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마블빠로서 #어벤져스엔드게임 을 기대하며 쓴 글인데 딱히 게재할 플랫폼을 찾지 못해 그냥 여기에 올린다. (아직 안 본 분은 없겠지만 인피니티워 및 전작들의 스포일러 많음)



곧 어벤져스 원년 멤버들의 여정의 대미를 장식할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한다. 전 세계가 타노스에게 이를 갈고 있기에, 우리의 히어로들이 타노스를 어떤 전술로 어떻게 이기냐에 대한 관심과 추측이 각종 커뮤니티, 인터넷 매체와 유투브 등에서 난무하고 있지만 그건 감독들이 알아서 잘할 테니 아묻따 믿고 감상하고 싶고, 그보다는 도대체 어떤 도덕적인 딜레마와 갈등 구조를 그릴 지가 내게는 최대 관심사이다. 그 이유에 대해 길게 주절거려보고자 한다.


해피엔딩보다는 잘 만든 비극 혹은 열린 결말을 좀더 좋아하는데, 특히 영화가 (물론 케바케이지만) 해피엔딩인 경우 “오, 사이다~” “개존잼!” 하고 극장을 나와서 길어야 하루 이틀 더 되새기면 끝으로 곧 잊히곤 했지만, 비극이나 열린 결말의 작품은 여운이 오래 남아 곱씹어보며 사유를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최근 1년 내에 본 영화 중에서 플로리다 프로젝트, 『쓰리 빌보드어벤져스: 인피니티워와 같은 작품들을 거의 광적으로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경우 몇몇 장면을 떠올리면 과장이나 섣부른 판단 및 자의적인 해석 없이 담담하게 거리를 두고 그려졌던 주인공들의 비극이 생생하게 떠올라 아직도 눈물이 줄줄줄 흘러내린다. 이런 수작을 두고 관음증 변태적인 영화가 미장센 운운하며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니 아직도 화가 난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위선적인 영화이다. 내러티브적으로는선함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정작 영화에서 긴 시간을 할애하여 전시하는 이미지들은 소위액션이라고 일컫는 폭력, 전투, 파괴, 살인 장면이고 관객은선함혹은정의를 명분으로 대리 만족하며 이를 즐기러 극장에 가는 것이니까. 물론,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 에서 소개했던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 마냥, 정교한 사회와 도덕 시스템에 촘촘히 얽혀 폭력성을 맘놓고(?) 발휘하기 다소 힘든 현대인들에게 일견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다. 인류학자 리처드 랭햄 의 저작 『악마 같은 남성 Demonic males』 에서도 지적하듯이, 영장류 수컷의 폭력성은 DNA에 뿌리 깊이 새겨져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지성이라는 무기와 더불어 더욱 정교하고 잔혹하게 진화하였고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후손들에게 전달되어 왔다. 내재된 폭력의 본성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조금씩 축적되다 급물살을 타고 임계점에서 폭발하며 전세계적,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사건들이 굵직굵직한 세계대전과 냉전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냉전이라니, 퍽이나 후진 옛날 이야기다. 『빈 서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등으로 유명한 세계적 석학 스티븐 핑커 가 제시하는 통계와 성찰에 의하면 통념과 달리 인간 사회는 점점 선해져 폭력과 전쟁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소수자들이 점차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세계는 어떻게 다양성을 지니고 혐오 사회에서 벗어나 더불어 살아가느냐와 대한 화두를 놓고 지끈거리는 두통으로 씨름하고 있다. 핑커의 주장이 옳다고 해도, 넓게 보면 영장류 전체, 좁게 보면 호모 사피엔스에 내재된 폭력성을 발휘하려는 욕망까지 깡그리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초적 폭력성을 발산하는 방식은 시대적 흐름과 영화산업의 비약적 발전을 타고 좀더 건전한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이드id는 전쟁과 폭력, 살인을 스크린을 통해 즐기고 있다. 초자아superego가 마음 속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럴듯한 명분을 부여하며 죄책감을 덜어주어 가볍게 즐기기 더욱 좋다. 이 명분을 부여하는 복잡한 작업을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다소 유치한 장르였던 슈퍼 히어로물을 수준 높게 만든 것이 #케빈파이기 산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큰 공로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보는 것을 힘들어해 슈퍼히어로물을 극혐했던 나까지 팬으로 만들었으니. 최근엔 슈퍼 히어로 영화 장르의 문법만 빌려와서 더욱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 않은가. 스릴러물(『캡틴아메리카: 윈터솔져』), 인종문제(『블랙팬서』), 청소년 성장물(『스파이더맨: 홈커밍』), 유쾌한 가족 드라마(『앤트맨과 와스프』), #페미니즘(『캡틴마블』)까지.















『인피니티워』는 작년 2018년 한해 동안 영화 팬들에게 큰 충격과 배신감을 선사한 작품이다. 결국 악이 승리했으며 정의의 사도인 어벤져스는 명분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변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작품의 광팬으로 10번 정도 관람했다. 당분간은 후속작인 엔드게임 없이 이런 결말도 그냥 멋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너무 좋아했다.




일단 액션 영화로서의 테크닉은 말할 것도 없고, 중요한 인물이 30명 가까이 나오는데 불협화음 없이 잘 어우러지고, 불필요한 대사는 단 한 줄도 없다. 정교하게 짜인 모든 대사와 상황 설정은 각 인물들의 개성, 가치관과 내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며 복선은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부조화일듯했던 인물들의 앙상블이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내며 그 접점에서 고도로 계산된 유머가 빵빵 터진다. 악인의 일대기에 효과적으로 몰입하게 만들어서, 흉측한 보라색 괴물을 관객들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만들었다. 콧대 높으신 각종 영화제에서 홀대 받은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향후 100년 동안 손꼽힐 명작 중 하나가 되리라고 예상한다. 배드엔딩으로 유명한 스타워즈 시리즈의 『제국의 역습』과 『시스의 복수』 가 그러하듯이.














