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500여권 출간, 어린이 위한 철학만화도 펴내... 플라톤의 `국가`는 14년 걸려

서광사에 전화로 책을 주문하는 고객은 주민번호까지 일일이 불러줘야 한다. 2005년 초 세무조사에서 ‘개인에게 책을 팔 때도 세금계산서를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고지받은 후 이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직원 5명이 일하는 작은 출판사지만 이렇듯 서광사는 원리원칙에 따라 운영하고 있다. 철학책을 전문으로 펴내는 ‘서광사’는 김신혁(金信爀·62) 사장이 1974년 당시 다니던 인쇄소를 그만두고 나와 자본금 100만원을 가지고 문을 열었다. “사장님이 가톨릭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한때 신부가 되려고까지 했어요. 처음부터 철학책을 전문적으로 내는 출판사를 세우기로 마음먹었던 거죠.” 1999년 12월 김 사장이 뇌출혈로 쓰러진 후 회사의 경영을 맡고 있는 부인 이숙(李淑·58) 부사장의 말이다.

아직 국내에 저작권법이 발효되기 전이었던 당시엔 원서를 제본해서 판매하는 리프린트부터 시작했다. 리프린트하는 책 또한 철학 원서였다. 많은 수의 원서를 리프린트 하면서 훑어보고 번역출판 가능성을 검토해 본격적으로 출판에 뛰어들 채비를 했다. 마침내 1977년 서광사의 첫 번째 책인 롤스의 ‘사회정의론’이 출간되었다.

서광사의 책에는 고유번호가 매겨져 있다. 롤스의 사회정의론을 1번으로 해 가장 최근에 출간된 ‘공자와 유가’는 511번을 달고 있다. 약 30년 동안 500여권을 펴냈으니 한 해에 출간한 책은 20권이 채 안되는 셈이다. 한 권당 1년에 보통 100권 정도가 팔린다고 하니 ‘저렇게 팔아서 장사가 되려나’ 싶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500여권의 책이 대부분 절판되지 않고 10년이고 20년이고 꾸준히 팔리고 있다. 1년 동안 팔리는 책을 합산해 보면 8만~9만권 정도가 된다.

서광사는 시대를 앞선 경영 방식으로 출판가에 화제가 되곤 했었다. 우선 야근이 선택이 아닌 필수처럼 되어있는 출판계의 상황에서 정시 출퇴근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했다. ‘아침 9시 출근, 오후 5시 50분 퇴근’이 그것. 야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사장한테 허락을 맡도록 했다. 더욱 놀랄 일은 1987년에 이미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한 것. “처음엔 직원들이 더 불만이 많았었다고 해요. 특히 우리나라 남자들은 남들 일할 때 집에서 쉬고 있으면 불안해 하잖아요. 그런데 얼마 지나니까 역시 다들 만족해하더래요. 처음엔 사람들이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몰랐던 거죠.”

서광사가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한 지 3년쯤 지났을 때 김신혁 사장이 한 잡지에 기고한 글을 봤다. 거기에는 “(사원들이) 주5일 근무제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며 “새로 입사한 직원 중에는 ‘회사가 개인에게 지나치게 관여한다’거나 ‘숨이 콱콱 막히는 것 같다’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고 적혀 있었다. 토요일에 일하고 싶은 사람을 회사에 못 나오게 하는 것도 당시엔 심각한 사생활 침해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1993년에 외국에서는 일반적인 관행으로 자리잡았지만 국내에는 생소했던 인세후불제를 시행했다. “저자들은 안전하게 선불로 계약금 받는 걸 선호했죠.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저자들도 연말마다 세금공제 서류까지 첨부해서 책의 매출현황을 정확하게 기록한 내역서를 받아보시고는 이렇게 투명하게 하는 쪽이 더 낫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자에게 보내는 매출내역서를 정리하듯이 회사의 재무관리도 책 한 권, 비품 하나까지 꼼꼼히 챙기며 투명하게 해나갔다. “10년쯤 전이었을 거예요. 세무사들이 세무조사를 하러 왔는데 막상 아무런 잘못도 발견하지 못한 거예요. 나중에는 아무것도 안 나오니까 짜증을 냈다고 하더라고요.”

회사가 투명하다는 것은 사장이 없더라도 회사가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투명하게 경영한 덕을 보게 되었다. 김신혁 사장이 뇌출혈로 쓰러진 뒤 거동이 불편하고 무엇보다도 언어장애가 왔기 때문에 경영을 계속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족들은 출판사의 거취를 놓고 고민했다. 이 부사장은 “출판 일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엄두가 안 났죠. 그렇다고 사장님이 그토록 애정을 가진 사업을 그만둘 수는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결국 유학 가기 전에 잠시 회사 일을 돕고 있던 큰 아들과 함께 이 부사장이 회사를 맡기로 했다.

