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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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 사는 것과 왕의 아들로 사는 것 중 어느 삶이 더 고달프다 말할까. 하필이면 나라의 형세나 시국이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을만큼 위험천만한 때라면? 누구라도 쉽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권한을 갖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겠다. 어느 쪽이든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왕으로 살든 왕의 아들로 살든 그것은 짐이었을 것이다. 원하지도 않는 주인공이 되어야 마땅한 소외된 삶, 이라고 표현하면 그 의미가 전달될까. 그 중에 명과 청의 싸움에 적의 볼모로 끌려가 8년이란 세월을 보내며 나라의 패배와 굴욕, 비루함과 고독을 모두 끌어안고 살았던 소현이 있다. 어쩌면 소현은 왕의 아들 중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죄, 아비를 잘못 둔 죄. 그것이 과연 그의 죄라 할까. 그는 조선 16대 왕 인조의 첫째 아들이었다. 일찍이 세자로 책봉되었던 그는 시국이 평안했다면 당연히 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되지 못했고 그의 자식과 후손들 또한 줄줄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일이라지만 인조의 소현세자 독살설은 어떤 의미에서 영조와 사도세자보다 더 비극적이라 할 수 있다. 

인조반정을 기억하는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니 인조와 소현세자를 다룬 이야기를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왕실을 다루는 정통사극이 아닌 드라마 <최강칠우>나 <추노>에서도 인조와 소현세자가 등장한다. 열심히 보지 못해 알 수 없지만 TV 속에서 한동안 인조시대가 펼쳐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요즘은 정통사극 <동이>가 우세하고 있으니 숙종의 시대가 열릴 것인가. 아무튼 중립외교를 지향하는 똑똑한 광해군을 몰아내고 광해군과는 다른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며 서인들의 압도적 지지로 왕의 자리에 오른 인조의 정책들을 평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서인들 또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허수아비 왕으로 인조를 선택했으니 그것만 봐도 시대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김인숙의 소설 <소현>이 인조시대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상당부분 청에 잡혀간 소현에게 초점이 맞춰져 여기서는 역사적 사실 자체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현이란 이름을 가졌던 자. 태어나자마자 당연히 세자의 자리에 올라갔던 이름. 인조의 아들이란 이유로 8년의 타국살이와 뼛속까지 시린 고독을 감내해야 했던 삶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이 소설이 바로 소현세자가 타국에서 보낸 마지막 2년을 밀도있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과 청, 그리고 명. 조선 중기 역사에서 세 나라의 관계는 인조시대를 정확히 설명한다. 전쟁의 패배 때문에 오랑캐의 왕 앞에 피를 철철 흘릴 때까지 땅바닥에 이마를 찧었다는 인조에게 비극은 자신의 굴복이 다가 아니었다. 명과 청의 전쟁에 대한 명목으로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의 볼모로 보내야 했다. 철저하고 처절한 패배.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무엇이 정의인지 아닌지를 아는 나이었기에 소현의 볼모살이는 봉림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굴복의 의미로 적국에게 바쳐진 입장에서 소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적의 패배와 굴욕을 그다지도 바랐건만 적은 오랫동안 승리와 영광만을 보여주었다. 언젠가 조선이 우뚝 서는 날, 나 또한 우뚝 섰을 때 모든 것을 돌려주리라는 계산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조선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등지면서 영원히 소현세자로 남는다. 청에 있는 소현세자의 모반을 의심하게 되는 인조, 소현이 마침내 조선에 돌아와 청의 문물을 수용할 것을 제안한 것에 분노한 인조가 그를 독살했다는 설, 소현의 조용하고 드러내지 않는 성격과 청에서의 오랜 볼모생활 탓에 고독과 스트레스가 병이 되어 죽었다는 설도 있는 것으로 안다. 진실이 어떤 것이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소설의 좋은 점은 철저히 소현이 되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가 소현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왕의 아들이 할 수 있었던 일과 해야 했을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아버지에게 누가 되지 않는 아들이 되려는 것과 적어도 겉으로는 내 나라 아닌 적의 승리를 기원해야 했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을 것이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책을 덮는데 모두의 삶이 각자 서글펐다. 