인간 최인아로서 잘한 일일지는 모르겠다. 허나 소수자들은 표집이 적고 표본 그대로 대표성을 띠기 때문에 그들의 발자취가 후에 그들을 따라오는 이들에게 큰 메시지를 준다는 것을 간과한 행동이라 아쉽다. 하다가 그만뒀더라도 유리천장을 뚫고 제일기획 사장직을 수락했어야 리더가 되고 싶어도 좌절해온 수많은 여성들의 귀감이자 희망이 되었으리라고 본다.

다음으로 아쉬운점 하나는, 본인이 40 중반에 인생의 후반전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해서 계속 그게 정답인것처럼 이야기하는 태도가 조금 불편했다. 20대 청년만큼 체력과 패기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40-50대에 (심지어 60, 70대에도!)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서 처음부터 시작한 사람들도 있다. 안 그래도 한국은 연령주의가 심각한 나라인데, 이뤄놓은 것 없이 실패만 한 과거를 툭툭 털고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사람이 본다면 좀 맥이 빠질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넘쳐나고 용기를 불어넣어줘서 흔들릴 때마다 여러번 읽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제는 <흉포한 신: 자살의 연구The Savage God: A Study of Suicide> 로 앨 앨버레즈Al Alvarez의 1971년작을 최승자 시인이 번역하여 1995년에 청하출판사에서 출간했으나 절판되었고, 해당 판본에서 누락된 4.1-4.3장을 황은주 번역가가 추가 번역, 을유문화사에서 개정판으로 올해 30년 만에 재출간되었다.
본작은 천재적인 창작혼을 불태우다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우울증으로 스스로 삶을 마감한 시인 실비아 플라스에 대한 헌사로 시작, 자살에 대한 역사적, 사회문화적, 철학적, 정신분석적인 지적 고찰로 빛나 독해가 술술 넘어가는 책은 아니나 개인적으로 2025년 최고의 책 중 하나로 꼽겠다.

1장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천재적인 시인이자 친우였던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의 죽음에 대한 깊은 애도와 일종의 부채감이 본작의 모티브가 된 것 같다. 테드 휴스와 함께 부부가 유명한 시인 커플이었으며 작가는 시 평론가로 플라스의 생애 마지막 3년간 비평가-시인의 관계이자 친우로 교류해온바, 앨 앨버레즈는 그의 추모에 한 장을 할애한다. 세간에 자살의 아이콘처럼 사후 유명세를 치르게 되어버린 악명을 바로잡으려는 듯한 조심스러운 배려와 애정이 돋보인다. 실비아 플라스의 작품과 삶에서 드러났던 창조성-파괴성이라는 양극단의 전투적 에너지와 내면의 양가감정을 분석함으로써 이 책에서 앞으로 논의할 자살의 복잡한 정신심리적 측면을 암시한다.


2장
서구문화에서의 자살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논한다. 오늘날도 자살에 대해 논하는 것은 금기인 것은 마찬가지이나 그래도 자살자를 희생자로 접근하는 반면에, 19세기까지는 자살에 실패하면 범죄자 낙인이 찍혔고 성공하면 사후 제도적으로 시신에 갖은 오욕을 보이고 유가족을 박해하였다고 한다. 서구 사회에 기독교 교리가 미쳤던 영향인데 놀랍게도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자살을 금지하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살을 죄악으로 보는 관념은 6세기에 이르러 기독교 교리에 추가되었으며, 오히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품위있는 대안’이었고 초기 기독교들에게는 순교를 영광으로 여겨 열풍이 일었다고도 한다. 이에 반대파가 정교하게 교리를 가다듬어 자살을 죄악시하는 교리가 만들어져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3장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장이라고 본다. 자살에 대해 흔히 알려진 오해를 실제 통계와 사례를 통해 바로잡으며, 자살에 대한 정신사회심리적 이론에 큰 부분을 할애한다. 사회적 오욕이자 도덕적 낙인에 불과했던 자살은 1897년 에밀 뒤르켐의 명저 <자살론>의 출간 이후 학문적인 연구 대상이 된다. 작가는 사회학적 측면이 지나치게 부각되는 한편 정신분석학적 분석이 아직 부족함을 비판하며,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자들의 이론을 통해 비에로스적 원시 공격성인 죽음 본능으로부터 자살의 근원이 비롯함을 논증한다.
이어 자살자의 감정적 측면을 다루는데, 동기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명확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명징하지 않으며 (완벽한 이성이란 허상이듯이) 정신병적 강박이 있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완벽주의를 통해 자살자로 태어나는 부류의 사람들, 만성 자살자들이 결국 성공에 이른다고 한다.
자살의 이론을 다룬 제3장은 이 책에서 가장 어려운 장이면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강력 추천.

