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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고양이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임미경 옮김 / 창비 / 2013년 1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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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03일에 저장

일곱 박공의 집
너대니얼 호손 지음, 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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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9월 25일에 저장

[˝내 손을 잡아 봐, 피비! 그리고 손가락으로 세게 꼬집어 봐라! 장미 한 송이를 줘 봐. 가시에 손을 찔러서 그 날카로운 고통으로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니란 걸 확인하게.˝] 노력은 처음의 간절함을 잊기 마련이다. 이 작품에서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낀다면, 그건 헵지바와 클리퍼드와 피비가 우리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난 과거는 그의 기억을 말살한 알 수 없고 끔찍한 것이고 미래는 백지와도 같아서 그는 오직 손에 잡을 수 없고 환영과 같은 지금만을 가졌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불안한 남자
헨닝 망켈 지음, 신견식 옮김 / 곰 / 2013년 1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3년 11월 28일에 저장
절판
루이 랑베르 (양장)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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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9월 15일에 저장

광기와 죽음은 한끗 차이. 랑베르가 전무한 세상에서 그가 하는 모든 사유는 거의 절대적이다. 지식과 사유로 통하는 우아한 비상(飛上)이 좌절되는 걸 보는 건 부조리하다. 형이상학, 친근감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사람들은 항시 오만하다. 랑베르는 주위현상을 한눈에 파악하는 깊은 통찰력과 단어와 단어에 얽힌 이야기만으로 세상을 다시 써내려가는 집요함을 가졌으며, 영혼과 육체 그리고 움직임이 위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행동과 반응, 욕망과 환상, 작용과 반작용 사이를 유랑하며 열정이 사라진 세상에 물음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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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8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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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의 운명만 봐도 알 수 있듯, 운명이란 참 덧없다. A에 의해 B의 삶이 그리도 쉽게 변하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이. A와 B는 가족, 친구, 연인을 비롯해 사실상 관계의 양상 거의 모두에 해당하는데 가까운 사이일수록, 친밀도가 높을수록 해당 비극의 강도가 세어지는 특성을 보여준다. 혼자 왔다 가는 세상 아니다. 독불장군처럼 있다간 세상이 코 베어가도 모를 세상. 그래서 인간은 절충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우며 자라난다. 선과 악, 능력과 신분, 성직자와 군인, 윤리와 세속 사이에서 갈등하는 건 주인공 쥘리앵 뿐만이 아니다. 



독실하고 순결한 성직자()를 꿈꾸지만 남보다 특출난 지능 뿐인데다 가난하고 시간이 없으니 먼 길을 돌아가야 할 타당한 이유를 굳이 찾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 속의 기준이 무너진 사람을 보고 있는 일은 어찌나 아슬아슬한지. 노력이나 열정으로 되지 않으면 가능한 타인을 발판으로 삼아 올라서려 한다(). 쥘리앵의 경우 은근하다는 것과 본인의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여자, 사교계,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은 쥘리앵의 목표에 희생되기 좋은 촉매제다. 대가를 챙긴 아버지가 억지로 떠민 집으로 들어가 레날 시장의 아이들을 돌보는 입주 가정교사가 되지만 상층사회의 배움은 도덕이 아니라 불법을 무릅써서라도 쟁취하는 법이다. 손쉽게 시장의 아내를 유혹해 원하는 것을 얻다가 들킬 위험에 처하자 평소 신부의 신임이 두터운 덕에 쉽게 추천장을 받아 드넓은 도시 브장송의 신학교에 들어간다. 자신이 타고난 능력을 과신하는 유형의 전형적 캐릭터. 쥘리앵의 갈등과 변화를 내세워 능력과 노력이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암울한 왕정복고 체제를 비판하는 동시에 노력과 열정이 통했던 나폴레옹 시대를 동경한다. 마음이 찬란해질 정도로 그리운 시대가 내게도 있었던 것 같다. 



프랑스 문학은 희한하게도 최후에 돌아가야 할 보금자리처럼 여겨진다. 만족과 찬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이유에서 지성과 감성의 기로에 서서 흔들고 쓰다듬게 된다. 스탕달 보다는 발자크와 플로베르가 좋지만 어디까지나 세 사람은 프랑스 문학이라는 갱도 안에서 하나이다. 상징성 짙은 사회소설이 부담되면서도 정작 '레 미제라블'을 읽으면서는 할 수 없던 프랑스 왕정 역사를 살펴보는 계기가 된다. 한 청년의 수난사에 나를 대입해보는 감각, 프랑스 문학사의 획을 긋는 작품인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완연하게 보장해주지 않는 사회라면 묵과할 수도 없고 간과해서도 안되는 지점에서의 촌철살인적 멘트. 읽어내는 자에게만 허락된 어떤 뿌듯한 벅참 같은 것. 프랑스 혁명 이후의 왕정 복고(부르봉 왕가), 나폴레옹 집권과 실각, 루이 필리프(오를레앙 왕가) 등장 직전까지가 스탕달이 마흔 여덟, 죽기 12년 전에 발표한 작품의 배경이다. 이후 나폴레옹 정권 역시 유럽을 전란으로 밀어넣었다는 명분을 쓰고 워털루 전쟁으로 명을 다한다. 신체제가 구체제를 전복할 수 없는 현대 시각으로 보면 한없이 무력하게만 보이는 이들의 부침이 약간은 멀뚱하게 느껴지는 건 너무나도 상식적인 돌담을 부수지 못한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일까.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부제: 1830년 7월 28일), 1830, 루브르 박물관 소장




미어터지는 겨울날 루브르에서 좋은 자리에 크게 걸려있기도 했지만, 유독 시선을 사로잡던 이 작품을 기억한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라곤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밖에 모를 때였다. 당시 들라크루아 그림에 심취한 적이 있어 중심에 선 여인이 잔 다르크를 상징한다는 것도 아는 상태에서 본 그림이라 모나리자 다음으로 기억에 남았다. 좋아한다기 보다 그저 기억에 남은 것이다. <적과 흑>이 발표된 1830년, 비로소 7월 혁명으로 복고왕정이 무너진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성공으로부터 겨우 15년 만에 다시 황제를 맞아들인 후였다. 나폴레옹의 실각 후 혜성처럼 등장한 루이 필리프는 국민 모두의 열망을 안았지만 사실상 착각임이 밝혀진다. 그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수명을 다할 때까지 프랑스 시민의 왕으로 군림하지만 그의 집권은 왕정 복고 체제로 돌아간 것과 다름 없었다. 군주제는 자취를 감춘 게 아니었고 루이 필리프는 즉위 후에도 자본가측의 이익만을 대변했다. 급분한 시민들이 벌인 2월 혁명의 결과로 공화정이 성립되지만 이후 등장한 나폴레옹 3세 역시 황제를 선언하면서 공화정도 민주정도 너무나 멀게만 보인다. 이러한 상황. 다소 용맹스럽지만 강인하고 유연한 정책을 폈던 나폴레옹에게는 넘치는 추종자들이 있었고, 실각 후에도 그를 그리는 이들이 많았다. 



