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의 연인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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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황 측천무후>에서 샨사의 점증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이 주는 서사적 구조와 서정적 문체에 반해 내친김에 <음모자들>까지 읽었을 때 비록 내용면에서는 처음의 감흥만큼 완벽한 서사구조는 아니었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샨사만의 문장을 다시 만날 수 있어 기쁘기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그녀의 작품을 다시 만나기를 기다렸다. 예전 것도, 새로운 것도 감정이 메말라 촉촉한 소설이 필요할 때 읽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작품의 순서를 따질 겨를 없이 꽁꽁 담아두던 샨사의 소설을 다시 꺼내보는 일은 한 인터넷 서점의 할인행사 때문에 가능했는데 2,900원에 구입하면서 내내 마음이 찜찜했던 이유도 중국 태생이지만 독학 끝에 프랑스어로 소설을 발표한 그녀의 감성과 문체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감동적이고 촉촉한 이야기가 저평가되는 것이 안타깝기도, 다시 만나서 반갑기도, 했다. 

<알렉산더의 연인>은 유라시아를 통일하고자 했던 위대한 정복자이자 영웅 알렉산더의 일대기를 그림과 동시에 그의 연인인 시베리아 아마존의 야성적인 여왕 알레스트리아의 삶, 그리고 대립하는 모든 기질을 타고난 두 연인의 운명같은 만남과 영원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무찌르고 20세에 왕위에 오른다. <알렉산더의 연인>은 알렉산더의 지위가 그의 타고난 태생적 아름다움 때문이라는 데에 긴 묘사를 할애하는데, 알렉산더의 일대기를 더이상 자세히 알지 못하는 터라 진위여부는 모르겠다. 


 Alexander the Great

왕위에 오른 뒤 10년만에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세 대륙을 통합, 정복하여 도시 곳곳마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 이름 붙였다. 샨사의 소설 <알렉산더의 연인>은 사실상 알렉산더의 정복보다는 운명적인 연인 알레스트리아와의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서 알렉산더가 정복하는 도시는 연인에게 바치는 선물이자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서만 작용한다. 작가는 애초부터 서사적 구조에 아름다운 묘사를 덧붙인 점증적 문장으로 여성적이고 감상적인 서사시를 그리려 한 것 같다. 역사상, 신화상 위대한 힘을 가진 정복자로만 알려진 알렉산더에게 인간미를 불어넣음으로서 오랜 세월 전에 살았던 역사적 인물과 교감을 일으키려 한 것 같기도 하다. 또 한 가지, 알레스트리아와 결합한 알렉산더야 말로 가장 강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정복자이기도 했다. 

날아라, 새들아,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라!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가 구름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드넓은 세상에 길을 열 것이다. 우리는 땅을 비옥하게 하고, 빙하의 아름다움과 불의 힘을 퍼뜨릴 것이다.
날아라, 새들아! 너희들이 떠나온 곳을 쳐다보지 말고 힘껏 날개를 저어라. 너희들의 둥지를 돌아보지 마라. 날개를 저어라. 바람을 헤치고, 태양을 바라보아라. 그 붉은색, 그 노란색, 그 오렌지색을, 그 얼음과 화염의 융합을 바라보아라.
날아라, 새들아! 모든 새들을 이끌고 날아라. 세상 그 무엇보다 자유의 도취를 사랑하는 너희들아. (pp.160~161)  

사내에게 의지하지 않고, 사내의 씨를 통해 후손을 만들지 않겠다는 전통을 가진 시베리아 아마존의 여왕이기도 했던 탈레스트리아를 알렉산더만의 여왕, 알레스트리아로 만든 힘은 과연 어디에 존재했을까. 나는 그 힘이 단지 위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여인을 오로지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와 세상 전부를 지배하려는 의지는 결국 같은 뿌리를 가지고 태어난 불타는 욕망에 불과할 테니까. 알렉산더가 뜨겁고 열정적인 불과 태양의 정복자였다면 시베리아의 얼음처럼 이지적인 미소로 끊임없이 알렉산더를 기다리고 품어주었던 알레스트리아 역시 위대한 여왕이자 왕비였다. 그들의 결합은 애초부터 완벽하고 영원했다. 사랑은 영혼의 교감이자 꿈이고, 희망이자 자유다. 연인에게 사랑은 무엇이며, 사내에게 또는 여인에게 연인의 존재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한 여자가 왔다. 두통이 날 신음하게 할 때 그녀가 내 위로 올라와 누웠다. 그녀의 피부가 날 식혀주었다. 그녀의 침묵이 날 가만히 흔들어주었다. 그녀가 날 껴안고 어루만져주었다. 비록 그 감촉을 느끼지는 못해도, 나는 온몸으로 퍼져가는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p.283) 

그, 알렉산더와 그녀, 알레스트리아의 영원한 결합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함께한 아마존 여왕의 시녀 타냐, 아니 아냐에 의해 기록되었다. 남과 여, 음과 양, 태양과 달, 불과 얼음, 이 융합될 수 없는 모든 것, 대립할 수 밖에 없는 모든 것이 만났지만 둘은 결국 하나가 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 이치라면 이 세상 모든 연인들의 사랑이 신화처럼 언제나 빛나기를.  