“예전에 사장님이 집에 오면 회사 얘기를 참 많이 했어요. 그냥 무슨 일이 있었다는 정도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회사에 이러이러한 일이 생겼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식으로 저한테 자문도 많이 구했거든요. 그래서인지 집에 있으면서도 회사가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죠. 또 회사에 와보니 매출, 수금현황 등 회사 경영에 대한 자료가 워낙 투명하게 잘 정리돼 있어서 그런 것들을 하나둘 보면서 업무를 익힐 수 있었어요.”

취재를 하면서 매출실적, 출간현황 등을 물어보면 이 부사장의 큰 아들인 김찬우 부장이 표와 자료를 뒤져가면서 정확한 수치를 대답해줬다. 김 사장이 쓰러진 후 항간에는 ‘서광사가 문을 닫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부사장이 경영을 맡은 후에도 서광사의 책이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되는 등 전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자 다시금 출판사엔 역·저자의 원고가 밀려들고 있다.

30년 이상 철학책만 펴내다보니 주위에서 “돈 안되는 철학만 전문으로 할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책을 내보라”고 권유도 많이 받았다. 서광사는 ‘철학 외길’을 포기하고 다른 분야의 책을 내는 대신에 다른 연령대를 공략하는 전략을 택했다. 1990년부터 출간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철학 동화 ‘사랑과 지혜가 담긴 동화’와 ‘세상의 빛깔들’ 시리즈, 1997년부터 펴낸 청소년을 위해 만든 ‘만화로 읽는 철학’ 시리즈가 그것이다. 현재는 청소년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철학책이 전체 매출액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서광사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아동용 철학책을 찾는 분 중에 논술과 관련된 책인지를 묻는 분이 적지 않게 있어요. 철학책마저도 입시에 도움이 되는지를 따져보고 찾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해요.”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무어냐고 물었다. “플라톤의 ‘국가’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계약을 한 건 1983년이었을 거예요. 1997년에 출간됐으니까 책이 나오기까지 14년이 걸린 거죠. 원고가 도착하던 날 사장님이 ‘14년 만에 원고 받아오면서 눈물이 날 정도로 벅찼다’고 말씀하시던 게 생각나요. 플라톤의 ‘국가’는 원체 유명한 고전이긴 하지만 국내에서 그리스어를 원서로 해서 완역을 한 건 처음이었을 거예요.”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덕인지 판매실적도 지금껏 나온 책 중에 가장 좋다. 지금까지 1만2000부 정도가 팔려나갔다.

어느덧 30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서광사는 국내 철학 출판분야에서 일가를 이뤘다. 앞으로의 목표는 소박하다. “집에 계신 사장님 꿈이 생전에 철학책 1000권을 출간하는 거예요. 30년 동안 절반 정도 냈으니까 앞으로도 부지런히 내야죠. 시장환경이 안 좋아도 좋은 책은 꾸준히 팔리더라고요. 특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같은 고전은 세대가 바뀌어도 계속 찾는 사람이 생기잖아요. 이런 고전분야를 비롯한 좋은 철학책을 꾸준히 내서 서광사 일련번호를 1000번까지 늘리고 싶습니다.” (주간조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회계약론 외 범우고전선 6
J.J.루소 지음 / 범우사 / 1999년 11월
평점 :
품절


※ 범우사판 《사회계약론》에는 루소의 저작 사회계약론/인간불평등기원론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사회계약론은 루소 전공자가 번역한 것 같고, 아마도 인간불평등기원론은 중역된 듯하다.

사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읽던 책들을 덮었었는데, 《사회계약론》 총 4장중 3장까지 읽다 덮어두고 여러 해동안 읽지 않다가 누렇게 바랜 책을 이 책을 꺼내어 다시 처음부터 읽은 건 평택 사건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평생 운운하는 게 어쭙잖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평택 사건은 내게 평생 큰 부끄러움으로, 아픔으로, 앙금으로 남을 것 같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국가 권력이란 왜 생겨났는가? 아나키스트들이 이야기하듯이 본래 국가란 "최대의 합법적 폭력기관"에 불과하다고 평소에 시니컬하게 생각하던 나였지만, 평택 대추리 사태를 비롯한 사건들을 바라보며 이 질문은 아프게 내 심장을 찔러왔다. 왜? 자유로운 개인이, 왜? 국가가 감히 무슨 권리로? 왜? 왜? 왜? 왜?