이전 나폴레옹의 인기와 명성을 입고 당선된 나폴레옹 3세는 곧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이로서 보나파르트 왕조의 막이 열린다. 1842년에 세상을 떠난 스탕달은 이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거나 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쿠데타를 반대하다 국외추방을 당한 이가 위고다. 그는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을 전전하면서 19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한 걸로 알려졌다. <노트르담 드 파리>가 1831년, <적과 흑>이 1830년에 발표되었다. 위고의 문학인생은 추방 전과 후로 나뉜다. 1862년에 나온 <레 미제라블>과는 다른 정치상황에서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 쓰여진 것이다. 이 시기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 세계를 통틀어 가장 최초의 근대적 혁명으로 불려왔다. 


요약하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 처형 이후 나폴레옹의 쿠데타 성공, 자유,평등,소유권을 인정한 1793년 헌법 제정, 안팎의 흉흉한 전쟁이 거듭된 시기를 거쳐 워털루 전쟁(1815)에 의한 나폴레옹의 실각까지가 스탕달이 사회주의 소설로도, 애틋한 사랑의 심리주의 소설로도 읽히는 이 작품을 내놓은 배경이다. 정확히 루이 필리프가 취임한 해에 나왔고, 주인공 쥘리앵을 작가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같도록 설정한다. 부정으로 얼룩진 혼란한 시대에 남몰래 침대 아래 숨겨둔 나폴레옹 초상화가 발각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쥘리앵들이 이 사회에도 얼마나 많은가. 이 목표지향적 보나파르티스트는 신학교 교장의 신임과 영리한 두뇌로 라몰 후작의 비서로 들어가 사교계의 꽃으로 부상한다. 후작의 딸 마틸드와의 사랑이나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기병연대의 중대자리는 쥘리앵의 신분을 고속승진시키지만 이후 찾아온 비극에 비하면 영광의 축에도 못 끼는 불꽃같은 순간이기도 했다.



여느 고전이 그렇듯 스토리상의 속력전이나 짜릿한 쾌감은 덜하다. 대신 반종교, 반체제, 혁명적, 저항적인 작가의 사상이 잘 반영되어 세상을 향해 돌진한 꽃다운 젊은 청년의 말할 수 없는 비극을 체화시킨다.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고결한 저울질은 바닥과 하늘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다. 운명순응자들의 끝을 알 수 없는 몰감각이 쓸쓸하다. 정확히는 피곤하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막연한 세상에서 저마다의 숫자만큼이나 존재하는 기준, 잣대, 경계, 원칙이란 숫자 0에 0을 곱한 듯한 모양새 또는 시그마나 인테그랄처럼 정답이 떨어지는 투명하고 신속한 기제가 아니다. 첫 장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의 고독해질 마지막을 짐작하고 있었다. 슬프고 애처로운 비상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가 우리의 정답이라 확신할 순 없어도 그가 우리의 대안 중 하나이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쥘리앵은 우리들을 닮았고, 저녁 시간의 유쾌함을 지켜주는 드라마 속 갈등유발자들과도 닮았다. 어쩌면 나를 그리고 당신을 너나할 것 없는 모두를 닮았다. 두려워해야 할 것, 궁금해 어쩔 줄 몰라야 할 것은 결말이 아니라 바로 나쁜 줄 알면서 품은 마음이다. 뭉개버린 원칙, 깨버린 금기, 등한시해야 했던 욕망이다.

 




이쯤에서 꼬꼬마 때 좋아한 Wellington's Victory을 다시 듣는 건 나폴레옹에게나 프랑스에나 스탕달에게나 적과흑에 조금은 미안한 일이지만 먼지 쌓인 피아노 뚜껑을 열고 결혼 축하곡집, 체르니, 하농, 소곡집, 명곡집,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의 연주집을 뒤적이는 대신에, 누가 연주했는지 올렸는지도 모르는 Wellington's Victory을 연달아 재생시킨다. 승리의 포만감과 환희가 넘실대는 경쾌하고 가벼운 멜로디가 난데없이 땅에 닿지도 않는 다리로 피아노 학원 의자에 앉아 몇 번이고 건반을 두드리던 작은 여자아이를 눈앞에 데려다준다. 이게 봄과 여름 사이 적과 흑의 유일한 결론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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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2 0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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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02 0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학과 역사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좋아하는 분야라고 손 번쩍 들어 편협한 독서취향 강조 말고. 문학은 역사를, 역사는 문학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를 뛰어넘으려는 존재여야 할까. SF문학도 결국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니 대다수의 문학이 역사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사실 아닌가. 역사는 과거가 될 현재의 기록이고 문학은 흔히 말하듯 현실에 있을 법한 사건을 그리는 (예술)학문의 일종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문학은 언어를 예술적 표현의 제재로 삼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여, 인간과 사회를 진실되게 묘사하는 예술이고, 역사는 인간이 거쳐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을 기록하거나 기록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닮은 듯 다르고 다르다면 섭섭하다. 닮았다고 갈등이 없는 게 아니듯 문학과 역사는 필연적으로 얽혔으니, 이 (제발트) 논쟁은 새삼스럽지 않다. 랑케와 카의 역사에 대한 정의가 다른 것처럼 문학이 (거대하게) 역사의 일부이거나 전부 또는 전혀 다르다고 하더라도 틀린 건 아니다. 물론 제발트가 (독일)문학이 역사 앞에 침묵했다고 말한 것 역시 일리가 있다. 일반론적인 문학과 역사가 아닌 제2차 세계대전을 골자로 한 유럽, 더 좁혀 독일이라는 무대에 국한된 주장이라고 해도 받아들여진다. 전세계는 이 논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2012년 선거를 해놓고 (무의식적으로) 1970년대로 돌아가 사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럴 리도 없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3,4공화국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제대로된 문학이 나오겠는가. 나온다고 해도 온전하겠는가. 온전하다고 해도 그걸로 진정 괜찮겠는가.  