오랜만에 철제무기를 들고, 목숨 걸면서 싸우다 죽어가는 이들이 나오는 모든 영화들이 보고 싶어졌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독서로 정복할 날을 꿈꾸며. 신화 속,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는 일은 항상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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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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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나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하느님을 못 본다는 것과 같은 말이야. 우리는 매일매일을 살아가지. 하루가 지나면 내일이 오고. 그러다 어느 날 느닷없이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지.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던 사람,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을. 하지만 그는 제단에 전 재산을 쌓는 것처럼 어떤 행동을 하고, 이 행동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가슴에 묻혀 있던 것을, 결코 완전히 잃어버리지도 않았고 잃어버릴 수도 없는 그 무엇을 보게 되지. 그것이 그 순간이야. 바로 그 순간 말이야. 우리가 오래도록 기다렸으나 두려워 했으며, 우리를 유일하게 구원해 줄 수 있는 그 순간. (p.202) 

위 문장은 코맥 매카시의 국경 3부작 중 두 번째 작 <국경을 넘어> 중 내가 뽑은 가장 희망적인 구절이다.  

어느날 포크너, 멜빌, 헤밍웨이와 비견되며 현대 미국문학의 대가라 불리는 낯선 이름이 문학계에 불쑥 나타났다. 1933년생 매카시의 긴 문학인생 중 최신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로드>의 세계적인 인기는 이제껏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과거작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했는데, 두 작품 모두 어렵고 힘들게 본 기억이 있는 나는 새로운 작품을 만난다는 기대 한편으론 걱정도 많았다. 황폐한 땅과 거룩한 자연에 도전하다 모든 것을 이끄는 신의 힘에 결국 순응해가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과 신의 구원을 무겁고 담대하게 그려낸 카리스마에 푹 빠지기도 했지만 특유의 건조한 문체와 삶에 대한 희망없음, 구원을 찾아 떠나는 밑도끝도 없는 지루한 발걸음이 그 못지않게 불편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황량한 사막에서 사소한 욕망으로 쫓고 쫓기는 인간 대 인간의 밑바닥 삶을 드러냈다면, <로드>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내세워 인간이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일깨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관통당하는 것 마냥 생생한 고통과 구원의 목소리가 아름답고 간결한 문장으로 전달되는 것이 영 달갑지만은 않았던 것도 인간의 이중성과 도달불능성, 한계와 잠재성을 이야기하는 가슴을 짓누르는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어>는 열 셋에서 스물, 빌리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모험담이다. 또래 답지 않은 고집스러움과 목표로 자신의 맹세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국경을 넘으려다 의도치 않은 온갖 수난을 감내하게 되는 빌리의 성장통이기도 하다. 카우보이이던 빌리의 가족들에게 문제가 닥친다. 근처 목장의 송아지들이 멕시코 쪽 산에서 내려온 늑대에게 물려죽는 일이 종종 발생하자 빌리의 아버지와 빌리는 늑대를 산 채로 잡아 소의 희생을 막고 이득도 남기려 한다. 평화로운 가족의 일상에 뛰어든 늑대는 빌리가 국경을 넘는 발단이 된다. 혼자 늑대를 사냥하러 간 빌리는 온갖 사투 끝에 사로잡지만 느닷없이 되돌려 보내주기로 마음 먹는다. 멕시코에서 넘어온 늑대를 다시 멕시코 땅으로 가서 풀어주기로 한 것이다. 늑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국경을 넘는 빌리에게는 모험과 수난이 기다리고 있다. 늑대를 빼앗거나 이용만 하려던 사람들에게서 늑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빌리는 자신이 늑대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닫자 결국 자신의 총으로 쏴 죽인다. 그저 늑대가 온 곳으로 가서 풀어주려 했을 뿐인 빌리의 수난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집으로 돌아오자 부모님은 습격한 강도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동생 보이드만 살아남았다. 이후 말을 훔쳐 달아난 강도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두 형제는 길을 떠난다. 가는 도중 아버지가 아끼던 몇 마리를 되찾기도 하지만 여러마리의 말을 데리고서는 쉽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다. 아무 것도 갖지 못한 두 형제를, 또한 말을 욕심내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빌리를 적으로 여긴 낯선 이에게 총을 맞은 보이드는 형이 자신을 두고 가던 길을 계속 가기를 바란다. 보이드를 두고 혼자 떠난 빌리는 강도를 찾지 못한 채 스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동생을 찾아가지만 이미 죽고 없다. 묘지를 파헤쳐 동생의 유골을 찾아오던 중 강도를 당해 이번에는 타고 다니던 말이 부상을 당한다. 빌리는 더이상 갈 곳이 없는 채로 쉬지 않고 길을 간다. 이제 빌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빌리의 여정에는 목표가 없다. 갈 곳도 없고, 반겨줄 사람도 없다. 