적국인 청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구도와 청의 수장인 도르곤의 인간적 고뇌가 언뜻 비치기도 해서 마음은 더 심란해졌다. 도르곤과 소현세자는 각자의 나라를 대표하는 수장이고 세자이지만 그들 또한 인간이다. 혼란스러운 세상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던 건 마찬가지였다. 세상과 시대의 어쩔 수 없음이 너무 헛헛해서 슬펐고, 떠날 때까지 울음 한 번 제대로 울지 못했을, 마음에 담긴 작은 생각조차 들킬까 염려돼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을 소현세자의 수많은 망설임과 침묵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비극적 삶을 살다 간 역사 속 인물 앞에 오늘의 우리는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하며, 어떤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까를 수없이 되묻는다. 울 수 없다. 우린 이 역사를 떠받치는 후손이며, 여전히 이 땅을 지키며 살아야 할 주인이기 때문이다.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내가 선 바로 이 땅, 여기. 내 나라를 사랑하는 법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르겠다. 소현세자가 낯선 땅에서 느꼈을 소외와 고독과 아픔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나라에 대한 소중한 마음과 고민들이 필요한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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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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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와 같은 고민을 언제부터 하게 됐는지 생각해봤다. 아마 나무랄 데라곤 전혀 없는 천재적인 음악성을 타고났으면서도 자신의 피부색과 뿌리가 한계가 된다고 믿은 나머지,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강도의 성형수술과 피부이식을 서른 번이나 했다는 마이클 잭슨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중학교 국어시간 이후가 아니었을까. 흑과 백 같은 이분법적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치라는 걸 전혀 몰랐던 나의 열여섯. 그러고 보니 필립 로스가 그리는 <휴먼 스테인>의 배경이 바로 내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중학교 시절의 무렵이다.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자신의 집무실과 백악관 주차장 등지에서 스무 살을 갓 넘긴 여비서와 사랑을 나누며 세계가 떠들썩할 정도로 강도 높은 스캔들을 선물했던 바로 그 해는 주인공 콜먼이 일흔 하나의 나이에 서른넷의 포니아와 사랑을 나누던 때와 일치한다. 버크셔 산악지대의 오두막에서 세상과 결별한 채 글을 쓰는 네이선은 콜먼을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하는 한 사람, 콜먼의 친구이자 대변인 그리고 작가로 등장한다. 우린 네이선을 통해 콜먼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느낀다. 
 

콜먼은 은퇴한 대학교수다. 유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학장을 지낼 만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고, 학장으로서의 콜먼이 이룩한 업적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우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일로 자존감을 찾고 싶었던 콜먼이 자신의 강의 시간에 오래도록 출석하지 않는 학생들을 두고 유령들(spooks)이란 표현을 썼다가 하필 그 단어에 검둥이들이란 뜻이 있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려 온갖 비난을 당하고 쫓겨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아무리 호소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억울함 때문에 항상 씩씩하다고만 생각했던 아내 아이리스를 잃게 되자 콜먼의 슬픔과 절망은 극에 달한다. 그를 절망의 수렁에서 구해준 이가 바로 서른넷의 포니아다. 그녀 또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계부에게 성희롱을 당한 상처로 집을 떠났다. 훗날 결혼하지만 남편 역시 베트남 전쟁의 상흔으로 끊임없이 포니아를 괴롭히는 등 녹록치 않은 삶을 산다. 그래서인지 콜먼과 포니아는 만남과 동시에 서로의 결핍과 상처를 알아본다. 성공한 유태인인 줄 알았던 콜먼이 사실은 마이클 잭슨과 같은 인종 정체성을 앓아온 점이나 똑똑한 포니아가 스스로 문맹인을 자처해 살아가는 점은 비록 충격이긴 하나 20세기 끝자락의 비극을 잘 나타내준다. 