4장
문학 비평가답게 서구 문학과 자살의 역사에 대해 다룬다. 불후의 명작 <신곡>에서 단테는 자살을 죄악으로 다루던 중세인인 만큼 자살을 거부하였으나 자살의 괴로움을 나름 공유했음이 암시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어 르네상스 시대의 수사이자 자살에 대한 최초의 옹호인 <비아타나토스Biathanatos>의 저자 존 던, 계몽주의 시대의 자살 실패자 카우퍼와 21세에 자살에 이른 천재시인 채터턴, 천재는 요절한다며 자살을 낭만화한 낭만주의자들, 실존주의자들, 키릴로프라는 유명한 가상인물을 낳은 도스토예프스키, 세계대전으로 귀결된 이성에 대한 조롱과 반예술을 주창하며 자살의 릴레이를 낳은 다다이즘, 모더니즘까지 숨쉬지 않고 달린다. 예술의 속성상 비탄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으므로 상처받기 쉬운 자기 안의 영역을 모두 탐구하는 것이 예술가이며 이에 모든 죽음의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상징적으로 시행하기에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자살이란 훌륭한 예술 작품처럼 마음의 침묵 속에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5장
에필로그. 마지막장에서 앨버레즈는 본인 역시 자살 생존자임을 밝힌다. 최근에 읽었던 클랜시 마틴의 <나를 죽이지 않는 법>은 저자가 자살 생존자임을 밝히고 진솔하게 경험담으로부터 자살자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시작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저자의 생생한 체험담을 통해 이상에서 논의했던 자살의 복잡한 정신심리적 측면을 추체험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금기인 주제인 듯하나, 섹스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욕망이면서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이 바로 자살인 것이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일찍이 그렇게 밝히지 않았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mall Things Like These : Shortlisted for the Booker Prize 2022 (Paperback, Main) - 『이처럼 사소한 것들』원서
Claire Keegan / Faber & Faber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he narrative, which details trifling ordinary lives surrounding a coal merchant and his family during the Christmas season, builds up for the two significant moments that has been prepared and expertly captured as the ultimate moral questions in this brilliant work. One is poignant and the other is beautiful and magical. It seems to cast a way on how to survive against injustice together as a human being with dignity nevertheless struggling in this sometimes evil world.
As a non-native English speaker, I cannot say that I didn’t have difficulty interpreting the context of the work in the bombarded Irish dialects and unique cultures in English text without referring to dictionaries or Google Images.😅

과연 놀라운 재능이다. 반전서사나 거창한 스토리 같은 것은 없어도 된다. 이 소소한 중편 소설에서, 클레어 키건은 주제를 관통하는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두 가지 중요한 순간을 향해 일견 사소해보이는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영어 원서로 도전해서 아일랜드 방언과 특유의 문화를 모르면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쏟아져나와 길지 않은 분량인데도 애먹으며 읽었다. 작가가 의도한 몇 퍼센트나 맥락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천한 어학능력으로 독해하기에도 클레어 키건의 재능은 눈부시다. 역시나 문학작품 영어 원서는 쉽지 않다. (300-400 페이지의 논픽션보다 100페이지 남짓의 픽션이 원서로 읽기 훨씬 어렵다😭)

‘Isn‘t it a good job Mrs Wilson didn‘t share your ideas?’ Furlong looked at her. ‘Where would my mother have gone? Where would I be now?‘ ‘Weren‘t Mrs Wilson‘s cares far from any of ours?‘ Eileen said. ‘Sitting out in that big house with her pension and a farm of land and your mother and Ned working under her. Was she not one of the few women on this earth who could do as she pleased?‘

People could be good, Furlong reminded him-self, as he drove back to town; it was a matter of learning how to manage and balance the give-and-take in a way that let you get on with others as well as your own. But as soon as the thought came to him, he knew the thought itself was privileged and wondered why he hadn‘t given the sweets and other things he‘d been gifted at some of the houses to the less well-off he had met in others. Always, Christmas brought out the best and the worst in people. - P91

When he got to the gable and went round to the coal-house door, the need to open it left him, queerly, before it just as soon came back, and then he slid the bolt across and called her name and gave his own. He‘d imagined, while he was in the barber‘s, that the door might now be locked or that she, blessedly, might not be within or that he might have had to carry her for part of the way and wondered how he‘d manage, if he did, or what he‘d do, or if he‘d do anything at all, or if hed even come here - but everything was just as he‘d feared although the girl, this time, took his coat and seemed gladly to lean on him as he led her ou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