앞서 말했듯이 후속작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도덕적인 딜레마와 갈등 구조를 어떻게 설득력있게 그려낼 지가 내게는 최대 관심사이다. 3시간이라는 긴 러닝 타임 동안 관객들을 몰입시키기 위해 도대체 히어로들에게 어떤 명분을 부여해줄까? 『어벤져스: 인피니티워』에서는 히어로들이 갈등으로 쪼개지고 서로 전술도 공유되지 않은 채 시작하여 무방비 상태에서 처참하게 당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이야기와 예고편에서 암시한 바로는 히어로들은 심기일전 중이며 남은 명분은 이제 복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복수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타노스는 이제 자신의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고 명예도 물욕도 없이 오두막에서 쉬고 있는데? 감독은 관객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초점은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것일 텐데복수는 루소 형제가 그간 작품들에서 담고자 했던 메시지가 절대로 아니다(아이러니하게도 ‘avengers’는 복수자들이라는 뜻이지만). 전작에서도 복수심에 눈이 멀었던 자들은 다 실패했었다. 1: 타노스 손에서 인피니티 건틀릿을 빼기 전에 연인 가모라를 잃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치고 희대의 트롤러가 되어버린 스타로드. 2: 역시나 니다벨리르에서 힘들게 새로운 무기 스톰브레이커를 만들어 와 놓고도 아스가르드인들과 동생 로키에 대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실패한 토르(감독 코멘터리에서 밝히기로도 도끼날을 타노스의 가슴에 꽂으며 타노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토르는 복수의 희열을 즐겼다고 한다). 괴로워하며 타노스는 말한다. “, 실수한 거야. 내 머리를 노렸어야지.” 그리고 있는 힘을 그러모아 핑거 스냅, ! 인류의 절반이 먼지가 되며 상황 종료.



『인피니티워』에 이어서 『엔드게임』에서도 보여줄 핵심 키워드는 타노스와 캡틴 아메리카의 가치관 싸움이라고 예상해 본다. 타노스는 비용·편익 분석을 도덕적 판단의 근거로 삼는 양적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의 21세기적 후계자이자 맬서스 인구론의 실제적 집행자이다. 캡틴 아메리카는 칸트의 정언 명령의 충실한 후계자라고 볼 수 있다. 인피니티 워를 본 관객들이라면 타노스에게 이길 뻔 했던 몇 가지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어차피 절반이나 다 죽을 거 마인드 스톤의 소유자인 비전을 좀만 더 일찍 죽였다면 몰살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스타로드가 이성을 잃지 않아 건틀릿을 타노스의 손에서 벗기는데 성공했다면? 스타로드가 가모라를 일찍 죽였다면 소울 스톤은 아예 찾지도 못했을 텐데. 토르가 좀더 냉정하게 타노스의 머리를 노렸더라면? 뒤의 두 가정은 히어로들의 인간적이며 불완전한 면모와 복수심의 무용함을 보여줬다면, 앞의 두 가정은 비용 편익 분석적으로 보면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나 최악을 막기 위해 차선책으로 절반을 죽여도 괜찮다는 타노스의 가치관과 진배 없는 섬뜩한 가정이다.















『인피니티워』에서 두 가치관의 격돌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개된 기차 비상 선로에서의 도덕적 딜레마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무고한 1인을 고의적으로 살해하여 5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살인은 정당한가?” 세계 기아 문제 전문가인 장 지글러 는 유명한 저작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기근이 인구를 조절한다는 맬서스 이론에 대해자신들은 절대로 굶어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자들의 전형적인 유럽적·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라며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를 의식했는지 감독들은 영리하게도 타노스를 업그레이드시켰다. 그는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신념을 실행하는 자로 묘사되며 스톤만 챙기면 전투를 멈추고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사라진다. 그는부자든 가난한 자이든 랜덤으로 공평하게 절반만 죽인다’. 감독 코멘터리에 따르면 심지어 타노스 자신도 랜덤으로 살아남은 쪽에 속한다고.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에 대한 기초놓기』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의지가 존중되는 존재자로서 생명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며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캡틴은 칸트 철학의 수호자이다. 『시빌 워』에서는 소코비아 협정에 반대하며 지성적인 존재로서 자율적인 의지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여 칸트의 도덕 철학의 핵심 정신을 실천한 바 있다. 『인피니티워』에서도 역시 그는 비전이 자신을 죽이라고 하자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 “We don’t trade lives(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저울질하지 않는다).”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결과론적인 비용 편익 분석으로 인간의 생사가 결정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 정의로운 캡틴 아메리카의 생각이며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캡틴은 졌고, 동료들의 절반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참혹한 와칸다 전투 현장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황망한 표정으로, 처음으로 신을 찾는다. 이보다 절망적일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캡틴은 자신의 정의를 고수할 수 있을까? 지난 10년 간 캡틴의 여정을 그린 6편의 영화를 지켜보면서 자신 있게 말하건대, 반드시 그럴 것이다. 어떻게 그 신념을 멋지게 그려낼 것인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개봉을 남겨두고 가장 흥분되는 지점은 두 가지이다. 나의 새로운 우상 캡틴 마블의 활약과, 캡아는 도덕 판단을 비용 편익으로 분석하며 생명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한 방 날려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의 새로운 우상 캡틴 마블의 활약은 얼마나 멋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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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중간 의사는 사람을 치료하며, 큰 의사는 나라를 구한다



소의치병(小醫治病), 중의치인(中醫治人), 대의치국(大醫治國)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중간 의사는 사람을 치료하며, 큰 의사는 나라를 구한다

중국의 사회 혁명가이자 의사인 쑨원(孫文)이 인용하여 유명한 격언입니다. 의대 교수님들이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의 주제로 수업 시간에 곧잘 언급하시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의료계에 몸담고 계신 분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직관적으로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외과의사이자 저술가, 공중보건의료정책가인 아툴 가완디Atul Gawande는 글로벌한 보건의료 문제에 메스를 대며 사회를 개혁해 나가는 사상가라는 점에서 이미 대의(大醫)를 넘어선 의사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전국민의료보장제도를 도입했던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그의 철학에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오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자선사업에 분투하고 있는 세계적인 대부호 빌 게이츠와 손을 잡고 말라리아 퇴치 사업 및 여전히 모성 사망률이 높은 의료 사각지대의 의료 접근성 확충 등 글로벌한 헬스케어의 이슈들에 메스를 대고 해결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도 했습니다.[1]






 

그는 《타임Time》지가 2010년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100중 한 사람이며,[2] 첫 저작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Complications(2002)』는 진솔함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돋보이면서도 현대 의학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이 빛을 발해 큰 화제를 모았던 바 있습니다. 이어 출간된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Better: A Surgeon’s Note on Performance(2007)』는 2007년 아마존 10대 도서를 비롯해 각종 도서상을 휩쓸었고, 『체크, 체크리스트The Checklist Manifesto(2009)』는 구글 학술검색 데이터에 의하면 20184월 현재까지 각종 논문에 1953회 인용될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존엄한 죽음에 대한 화두를 세계적으로 불러 일으킨 가장 최근작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 2014)』까지 그의 저서는 모두 국내에도 소개되었으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 바 있습니다. 그의 저서들과 강연들을 접할 때마다 놀라운 통찰력과 균형 잡힌 시각, 다방면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게 되곤 하는데요, 그의 독특한 성장 과정과 인품이 현재의 그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의사인 아버지가 일평생 몸소 실천해 보여주신 교훈 - 노블레스 오블리제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굴하지 않는 인내와 끈기였다. 삶의 여정에서 결코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힘 말이다.”[3]