그저 이 곳에서 저 곳으로 갈 뿐이다. 이동 중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는 빌리에게 재산이다. 매카시는 이제껏 내가 읽은 작품들이 그랬던 것처럼 빌리의 확실한 미래를 보여주지 않은 채 끝맺는다. 늑대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주려는 단순한 목표에서 시작된 빌리의 국경넘기는 순수한 소년을 인생만사 다 겪은 청년으로 변신시켰다. 부모님과 동생을 잃고, 갈 곳마저 잃은 그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매카시의 소설은 그래서 아름답다. 여운과 감흥이 뒤따라오는 건조한 문체는 매력적인 유혹이기도 하다. 그래서 또 다시 읽게 된다. 그는 군데군데 희망을 심어두었지만 행과 행, 문장과 문장, 구절과 구절 사이를 흘려 읽는 사람에게는 발견되지 않는다.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또렷하게 다가오는 인간을 넘어선 생명체, 생명체가 존재하는 자연, 자연 너머의 신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부단한 욕망과 어지러움과 무질서의 평형을 맞추는 신의 힘을 느끼자. 독서를 즐기지 않거나 매카시의 건조한 문장 때문에 기승전결이 따분하다면 차선책으로 영화라도 보자. 살아있는 미국문학의 대가인 매카시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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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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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침에 퍼놓은 식은밥을, 두부와 호박을 썰어넣고 끓인 먹다남은 된장찌개를, 며칠전 무쳐 비빔밥 해먹고 냉장고에 뒹굴던 가지나물과 배추나물을 빨강색 음식쓰레기통으로 마구 쳐넣었다. 어떤 건 쉰내가 나고, 어떤 건 질렸다. 새로 끓인 김치찌개와 저녁을 먹지만 내일이면 김치찌개의 일부도 개수대를 거쳐 음식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죄많은 나에게 이 책이 가당키나 한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으며 나는 살아온 한순간 한순간이 죄지은 느낌이었다. 커피 두 잔과 매실차 한 잔, 심심풀이로 빵과 비스킷 등등 쉬지 않고 입에 넣는 나는 얼굴은 모르지만 그들 앞에 분명 죄인이었다.   

내가 TV앞에서 눈 깜빡이며 또 무언가 입에 쳐넣고 오물오물 거리는 동안 아프리카와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대륙 각지 각국에서 5초에 한 명 꼴로 굶어 죽는 아동들이 있단다. 만성적 영양실조로 시력을 잃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란다. 이 책은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저자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눈물어린 진실이다. 도대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걸까?  

지금보다 어릴 때, 아프리카는 날이 더우니 일을 할 수 없어서, 일을 하고 싶어도 척박한 땅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애초에 발전가능성이 없어서, 거기다 발전하고자 하는 토착민들의 의지가 없어서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국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대륙인 줄로만 알았다. 아프리카라는 곳은 저주받은 땅이라서 그 곳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죗값처럼 그 죄를 다 받으며 살아가는 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내게 사하라는 도달 불능의 멋진 곳이고 가끔 로망이기도 했다. 무식하고 어리석었다.  

이 책은 각지 각국의 기아실태를 보고하는 동시에, 지구촌이라는 명목아래 펼쳐지는 구호활동의 실상과 구호활동이 갖는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아문제가 전혀 나아지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고발한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대답하는 형태의 질의응답식으로 되어있어 이해가 쉽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구의 2배를 먹여살릴 수 있다는 오늘날의 식량생산량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구가 기아로 목숨을 잃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거기에는 수많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지만 사실상 해결 불가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니,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가 아니라 해결할 수 있는 자들에게 해결할 마음이 없을 뿐이다. 잘먹고 잘입고 멀쩡하게 사는 사람이 굳이 골치아픈 문제에 뛰어들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전 세계 기아들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제 몸 불리기에 더 급급하다. 먹을 것이 많은 나라가 못 먹는 나라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면 형평이야 맞춰지겠지만 한 국가내에서도 달성하기 힘든 제도를 지구촌에 적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이론적 해결에 그칠 뿐이다. 예를 들어 가격조절을 위해 수요, 공급의 형평을 맞춘답시고 곡식의 양을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도록 법으로 정한다든지, 멀쩡한 소와 돼지를 마구잡이로 도살처분하는 등 일련의 체제로 과잉 식량공급을 차단하려는 방법에서 기아문제를 해결할 마음이 없는 선진국의 본모습을 볼 수 있다.  