그는 나중에 이런 글귀를 추가했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민자들, p.183)





방에 앉아 방향을 가늠하지도 못한 채로, 거리로 바다로 하늘로 지구 반대편으로 우주로 은하계로, 여기 아닌 저곳에만 눈길이 멎던 날들, 땅에 발붙이기보다 구름에 실린 듯 꿈꾸고 느끼던 날들, 나는 대다수의 비물질적인 것에 남달리 애착이 강하고 욕심이 많았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정서가 남다른 걸로 잘 살아지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즈음 나는 냉탕과 온탕을 넘나들며 줄 위에 선 곡예사마냥 위태위태했으리라. 알게 모르게 사람을 괴롭히기도, 이해 안되는 행동과 말로 나를 타당화하기도 했을 것이다. 자기확신과 자기신념이 강한 사람이 빠질 수 있는 위험에 사로잡혀 어떤 날에는 조금만 옅어졌으면 싶기도 했을 것이다.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 현재와 꿈의 괴리가 큰 만큼 사람은 불행하다. 세포를 건드리는 황홀하거나 위험한 순간, 절묘한 진실의 상실, 선택지가 하나 밖에 남지 않았을 때 불쑥 솟아오르는 위화감을 몸소 느낄 때만큼 서늘한 순간이 있을까. 전율할만치 섬뜩하고 잔혹했던 여름은 다른 계절보다 더 많이 읽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사유의 확장과 근사한 리뷰를 선사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침묵했다. 무엇으로도 채우거나 덮을 수 없는 더위 끝의 냉소와 불시착. 나는 여름 내내 불시착한 우주선처럼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책 속에서 책 곁에서 책을 뒤로한 채 더위와 화해하고 한 살 더 먹었다. 



실제와 평가, 현실과 기록 사이의 미묘한 어조를 예리하게 써내려간 작가는 제발트, 그는 북극곰을 지켜주기 위해 틀지 못했던 에어컨 때문에 더 유난하고 별스러워진 여름에도 장엄과 숭고가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번째 증거다. 서늘하고 고결하고 견고하게 샘솟는 문장은 도시와 거리가 처참하게 무너져내리는 순간조차 아름답게 그린다. 유연하고 적확한 문체, 눈에 보이듯 생생한 거리, 생동적이고 아름다운 묘사력 등 그를 찬탄할 만한 요소는 많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 저 멀리 잿빛 구름이 모였다 흩어지듯 눈앞에서 사라진다. 진실이 꿈 같고 비판이 애정 같고 잡힐 듯하다가 달아나는 글. 손택이 사진을 보고 그랬듯, 실제로 보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그의 글을 따라가면 텅 빈 거리에 세운 하나의 도시가 완성된다. 망각된 역사 아니, 역사가 망각된 사실 그리고 역사가 망각된 사실의 '고착'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이 태어나 자란 도시를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세심함과 예민함 덕에 '제발트 논쟁'이라 불리는 취리히 대학 강연의 고상한 논점에 다가설 수 있었다. 성급하고 변덕스러웠으나 이제는 더없이 신중하고 솔직해진 갈증. 해소는 각자의 몫이다.


당장 이름을 두 개쯤 댈 수 없다고는 해도 제발트가 문학과 역사, 실체와 기억, 폭로와 침묵 사이에서 고민한 첫 번째 작가는 아닐 것이다. 작가와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늘 시대의 고발과 존재의 엄숙에 대해 고민해왔다는 걸 안다. 내 지난 여름은 독일의 파편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향한 위대한 문학의 탄생을 갈망하고 또 쌓아온 모든 지식과 감정을 지우고 짓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이민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민을 갈 수도 없고 전쟁의 아픔을 배우기 위해 전쟁을 도발할 수도 없다. 겪지 못한 자들은 결국 책과 매체를 통해 간접적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누군가의 모든 상처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독일은 괴테, 토마스 만, 츠바이크, 슐링크, 제발트를 통해 언뜻 엿본 세계가 전부다. 모두 소설가이고, 역사책을 비롯해 전기나 평전 한 권 읽지 않았으니 소설가가 압축해놓거나 새로 그린 세계를 통해 독일을 배운 게 다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을 거쳐만 갔던 기억에 비추어도 그 도시와 나라에 대한 뿌리깊은 상처 때문에 오히려 문학에 대한 취향이 제약받을 정도다. 이 협소한 세계에 베른의 기적, 타인의 삶, 쉰들러 리스트, 굿바이 레닌, 몰락 등의 입때껏 봐온 독일영화 몇 편을 덧붙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그간 생성된 독일에 대한 지식, 사유, 느낌이 변할 정도는 아니다. 유대인, 나치, 수용소, 제2차 세계대전, 베를린 장벽으로 굳혀진 독일 역사 때문인지 제발트의 문학이 그가 드러낸 사건이나 배경보다 문체나 느낌으로 읽히는 점을 부인하지 못한다. 전반적으로 가지고 가야 할 기억과 현실 사이의 어떤 괴리, 단호함과 절제 사이 어디쯤에서 실낱같은 끈을 붙잡고 매달리는 이들의 삶에 매혹된다. 훗날, 어느 젊은 날 불볕 더위 아래 아는 게 적어 느낌도 빈약했던 독서를 체화하거나 수정할 날도 오리라.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아우스터리츠]의 절반을 독일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을 때 읽던 기억으로, 노벨상 수상이 유력했으나 2001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면서 기회를 놓쳐버린, 더이상은 그가 남겨놓은 글이 없을까, 이미 주어진 글이 흔적 전부일까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제발트의 소설 옆에. 



헨리 썰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막스 페르버. 네 명의 이민자들이 나오는 단편집 [이민자들]은 소설이라기보다 체험수기처럼 다가온다. 네 사람의 사연인데도 하나의 긴 옛날 얘기 같다. 이민의 삶이 가진 다양한 형태와 모습, 고통과 방황, 슬픔과 애처로움이 한데 스며들어 자살이라는 결말로 치닫는 동안 너무도 담담하고 적막해서 암담한 기분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원인이 단순하지 않은 외부로부터 발생한 모두 아는 유명한 사건으로 인해 자의로든 타의로든 고향이나 터전, 가족을 잃게 된 그들의 상처에 닿는다. 속단과 오해, 단절과 애수, 절망과 기억이 타오른다. 이들이 살아있는 이유 그리고 용기가 탕하고 울리는 총소리에 발맞추어 출발한 자들에게나 찾아오는 황홀한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운명이 질기디 질긴 애착과 만났을 때 낼 수 있는 비명과 통증이 여전히 문장 사이를 뛰어다니고 종이 바깥으로 전해지는 것 같다.


카지미르 외삼촌은 발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것이 어둠의 경계야. 실제로 우리 뒤의 육지가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린 듯했고, 남북으로 가늘고 길게 이어진 한줄의 모래띠만이 물의 황무지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I often come out here(여기 자주 온단다).' 외삼촌이 말했다. 'It makes me feel that I am a long away, though I never quite know from where(여기 오면 내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어디로부터 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렇게 말하고 외삼촌은 큰 바둑판무늬의 외투에서 사진기를 꺼내 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민자들, pp.112-113)


















그리고 제발트 이전을 살았던 츠바이크는 또 어떤가 하면, 같은 아픔을 가진 상처에서 쓰고 또 쓰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끝장낸다. 이런 가여운 사람.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은 독한 사람일까 가여운 사람일까. 하지만 죽음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는 말에나 남한, 북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어 바다 속으로 뛰어든 [광장]의 이명훈과 충성을 다하고도 버림받은 소년이 투항 대신 기꺼이 죽음의 열차에 올라타는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류환처럼 말이다. 츠바이크의 삶이 어떠했든 그의 작품은 사랑과 이별, 남녀 관계의 인간 심리를 탁월하게 그린다. [체스 이야기]에서는 유독 제발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쓰지만 비슷한 주제의식을 가진다. 1800년대의 유대인과 1900년대의 유대인이 같지 않을지라도 두 작가가 공유해온 유럽의 전쟁, 유대인, 이민자에 대한 감상은 비슷했던 걸로 보인다. 