아툴 가완디는 1965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인도계 미국인 1세 아트마람 가완디Atmaram Gawande와 수쉴라 가완디Sushila Gawande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 작은 마을 우티의 평범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난 아트마람 가완디Atmaram Gawande 10세 때 젊은 어머니가 말라리아로 목숨을 잃는 슬픔을 겪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4] 아버지 가완디는 비뇨기과 의사였고 어머니는 소아과 의사로 두 사람은 뉴욕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다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툴과 미타Meeta 두 남매를 낳았습니다. 부부는 1973년 미국 오하이오 주 애선스Athens라는 대학 도시로 이주하여 자리잡고 두 자녀를 길렀습니다.[5]


교육과 의료 혜택이 부족하던 인도의 시골 마을 출신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아트마람 가완디는 소명 의식을 발휘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가 30년 넘게 비뇨기과 의사로서 근무했던 오하이오 헬스케어 오블레네스 종합병원Ohio Healthcare O’bleness Hospital은 애선스라는 작은 도시에 있었는데, 오하이오 주립대학과 관련된 관광 수입 외에 특출한 산업이 발달하지 않아 오하이오 주에서도 낙후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지역사회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며 지역주민들과의 두터운 신뢰 관계를 쌓은 존경 받는 의사였습니다. 그의 진찰실은 항상 환자들로 붐비고 정신 없을 정도로 바빴다고 하며, 항상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노력해왔다고 합니다.[6] 이에 그치지 않고 아트마람 가완디는 지역사회의 리더이자 독지가로서도 활약하였는데 애선스 카운티 메디컬 소사이어티의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7] 아툴 가완디는 그의 트위터 계정@atul_gawande에서 외국 출신의 두 의사(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지칭)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꺼렸을 오하이오의 교외로 가서 지역사회를 위해 (30년을) 헌신했다라고 자랑스러움을 내비치며 아버지를 회상하기도 했습니다.[8]



 

집안에서 정해준 처자와 결혼을 하지 않고 연애 결혼을 하여 할아버지를 노발대발하게 만들었으며 미국 문화의 거의 모든 부분을 받아들이고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는 아버지 아트마람 가완디는 한편 그의 조국을 잊지 않았습니다. 고등 교육으로부터 소외된 인도의 교외 지역에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그의 어머니이자 아툴 가완디의 할머니의 이름을 딴 지에스지 컬리지GSG(Gopikabai Sitaram Gawande) College를 설립하여 2,000명 규모의 캠퍼스로 늘리는 사업을 벌이기도 했고, 지속적으로 학교에 기부를 해왔다고 합니다.[9]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신을 몸소 실천해온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년에는 척수종양으로 투병하는 와중에서도 오하이오 남부 로터리 클럽 회장이 되어 59개 지부를 손수 순회하며 지역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에 몰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일화는 그의 저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2014)』에서 죽음을 앞둔 인간이 최후까지 삶의 자율성autonomy을 발휘하기 위해 분투해나가는 한 훌륭한 예로써 소개되어 있습니다.[10] 아툴 가완디의 저서를 보면 아버지의 정신적 유산을 자랑스럽게 여겨왔음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보건의료정책가의 싹이 트다 - 남다른 정치적 야망


I had majored in biology as well as in political science, and I didn't know how I was going to put these things together. I knew I wanted to become a doctor but I was also very interested in public affairs, and it wasn't necessarily specifically around healthcare alone."

아툴 가완디가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자연스러운 행보이리라 생각됩니다만, 사실 그는 의사가 되기 전까지 남들과 약간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1987년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생물학과 정치학을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프리-메드(Pre-med, 한국의 의과대학의 예과 과정에 해당된다고 보면 됩니다) 과정으로 생물학을 전공한 것은 수긍이 가지만 정치학을 전공한 것은 다소 특이한 이력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메드스케이프(Medscape)와의 2013년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예전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것을 알았지만 공공분야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 후의 그의 행보는 이러한 진술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가완디는 하버드 의과대학원(미국의 의과대학 학제는 기본적으로 한국에서도 한때 시행했던 의학전문대학원 체제에 해당합니다)에 진학했으나 학교측의 양해를 얻어 잠시 의과대학원 과정은 접어 두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그는 옥스포드 발리올 컬리지(Oxford Balliol College)에서 로즈 장학금(Rhodes Scholarship) 수혜자로서 일종의 다학제적 협동 분과 학위인 P.P.E.(철학, 정치학, 경제학 협동과정, 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 P.P.E.)과정으로 1989년 석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참고로 영국 외의 영어권 국가에서 영국 옥스포드에 수학하러 방문하는 최고의 엘리트 대학생 1000여명이 매년 로즈 장학금에 지원하는데 이 중 32명만이 최종 선발되며 세계에서 가장 영예로운 장학금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합니다. 단지 성적만을 판단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성과 잠재력 등 여러 요소를 평가하여 선발한다고 하는데, 이만하면 엄친아로 불리기 손색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요.[11]



옥스포드 P.P.E. 과정은 영국을 이끌어가는 각계의 엘리트들(영국의 내각 관료들, BBC 방송, 《가디언the Guardian》 지 등의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이 거치는 코스로 유명합니다. 진지한 학문 분과라기보다는 정치계와 언론계 입성을 위한 그들만의 리그를 닦기 위한 초석이라는 비아냥거림이 있을 정도로 말이죠.[12] 다학제적 학위로 정치, 경제, 사회학적 현상을 연계하여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이 이 학문 분과의 취지라고 하며, 강제적이며 의무적인 강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학풍이 특징적이라고 합니다. 인도 출신의 이민자 미국인 부모님 슬하에서 성장하면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양쪽을 공부했고, 옥스포드 P.P.E. 과정을 수학했던 아툴 가완디의 남다른 배경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저서에서 맛볼 수 있는 지적으로 유연한 사고 방식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중요한 기점이 아니었을까 싶으며, 이미 학생 시절부터 어느 정도 소셜 리더로서의 야심이 있었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릴 줄 알며 그 결과에 온당히 책임지고, 결과로부터 교훈을 얻는 위대한 정치가들과 외과의들을 존경해왔으며 그들 이상이 되고 싶었다(I wanted to be more like surgeons and more like the politicians I admired who could make decisions, live with the consequences, and learn from the consequences)”