 

그들의 사랑은 포니아 남편의 끈질긴 방해로 결국 파멸을 맞는다. 그것이 모두가 진정 원한 삶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원한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과거를 숨기거나 버려야만 나아갈 수 있었던 콜먼과 포니아가 사랑에 빠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콜먼과 포니아를 둘러싼 세상은 호락하지 않았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괄시는 흑인으로서 받는 멸시보다 오히려 나았고, 어린 딸이 당한 희롱을 친엄마조차 믿어주지 않는 현실을 견디려면 아는 것을 모른 체하며 살아가는 게 편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립되었다. 콜먼과 포니아는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만든 건 세상이지만 세상은 그들을 상처 속에 살게 했다. 피부색을 바꾸고, 생김새를 고치고, 아는 것을 모른 체 한다 해서 달라지는 것이 세상은 아니건만, 마이클 잭슨이 그랬듯 콜먼과 포니아 또한 뾰족한 대안이 없던 탓이다. 화가 난다. 철이 든 순간부터 나는 나를 무시하는 사람보다 나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불편했다. 누가 어떻게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흑과 백, 로맨스와 불륜, 아름다움과 추함, 행복과 불행. 그런 것들만 인생인가. 성별, 나이, 학력, 통장잔고. 그런 것들만 나인가. 도대체 나를 나답게 하는 기준과 삶을 삶답게 하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이며, 기준이 있다한들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꾸만 세상이 어렵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나다. 또한 콜먼과 포니아처럼 살고 싶지 않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야 살 수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해도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결심의 첫 번째 증거로 감히 콜먼과 포니아의 영원함을 옹호한다. 비록 비아그라를 복용해야 하고, 육체의 탐닉이라는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그들을 응원할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분노이므로. 우린 누구나 어떤 것에 속해있는 동시에 어떤 것에도 속해있지 않다. 흑백논리나 편견, 선입견 같은 것들은 결국 오점으로 작용할뿐더러 아무데도 도움 되지 않는다. 일흔 한 살의 남자가 서른 네 살의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규정은 어디서,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와 타인이 다르다고 둘 중에 하나가 틀렸다는 억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마 그런 억측들이 이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나를 나답지 못하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가장 아름다운 것. 나는 필립 로스의 모든 문장들을 버리고 내가 만들어낸 단 하나의 문장만을 가슴에 담는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미국적인 문제들은 21세가 10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누군가는 아직도 성형수술을 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사랑 앞에 망설인다. 또 누군가에게는 정의에 눈감고 불의에 동조하는 것이 삶의 전부다. 결국 필립 로스가 말하는 <휴먼 스테인>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내일의 문제이고 미래의 문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가 공통으로 고민해야 할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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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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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그동안 내게 너무 멀게만 느껴졌던 김훈의 소설들. 일부러 피한 건 아니었는데 문학을 공부하면서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그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늘 죄책감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어쩌면 사회 비판적 성향이 짙어 보이는 작가의 인상에 지레 겁을 먹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무슨 말을 하든 게으른 나의 비겁한 변명이란 걸 알면서 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읽지 못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작가였음을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그런 내가 감히 현대문학을 아는 척 해도 될까. 