교묘하고 영리해서 널리 알려진 작품이란 걸 차치하고도 완전한 소설적 구성, 짜임새, 소재, 주제에 감탄하게 된다. 고도의 체스게임 안에 불안, 고립, 상처, 고통, 절망을 겪은 사내의 과거를 녹여내 복잡하고 유기적인 경험과 기억의 관계를 나치의 억압과 광기에 대항하는 한 인간의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는 도구로 활용한다. 체스판의 말이 된 듯한 남자, 체스로 인해 이미 다 살아버린 남자, 이야기 안팎에 존재하는 고도의 심리전이자 의지의 산물인 체스는 주어인 동시에 목적어, 목적어인 동시에 동사로 기능한다. 무에서도 혼란에서도 사람은 죽는다면 우리가 사는 곳은 이승의 연옥쯤 되는 셈인가. 여느 게임이 그렇듯 치고 빠지고 밀고 당기는 전략으로 한걸음씩 나아가는 체스가 고난과 고비를 넘어 마침내 도달하리라 여겨지는 인생 여정과 닮았다.



우리를 그저 완벽한 무의 상황에 세워두었던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상의 어떠한 것도 그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 영혼을 압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각각 완전한 진공상태, 즉 외부세계로부터 애매모호하게 폐쇄된 각 방에 가둠으로써 채찍과 추위로 인해 가해지는 외부의 압력 대신 내부로부터 압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지요. 그 내부로부터의 압력이 결국 우리의 입술을 폭파하듯 열게 하는 것입니다. 


도처에 그리고 끊임없이 한 사람 주위에 무만 있었을 뿐입니다. 완전히 무공간적, 무시간적 공허였지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에 따라 생각들도 이리저리 계속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러나 생각 자체는 사실 생각이 그렇게 실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버팀목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생각은 맴돌며 무의미하게 자전하기 시작하거든요. 생각도 무를 견디지 못합니다. (체스 이야기, 중에서)


















불행해보이는 부모님, 자기 상처 안에 갇혀 술로 세월을 사는 아버지와 나름의 상처를 가졌으면서 겉으로는 평온한 채로 아버지를 지키는 어머니.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의 과거 상처를 모조리 알게 된 소년이 묻는다. 왜 어머니는 아버지 곁을 지키셨어요, 라고.


"그게 무슨 소리냐."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너도 젊었을 때 얼마 동안은 선택을 할 수 있어. 이것을 하거나 저것을 할 수도 있고, 이 사람과 살거나 저 사람과 살 수도 있지. 그러나 어느 날 너의 행동과 그 사람이 네 인생이 되어버리는 거야. 그때 가서 왜 너는 네 인생을 지키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정말로 멍청한 질문이다. (사랑의 도피, '소녀와 도마뱀', p.36)


그리고 이렇게 떠난 여자도 있다.


마침내 그녀는 그를 떠났다. "나는 네 머리와 가슴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녀는 그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고 나서 그의 가슴을 툭툭 쳤다. "이 안에 내 자리가 있기는 하겠지만 내겐 너무 좁아." (사랑의 도피, '소녀와 도마뱀, p.41)



작품 '할례'를 추가해 복원한 슐링크의 작품집 [사랑의 도피]에서 '다른 남자'는 기시감이 짙다. 모든 소설이 미시감으로 읽히는 반기억력의 소유자에게 읽지 않은 작품에의 기시감이라니 새삼스러워서 이전 책을 도서관에서 읽었나 했더니 2009년은 학교에 다닐 때가 아니고 졸업한 후로 시립 도서관 두세 번 외엔 간 적이 없다. 고로 읽었을 리가 없는데 기억이 난다. 다른 소설과 비슷한가 싶긴 해도 그 다른 소설이 기억나지 않는 한 도랑으로 빠졌다가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추리. 이건 그저 간간이 흘러내리는 비스킷 찌꺼기 같은 느낌일 뿐, 작품집에 대한 희미하고 미미한 느낌으로 한 편의 리뷰를 쓰기란 여간 곤란한 게 아니라서 묵히면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남기는커녕 읽는 순간의 작은 떨림조차도 모래처럼 빠져나가 이제는 정말 아무 것도, 그 어떤 것도 잡히는 게 없다. 소소하고 분산되고 가늠하기 쉽지 않은 균열의 절망만을 확인한다. 더이상 같은 말을 하긴 싫다. 시간이 가면 나이도 먹고 키는 안 크지만 나날이 자라는데 왜 맨날 같은 얘기를 해야 하나. 단편집을 어떻게 한 편의 통일성 있는 리뷰로 표현하란 말이냐, 이딴 웩웩거리는 감상문은 쓰기 싫다. 쓰면 쓰지 못 쓸 건 또 뭔가. 못 쓴다는 건 그야말로 안 써진다는 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나 소재가 주는 통일감, 해석의 방향을 찾기 힘들다는 뜻이다. 다른 의미는 아니다. 



더 달려야 한다. 상처로부터 도망치든 원하는 것을 가지려 안달하든 방향만 정하면 나아갈 수 있다. 구하기 위해 펼쳐든 팔이나 버리기 위해 내민 팔에서는 선의와 악의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행동의 직후를 봐야 알 수 있다. 책도 그렇다. 펼쳐야 알고 읽어야 알고 생각해야 안다. 써져야 쓰는 거다. 안 써지면 안쓰는 거다. 책구경이 취미라 할 수 있는 나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 펼쳐야만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에 나를 구겨넣고 칵테일 섞듯 춤추고 나면 남을 건 남고 버려질 건 버려지겠지. 약간은 초연한 여름. 흐드러질 수록 옅어지는 욕심. 희미하게 강해지는 의지. 먹고 구역질 하고 또 먹는 폭식증 환자만큼 어리석은 행태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책에 관한 한 폭식환자가 되는 게 진리일 수 있다. 헷갈리는 진단, 애써도 어려운 예방, 궁극적 치료까지 한번에 해치우는 길인 양. 읽으면 읽을 수록 낮아지긴커녕 더 높아지고 더 늘어나기만 하는 책탑은 지난 계절에 이어 그대로인데 진저리나게 애처로운 이 계절은 여전히 온몸에 매달려 지치게 하고, 바라보는 나는 못견디게 숨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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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8-28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inmal ist keinmal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고 있는 요즘.
이 말의 어떤 모순적 울림이.. 제 삶에도, 이 포스팅의 책 목록에도, 아이리시스님의 글에도 묻어나 있는 것 같아...
차분해집니다.