가완디는 1988년 상원의원이었던 앨 고어의 선거 캠프 인턴으로도 일했고 빌 클린턴 행정부 산하 테네시의 짐 쿠퍼 의원 사무실에서 보건의료관리 정책에 관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메드스케이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의사를 인디언 보호구역과 같은 낙후된 농촌 지역으로 데려 오는 데 도움이 되는 대출 상환 프로그램으로 국민 건강 봉사단National Health Service Corps을 부활시키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이 특히 자랑스러웠다고 밝힙니다. 그의 나이가 겨우 26세 때였다고 하네요. “이때는 나의 다양한 경험들이 이후의 내 커리어 속에서 어떤 상호작용을 이루게 되리라고 예상했던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많은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넌 도대체 언제 의대를 졸업하려고 하니?”라는 아버지의 잔소리는 덤이었고요.

본래 그의 꿈은 내과학을 전공하고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쌓은 임상 경험을 기반으로 공중 보건 개혁에 방점을 찍고 의료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만,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외과 실습을 거치며 수술방에 들어가자마자 수술실에 완전히 매혹되었다고 합니다. 의과대학 졸업 후 외과 레지던트 수련을 시작하는 한편, 오래 전부터의 꿈이었던 하버드 보건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습니다. 외과의사가 공중보건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많을 리가 없지 않을까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요(그런데 그런 생각이 틀렸음이 나중에 밝혀집니다).

가슴 속에 꿈을 꺼뜨리지 않고 간직하며 정진하는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기회가 찾아 오게 마련인가 봅니다. 외과 레지던트로 수련을 받던 그에게 친구 한 명이 인터넷 매거진 슬레이트닷컴Slate.com을 시작하면서 가완디에게 글을 써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1996년에 인터넷 매체에 글을 쓰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가완디가 회상하듯 모험적인 일이 분명했지만 그는 이 새로운 도전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그는 레지던트 수련을 받으면서 글쓰기를 병행하기란 힘든 일이었다고 털어놓습니다. 자신의 첫 번째 칼럼은 끔찍했지만 계속 원고를 퇴짜맞고 글을 수정해나가며 효과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의 눈높이로 전달하는 법을 배워나갔다고 하며, 머지 않아 그의 글이 《뉴요커New Yorker》 편집자의 눈에 띄어 1998년부터 뉴요커 고정 필진으로 글을 쓰게 됩니다.[13]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글쓰기의 힘


또한 글 쓰는 행위 자체의 힘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나도 의사가 되고 나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막상 의사가 되고 나니 글을 써야 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의학은 그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머리보다는 몸이 고된 일이다. 의학은 소매업과 같다. 의사들은 한 번에 한 명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한 까닭에 의료는 고되고 단조롭다. 좀더 큰 목적의식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글쓰기는 그런 여러분을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문제를 헤쳐가게 해준다.”[14]

글을 쓴다는 행위는 자신의 언어를 갖게 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나의 신체와 정신을 그저 스쳐 지나갈 뻔한 무수한 경험들을 꾸준한 글쓰기를 통해 자신만의 언어로 공고히 재정의하면, 귀중한 경험들이 휘발되어 버리지 않고 켜켜이 쌓여 나의 정체성을 이루게 되며 앞으로 일어날 고난들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정신적인 힘을 갖게 도와줍니다. 가완디는 글을 쓴다는 행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하버드 의대 교수로서 강의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정기적으로 글을 쓰라고 당부한다고 합니다. 《가디언the Guardian》 지와의 인터뷰에서 글을 쓴다는 것과 외과 의사라는 정체성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내가 만약 지금 버스에 치여 쓰러진다 해도 다음주 월요일로 예정된 내 담당환자 수술 스케줄이 연기되는 일은 없겠지만(다른 외과의로 대체될 수 있다는 의미겠지요), 글쓰기의 경우 그렇지 않다고 답했는데,[15] 그만큼 가완디의 저술가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과 레지던트로서 치열한 의료현장에서의 경험을 진솔하게 엮어 화제가 된 그의 첫 저작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Complications(2002)』에서 이미 보건정책연구가로서의 사상이 서서히 태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제약에 대처하기 위해 분투하는 의학의 잠재력에 매혹을 느끼고 의학도의 길을 걷게 된[16] 꿈 많던 청년 의사가 현실 의료 현장에서 느끼게 된 딜레마와 한계에 대해 고뇌하고 솔직히 털어놓는 인간적인 모습은 독자들을 열광시켰습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외과에서 기술과 자신감은 경험을 통해서 더듬더듬, 자존심을 상해 가며 얻어진다. 테니스 선수나 오보에 연주자나 하드드라이브 기술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일에 능숙해지려면 반복적으로 연습을 해야 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의학에서 연습 대상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는 점뿐이다.”[17]

오래전부터 의학계는 환자들에게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와 신출내기 의사들에게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는 두 가지 상반되는 명제 사이에서 고민해 왔다.”[18]


우리가 가완디의 글을 사랑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글에서 보여주는 진실과 직면하는 용기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치부를 건드린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라면 가완디는 결코 멈추지 않고 용감하게 나아가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내 놓습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맏아이 워커가 갑자기 심한 심장 결함로 인한 울혈성 심부전증을 일으켰다. (중략) 퇴원할 때가 다 되어서도 우리는 그 일을 맡아 줄 심장 전문의를 정하지 못했다. (중략) 그는 심장팀 중에서 워커를 돌보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의사였다. 원인 모르게 숨차하는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워커를 처음 본 사람도 그였으며, 진단을 내린 이도 그였고, 워커에게 약을 투여해 안정시키고 외과의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날마다 병실로 찾아와서 우리 질문에 답해 준 것도 그였다. (중략) “죄송하지만, 저흰 뉴버거 선생님께 부탁드리려고 생각하는데요.” (중략) 젊은 의사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사감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뉴버거 선생 쪽이 좀더 경험이 많다는 것, 이유는 그게 다였다. 공평치 못한 처사라는 건 나도 안다. 아들 아이는 보기 드문 케이스였고, 그 전임의는 경험이 필요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지던트인 나는 그런 상황을 이해해 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결정에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건 내 아이의 문제였다.”[19]

나는 병실에 붙은 그 문구를 쳐다보고 있는 그 순간까지 내가 그 감염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분명히 나를 포함한 우리 가운데 하나일 텐데도 말이다.”[20]


그러나 이 책이 단지 글 좀 쓸 줄 안다는 한 외과의가 의료 현장 뒷얘기를 시시콜콜하게 풀어내는 후일담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훨씬 값진 이유는 본질적인 문제와 핵심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그의 통찰력 때문입니다.