19세기 로맨티스트 자유주의자처럼 도취되어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사회계약론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구제도의 모순이 축적되어 곪아터지기 일보직전이었던 18세기에, 그 암담한 시기에도 자연 상태의 인간이 본래 선량하고 자유로운 존재였다고 신뢰한 루소여, 나는 그 위대한 휴머니즘에 코끝이 찡해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도 인간의 본성이 선량하다고 믿을 수가 없어서, 당신의 휴머니즘이 정말이지 부럽다. 인간의 본성을 신뢰했기에, 자유로운 신민들 모두의 (다수결이나 수량의 합으로 회귀되는 정의가 결코 아니다) 공통된 의지의 합인 일반의지를 무조건 선하다고 보았다. 국가가 이렇게 일반의지를 행사한다면 신민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으로 귀결되므로 그럴 때만이 국가 권력에 복종할 수 있게 된다고 본 것이다. 루소는 국가가 특수의지와 엄격히 구분된 일반의지를 행사하게 된다면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학을 인간의 윤리를 완성시키는 학문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자, 오늘날의 정치 행태는 어떠한가? 감히, 이미 어린애들까지 거짓말이 판치는 개판으로 인식하는 우리 정치판에 이 논리를 적용하는 것 자체가 부끄럽고 루소를 모독하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물론 루소의 논리는 이상적인 이론이므로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아무튼, 그래도 아직까지 도취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련다. 개한민국 정부 및 국회에, 제발, 특수의지가 아닌, 조금이라도 일반의지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하려는 사명감에 찬 인재가 들어설 날은 결국 없는 것인가? 아니, 인간이라는 종족이 국가라는 체제를 유지하면서 종속하는 한, 일반의지를 행사하는 권력은 결코 들어설 수 없는 것인가? 그런 인재가 있다고 해도, 무지몽매한 대중은 불안정한 자유보다는 안정한 독재자를 원하므로 역시 힘든 문제다.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동물적 욕망에 지적 호기심까지 양 날에 곁들인 자연 최대의 적이므로, 영원히 불가능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휴머니스트인 루소마저도 자기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내다버린 모순적인 인간이었다지 않는가.

최소한의 정치 철학도 갖추치 못한 무뇌아인 정치인들에게 사회계약론을 읽혀야 한다. 반드시 이 책을 읽히고 논술 시험을 치른 뒤 통과하면 정치판에 서든지 말든지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라고 억지 주장을 세우며 글을 맺는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잎클로버 2006-12-28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재미있는 글이네요^^;;; 요즘 정치가 .... 쩝... 괜히 짜증나는군요. 아무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사야하나 모르겠네요..-_-;;ㅋ 99년 출판하다니...;;;
 
달로
한유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한유주. 김애란이 80년생 작가인데 더 젊잖아? 82년생 작가라는 말을 듣고 눈에 띄어서 읽게 되었다. 표지도 예쁘고. (작품집이 안 나와서 그렇지 84년생 작가도 있다더라. 2005년 창비신인상을 탄 김사과씨^^)

도시의 저녁 어스름 속에 떠있는 손톱만한 초승달이 그려진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표지를 보고 소녀적인 취향이나 발랄한 문체를 기대하면 곤란하다. 작가의 등단작이자 제 3회 문학과 사회 신인상 수상작이라는 표제작 〈달로〉가 이 책의 첫 작품이었는데, 처음엔 세 페이지 정도 읽다가 내팽개쳐버렸다. 문장과 이미지의 나열이다. 가독성이 정말 낮다.  스토리가 없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다행히 책을 한 번 잡으면 재미 없어도 웬만하면 끝까지 오기로 읽는 성미 덕택에 나는 이 재능있는 작가를 놓치지 않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으레 소설을 읽을 때 그렇듯이 인물이나 플롯의 전개를 기대하지 않고 작가가 이야기하고픈 메타포를, 행간이 말하는 이야기를, 이미지를, 한줄한줄 곱씹으며 읽었다. 소설이 아니라 시를 읽는 기분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 남는 묘한 여운.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읽기를 매우 좋아하고 소설이랍시고 이것저것 끄적거리는 입장에서 (니체가 말했다지, "문학은 자위행위다"라고.) 이 질문은 쫓아가도 결코 잡히지 않는 무지개처럼 소설이 무엇인지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래도 어렴풋이 생각하는 게 있다면, 이야기를 토해내고자 하는,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며,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공간과 메시지와 인물에 자신을 반추하며 끊임없는 내면의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런 개념이었다.

