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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로
한유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한유주. 김애란이 80년생 작가인데 더 젊잖아? 82년생 작가라는 말을 듣고 눈에 띄어서 읽게 되었다. 표지도 예쁘고. (작품집이 안 나와서 그렇지 84년생 작가도 있다더라. 2005년 창비신인상을 탄 김사과씨^^)
도시의 저녁 어스름 속에 떠있는 손톱만한 초승달이 그려진 신비스러운 분위기의 표지를 보고 소녀적인 취향이나 발랄한 문체를 기대하면 곤란하다. 작가의 등단작이자 제 3회 문학과 사회 신인상 수상작이라는 표제작 〈달로〉가 이 책의 첫 작품이었는데, 처음엔 세 페이지 정도 읽다가 내팽개쳐버렸다. 문장과 이미지의 나열이다. 가독성이 정말 낮다. 스토리가 없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다행히 책을 한 번 잡으면 재미 없어도 웬만하면 끝까지 오기로 읽는 성미 덕택에 나는 이 재능있는 작가를 놓치지 않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으레 소설을 읽을 때 그렇듯이 인물이나 플롯의 전개를 기대하지 않고 작가가 이야기하고픈 메타포를, 행간이 말하는 이야기를, 이미지를, 한줄한줄 곱씹으며 읽었다. 소설이 아니라 시를 읽는 기분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 남는 묘한 여운.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읽기를 매우 좋아하고 소설이랍시고 이것저것 끄적거리는 입장에서 (니체가 말했다지, "문학은 자위행위다"라고.) 이 질문은 쫓아가도 결코 잡히지 않는 무지개처럼 소설이 무엇인지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래도 어렴풋이 생각하는 게 있다면, 이야기를 토해내고자 하는,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며,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공간과 메시지와 인물에 자신을 반추하며 끊임없는 내면의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런 개념이었다.
그러나 한유주의 작품을 읽고 나서 나는 아, 소설가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구나. 라고 무릎을 치게 되었다. 그녀의 작품엔 이야기가 없다. 게다가 언어에 대한 편집적인 결벽증에 걸린 것 같다.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모호한 인물들이다. 〈세이렌 99〉에서는 "손경욱"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이지만 그를 포함한 10명의 대원들은 1월, 2월, 하는 식으로 불린다. 이름이 없다. 〈그리고 음악〉에서는 "환영"이라는 인물(의도적인 작명인 것 같다)이 나오는데, 처음에 나는 인물 이름이 아니라 환각의 이미지를 뜻하는 단어 환영인 줄 알았다. 이야기는 부재하며, 인물들도 개성을 실종한 인물들이다. 작가의 스타일과 어울리는(또는 필연적으로 그러할 수밖에 없는) 설정이면서도 야만적인 ("우리의 세대는 야만적이다"라는 문장이 자주 나온다) 현대 문명 속에서 실종되는 개인성을 함의하는 듯싶다.
작가의 힘은 시적 사유(이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다)를 담은 문장이다.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많은 사물들, 많은 현상들을 치밀하게 관찰했구나. 치열하게 통찰하고 곱씹어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가가 언젠가 (아마 현재로선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이야기"를 쓰게 될 날이 온다면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될 지, 매우 궁금하고 기대된다. 작가의 정진을 기대해본다.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였던 달은 강의 어느 저편에 흐린 얼굴로 잠겨 있었다. 달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먼 옛날 이야기로,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최초의 순간들을 문득 저릿하게 그리워하기도 했다.
달로 갔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달에서 긴긴 안식을 몸에 두를 수 없었다. 그들은 잠시 달의 몸에 취햇다가, 다시 일상의 세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달의 뒷면에 고여 있을 바다를 그리워했다.
도시 안에서 일상의 활기찬 소음들은 기나긴 적막 속으로 삼켜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어느 무대 위에서 누군가가 뱉어놓은 독백처럼 덩그러니 남았다. 표정 없는 말들이었다. 일직선 거리를 가로지르는 전파처럼 어느 누구의 그림자든지 꿰뚫고 지나갔다.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로 투명한 거미줄처럼 짜여 있었다. 줄이 흔들릴 때마다 해가 뜨기 전 맺혔던 물방울이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줄마다 빨래처럼 매달린 사람들은 잠깐 내비친 태양 빛으로 젖은 몸으로 광합성을 하다가, 곧 어느 거미의 입 언저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달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