 “외과의학은 의학으로서 최첨단을 걷지만, 최고의 외과의들조차도 과학과 인간 기술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 이 책의 제목 ‘Complications’(『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의 원제로,복잡성’, ‘뒤얽힌 관계라는 의미도 있지만, 의학 분야에서는 합병증을 의미합니다. 가완디는 이 제목이 위의 모든 의미를 동시에 암시하는 것을 기대한 것으로 보입니다)에는 의료 현장에서 발생하는 예기치 않은 곡절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는 일의 밑바닥에 깔린 보다 큰 불확실성과 딜레마에 대한 나의 우려가 담겨 있다.”[21]

 




좋은 의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학의 불확실성과 딜레마 속에서 좋은 의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해야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성찰은 그의 철학의 일관되고도 중요한 핵심 화두입니다. 많은 의사들이 정확한 진단, 뛰어난 기술, 환자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마음만 가지면 좋은 의료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의료 현장에 뛰어들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이는 불완전한 인간인 의사 개개인이 감당하기에는 고도로 발달한 현대 의학의 복잡성에서 기인한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Complications』에서부터 태동한 현실 의식을 바탕으로, 어떤 가치관의 혁신을 이뤄야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풀어나가는 것이 후속작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Better: A Surgeon’s Note on Performance』 입니다.


가완디는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중요한 덕목으로 성실한 자세, 올바른 실천, 새롭게 다시 생각하는 자세를 꼽습니다. 손쉽고 하찮은 덕목으로 여겨 흔히들 무시해버리기 십상이지만, 가완디는 거의 백 퍼센트 완벽하고 강박적인 수준으로 이 덕목들을 지켜야 함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의사란 인간의 건강과 생명에 직결된 선택을 시시각각으로 내려야 하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성실함을 예로 들어 봅시다. 하루에도 수백 번이 넘는 손길을 통해 케어를 받는 중환자실 입원 환자를 돌보는 수많은 의료진들 중 단 한 명이 손씻기를 단 한 순간 잊음으로 인해 환자는 슈퍼박테리아 감염과 같은 치명적인 감염에 노출될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이처럼 성실함과 같은 덕목은 의료행위의 중심일 뿐 아니라 상상을 초월할 만큼 힘든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첨단 의학 지식으로 무장한 지식인이기에 앞서 의사 역시 한 명의 불완전한 인간일 뿐인데, 위의 덕목들을 부주의로 인해 잠시라도 놓쳐버린다면 부도덕한 의사가 되어버리는 걸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의사들이 더 좋은 퍼포먼스를 수행하기 위해 지식을 체계화하여 의료진 모두가 공유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에서 가완디는 이제 의대생들에게는 국가고시 단골 출제 문항이자 고전이 되어버린 아프가 점수Apgar score의 예를 가져왔습니다. 아프가 점수는 갓 태어난 신생아의 다섯 가지 생체 징후를 점검하는데 신생아의 전신 피부색, 호흡, 사지의 운동성, 심장박동수,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에 대해 점수를 채점하며 각각의 항목이 2점이고 총합 10점이 만점입니다. 1953년 닥터 아프가가 공표하였으며 당시 갓 태어난 신생아가 청색증이 심하다든지 기형이라든지 하는 외관으로만 예후가 판단되어 사산아 명단에 올려지는 것을 마음 아파하며 연구한 끝에 제안한 접근법입니다. 출생 1분 후 아프가 점수가 현저히 낮았던 신생아라도 보온과 산소 공급 등의 조치를 취해 주면 출생 5분 아프가 점수가 극적으로 높아진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시작했습니다.





“(전략) 수없이 많은 인체의 이상에 대해 지식 축적과 혁신적인 치료법 개발은 단연코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태껏 과학이 이미 이뤄놓은 능력마저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 씻기나 부상병 치료, 분만에서 보았듯이 의료행위를 둘러싼 구체적인 지식을 체계화했을 때 수천명의 목숨을 구한다.”[22]

 

이와 같은 지식의 체계화로 인해 사산아로 죽어가던 수많은 신생아들의 생명을 살리는 혁신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과학적 진보에 따른 최첨단 치료법의 개발도 중요하지만, 가완디가 보기에 선배 의사들이 전해준 발상의 혁신이라는 유산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더더욱 중요해지고 있음에도, 극도로 전문적이고 복잡한 의료 현장에서 쉬이 간과되고 있었습니다. 가완디는 이러한 불균형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이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보건의료체계의 허점을 계속해서 파고듭니다.

 



고도 전문화 사회에서 놓치기 쉬우나, 핵심적인 보건의료의 혁신이란? - 의료 자원 운용의 효율성


2003년 하버드에서 외과 레지던트 수련을 마치고 나서 본격적으로 외과 전문의로서 업무를 시작하기 앞서, 가완디는 부모님의 모국인 인도에 교환방문 의사로 체류하게 됩니다. 두 달의 기간 동안 아버지의 고향 지역을 비롯하여 인도 전역에 위치한 공공병원 여섯 곳에서 일했는데,[23] 공중보건의료정책의 문제 개선에 대한 획기적인 청사진을 내놓는 그의 선구자적 혜안을 기르는 데 일조한 중요한 경험으로 보입니다. 의료 자원이 풍부히 갖춰지고 고도로 전문화, 분업화된 미국 같은 선진국과 달리, 터무니없이 열악한 시스템에서도 의사들이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의학적 지식을 발휘하여 놀라운 의술을 펼치는 것을 목도하며 그는 큰 감명을 받습니다. 또한 인도 의사들에게서 교훈을 얻게 되는데, 바로 자원의 양이나 새로운 자원의 개발보다는 기존 자원 운용의 효율성이 중요하다는 시각입니다.