김훈을 읽지 않고는 현대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처절한 반성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읽을 기회라는 게 주어진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세련됨이 현대적인 거라고, 현대적이어야 청춘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믿던 시절에 소재조차 고루해보이는 김훈의 소설이 내 시야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노래> 시리즈가 한창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할 때 구석에서 21세기에 무슨 이순신 일대기야 하던 건 나였고, <강산무진>과 <남한산성>이 인기 가도를 질주할 때 또 강이랑 산이야 하며 하품하던 것 역시 나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겨우 지금에 와서야 그가 내뱉는 세계의 아릿함을 모르고 지나온 20대의 절반이 못내 한탄스럽기까지 하다. 내게는 언제나 좀 더 일찍 알았으면 하는 것 투성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시조인지 시인지 모르는 작자미상의 公無渡河歌는 옛 것을 지루해하던 나에게 제일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어준 옛 글이었다. 우연히 듣게 된 국문학 수업에서 뒤늦게 옛 시의 고풍스러움을 깨닫게 된 것이야말로 오늘날 이렇게 김훈의 <공무도하>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나에게는 모든 현상을 어떻게든 인연으로 엮어 보려는 엉뚱한 버릇이 있다. 한 번 발동하기 시작하면 복잡미묘한 세상도 때로 별 것 아닌 것이 된다. 나는 그게 좋다. 온 세상이 내 손바닥 안에서 꿈틀대는 느낌. 그럴 때 세상은 완전한 내 것이 된다. 하지만 내가 쥔 세상이 반드시 아름답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상은 처음부터 내가 부른다고 달려오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던 탓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면 나는 이미 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그렇다. 죽음의 강 레테는 한 번 건너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건너고 싶을 때 건널 수 없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 수 없지만 돌고 돌다보면 어느 순간 같은 자리에서 만나게 된다는 걸 우린 그저 본능으로 알고 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없는 것, 나의 것과 너의 것이 동일하면서도 다른 것, 눈 앞에 건너야 할 강이 있지만 건널 수 없는 것.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이것 아닌 것도 저것 아닌 것도 아닌 것, 삶. 김훈의 <공무도하>는 인간 본연의 비루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호들갑스럽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다. 지금은 모두 혼자이지만 언제든 함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살아간다는 것은 더 없이 치열하면서도 또한 치사하다. 언제 죽어도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삶들이 지천에 널렸지만, 그게 내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는 사실만이 유일한 사실이다. 모든 인간사의 중심에서 부지런히 사건을 날라다 주는 기자 문정수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돌아보게 된다. 의붓여동생을 강간한 친아버지를 쇠절구로 쳐죽인 아들, 혼자 방치되다시피 자라다 키우던 개에게 물려 죽은 소년, 어딘가에서 TV를 통해 소년의 죽음을 접하고 소멸한 엄마, 누군가를 고해바친 댓가로 살아난 고얀 목숨, 생산직 노동자의 취중 실족사, 아직 개통되지 않은 도로에서 크레인에 치여 즉사한 17세 소녀, 딸의 보상금으로 거액의 빚을 갚은 아버지, 결혼이민으로 시집온 베트남 여인, 그리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저 관찰자의 역할 밖에는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 우리 중에 주인공도 있고, 관찰자도 있다. 누군가는 주인공이고 누군가는 관찰자가 되는 것, 때로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사다. 인간이 처음부터 비열하고 치사하고 더러웠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름다웠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소설 초반 발생하는 홍수는 강을 건너지도, 건너지 않을 수도 없는 이들의 발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또한 마지막까지 강을 건너지 못하는 인간의 추악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홍수는 정말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초자연적 힘일까? 어쩌면 홍수야말로 인간의 욕망과 허상이 만들어낸 거울 속의 거짓 세상, 그 집합체가 아닐까? 그렇다면 해망이 가진 과거의 상흔과 현재 해망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업 앞에 보상이라는 이름의 작업이 과연 가능할까? 합리와 불합리, 선과 악, 이성과 비이성이 부딪치는 빈번한 소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진실은 언제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욕망도 흘러가고 있다는 것 뿐. 그것은 동시에 걸어갈 수 없기에 언제나 어긋날 수 밖에 없는 보상불가능한, 시간 너머의 것이다. 