그러나 한유주의 작품을 읽고 나서 나는 아, 소설가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구나. 라고 무릎을 치게 되었다. 그녀의 작품엔 이야기가 없다. 게다가 언어에 대한 편집적인 결벽증에 걸린 것 같다.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모호한 인물들이다. 〈세이렌 99〉에서는 "손경욱"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이지만 그를 포함한 10명의 대원들은 1월, 2월, 하는 식으로 불린다. 이름이 없다. 〈그리고 음악〉에서는 "환영"이라는 인물(의도적인 작명인 것 같다)이 나오는데, 처음에 나는 인물 이름이 아니라 환각의 이미지를 뜻하는 단어 환영인 줄 알았다. 이야기는 부재하며, 인물들도 개성을 실종한 인물들이다. 작가의 스타일과 어울리는(또는 필연적으로 그러할 수밖에 없는) 설정이면서도 야만적인 ("우리의 세대는 야만적이다"라는 문장이 자주 나온다) 현대 문명 속에서 실종되는 개인성을 함의하는 듯싶다.

작가의 힘은 시적 사유(이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다)를 담은 문장이다.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많은 사물들, 많은 현상들을 치밀하게 관찰했구나. 치열하게 통찰하고 곱씹어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가가 언젠가 (아마 현재로선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이야기"를 쓰게 될 날이 온다면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될 지, 매우 궁금하고 기대된다. 작가의 정진을 기대해본다.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였던 달은 강의 어느 저편에 흐린 얼굴로 잠겨 있었다. 달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먼 옛날 이야기로,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최초의 순간들을 문득 저릿하게 그리워하기도 했다.

달로 갔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달에서 긴긴 안식을 몸에 두를 수 없었다. 그들은 잠시 달의 몸에 취햇다가, 다시 일상의 세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달의 뒷면에 고여 있을 바다를 그리워했다.

도시 안에서 일상의 활기찬 소음들은 기나긴 적막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어느 무대 위에서 누군가가 뱉어놓은 독백처럼 덩그러니 남았다. 표정 없는 말들이었다. 일직선 거리를 가로지르는 전파처럼 어느 누구의 그림자든지 꿰뚫고 지나갔다.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투명한 거미줄처럼 짜여 있었다. 줄이 흔들릴 때마다 해가 뜨기 전 맺혔던 물방울이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줄마다 빨래처럼 매달린 사람들은 잠깐 내비친 태양 빛으로 젖은 몸으로 광합성을 하다가, 곧 어느 거미의 입 언저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달로〉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조건
앙드레 말로 지음, 김붕구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1월
절판


‘조금 전 메이는 마치 미치광이나 장님 같았지. ……내가 알고 있던 메이는 아냐. 나는 오직 내가 사랑하는 정도밖에는 메이를 알지 못하며, 그것도 내가 메이를 사랑하는 방법 안에서만 알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곧잘 이런 말씀을 하셨지. 어떤 사람을자기 것으로 만든대도 결국 자기가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밖에 소유할 수 없는 법이라고. 그러면 그 다음은?’-71쪽

그는 레코드를 들으면서 느꼈던 놀라움(*녹음된 목소리가 자기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아 이질감을 느꼈던 놀라움)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
"나도 전에 무심코 거울을 들여다보고 통 내 얼굴같이 보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지……."
그의 엄지손가락은 마치 추억의 가루를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오른손 손가락들을 조용히 매만지고 있었다. 그는 아들이 앞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듯 자기 생각을 쫓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건 틀림없이 방법의 문제야. 우린 딴 사람의 목소리는 귀로 듣거든."
"그럼 자기 목소리는요?"
"목구멍으로 듣는 거지. 왜냐하면 귀를 막아도 자기 목소리는 들리거든."-57-58쪽