아이리시스 2013-08-30 11:44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다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는 책을 다시 읽고 계시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요. 저 역시 시간을 버티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시간이 너무 안가요. 동시에 빨리가고요. 서있을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느낌.

언젠가, 소설에 나오는 네 사람 중에 dreamout님은 누구와 가장 가까운 편인지 듣고 싶어요 :)





꿈꾸는섬 2013-08-29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어와 좋은 글 읽고 가요. 잘 지내죠? 어느새 여름이 지나가고 있네요. ^^

아이리시스 2013-08-30 11:51   좋아요 0 | URL

여름이 얼른 가버리면 좋겠어요. 지나고 나면 이런 여름도 그리워지겠지만요. 꿈섬님이 그 자리에 계속 계신다는 느낌 이제는 들어서 오랜만이라도 서운하지 않아요.

즐거운 주말! (그러나 오늘은 금요일)


맥거핀 2013-08-29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의 과거의 전쟁, 그리고 60년대 사회변혁운동들에 대한 회고와 반성, 그리고 교훈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나오는 것 같아요. 특히 전쟁과 해서는 안될 짓들에 대한 끊임없는 언급과 반성은 집요해보일 정도입니다. 반면 우리의 과거는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졌죠. 일본도 그렇고, 우리 내부에서도 말입니다. 현재에 문제가 되는 여러 사건들 역시 과거의 문제들을 처리하지 못한 것과 여전히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발트의 <아우스터리츠>를 배수아 번역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래전에 사놓았는데 아직도 못읽고 있네요. 이상하게 집어들기가 좀 겁이 난달까. 슐링크의 <주말> 이건 어떤가요? 혹시 읽어보셨어요? 예전에 서평만 보고 와 진짜 괜찮겠다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까먹고 있었네요.

아이리시스 2013-08-30 11:59   좋아요 0 | URL

전혀 관심 안갖다가 찾아봤더니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의 번역자는 배수아가 아니던데 맥거핀님이 가진 책은 다른 걸까요? 번역이야 번역이고 녹록치 않은 문장들이고 스토리가 없어서 어려운 게 사실이에요. 바로 그 점이 다른 작품과 차별화되긴 하지만요. 과거사 청산을 시작하면 깨지는 건 국민이기도 할텐데요. 소수에게 보상해주기 위해 현시점에서의 세금이 사용되는 거니까. 어느 순간 딜레마에 빠졌어요. 국가범죄 청산이 무슨 간접세도 아니고.. 잘못은 그들이 하고 배상은 국민세금으로..

이건 많이 다른 얘기긴 하지만요.

슐링크는 [더 리더]만 샀습니다. 영 손이 안가지만요. <주말>이나 <귀향>은 언젠가 읽을 목록에.. 그 이후 한 권 더 나온 단편집은 도리도리.



맥거핀 2013-09-02 00:12   좋아요 0 | URL
아..제 착각입니다. (멍청이..ㅋㅋ) 배수아 씨가 번역한 게 아니라 예전에 가장 좋아하는 독일 작가 중에 하나라고 하더군요. 아..<더 리더>가 슐링크가 쓴 거였군요. 몰랐음.ㅋㅋ

아이리시스 2013-09-02 01:54   좋아요 0 | URL
그런거야 뭐. 저는 <삼십세>가 제 책이라고 한 적도 있어요. 저는 실비아 플라스잖아요. 이런 거에 비하면.. 잠깐 헷갈린 게 배수아 작가가 어떤 언어로 된 책을 번역했는지는 생각했는데 모르겠어서 한참 생각을 해봤어요. 화학과 나오신 자연대(공대?)생이었는데. 독어까지 잘하시면 이건 진짜 반칙이죠.

이제 저는 약간 멍청이 취소해드리려고 했는데(진짜예요) 스스로 인증한 겁니다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이걸 신판 나온 마당에 중고샵에 널려있는 구판을 사가지고 아..읽기 싫.. 영화도 한참 전에 봤고 말이죠.

Shining 2013-08-29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발트는 읽어본 적 없어요, 아이님 글 읽고나니 어떤 글을 쓰는 작가인지 궁금해지네요.

저는 독일 작가하면 역시 헤르만 헤세.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좋아하는, 첫사랑 같은 작가. 그리고 하인리히 뵐, 토마스 만, 파크리트 쥐스킨트(독일 작가 맞죠..?;;), 괴테, 카프카가 딱 떠오르는데 그러고 보니 대개 중,고등학생 때 읽은 작가들이네요;

그 다음엔 미하엘 엔데, 베른하르트 슐링크, 그리고 츠바이크! 가 있군요. 슈테판 츠바이크, 제가 정말 사랑하는 작가에요. 모든 작품이 다 좋은데, 구판이 많아서 개정판이나 복간 좀 내줬으면 좋겠어요ㅠ 문동에서 나온 저 책은 정말... 제가 외출할 때 가장 많이 들고 나가는 책 중 하난데 아, 반가워서 막 엉뚱한 얘기만 댓글에 달아요ㅎㅎㅎ

덧) 잠깐, 독일의 경우, 라는 건 다른 시리즈도 이어지는건가요? 유후! :^

아이리시스 2013-08-30 12:17   좋아요 0 | URL

페이퍼 쓸 때, 헤세나 카프카는 떠오르지도 않았어요. ^-^bb (엄지 두개..) 독일인은 아니지만 저는 릴케 좋아해요. 근데 쓸 정도는 아니예요.

신문에서 샐린저 작품집 출간예정 소식을 봤거든요. 남아있는 작품이 있으리란 생각도 못했는데. 츠바이크의 소설은 얼마나 더 있을까요. 더 있겠죠? Shining님 위해 다시 나와주길.. 누구한테 말해야 하죠?(히히)

외출할 때 저 책을 들고나가는 이유는 [낯선 여인의 편지] 때문입니까? (그럴 것 같아)


덧) 1년 후쯤 러시아의 경우, 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질 독서력의 소유자로서..!
아쉬운대로 그 이전에 아프리카라도 어떻게.. (보유하고 있는 텍스트, 지식 전무함)


Shining님, 저 내일 봉하마을 축제 갑니다. ^0^


Shining 2013-09-05 23:11   좋아요 0 | URL
오호. <아홉 가지 이야기> 좋게 읽은 기억은 나는데, 추가로 출간될 작품이 더 있군요. 하긴, 샐린저가 첫 작품이 대표작이 된 작가라고는 해도 그 후 작품 활동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요. 맞아요, 다시 나와주길ㅠㅠ 책이 너무 올드해서 소장 욕구가 떨어진다니까요-_ㅠ 문동처럼 깔끔한 디자인으로 나와주면 좋겠어요, 산도르 마라이 책처럼 견장본에 작은 책이어도 좋을 것 같고. 으으으, 좋겠다!