미국 정부와 민간 재단은 새로운 유방암 치료법을 개발하느라 매년 10억 달러에 육박하는 예산을 연구비로 지출하지만, 유방암 선별검사를 쉽고 편하게 만드는 방법을 강구할 생각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한 가지 기술만 좀더 규칙적으로 이용해도 유방암 사망률을 3분의 1은 줄일 수 있다고 말해주는 연구가 꾸준히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는 치료 성과의 개선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의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그 가능성을 충분히 깨닫게 된 것은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진료 관행을 살펴보고 나서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희망은 치료 성과를 높이는 데 있지, 유전 연구의 확대에 있지 않았다.”[24]


새로운 실험실 과학이 인명을 구하는 열쇠는 아니다. 기존의 노하우를 실천해 치료 성과를 개선하는 초보적인 과학이야말로 인명을 구하는 열쇠다. 그렇지만 이를 인식하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 까닭에 온 세상의 외과의는 그저 연필 한 자루와 섬세한 손가락, 맑은 정신만으로 허점투성이의 제도와 갈수록 늘어나는 환자의 물결에 맞서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25]


의료 자원 운용의 효율성 문제는 비단 개발도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뉴요커New Yorker》에 게재된 2009년의 기사 「비용에 대한 수수께끼The Cost Conundrum」에서 가완디는 그가 미국 텍사스 주의 맥캘런McAllen이라는 한 소도시에서 우연히 목도한 몇 가지 의문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멕시코 인접 국경 변방 인구 25천의 비슷한 규모의 소도시이며 둘 다 빈곤 지역인데 엘 파소El Paso와 맥캘런McAllen의 의료비 지출은 왜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며, 맥캘런의 의사들이 특별히 더 비도덕적이라든지 한 것도 아닌데 왜 맥캘런 주민들은 과도한 의료비로 파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인지, 또한 이런 현상은 지난 10년 간 왜 심화되었을까? 결국 가완디는 의료 선진국이자 세계 최고 강대국인 미국의 의료 자원의 비효율적 운용이라는 문제점을 밝혀냅니다.[26] 이 기사를 읽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고 전해집니다.[27]





의학지식의 고도 전문화라는 양날의 검


시스템의 허점을 해부하는 가완디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체크, 체크리스트The Checklist Manifesto(2009)』에서 구체적으로 빛을 발합니다.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과학의 발전으로 날이 갈수록 더욱 방대한 양의 정보가 축적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생생한 의료 현장에서의 실패담을 예를 들며 논증합니다. 그는 실패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규정합니다. 첫 번째는 무지, 세계에 대한 지식과 그 작동 방식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실수를 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무능으로, 필요한 지식을 현실에 적절히 적용하지 못해 실패하는 경우로서, 고도로 전문화된 지식 사회인 오늘날 경계해야 하는 경우는 특히 무능에 의한 실패임을 강조하며 지적 권위로 가득 찬 의료계에 경종을 울립니다. 가완디는 특유의 성실한 조사를 바탕으로 의료 시스템뿐만 아니라 타 분야의 테크놀로지가 적용되는 시스템의 실패들도 가져와서 예를 드는데, 잘못 지어서 무너진 마천루, 기상학자들이 징후를 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눈보라, 환자가 어떤 흉기로 부상당했는지 잊어버리고 묻지 않은 경우 등이 무능으로 인한 실패에 속한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삶은 주로 무지에 의해 좌우되어왔다. 이 점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예가 바로 질병이다. 과거에 우리는 각종 질병의 원인이나 치료법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불과 수십 년 만에 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지식의 양도 방대해졌다. 무지보다 무능이 더 큰 문제로 부각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28]


팀웍의 협력을 방해하는 가장 흔한 장애물은 노발대발하면서, 메스를 집어던지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외과의가 아니다. (중략) 그보다 더 광범위하게 확산된, 친숙하고 위험한 문제는 일종의 침묵의 이탈상태로 고도로 특수화된 전문가들이 자신이 맡은 영역에서만 전념해서 생기는 결과다. ‘저건 내 문제가 아니야라는 태도는 환자를 수술하건, 승객으로 꽉 찬 비행기를 활주로에서 이동시키건, 혹은 300미터 높이의 마천루를 짓건 사람들이 가지는 최악의 정신 자세다. 하지만 의료계에서는 이런 태도가 자주 목격된다.”[29]















그렇다면 무능에 의한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해결책이 필요할까요? 외과의사로서 그는 수술의 실패로 생기는 합병증을 감소시키는 문제에 천착합니다. 세계적으로 한 해 23천만 건의 수술이 행해지고 있고, 최소 700만 명이 수술 후 장애를 겪으며 100만 명이 수술 후 합병증으로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술을 받는 케이스들이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그에 따른 치명적인 합병증의 피해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수술의 안전성과 질이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 고민의 결과로 그는 체크리스트를 제안합니다. 수백 명의 승객의 안전이 달려 안전수칙을 중시해야 하는 비행기 조종사들의 위기 예방 관리 사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데, 단순하지만 깜박할 경우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행위들의 목록을 간단하게 문서화하여 팀원들이 모두 공유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가장 단순하지만 기본적인 사항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에 의한 실패를 예방하려는 시도로서, 어쩌면 이는 아프가 점수를 도입한 선배 의사들과 타 분야 전문가들의 선구적인 시각을 존경하며 교훈으로 삼았던 겸허한 자세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체크리스트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겸손, 규율, 팀워크와 같은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합니다. 이런 방식은 우리가 해왔던 것과는 반대입니다. 독립, 자급자족, 자립심 같은 것들 말이죠.”[30]


때로는 환자의 사망과 같은 치명적인 결과까지 초래할 수 있는 수술 합병증의 과반수는 지식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당초 예방이 가능했으나 놓쳤기 때문인 것으로 많은 연구에서 드러났다고 합니다.[31] 가완디가 이끄는 하버드 보건대학원 연구팀은 세계보건기구WHO와 협력한 프로젝트 연구에서 8개 병원에서 시행한 체크리스트가 수술 후 합병증을 상당수준으로 감소시켰음을 밝히고[32] WHO는 안전한 수술을 위한 체크리스트(WHO Surgical Safety Checklist) 사용을 권고합니다.