당신은 페르시아 여자들이 화가 나면 남편을 징이 박힌 슬리퍼로 두들긴다는 애기를 아세요? 그래도 그 여자들에게는 책임이 없대요. 그러고는 다시 예전 같은 생활로 돌아간대요. 남자와 같이 울고불고 하는 생활은 문제가 아니지만, 남자와 같이 잘 때는 노예가 되는 생활 ㅡ 그렇죠? ㅡ 말하자면 여자들이 소유당하는 생활이 다시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나 저는 소유당하는 여자는 아니예요. 당신이 흡사 어린애나 환자를 대하듯이 거짓말이나 슬슬 해가며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그런 육체는 아니에요. …(중략)… 그렇지만 당신은 아마 여자도 '역시' 인간이라는 걸 끝내 깨닫지 못하고 저승에 가실 것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부딪친 남자들은 ㅡ 아마 앞으로도 그런 남자들밖에는 만나지 못할 테죠. 할 수 없어요. 제가 '할 수 없지'라는 한탄을 얼마나 자주 되풀이하는지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ㅡ 그 남자들은 제 매력을 발견하고 제 변덕을 미덕으로 고쳐주려고 제가 감동되리만큼 무척 애를 쓰곤 하더군요. 그렇지만 어떤 참다운 인간적인 문제가 생길 때면 그들은 으레 남자 친구를 찾아가 버리는 거예요 ㅡ 물론 위안을 받고 싶을 때는 제외하고요. …(중략)… 당신이 자기가 한갓 수표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내가 한갓 육체로 되기를 거부하는 거예요.-279-280쪽

페랄은 지조르의 투철한 통찰력이 어디서 오는 것이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방을 대할 때 그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단편적인 모습을 알아내는 힘에 있는 것이다. 그 예리한 관찰을 종합함으로써 지조르라는 인간의 가장 정묘한 모습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페랄은 모르고 있었다.-29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2
임마누엘 칸트 지음, 이원봉 옮김 / 책세상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친구들은 매우 바쁘다. 취업이 임박해 자격증, 영어점수, 회화 등의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능력들을 개발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이 할랑한 인간은 오늘도 고전소설과 철학서들을 찾아 머리를 쥐어짜며 고통스러운 글읽기를 수행하고 있다. 따놓은 자격증이나 그럴듯한 토익 토플점수 증명서도 없다. 학점도 개판이다. 참 할일없는 인간이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철학도도 아닌 내가 왜 칸트의 저서에 흥미를 느끼고 찾아 읽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몇 년 전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려다가 서문 이십 여 페이지 정도 읽고 머리를 쥐어싸매다 다른 책들의 유혹에 빠져 슬그머니 책장으로 밀어넣은지 일 년 만에, 나는 이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아마도 칸트에게 내가 흥미를 느낀 이유는 이러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미 알게 모르게 서양철학의 세례를 받아 서양철학이 우리에게 나누어준 이성적 사고방식으로 사유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칸트가 끼친 영향은 아마 지대할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행동 원칙과 가치관도 상이하여 여러 가치들이 충돌하고 있고, 어떤 것이 최상의 가치인지도 불분며하고 혼란스러운 세계이다. 이런 오늘날, 도덕성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러한 사실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접하면 좋을 책이다. 칸트는 도덕성을 경향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이성의 의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의무'는 절대적으로 순수하게 이성에 바탕을 둔 선험적인 도덕 형이상학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의들을 논리적으로 순환논리의 오류를 벗어나기 위해 아주 세심하게 증명하고 있는데, 1장에서는 우선 일반인이 평범하게 인식하는 도덕성이 경향성이 아닌 이성의 의무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논하고, 2장에서는 가언적이 아닌 정언적 명령법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도덕성의 최상 원칙임을 논한다. 또한 정언적 명령법의 목적이 "인간"임을, 다른 표현방식으로 논의하고 있다. 3장에서는 이 "의무"라는 것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찾아서 논리적으로 연결하고 있는데, 이 개념을 "자유"에서 찾고 있다.

이상이 대강이나마 이 책에 대해 내가 이해한 내용이다.『순수이성비판』보다는 비교적(어디까지나 "비교적"임) 읽기 쉬운 책이었지만, 그래도 한줄한줄 의미를 곱씹어가며 정독하느라 고통스러웠던 책이었다는 사실은 고백해야겠다. 아직 이 책을 잘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를 놓기" 위해 칸트가 제시하는 사유 방향을 따라오면서 칸트가 우리 시대에까지 미친 영향을 새삼 절감할 수 있었으며 그 집요한 성찰에서 내가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도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 (역자의 친절한 해제도 읽으면서 모호했던 내용을 다시금 곱씹어 정리할 수 있도록, 또한 칸트의 철학이 오늘날 가지는 의의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잘 도와주었다)

그 유명한 정언적 명령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자신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 또한 너무 이상주의적이라고 비판을 받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간이 목적이 되고 자유로운 의지로 행위하는 목적의 왕국을 꿈꾸었다. 오늘날과 같은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칸트의 철학은 우리 자신을 돌아볼 크나큰 성찰의 여지를 던져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