하하. 둘 다 정말 똑같이 좋아하지만, 아마 외출할 때 데려가는 이유는 낯선 여인의 편지, 때문이 맞는 것 같은데요? 츠바이크 특유의 서정성이 신파로 흐르지 않는 그 미묘함이 좋아요. 근데 체스 이야기, 도 진짜 멋진 소설. 엄지손가락이 더 있으면 모두 합쳐 올려주고 싶은, 진짜 좋아하는 소설들이에요 :)

봉하마을 잘 다녀왔어요?

아이리시스 2013-09-06 20:00   좋아요 0 | URL
봉하마을 얘기는 방명록에서 했고, 샐린저는 늘 다시 읽어야지 하면서도 다시 읽은 적은 없어요. 출간얘기는 원서얘기였으니 번역이 동시에 될지는 몰라도 기다리면 곧 나오겠죠?^-^

그..그..출판사에게 미안해서 다시 내주세요! 라고는 하기가 그렇고 저는 그래서 소장 안했어요.푸하하하. 저한테 있는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스튜어트> 그리고 <초조한 마음>이고 다른 책은 없어요. Shining님 위해서 아무 출판사나 깔끔하게 내주세요, 제발요. 저 그저께 <밤으로의 여행> 샀답니다. 이건 반쯤 Shining님 덕분이에요. 미루다가 미루다가 <시간의 혼> 보다 삘 받은 거니까.

으으으, 네, 그래서 어떤 책 읽다보면 <체스 이야기> 엄청 많이 언급돼요. 그 구조와 상징성이 왜 그토록 많이 회자되는지 읽고나서야 명백하게 알 것 같아요. 읽기 전에도 늘 어떤 작품일까 궁금했었거든요. <낯선 여인의 편지>도 좋았구요. 좋아요. 히히히.
 
하비비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크레이그 톰슨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살기로 선택했어. 하지만 돌아오는 차편을 놓치고 말았어. 결국 걸어왔어. 

사막에서의 그 여덟 시간이야말로 사십 일 동안의 낮과 밤이었지.


<하비비>를 관통하는 주제는 결국 두 가지다. 노예문제 즉 인종문제와 생명의 탄생 혹은 신비. 


여기서 하나 더 보태면, 1900년에 태어나 지금까지 장수하고 계신 할머니를 한 번 떠올려보자. 그런 할머니 안계신다고? 나도 없다. 상상해보자. 아니, 빙의를 해보는 거다. 호롱불 켜고 농사 짓거나 삯바느질 하고살다 갑자기 일본인들에게 점령됐다. 신랑 얼굴도 모른 채 열여덟에 시집와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거쳐 자식을 길렀더니 해방이란다. 같은 민족이라더니 내전 비스무리한 전쟁도 3년이나 계속된다. 휴전선이 그어지는 걸 보았다. 더불어 부모의 삶으로부터 일정부분 영향받을 수밖에 없는 자식이고보면 이런 일도 있었다. 일본과 청나라, 서양문물이 막 들어오기 시작한다. 부모시대는 영정조, 순조,헌종,철종 시대 세도정치기인데 어느 날 갑자기 신분제 폐지라더니 곧이어 일본에 의한 식민시대를 맞고 계속된 애국과 계몽 끝에 해방이라는 결실을 본다. 호롱불이 형광등으로, 개울에서 방망이로 하던 빨래가 세탁기 역할로 바뀐다. 오래 살다보니 텔레비전, 김치전용냉장고, 에어컨, 컴퓨터란 걸 다 본다. 1,2,3차 산업 시대를 인생 전체와 맞부딪혀가며 살아오신 할머니의 삶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반대로 할머니는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까. 이 세상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 세월이 흐른다는 건 그런 뜻이다.

  

읽다 가려운 곳이 생겨도 성경이나 코란을 펼쳐 독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시작한 일이다. 크레이그 톰슨이 바쳤다는 7년이 허투루 가능한 시간도 아닌데다 띠지에 적힌 수많은 수상이력을 대하면서 무엇 하나 보여주겠지 싶은 믿음이 있었다. 코란과 성경.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되면 달리 방법이 없지만 아랍이든 서구든, 이슬람이든 가톨릭이든, 종교를 향한 뿌리깊은 선입견이라도 배제하는 게 이 책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라고 여겼다. 적나라한 섹스라도 있는 걸까. 비닐로 꽁꽁싸인 벽돌처럼 두꺼운 책을 받고서야 비로소 조금은 설렜다. 빽빽한 그림과 경건한 글자체. 그린 이의 위대함을 체험하는 건 수년 들인 공을 단 몇 시간 신공으로 낼름 집어삼키는 게 왠지 모르게 미안해질 때부터다. 아버지에게 팔려 필경사의 아내가 되었다가 남편이 책사냥꾼들에게 목숨을 잃자 다시 노예시장으로 온 열두살 소녀 도돌라가 버림받아 죽기 직전의 운명인 세 살배기 잠을 만나면서 위대한 사랑이 시작된다. 장장 15년. 9년을 함께하고 6년을 그리워하다 비로소 다시 만난 연.인.들. 종교를 갖지 못한 이들이 특정 문화권의 한낱 종교서에 불과하다 여기는 코란과 성경이 이 오누이의 성장과 사랑을 둘러싼 채 배경음악처럼 흐른다. 맞다. 새삼감탄할 것도 없다. 사랑에 대해, 세월에 대해, 달콤함에 대해 두 종교서는 늘 접점을 보여주곤 했었다.


두 가지 색의 실타래가 얽혀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코란과 성경이 따로 놀도록, 도돌라와 잠의 인연 사이 억지로 끼어들도록 하지 않는다. 숨겨진 상징을 찾아내고 말고는 읽는 이의 몫이지만 이 작품은 전혀 다른 두 종교서-코란과 성경-를 곧고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동시에 이야기적 특수성과 시대적 보편성을 필연적으로 획득한다. 찾아내는 만큼만 보인다. 노예시장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친 오누이가 버려진 배 위에서 살아가며 필요한 것들을 사막에서 구한다. 각자 먹고마실 것을 구해오기로 한 그들은 때로 도와주고 때로 가혹한 하늘의 이치를 모르고 있다. 도돌라의 희생은 성스러운 것이었다. 사건과 아랍의 문화 혹은 신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맞닿아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지키기 위해 내어주는 행위는 영혼과 육체가 따로 행하는 숭고한 결합이며, 그 열기는 오래도록 식지 않고 불빛을 밝혔다. 어린 잠이 도돌라를 위해 물을 팔아 식량을 사러간 사이 정체모를 이들에게 잡혀간 도돌라는 술탄의 하렘에 갇혀 매일밤 왕의 욕망을 받아내며 괴물로서의 지옥을 살아간다. 힘겹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낳지만 권모술수에 능한 권력과 투기로 잃어버린다. 그녀는 오래도록 잠에게로 가기 위한 자유와, 아이이자 소년의 이상으로 남은 지켜주기 위한 이로서의 잠과, 진정한 사랑에 의한 봉인된 분수의 샘을 위해 버틴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아팠는지 차마 확신할 수 없었으니, 고통 때문에 순차적 시간 감각에 혼란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러 질병에 매달린 것도 있었다. 내 이상의 상실과 이 낯선 남자의 기묘함을 받아들일 시간을 벌기 위해서. 