가완디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버드 보건대학원과 보스턴 브리검 여성병원Brigham & Women’s Hospital의 협력으로 세계 개발도상국의 모성 사망률을 줄이자는 프로젝트로 설립된 아리아드네 랩Ariadne Lab의 전무 이사Executive Director로서[33] WHO와 또다시 손을 잡고 개발도상국의 분만 시설에 안전한 분만을 위한 체크리스트를 보급합니다. 그렇지만 인도의 분만 현장에서 자격 있는 전문가들로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모성 사망률이나 신생아 사망률과 같은 지표가 그다지 개선되지 않음을 목격하고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고민하다 코칭 시스템을 제안합니다.[34] 전문가는 스스로의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기존 견해를 뒤집은 발상의 전환으로서, “끝은 없다, 모두들 코치가 필요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인 스포츠 분야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왔습니다. 201712월 테드 강연TED talks에서 가완디는 자율성autonomy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전문가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전문가들도 코칭을 받음으로써 훨씬 향상된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아리아드네 랩이 인도 정부와 손잡고 16만 건의 분만에 코칭 시스템을 적용한 결과 안전한 분만을 위한 체크리스트 항목 준수율이 30퍼센트 이상 향상됨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코칭 시스템은 분명 혁신적이면서도 의료계 종사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만한 제안이기도 한데요(그 자신도 은사인 원로 교수님께 요청해서 코칭을 받으면서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음을 인정합니다), 앞으로 그가 코칭 시스템을 어떤 방식으로 도입하게 만들지 크게 기대가 됩니다.





 

 

질병과 죽음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하여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불편한 진실과 직면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아툴 가완디의 용기과 의지는 가장 터부시되는 주제이자 인류가 가장 두려워해 온 죽음이라는 화두 앞에서도 멈출 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가장 최근작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 2014)』에서 가완디는 처할머니인 앨리스 홉슨의 죽음을 계기로 현대 요양원 제도가 지닌 허점과, 죽어가는 환자에게 지나친 의료 행위를 제공하여 도리어 환자의 마지막 삶의 질을 망쳐 놓는 의료 시스템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질병을 고치고 수명을 연장하겠다는 의학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의료 시스템은 정작 질병과 노화로 고통 받는 인간을 주체에서 객체로 소외시킨다는 뼈아픈 문제인식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우리(의료계 종사자들)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데 능숙하다. 대장암, 고혈압, 무릎 관절염 등 특정 질환에 걸린 환자가 찾아오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고혈압과 무릎 관절염에 더해 각종 다른 문제들을 안고 있는, 이를테면 자신이 영위해 온 삶의 방식을 모두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 할머니를 만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많은 경우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어 버린다.”[35]
















노화로 가족들 사이에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은 할아버지 시타람 가완디,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갖힌 것 같은 비참한 기분을 느끼다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은 처할머니 앨리스 홉슨, 척수종양으로 투병하다 생을 마감한 아버지 아트마람 가완디의 죽음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는 자연스러운 죽음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중요한 가치들을 수면 위로 떠올립니다. 선의를 가장한 기만(죽음을 미룰 수 있다는 환상)과 냉정하지만 존엄한 삶을 살 수 있게 만드는 직면(인간은 결국 죽는다), 자율성과 안전이라는 가치의 충돌을 그는 날카롭게 짚어 냅니다.


스스로는 자율권을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안전하길 바라는 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바로 이 점이 노쇠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크고 역설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가 애정을 가진 사람에게 바라는 일들 중에는 정작 자신은 단호히 거부하는 것들이 많다는 거죠. 자아감을 침해하는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에요.” [36]


현대 의학은 한 달에 12000달러가 드는 화학요법, 하루에 4000달러짜리 집중 치료, 한 시간에 7000달러짜리 수술 등으로 죽음을 미루려 애쓰는데 능하다. 그러나 결국 죽음은 오고야 마는데도 어느 시점에 치료를 멈춰야 할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37]


암울해 보이기만 하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전작들에서 보였던 행보와 마찬가지로 대안적인 움직임들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기존의 시설들은 낙상 예방을 위해 노인들에게 반강제적으로 휠체어를 태우지만, 오히려 근력이 약화되고 자존감을 저해시킨다며 넘어져도 좋으니 걷기를 권장하는 요양원과 같은 곳 말입니다. 이 밖에도 노인들에게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개인 공간에 문을 잠그는 것을 허용하는 요양원, 앵무새 백 마리와 강아지 고양이를 요양원에 들여놓는 의사, 말기 암환자에게 장례식장은 생각해 두셨냐고 직설적으로 묻는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 등에 가완디는 주목합니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제각각의 방식을 띠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가치를 공유합니다. 바로 헬스케어 서비스로부터 인간을 객체로 소외시키지 않고 최후까지 주체로서의 존엄성을 잃지 않게 돕는다는 것이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한계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라면, 그런 인간을 돌보는 역할을 하는 직업이나 기관 의사에서 요양원까지- 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그 한계에 직면하고 분투하는 과정을 도와야 한다. (중략) 그러나 우리가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의료진이 개입해 환자로 하여금 희생과 위험을 감수하도록 하는 일은 더 큰 삶의 목적을 위한 것일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 이를 망각할 경우 우리는 환자들에게 거의 야만적인 고통을 주게 될 수도 있다. 반면 의사의 역할과 한계를 분명히 기억할 경우, 우리가 가져다 줄 혜택은 실로 놀라운 것이 될 수도 있다.”[38]


이 교훈을 받아들여 가완디는 아버지의 삶의 자율성을 지켜나가기 위한 마지막 투쟁을 묵묵히 도우며 끝까지 지켜냅니다. 가족들의 도움을 통해 아버지 아트마람 가완디는 기나긴 암투병 과정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가장 적확한 시점마다 의학기술의 도움을 받았고, 자신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싶은 정확한 시점에서 의학기술의 중재를 거부했습니다. 가완디는 이를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경험이라고 술회합니다. 아툴 가완디가 아버지와의 일화를 통해 인도하는 죽음으로의 여정은 독자의 입장에서도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인간이 최후까지 존엄을 지키려 분투하는 과정에서 빛나는 위대한 의지와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었던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여정을 따라가며 독자 또한 죽음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시대의 슈퍼 히어로


토니 스타크 (아이언맨): 넌 왜 그런 일을 하지? 이유를 알아야겠어. 뭐가 잠꾸러기를 이른 아침부터 밖으로 불러내는 거야?

피터 파크 (스파이더맨): 지금까지 살면서 저는 평균적인 사람이었어요. 전 그냥 책 읽고 컴퓨터 조립하고 축구도 좋아했었는데, 이런 힘이 생기고 지난 6개월 동안 더 이상 그냥 그럴 수만은 없었어요. 저 같은 힘이 생겼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쁜 일이 벌어질 때 못 막으면 내 잘못인 것 같아요.

- 《캡틴아메리카: 시빌 워》 중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가완디는 대의(大醫)라 불리기에 부족함 없는 훌륭한 자질을 모두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기존의 고리타분한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창의성이 넘치는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인류의 집단지성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지적 유산을 소중히 지켜나가며 문제의 본질을 다방면의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는 성실한 균형감각, 사안의 핵심을 간파하는 날카로운 통찰력, 가장 적확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지혜와 결단력,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까지 모두 지니고 있으니 말입니다.