개발로 인한 삶의 터전을 돈으로 보상할 수 있다면, 이미 일그러진 그들의 삶과 빼앗긴 평화와 충만의 시간은 과연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우린 아무도 낙타처럼 가볍게 시간 너머로 갈 수 없다. 강을 건널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달아나는 것을 추적할 수도 없다. 인간중심적 개발과 자연친화적 개발이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고귀를 물질로 환산할 수는 없어야 한다. 인연의 맺고 끊음을 반복하며 생존 자체로 파닥거리던 인간이 언제부터 돈을 위해 인연을 응집시키고 해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단 말인가. 이 비극을 단지 바람에 날리는 소금먼지나 똥먼지를 보상하듯 돈으로 환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없어야만 하는 것이다. 살기 위해 타인의 장기를 사는 행위가 종교적 신앙과 박애의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더할 나위 없이 가볍게 정당성의 날개를 달았듯, 온 존재를 다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노을과 안개의 습성처럼,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날들의 시간을 우린 악착같이 양심을 파는데 할애하고 있다. 온 세상의 모든 관심이 하나로 집중되는 날, 누군가는 불행에 떠밀려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인데, 삶인데, 인간사를 두고 감히 누가, 존재의 옳고 그름을, 무슨 근거로, 어떤 방식으로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절대로 강을 건널 수 없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자. 좀 더 나은 삶이, 인간이, 세상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자. 그럴 수만 있다면 홍수가 그칠지도, 희망이 고개를 들이밀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의 미래를 큰소리로 말하자. 희망을 끌어안자. 말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더 많이 가진 기자 문정수는 자신을 태우고 강을 건너줄 노목희가 떠난 한국에서, 강변의 아침 안개를 무사히 맞이할 수 있을까. 그는 또다시 자신에게 담긴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였으면 좋겠다. 슬픔, 아픔, 비열함, 희망. 이 모든 것이 나였으면 좋겠다. 기삿거리가 전혀 없는 서북 경찰서에서 동남 경찰서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인생 무게가 더 가벼워질 수 있도록. 내가 날면 모든 것이 날도록. 내가 건너면 모든 것이 함께 건너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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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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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사소한 장난에도 까르르 웃던 단발머리 소녀시절부터 하루키를 읽었다. 뭘 알고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상실의 시대>부터 <어둠의 저편>까지 5년을 꼬박 읽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 시절, 저 모퉁이를 돌면 처음 보는 세계와 조우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나 거울 속의 내가 진짜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혼돈이고 방황이었다. 어떤 날은 읽을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워 일찌감치 책을 덮었고 어떤 날은 나의 실체와 만날 욕망에 몸서리치며 책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읽고자 하는 욕망을 멈출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세라쟈드의 유혹에 못 이기는 샤리아르 왕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엔 미흡한 표현력 때문에 하루키의 다른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얘기한다는 건 시도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는 금기처럼 여겨졌다. 흡인력은 대단하지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면 늘 막히고 마는 것이 내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루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가 창조한 세계 속에 나는 살았다. 5년 전 일이다. 이번엔 반드시 알고 싶었다. 표현하고도 싶었다. 목적은 단 하나. 그의 소설 속에 투입되는 쓸모없는 소품 말고 작품 바깥에서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똑똑한 말이 되고 싶었다. 바로 그거였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려는 욕망과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싶은 비평욕구가 충돌했다. 그를 처음 만난 후로 무려 열 살이나 더 자랐으니 못할 것도 없다. 어느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자신감 넘치는 독자가 되었다. 드디어 모든 페이지를 다 덮고 이 글을 쓴다.

