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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일기
김지승 지음 / 난다 / 2022년 9월
평점 :
우리는 한번도 세계의 주인공인 적이 없었다. 아니, 인간이었던 적이 없었다. 시혜적으로 인류의 부속품 정도로 끼워줬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이 번성하는데 자원을 제공하는 제2의 성으로서.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집어든다. 그는 의문한다. “진리를 여자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서문 첫 문장에서부터 한숨이 나온다. 실존에 대해 고민하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다시 집어든다. 부조리의 추론과 사유에 흠뻑 빠져 카뮈의 신랄한 냉소를 킥킥대며 즐기다 돈 후안의 사랑 운운하는 부분에서 미간에 힘이 들어간다. 편견을 버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나 열린 마음으로 들어보자. 이분 ‘사랑’에 대한 정의부터 다 잘못되었네. 아무리 봐도 사랑이 아니라 그냥 발정난 바람둥이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한데. 저승에서 불려와 벨 훅스 선생께 사랑학에 대한 나머지 수업좀 듣게 시켜야 하겠다. 아닌가, 내가 인류의 일원인 줄로 또 착각했네. 책 읽기와 사유하기를 좋아하는 여성으로서 misogyny의 포화에 정신이 폐허가 되어가며 글을 읽은 게 한두번인가, 이런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래서 여성주의 글 위주로 읽기로 다짐했는데, 기억력이 나쁘다.
여성적 글쓰기에 천착해온 김지승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의 최근작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가 인스타그램 피드에 많이 뜬다. 이전 작품부터 차근히 읽어야 할 것 같아 <짐승일기>를 먼저 주문했다.
#음악은 밤의 그림자, 꿈의 대변인. 아주 잠깐 음악이 표상의 세계에서 의지의 세계로 향하는 도구라고 했던 쇼펜하우어를 떠올린다. 동시에 그가 평생 여성과 동등하게 관계해본 적 없음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여성혐오의 문장들을 떠올린다. 음악에 묻은 쇼펜하우어를 털어낸다.
31쪽
#그들이 표현하게 놔둬라. 죽고 싶어, 살고 싶어, 멈추고 싶어, 잊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무서워, 아파, 힘들어, 행복해, 고마워…… 뭐든. 마땅한 출구의 표현을 막지 말고.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도 요원한 긍정적 사고를 아픈 사람에게 강요하는 일이 아픈 사람을 위해서가 아님은 분명하다. 완치의 시간을 향해 있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말들은 치료와 회복 기간을 마치 삶에서 재빨리 지나쳐야 할 어두운 시간으로만 규정한다. 64쪽
#놓친 물고기 같은 언어들이 있다. 적확하게 써본 적 없거나, 몸으로 경험한 적 없거나, 한동안 어둠 속에 있던 것들이 그렇다. 긍정적이란 말은 셋 모두에 해당된다. 사전적 의미로는 그러하거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 또는 바람직한 것. 나도 모르게 턱을 치켜든다. 옳고 바람직한 것이란 무엇인가. 철학에서는 사물의 존재 방식을 있 는 그대로 승인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반대로 그 존재 방식을 의심하고 비판을 가하면 부정을 실행하는 게 된다. 그러니까 아픈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란 말은, 당신이 앓고 있는 그 병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과 자신의 관계 방식이 어떤지 객관적으로 파악한 후 유지하려 애쓰십시오, 라는 말일 수 있다. 63쪽
#당신은 또 놀란다. 아픈 이를 수식하는 그 많은 말에. 수식에 앞선 평가들에. 강하다, 긍정적이다, 성격이 좋아 회복이 빠르다, 생의 의지가 남다르다, 씩씩하다, 씩씩한 척한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아프지 않은 그들의 안심을 위한 말임을 알게 되지만 그전까지는 이런 말들이 아픈 몸을 쉽게 억압할 수 있다는 걸 당신은 몰랐다. 76쪽
#당신은 유난히 놀란다. 아픈 몸에 깃드는 새 지도들과 언어에. 어떤 말은 영영 예전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걱정 어린 안부와 가벼운 호기심의 차이도, 기쁜 일과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함께하는 이들과 ‘도움이 되는 나‘에 취해 힘든 일에만 반응하는 이들의 차이도 더없이 선명하고 분명하지만 아픈 이의 감정적 반응은 대개 ”아파서“로 해석되므로 당신은 다만 조용히 기록한다. 통감 이외의 다른 감각을 놓치지 않도록. ‘긍정적‘이지 않은 모든 감정의 방에 램프를 켜둔다.
77쪽
여성. 비혼인. 싱글. 관병중(‘투병중‘ 아님 주의, 224쪽 참조). 소수자성이 겹겹이 덧씌워져 명명되는 일종의 인식적 폭력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글쓰기. 함부로 명명되고 정의되지 않은 나 자신으로서 존재함을, 살아있음을 소리내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전체집합에서 주류 집합이 쓰는 언어를 덜어 내고, 그 여집합 속에서 또 다른 주류에서의 여집합과의 교집합을 살펴보고, … 몇 차례 이를 반복하며 여집합들의 교집합을 뒤져보면 거름망 사이로 다 주르르 새어나가 나 자신을 상처내고 찌르는 칼날같은 단어들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여집합인 여성으로서의 언어도 이처럼 한계가 뚜렷한데. 그의 관병일기를 이루는 문장들은 언어를 고르고 골라 신중하고 성실하게, 고통스럽게, 장인처럼 갈고 닦은 문장들임이 분명하다. 관병중인 자에 대한 예리하고 정교한 추체험을 가능케 하는, 마치 카프카가 말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와 같은” 벼르고 벼른 언어들이다. 인류의 주인공인 남성들이 인식론적으로 결코 경험해봤을 리 없는 감정들이 해소된다. 타자화. 소외. 예외로서의 존재. 잉여. 그런 해묵은 감정들이.
#명사는 권력이고 권력 가까이 선 것들이고 권력으로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것들이다. 명명은 명사가 권력과 손잡고 하는 행위의 핵심. 너는 여자다. 그러면 나는 그들의 필요에 따라 긴 시간 조형된, 여자라는 개념 안에 갇힌다. 118쪽
여성주의적 글 읽기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집요하고 성실한 사유를 따라가며 고통스럽게 맞닥뜨리는 인식적 해방의 달콤한 쾌감 때문이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이런 문장들은 더 많이 쓰여야 하고,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소리내어 말해져야 해요. 그래서 별볼일 없지만 저도 제 공간에나마 씁니다.
수요일의 문장들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술래 바꾸기>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