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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의 연인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여황 측천무후>에서 샨사의 점증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이 주는 서사적 구조와 서정적 문체에 반해 내친김에 <음모자들>까지 읽었을 때 비록 내용면에서는 처음의 감흥만큼 완벽한 서사구조는 아니었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샨사만의 문장을 다시 만날 수 있어 기쁘기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그녀의 작품을 다시 만나기를 기다렸다. 예전 것도, 새로운 것도 감정이 메말라 촉촉한 소설이 필요할 때 읽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작품의 순서를 따질 겨를 없이 꽁꽁 담아두던 샨사의 소설을 다시 꺼내보는 일은 한 인터넷 서점의 할인행사 때문에 가능했는데 2,900원에 구입하면서 내내 마음이 찜찜했던 이유도 중국 태생이지만 독학 끝에 프랑스어로 소설을 발표한 그녀의 감성과 문체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감동적이고 촉촉한 이야기가 저평가되는 것이 안타깝기도, 다시 만나서 반갑기도, 했다.
<알렉산더의 연인>은 유라시아를 통일하고자 했던 위대한 정복자이자 영웅 알렉산더의 일대기를 그림과 동시에 그의 연인인 시베리아 아마존의 야성적인 여왕 알레스트리아의 삶, 그리고 대립하는 모든 기질을 타고난 두 연인의 운명같은 만남과 영원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무찌르고 20세에 왕위에 오른다. <알렉산더의 연인>은 알렉산더의 지위가 그의 타고난 태생적 아름다움 때문이라는 데에 긴 묘사를 할애하는데, 알렉산더의 일대기를 더이상 자세히 알지 못하는 터라 진위여부는 모르겠다.
Alexander the Great
왕위에 오른 뒤 10년만에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세 대륙을 통합, 정복하여 도시 곳곳마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 이름 붙였다. 샨사의 소설 <알렉산더의 연인>은 사실상 알렉산더의 정복보다는 운명적인 연인 알레스트리아와의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여기서 알렉산더가 정복하는 도시는 연인에게 바치는 선물이자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서만 작용한다. 작가는 애초부터 서사적 구조에 아름다운 묘사를 덧붙인 점증적 문장으로 여성적이고 감상적인 서사시를 그리려 한 것 같다. 역사상, 신화상 위대한 힘을 가진 정복자로만 알려진 알렉산더에게 인간미를 불어넣음으로서 오랜 세월 전에 살았던 역사적 인물과 교감을 일으키려 한 것 같기도 하다. 또 한 가지, 알레스트리아와 결합한 알렉산더야 말로 가장 강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정복자이기도 했다.
날아라, 새들아,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라! 알렉산더와 알레스트리아가 구름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드넓은 세상에 길을 열 것이다. 우리는 땅을 비옥하게 하고, 빙하의 아름다움과 불의 힘을 퍼뜨릴 것이다.
날아라, 새들아! 너희들이 떠나온 곳을 쳐다보지 말고 힘껏 날개를 저어라. 너희들의 둥지를 돌아보지 마라. 날개를 저어라. 바람을 헤치고, 태양을 바라보아라. 그 붉은색, 그 노란색, 그 오렌지색을, 그 얼음과 화염의 융합을 바라보아라.
날아라, 새들아! 모든 새들을 이끌고 날아라. 세상 그 무엇보다 자유의 도취를 사랑하는 너희들아. (pp.160~161)
사내에게 의지하지 않고, 사내의 씨를 통해 후손을 만들지 않겠다는 전통을 가진 시베리아 아마존의 여왕이기도 했던 탈레스트리아를 알렉산더만의 여왕, 알레스트리아로 만든 힘은 과연 어디에 존재했을까. 나는 그 힘이 단지 위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여인을 오로지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와 세상 전부를 지배하려는 의지는 결국 같은 뿌리를 가지고 태어난 불타는 욕망에 불과할 테니까. 알렉산더가 뜨겁고 열정적인 불과 태양의 정복자였다면 시베리아의 얼음처럼 이지적인 미소로 끊임없이 알렉산더를 기다리고 품어주었던 알레스트리아 역시 위대한 여왕이자 왕비였다. 그들의 결합은 애초부터 완벽하고 영원했다. 사랑은 영혼의 교감이자 꿈이고, 희망이자 자유다. 연인에게 사랑은 무엇이며, 사내에게 또는 여인에게 연인의 존재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한 여자가 왔다. 두통이 날 신음하게 할 때 그녀가 내 위로 올라와 누웠다. 그녀의 피부가 날 식혀주었다. 그녀의 침묵이 날 가만히 흔들어주었다. 그녀가 날 껴안고 어루만져주었다. 비록 그 감촉을 느끼지는 못해도, 나는 온몸으로 퍼져가는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p.283)
그, 알렉산더와 그녀, 알레스트리아의 영원한 결합은 모든 것을 지켜보고 함께한 아마존 여왕의 시녀 타냐, 아니 아냐에 의해 기록되었다. 남과 여, 음과 양, 태양과 달, 불과 얼음, 이 융합될 수 없는 모든 것, 대립할 수 밖에 없는 모든 것이 만났지만 둘은 결국 하나가 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고 그래야만 하는 것이 이치라면 이 세상 모든 연인들의 사랑이 신화처럼 언제나 빛나기를.
오랜만에 철제무기를 들고, 목숨 걸면서 싸우다 죽어가는 이들이 나오는 모든 영화들이 보고 싶어졌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독서로 정복할 날을 꿈꾸며. 신화 속,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는 일은 항상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