굳이 고백하자면 <1Q84>를 읽는 긴 시간동안 내가 과연 어디에 존재했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아오마메와 덴고를 만난 시간이 진짜였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들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만나고 있으면서도 아직 만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실체와 관념이 뒤섞인 온갖 알레고리로 가득 찬 아이러니한 세계에 들어서는 일은 그저 신비롭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거기에 해석 같은 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것만으로도 하루키는 대단한 평가를 받아 마땅한 것이리라. 어쨌든 그의 새 소설은 예전과는 분명히 다른 의미에서 낯선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내가 자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건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는 세계와 존재하지 않는 모든 세계를 포함하는 우주 그 자체다. 비록 문학이지만 심리학, 사회학, 종교학, 철학, 역사학, 과학을 버물린 폭풍 같은 단 하나의 텍스트다. 초현실적 감각과 빨려들듯 선명한 이미지에 감탄했다.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펼칠 때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니 모두 읽었다고 해서 반드시 내 것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느낌만으로 충분하다. 어느새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긴장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는 나를 발견한다. 빠져들면 안 된다. 동화되어서도 안 된다. 나는 평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효과는 있었다. 적어도 나는, 아직은, 그 거대한 우주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신은 몇 개입니까? 도대체 수많은 당신 중에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입니까? 나는 스물일곱 개 존재합니다. 아니, 그건 년(年) 단위로 볼 때 얘기고, 만약 월(月) 단위로 본다면 나를 도대체 몇 개라고 해야 할지, 만약 일(日) 아니 시(時), 분(分), 초(秒)로 본다면 과연 내가 몇 개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나눈다면,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의 수로 나눈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머릿속 생각으로 나눈다면 과연 나는 몇 개가 될까요? 이것이 진실이다. 우린 아무도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타인을 만들어내고 교감하며 그 중 누군가를 통해 나를 정의하려 한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알았을까. 자신이 몇 개인지를, 어디까지가 기억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를,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를. 세상에 그 사실을 아는 존재는 딱 하나다. 완벽한 존재, 초자연적 존재, 리틀 피플, 아니 신. 살아가는 동안은 절대로 진짜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아오마메와 덴고가 단 한 번이라도 같은 세상에 함께 존재했다고는 여길 수가 없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가엾은 커플은 표면상으로만 보더라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데이트를 할 수도 없고, 껴안을 수도 없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일이다. 끊임없이 만나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만날 수 없다. 내가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각기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셀 수 없는 나들은 그저 각자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일을 할 뿐이다. 종교, 범죄, 성욕, 사랑, 고독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고 할 때 비로소 우린 알게 된다. 아무리 많은 것을 쥐고 있다한들, 우린 기본적으로 흔들리는 존재이지, 흔드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이동한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삶에서 죽음으로, 사랑에서 증오로, 희망에서 절망으로, 선에서 악으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인간에서 신으로, 무엇에서 무엇이 아닌 것으로.

아오마메는 어린 시절 ‘증인회’에서 고립되었던 기억이, 덴고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냉랭한 대우가 오래도록 상처가 되어 남았다. 적어도 진짜라 믿는 세상에서 진짜의 모습을 한 그들은 남들과 같이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아오마메는 살인자, 덴고는 남의 작품을 리라이팅해 문학상을 조작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오마메와 덴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이 두 개인 세계에 있다. 달은 왜 두 개가 되었는가. 상처가 치유되는 지점이 열 살의 교실이라는 점에서 또는 리틀 피플이 택한 필연적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둘은 동일 기억을 공유하는 동일 인물일 수 있다. 그렇다면 리틀 피플은 뭐고 공기 번데기는 또 뭘까. 실체를 알 수 없으므로 끝없는 고민이 필요하다. 우린 누군가와 어떤 기억을 얼마나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방금 전의 현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거대한 저장고에 든 기억이 작가 박민규가 만든 냉장고에서 터져 나오기 전에는 카스테라의 모습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엉클어진 기억들의 존재와 부재를 누구도 제대로 생산해낼 수 없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악과 선, 현실과 환상, 실체와 관념, 죽음과 삶처럼 상반된 것들은 절대로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간단한 공식이 파괴되는 순간 비극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나는 저 세계의 나와는 분명 다르다. 나의 본질은 그대로지만 새로운 세계에서의 실체 또한 그대로일 리 없다. 본질은 그대로인데 실체는 매번 달라진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본질 또한 흔들리게 된다. 내가 변한 것인지 세계가 변한 것인지 알 수 없어진다. 바로 그 때, 1Q84 시대가 도래 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가장 소중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후회의 상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중하지만 상처가 된 기억. 예를 들면 아오마메와 덴고가 서로에게 이끌렸으나 끝내 말할 수 없었던 사랑 같은 것. 덴고에게 연상의 걸프렌드와 후카에리가 아오마메에게 가는 길이었듯, 아오마메에게 있어 낯선 남자들과의 잠자리는 덴고를 향한 사랑이자 자신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때, 그는 과연 어느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까? 내가 너를 부를 때, 너는 무엇을 듣고 있을까? 전화를 하고, 목소리를 듣고, 보고 싶다는 말에 달려온다 해서 달려온 너를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그 때의 너라고 완전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하루키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서 늘 욕망의 밑바닥을 보여주었다. 욕망이 있으면 변형도 있다. 욕망은 속한 세상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뒤틀린다. 내 부모가 재벌이 아닌데 내가 재벌 2세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바로 지금 내가 안은 모든 욕망의 근원이 오로지 나에게만 있으란 법도 없다. 리틀 피플이 만들어낸 덴고의 공기번데기에 열 살의 아오마메가 들었듯 나의 공기번데기를 열면 나만 아는 나의 욕망이 들었음을 그 누구도 아닌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어느 누구와도 이어져 있으며 또한 누구와도 이어져 있지 않다. 나를 여러 개로 나눠야 하는 자체가 이미 부조리한 세상에 속해있는 증거다. 그것은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아는 세계와 모르는 세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우주 곳곳에 뿌려져 있는 모든 세상의 것들이 이미 나다. 그건 굳이 공기번데기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미 안다. 아오마메와 덴고에게서는 그저 존재의 본질을 배울 뿐이다.