가완디의 생애와 인생관을 추적하면서 자연스레 배트맨, 원더우먼, 아이언맨, 스파이더맨처럼 우리가 사랑해온 슈퍼 히어로들이 떠올랐습니다. 히어로를 히어로로 만들어주는 힘은 그들의 특출한 능력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힘은 그들이 지닌 소명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조리한 상황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고, 나에겐 이를 해결할 힘이 있으므로 모르는 척할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해내야 한다는 현실 인식으로부터 발휘되는 숭고한 의지 말입니다. 어쩌면 가완디는 날 때부터 의사의 자제로 태어난 엄친아로서 하버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외과의로서 적당한 명예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부모님의 위대한 유산인 프론티어 정신과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신, 엘리트로서의 지식과 풍부한 인적 네트워크, 외과의사로서 겪은 다양한 경험, 이 모든 것을 녹여내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이라는 힘을 갖고 있기에, 기존의 의료 체계가 지닌 모순을 뜯어고치는 일은 나의 위치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소명의식이 그를 위대한 보건의료정책가이자 사상가로 만든 것입니다. 소명의식보다는 돈과 명예가 지상 과제가 되어버린 오늘날 아툴 가완디와 같은 의사야말로 진정한 슈퍼 히어로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명의식은 꼭 전문직이나 엘리트들만이 전유하는 덕목은 아닙니다. 소명의식을 다루는 글 중 인상 깊게 읽었던 글에서 나온 일화입니다. 새벽부터 콧노래를 부르며 청소를 하는데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환경 미화원께 뭐가 그렇게 즐거우시냐고 묻자, “지금 나로 인해 지구의 일부분이 깨끗해지고 있잖아요라며 미소 지으셨다고 합니다. 이분 역시 슈퍼 히어로의 자질을 갖추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이처럼 우리 개개인이 소명의식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아름다워지고 더 나아지지better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1] Erin Barry, How Bill Gates and a top doctor are pushing health care solutions in developing nations, CNBC.com, Feb. 3, 2018. (https://www.cnbc.com/2018/02/03/microsofts-bill-gates-and-surgeon-dr-atul-gawande-team-up-on-health.html)

[2] Tom Daschle, THINKERS : Atul Gawande, Time, Apr. 29, 2010. (http://content.time.com/time/specials/packages/article/0,28804,1984685_1984745_1984936,00.html)

[3] 아툴 가완디(2015), 김희정 역, 『어떻게 죽을 것인가』, 부키㈜, p.399.

[4] 위의 책, p.320.

[5] Eric J. Topol, MD, Atul Gawande on the Secrets of a Puzzle-Filled Career, Medscape.com Dec. 06, 2013. (https://www.medscape.com/viewarticle/815241)

[6] 아툴 가완디(2002), 김미화 역,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p.39.

[7] Obituaries: Dr. Atmaram Gawande, the Athens News Aug 15, 2011. (https://www.athensnews.com/obituaries/dr-atmaram-gawande/article_c086ddb9-b64e-5160-902d-ebb4b395ebb3.html)

[8] Atul Gawande on Twitter (https://twitter.com/atul_gawande/status/828001110178791424?s=12)

[9]  About GSG College: History, GSG College(http://www.gsgcollege.edu.in/pages.php?pg_no=114)

[10] 아툴 가완디(2015), 앞의 책, p.321.

[11] Eric J. Topol, MD, Atul Gawande on the Secrets of a Puzzle-Filled Career, Medscape.com Dec. 06 2013. (https://www.medscape.com/viewarticle/815241)

[12] John Crace, Is PPE a passport to power – or the ultimate blagger's degree?, the Guardian, Sep. 23, 2013. (https://www.theguardian.com/education/2013/sep/23/ppe-passport-power-degree-oxford#comments)

[13] Eric J. Topol, MD, Atul Gawande on the Secrets of a Puzzle-Filled Career, Medscape.com Dec. 06 2013. (https://www.medscape.com/viewarticle/815241)

[14] 아툴 가완디(2007), 곽미경 역,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 동녘사이언스, p.294.

[15] Tim Adams, Atul Gawande: ‘Why, as you become older and sicker, should you give up your autonomy?’, the Guardian Jul. 12, 2015.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5/jul/12/atul-gawande-being-mortal-older-sicker-autonomy-interview)

[16] 아툴 가완디(2015), 앞의 책, p.394.

[17] 아툴 가완디(2003), 앞의 책, p.30.

[18] 위의 책, p.38.

[19] 아툴 가완디(2003), 앞의 책, pp.48-49.

[20] 아툴 가완디(2007), 앞의 책, p.39.

[21] 아툴 가완디(2003), 앞의 책, p.17.

[22] 아툴 가완디(2007), p.268.

[23] 위의 책, p.270.

[24] 위의 책, p.270.

[25] 위의 책, pp.279-280.

[26] Atul Gawande, The Cost Conundrum, the New Yorker, Jun. 1, 2009.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09/06/01/the-cost-conundrum)

[27] Eric J. Topol, MD, Atul Gawande on the Secrets of a Puzzle-Filled Career, Medscape.com Dec. 06 2013. (https://www.medscape.com/viewarticle/815241)

[28] 아툴 가완디(2010), 박산호 역, 『체크, 체크리스트』, 21세기북스, p.15.

[29] 아툴 가완디(2010), 앞의 책, 139.

[30] Atul Gawande, TED talks : How Do We Heal Medicine?, Apr. 2012. (https://www.ted.com/talks/atul_gawande_how_do_we_heal_medicine)

[31] WHO, New checklist to help make surgery safer, 25 June, 2008. (http://www.who.int/mediacentre/news/releases/2008/pr20/en/)

[32] AB Haynes et al., A surgical safety checklist to reduce morbidity and mortality in a global population,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360 (5), pp. 491-499.

[33] About Us, Ariadnelabs.org(https://www.ariadnelabs.org/about-us/support-us/founders-affiliates/)

[34] Atul Gawande, TED talks : Want to get great at something? Get a coach Dec. 2017. (https://www.ted.com/talks/atul_gawande_want_to_get_great_at_something_get_a_coach)

[35] 아툴 가완디(2015), 앞의 책, p.75.

[36] 위의 책, p.168.

[37] 위의 책, p.238.

[38] 위의 책, pp.395-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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