이 남자는 내가 창조한 잠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난 6년간 스스로를 창조해 온 잠이었다. (p.517)


시공간 속에 또다른 시공간을 짜넣고, 이야기 안에 또다른 이야기를 섞은 이 책을 읽는 일만큼이나 독해 역시 만만치 않지만 결국 다시 이야기, 이야기의 이야기에 대해 생각한다. 돌아갈 곳에 대한 이야기를. 돌아가야 할 사람, 장소, 시간에 대한 모든 것들을. 마침내 잠이 도돌라를 구해 그들이 함께 지낸 샘물같은 터전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부터 믿어의심치 않았던 이야기, 이야기에 깃든 원천의 배신은 와르르 더없이 아프게 무너져내린다. 도돌라가 만들어낸 이상과 그 이상 속에서 훌쩍 커버린 남자아이. 서로가 서로에게 이제는 더이상 줄 수도, 주지 않을 수도 없는 괴리가 문명과 비문명, 문자와 이미지, 순결과 헤픔, 이성과 감성, 사랑과 욕정 등 많은 것들을 건드릴 수 있었다. 육체와 영혼, 물주와 노예, 여자와 남자, 탄생과 소멸, 천국과 지옥도 마찬가지였다. 말로 어쩌지 못해 끝내 글로 적고야 마는 공허. 하루가 멀다하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내 이야기. 써온 시간이 스쳐지나갔다. 흘러넘치면 또 다른 곳을 채우리라. 손상와 치유, 참회와 용서가 인과를 형성하고서야 허락된 반대말이듯, 나 그리고 너와의 차이, 그로인한 간격을 가늠해봤다. 섹스와 사랑이 동의어가 아닌 것. 쾌락과 욕망, 숨과 이야기로 가분된 세상 끝의 이야기들. 나는 오랫동안 나일 수가 없었다. 보여주는 데 인색함 없는 삶이고 싶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언제나 보여주기에, 시간흐름에, 홀딱 벗고 뒹구는데에, 결합의 시간이 소중한 것이라 믿고 또 믿었던 시간들. 고통과 희생과 사랑이 어쩌면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낙원에서 비롯된 막의 파열은 침묵과 운명이 낳은 같은 비율로 기능한다. 나는 펜을 다루지 못하고 내 글을 다루지도 못한다. 샘을 가늠할 수 없고 샘이 있기나한지 의심스러우며 확신도 없다. 시간도 욕망도 운명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삶이 가슴을 긋고 지나갔다. 나는 겨우 소유격과 내가 속한 사각형이나 삼각형, 맨 처음 글자와 마지막 글자 사이의 간극을 통제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늘이 태양과 구름을, 바다가 물과 파도를, 사랑이 욕망과 절제를 대하듯 그저 내 이름 세 글자(나는 다섯글자지만) 앞에서만 당당할 뿐이다. 지금 든 것들을 모두 휘두른 후에야 죽을 것이다. 잉태, 탄생, 풍요 앞에 나는 허약하다. 그래서 더욱 숭고하고 고귀하다는 것을 안다. 사라진 것들은 아직 파묻혀있다. 우리가 밟고지나온 바로 그곳에. 길고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결국은 태어나고 살고 사랑하고 죽는 얘기다. 그래서 마주치는 온 세상에 맞서는 일이다. 그 과정에 분신을 하나쯤 생산해 던져주는 일이다. 세상을 제어하는 힘을 스스로 기르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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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8-09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은 이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그저 세상을 사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럼 나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걸까 싶어서 자괴감이 들고는 합니다.(이게 뭔?) 어떻게 하면 이 복잡한 세상에서 세상을 나름대로 제어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휘둘리지 않으면서...아시면 좀 알려주세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잤더니 상당히 피곤하군요. 이럴 때에는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고 영화보다가 잠드는 게 최고인데..보다가 편안히 잠들만한 좋은 책이나 영화 없을까요? 요즘 영화들은 피곤해요, 영화 안에서 너무 관객을 휘두르려고 하니까, 저는 휘둘리지 않고 편하게 잠들고 싶네요. 적어도 지금은요.

거기는 아직 비 안 오나요?

아이리시스 2013-08-09 20:51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댓글이 많이 안달려서 되게 편한데 그래도 맥거핀님 댓글은 무지 반갑네요. 맥거핀님 잘 살아계시구나 싶어서.. 저는 사소한 책에는 감동하지 않고 책도 원가대비 최대한의 지식과 감동을 원하는 편이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좋더군요. 좋아요. 최근에도 그냥 막 화나는 일이 있었거든요. 제 일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왜 다들 남일에 감놔라 배추놔라 하길 좋아하나 싶어서요. 자기 전에는 그냥 드라마 보는 게 제일 좋지 않나요? 일단 드라마라는 매체는 아무리 좋다고 소문이 자자해도 어쩔 수 없는 '현장성' '즉시성'이란 게 작용해서 한 주 한 주 차근차근 봐야 하는 법이니까.

맥거핀님은 잘 지내고 계시죠, 전라도도 다녀오시고^^ 저도 에어컨 달린 방에서는 잠밖에 잘 수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프랑스 현대철학인가..(제목도 가물가물) 그거 어제도 배 위에 얌전히 펴놓고 잤어요. 새벽에 벌떡 일어나 불끄고 다시 잔다는..

계속 동문서답하고있는 것 같은데, 네! 아직 비 한 방울도 안왔습니다.. 그..그러니까 반나절 이상 쭉 내리는 비 같은 비는.. 한 달 사이 한번도 안왔;; 진짜 죽을 것 같아요. 해운대는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쳐다만봐도 죽겠고 아이스크림이랑 얼음만 냉장고에 계속 채워가요. :)

아이리시스 2013-08-09 22:14   좋아요 0 | URL
그..그런데 이 더운데 유머해보겠다고 제가 배추라고 적었.... orz

맥거핀님! 책을 최소한을 담았는데 8만5천원이 되면요, 맥거핀님은 책을 더 끼워서 5만원씩 맞춰서 두번 주문하나요? 도로 한 권 빼서 5만원어치 주문하나요? :) 아님 그냥 신경 안써요? :)


맥거핀 2013-08-10 16:31   좋아요 0 | URL
요즘 사람들은 남의 일에는 감놔라 '배'추 놔라하는데, 졍작 자기 일에는 미적미적 하는 것 같아요. 어쩔 줄 몰라서 불안불안해 하면서 말이죠. 물론 이는 현대인의 고질병이기는 하고, 저도 완전히 그런 병이 없다고 말은 못하지만, 가끔 보면 너무 정도가 심한 분들이 계세요.