나의 공기번데기와 그의 공기번데기에 같은 것이 든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모두를 존재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욕망, 기억, 추억 등이 모두 그렇다. <1Q84>는 사랑이야기가 아니지만 내가 알게 된 유일한 사실은 나의 눈, 코, 입, 팔, 다리, 가슴 같은 실체가 매순간의 시간과 보이지 않는 모든 공간에서 관념의 기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 속에 이미 사랑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덴고는 아오마메를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하루키가 이대로 소설을 끝맺지는 않을 거라는 소식이 일단은 희망적이다. 대부분의 소설이 뒤로 갈수록 의문이 풀리는데 반해 <1Q84>는 불확실성과 비판을 감내해야 할 부분만 잔뜩 남겨두고 영 찝찝하게 끝났기 때문이다. 고마쓰와 연상의 걸프렌드의 부재, 아오마메와 덴고의 재회, 끊임없는 달 타령을 허용한다고 해도 평화를 지향하던 농업 코뮌 단체였던 ‘선구’가 종교단체로 변모한 과정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뜬금없다. 경험상 하루키가 다음 권을 쓴다고 해도 알레고리로 둘러싸인 모든 것들의 실체는 여전히 관념에 휩싸여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3권을 보고 싶은 마음은 그저 기대일지도 모르겠다. 읽는 내내 누가 툭 치면 금방이라도 이 세계의 내가 아닌 다른 세계의 내가 튀어나올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야 했다. 불바다가, 폭탄이 나를 삼켜버리지 않기를, 2009년에 사는 내가 200Q년으로 이동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이기를,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기를, 나의 모든 것은 언제나 내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막연한 느낌은 원래 하루키의 작품이 주는 선물이니 이번에도 고스란히 안고 가려 한다.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현재, 나와 또 다른 내가 또는 당신과 또 다른 당신이 서로 만나 이야기하고, 밥 먹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기를, 죽음이 아니라 삶이기를,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기를, 그래서 행복하기를. 성교로 인한 교접. 비록 짧았지만 어쩐지 그 초월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비약적인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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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두는 여자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샨사의 소설을 읽으면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진다. 역사적 비극도, 정치적 비극도, 전쟁 비극도, 개인적 비극도 모두 숭고하기만 하다. 아름답고 빛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오늘날까지 읽혀지는 이유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둑두는 여자]를 읽으며 내가 아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되짚어본다. 당시 우리나라는 가장 강력한 통치와 억압이 진행되던 일제강점기 막바지였다. [바둑두는 여자]는 바로 그 당시 중국땅에서 벌어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즈음이 배경이다. 쳔훵광장에서 바둑 두며 시간 보내는 일이 전부인 중국소녀와 천황폐하의 승리를 위해 군에 지원한 일본청년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둑판에 흑백돌이 번갈아 놓이듯 소녀와 군인의 삶이 매 장마다 교대로 펼쳐지는 전략적이면서도 치밀한 구조를 지녔다. 간결한 문체와 군더더기 없는 연결이 샨사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처녀작에서 이미 모든 것이 증명된 셈이다.  