만약 거론되는 모든 문제를 넘어서 민간구호단체들의 식량공급과 구조활동이 투입된다해도 그저 그걸로 다가 아니다. 이렇게 공급된 식량들은 정치적 도구로 위장되어 정부에 넘어가거나 무장단체들의 피습에 이용되기 일쑤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구호활동이 피해가 될 수도 있는 현실이다. 이런 경우 정부와 테러단체의 공조로 인해 내전이나 전쟁 등으로 고스란히 피해를 입는 것도 이미 죽어가는 국민들이다. 하다못해 미국 같은 선진국은 식량원조를 핑계삼아 중동이나 아프리카 국가의 땅 속 깊숙히 묻힌 자원을 탐낸다. 때로 값싼 노동력을 제공받아 자국의 힘을 키울 생각에 앞서 있기도 하다. 이처럼 눈앞에 굶어죽어가는 목숨을 두고도 치장할 보석이 필요한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좇을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바로 지금 지구촌에서 가장 힘있고 부유한 국가들이 자유롭고 민주적이라 믿는 자본주의다.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는 인간이라고 한다. 그런데 로드킬 당한 친구를 지키려고 위험한 도로를 배회하는 개보다 못한 생명체도 인간이다. 처음엔 한 달에 3만원이면 굶어죽는 아이 하나 살릴 수 있다는데 뿌듯한 마음으로 기부나 한 번 해볼까 했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지만 과자 몇 봉지 덜 먹고 차비 몇 번만 아껴 걸으면 충분히 낼 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꼭 부자가 아니라도 도울 수 있겠고 여러 명이 도우면 TV에 나오는 삐쩍 마른 아이들 덜 굶어죽는 날이 오겠지 싶었다. 이 책은 그 단순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준다. 있으면서도 돕지 않고, 돕고 싶으면서도 도울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나 한정된 자원 아래 인간의 자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기아로 인한 의도된 죽음이 오히려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 될 것도 같은 논리까지 감히 상상할 수 없던 부분까지 조목조목 알려주는 셈이다.  

나는 충격이 컸고 그만큼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낫다. 기아문제가 빠른 시일 내 해결 될 수도 없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국가가 더 많다. 그들이 없어야 그 땅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은 희망을 붙잡고 노력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움직이기 시작하면 달라진다고 했다.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 이유는 상당부분 이기적인 욕심 때문이다. 기아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많은 구조적, 절차적 걸림돌이 있겠지만 인간애에 호소하는 기본적 양심이 가장 정점이 될 것이다. 1초, 2초, 3초, 4초, 5초. 5초는 내가 살아있는 걸 느끼는 데도 부족할 만큼 짧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조막만한 손으로 빵 부스러기와 물 한 모금, 쌀 한 톨과 옥수수죽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이들이 죽어가는 시간이자 내 양심이 우는 시간이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지만 소리없는 외침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살 수 있는데도 죽어갈 수 밖에 없는 수많은 눈동자들이 나의 게으름과 나태를 다그치고 또 다그친다. 눈물이 난다. 우리는 과연 인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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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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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힌 반전에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그저 가만히, 한참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제목을 선뜻 소설의 내용과 연관시킬 수 없다. 그저, 음악 먼저 들어보고 읽을껄, 생각했을 뿐이다. 누가 말렸던 것도 아닌데 괜한 심통이다. 거기다 [카스테라]의 박민규만 알던 나는 한방 먹은 기분이다. 박민규가 이런 소설을 썼다니. 물론 인터넷 서점에서 온라인 연재될 때부터 읽기는 했다. 그다지 성실한 독자는 아니어서 그 때는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란 걸 몰랐을 뿐이다.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뒤에 첨부된 씨디와 엽서도 끝내 뜯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그와 그녀 그리고 요한의 이야기다. 그리고 작가 요한의 작품 속 이야기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자 아팠던 청춘의 고백이다.  

연재소설의 완성도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괜시리 "미리 써놓고 분량 나눠 올린 거 아냐?" 생각한다. 아예 시비조다. 오랜만에 정통 한국소설을 읽은 나는 새삼 친정에 온 새색시가 된 느낌이다. 장르나 소재는 타 국가에 비해 한정적이지만 국내작가는 우리나라 사람의 감수성에 딱 맞는 언어를 사용한 감동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재주를 가진 것 같다. 오랫동안 머리맡에 두고 표지와 제목만 읽곤 했는데 이제와 그 시간들이 왜 후회가 되는지 모를 일이다. 그와 그녀와 요한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모를 것이다. 지금 흐르는 청춘의 아까움을 모를 뻔 했다. 계획하는대로만 살아지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을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다.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오늘날의 청춘을 궁지로 내모는 감정들인지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와 그녀와 요한이 청춘이던 시절, 휴대폰과 이메일은 왜 없는 거냐며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예상 못한 결말에 비로소 나를 내던질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뜨겁게 타오르는 가슴과, 어딘가로 분출되어야 마땅할 열정과, 부족함이 주는 용기의 아름다움이 목숨보다 소중해진 까닭이다. 또 그와 그녀와 요한의 청춘과 삶을 믿는다. 박민규 작가는 이 소설이 못생긴 여자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다룬 첫 번째 소설이 될 거라고 했다. 그 말이 참 슬펐다. 그와 그녀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나와 너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때, 가엾던 청춘을 위해, 단지 상대를 위해, 사랑이란 이름으로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 아련한 추억이 눈물에 번지는 것 마냥 촉촉하고 잔잔하게 적셔지던 단아한 스무 살 연애감정과 단순히 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희망에 관한 이야기, 또는 삶의 절망. 청춘이라 해서 절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더이상 그와 그녀의 사랑을 질투하지 않는다. 다만 외로워하는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되면 두 말 없이 건네고 싶은 책 한 권이 생겨 좋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게 뭐냐고 묻는 이에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들이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 읽고 나서 <HOPE>라는 간판이 보이는 <BEAR>라는 호프집에서 켄터키 치킨과 마른 오징어를 안주 삼아 함께 맥주를 마시자고. 외롭다. 삶은 누구나 외롭다. 그러나 외로워하지 말자. 청춘은 고독하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말자. 청춘은 누구나 그런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누구에게나 가슴 아픈 것이다. 상처받은 사랑의 추억은 애틋하되, 살아갈 수 있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살다보면 알게 된다. 모두,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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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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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내용을 설명하는 일은 무의미하고 부적절하다. 그저 끝까지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픈 사랑을 경험한 것 마냥 허망하고 쓰라리다. 사랑은 무엇일까. 사랑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야 진짜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지만 [체실 비치에서]의 두 주인공이 더 아름다운 이유는 이언 메큐언이라는 작가가 만들어내는 언어와 언어가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클래식 음악선율 같이 은은하고도 열정적인 문체 때문이다. 섬세하게 다듬어진 감정들에서 구슬같이 찬란한 방울소리가 난다. 플로렌스가 연주하는 모차르트 현악오중주 D장조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순수하고 떨리던 사랑, 마침내 결합하게 된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식, 그리고 첫날 밤. 너무 사랑해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날 밤의 꿈은 쉽게 이뤄지지 않고 서로의 어긋남을 서서히 알게 되는 두 사람의 절규같은 외침은 결국 파경으로 치닫게 된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는 그렇게 헤어진다.  

40년 후 추억하는 사랑. 에드워드는 젊은 날 한 순간의 선택으로 잃었던 사랑이 진정 사랑이었음을 안다. 사소한 오해로 가지 않았던 길, 실망과 두려움으로 선택하지 못했던 길, 그 끝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평생을 그리워한 사랑이지만 이제는 가 닿을 수가 없다. [체실 비치에서]의 사랑은 과거와 현재의 철저한 교합으로 한층 예술성을 갖는다. 잔잔하고 은은하기에 더욱 품격있고 열정적인 사랑으로 기억된다. 결혼 여덟시간만에 신혼여행지에서 이별하고 돌아서는 두 남녀의 슬픈 사랑은 어긋나고 비껴가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최대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별의 순간과 아련한 기억의 순간을 마주하는 일은 아찔한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답고 아름답다.  

누구든 가지 못한 길을 다시 갈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충실한 현재에 발을 들여놓는 길 뿐이다. 후회없이 사랑하고 후회없이 이별하자. 그것만이 민트빛 체실 비치 저 멀리 연보랏빛 드레스를 휘날리며 서 있는 플로렌스와 그녀를 홀로 두고 뒤돌아보지 않고 걷는 내내 그녀를 사랑했을 에드워드를 기록하고 사랑하고 추억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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