소녀와 군인의 만남은 광장에서 바둑판을 마주하면서 시작된다. 이야기가 막바지로 향할수록 바둑판의 돌들이 어떤 식으로 엇갈리고 교차되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어수선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간절한 욕망과 절망이 아주 천천히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문장은 때로 눈앞에 펼쳐지는 생생한 광경 못지않게 시각적이다. 샨사의 문장은 모든 감각을 어루만진다. 아마 그 점이 평범할지도 모르는 그녀의 소설을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기억되도록 하는 거겠지만. 매번 비극적 사랑을 다루면서도 매번 다른 느낌을 준다. 현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는 인간이 자유를 욕망하기 시작할 때 그 끝은 비극일 수 밖에 없다. 이 소설 역시 핏빛 비극이다. 전쟁이 개인적인 아픔으로 귀결될 때 이겨내지 못하는 절망은 결국 죽음을 부르기도 한다. [바둑두는 여자]가 [로미오와 줄리엣]과도, 영화 <색, 계>와도 닮았다고 생각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다. 

희망도 절망도 없는 무의미한 삶에 예고없이 불쑥 사랑이 나타난다면? 소녀는 길에서 우연히 민과 징을 만나게 되면서 성장하기 시작한다. 소녀는 민을 사랑하여 징을 절망에 빠뜨릴 수 밖에 없다. 모든 비극이 그렇듯,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의 관계는 어긋난다. 사랑의 배신과 현실의 절망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소녀의 목소리는 마치 새의 그것처럼 작다. 소녀가 가장 비극적인 순간, 소녀는 가장 아름답다. 민의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후, 혁명군으로 몰린 민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사랑이 아니었다면? 소녀는 처형당하기 전, 탕과 키스하는 민을 보며 민이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용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소녀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아기를 죽이기 위해 홍의 말대로 약사발을 들이킨다. 흘러내리는 피를 무덤덤하게 응시하며 다시 살아간다. 폭풍은 지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바둑두러 나간 쳔훵광장에서 중국사람으로 위장한 일본청년을 만난다. 중국인으로 변장한 그에게서 느껴지는 특별한 감정은 소녀가 처한 상황 때문일까, 운명이 끌어당기는 사랑의 힘 때문일까. 공허함을 달랠 길 없어 바둑만 두는 소녀와 마음을 내려놓을 때 없어 유곽의 창녀들 틈을 전전하는 청년의 서로에 대한 애정과 연민은 곧 사랑이 된다. 하지만 그 뿐, 서로에게 더 이상 한 발짝도 다가설 수 없는 그들의 처지가 눈물겹다. 소녀의 용기있는 제안을 끝내 거절하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청년의 모습에서, 청년의 거절에 베이징으로 떠나버리는 소녀에게서 갈 곳 없는 청춘들의 애절함을 느낀다. 이별을 감수했으나 운명의 힘에 이끌려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로서 조우하는 이들은 용기없던 지난 날을 깨닫고 서로를 향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눈을 감는다.  

역사의 격동기를 살았던 청춘들, 안쓰러운 청춘들의 자유를 갈망하는 눈물에서 행동으로 얻어내는 진정한 희망을 본다. 자유와 돈을 저울질 당할 때 있어 자유를 선택하는 데는 한치의 고민도 없어야 한다는 소녀의 말처럼 진정한 자유를 위해 어느만큼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보게 한다. 어머니와 조국, 군인으로서의 맹목적 의지를 저버리고 소녀에 대한 사랑을 선택한 청년이나 마지막 순간 청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죽음을 택한 소녀에게서 느낄 수 있는 비극적 아름다움이 단지 소설이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이 함께 나눈 바둑은 사랑의 시작이자 세상과 단절된 마음을 소통하는 장이었던 셈이다. 영원을 맹세한 사랑이 바둑을 나누던 짧은 시간보다 훨씬 길기를, 그 곳에서는 있는 힘껏 사랑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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