그리고 질문에 답변드리면...
경험상볼 때 처음에 한 권 사겠다고 시작한 주문이 늘 2권, 3권, 4권 그 이상으로 불어나는 경험을 매번 하는지라..아마도 늘었으면 늘었지, 줄이지는 못 할 것 같은데..암튼 현대인의 최고의 발명품은 에어컨이요, 최악의 발명품은 신용카드입니다. (으흐흐..저넘의 신용카드 때문에 집에서도 이제는 막 지르고 있으니..)

아이리시스 2013-08-12 13:18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 '배'추는 실수아니고 진짜 감놔라 배추놔라라고 저 순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으하하하. 가만히나 있을걸, 내가 못살아ㅎㅎ 무식인증하고 있어;;

p.s 꽃보다 할배랑 후아유 재밌어요!. (뜬금없지만 요즘 케이블 맹신중이라서 말해봄?!)

지금 저희집에 식구가 별로 없으니 이번여름 버티기로 했어요. 에어컨 안 켜고^^ 데스크탑이 에어컨이랑 같이 꽂혀있어서 콘센트 문제도 있고 일단 버티기로.. 제가 비가 안와서 미치겠다는 건 아마 그런 이유일 듯. 네! 에어컨은 정말 미친 발명품이죠. 근데 요즘 제 유일한 낙은 계곡이 흐르는 전원주택 매물 삼매경입니다.. 책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여행도 아니고 그냥 잘 지어진 집을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가끔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생각하지만 제 탓도 할 수 없고 부모님 탓도 할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비 한 방울 안오는 남쪽나라 아파트에서 사는 거..

맥거핀 2013-08-13 22:54   좋아요 0 | URL
나도 꿏보다 할배! 요즘에는 야구 외에는 TV 안보는데, 그것만 유일하게 보고 있어요. ㅋㅋ
 
쥐를 박멸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알베르 카뮈 - 태양과 청춘의 찬가
김영래 엮음 / 토담미디어(빵봉투)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열 개의 거울 뒤에 숨은 카뮈. 눈으로 읽고 이해함으로서 만나는 카뮈, 카뮈, 카뮈에 대한 모든 것들.

 

세계, 고통, 대지, 어머니, 사람들, 사막, 명예, 비참, 여름, 바다.

 

 

좋아하는 누군가를 알기 위한 방법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마흔 여섯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카뮈가 남긴 소설, 산문, 희곡, 철학적 에세이, 시평, 사적인 글 등 다양한 장르적 탐색은 김화영 선생님의 오랜 노고로 번역되어 있는 전집을 읽음으로서 가능할 수 있다. 그의 글을 차곡차곡 읽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가 어린시절 그리고 삶의 일부를 보냈던 곳으로의 여행이 유일한 차선책일 것이다. 카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찬탄의 일환에서 엮어낸 이 책은 그가 남긴 작품들의 요약별 발췌를 통해 열 개 키워드를 반추한다. 우리가 카뮈를 생각하면 거의 항상 떠올리게 되는 것들. 그 빛나는 문장들을 유영하는 한편의 미장센이다.

 

그래서 이 책의 타깃은 명확해진다. 카뮈에게로 가는 입문의 역할이 아니라 카뮈의 매력에 다시 취하고 싶은 이들이 찾을 것.

 

가난과 유약함이 준 유리조각 같은 감성, 그가 살았던 파리와 프로방스, 북아프리카 알제리로의 기행, 저항과 부조리의 상징이 되어버린 작품의 의미를 헤집다보면 어느새 동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으로서의 카뮈를 엿볼 수 있다. 태양 아래 청춘을 불태웠지만 열정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해 괴로워했던 한 소년과 청년의 모습을 말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카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눈부심과 괴로움이 공존한다는 사실과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일 따름이라는 몇 개의 깨달음을 제외하면, 카뮈 곁에 놓여 있던 내 모든 경의는 어쩌면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카뮈라는 사람 자체에 매료된 것인지, 그의 불완전함을 사랑한 것인지, 위태로움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 했는지 알지 못한다. 많이 알아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여전히 카뮈에 대해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카뮈는 내 20대의 일부를 채워준 작가에 속한다.

 

 

카뮈를 읽는 일은 존재와 존재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일이다. 소설 <이방인>, <전락>, <페스트>가 그랬고, 네 편의 희곡과 그가 발표를 한사코 거부한 처녀작 <행복한 죽음>과 미완성 유작 <최초의 인간>,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을 숨기지 않는 철학 에세이 <결혼, 여름>과 고통을 통해 존재론적 의미로서의 행복을 찾아나선 <시지프 신화>, <안과 겉> 같은 철학적 사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알기 위해 읽을 것이 문학작품 밖에 없지 않다는 사실은 세 권의 <작가수첩>이 또다른 방법으로 증명한다. 거기다 사르트르와의 이념 논쟁이나 스승 장 그르니에와의 관계, 아름다움으로 존재의미를 다하는 유럽 곳곳의 그의 발자취까지, 이만하면 이름 만으로도 유혹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예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예술을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저 꼭대기에 올려놓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반대로 예술이 저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은 예술이 그 누구와도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제가 모든 사람들과 같은 높이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예술은 고독한 향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공통적인 괴로움과 기쁨의 각별한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최대 다수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수단입니다. (중략)' (p.281)

 

1957년 12월 10일 노벨상 수여식을 마감하는 연회가 끝날 무렵 열린 강연에서 카뮈의 말 중 일부분이다. 내면의 혼란과 광란의 역사, 가난과 병치레를 고스란히 겪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굴하지 않고 의지와 끈기를 보여준 그의 마음 안에 들어찬 예술에 대한 예찬과 작가로서의 다짐은 스물 몇 살의 도서관에서 마주한 이래, 철학과 예술, 사회와 역사를 향해 머리와 마음을 열어두는 일 또한 문학을 사랑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마음 깊이 새겨준 계기가 되었다.

 

 

저자가 엮기만 했고 비평이 아닌 찬양에 가까운 이 책의 탄생은 별점으로 그 평가를 다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다. 카뮈에게 애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책이며, 카뮈의 글을 발췌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쏟은 이가 다른 독자에게 카뮈를 소개하는 일이다. 인간을 하나의 틀에 가두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일이라고 할 때, 카뮈가 남긴 작품들의 양 만큼이나 여러 조각으로 분열하는 이 책이 완벽한 완성도를 자랑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도 분명하지만, 마냥 좋았다. 이 찬연하고도 빛나는 사유 안에서 언제까지나 숨쉴 수 있다는 것이.

 

카뮈를 좋아한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좋아하는 마음만은 투명하다. 그가 가진 것이 한낱 문학과 이론 속에 머물고 마는 것이었다고 해도 그의 이름에 반응하는 내 속도는 그다지 구애받지 않는다. 이십 대에는 문학에만 발을 담글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희곡은 손대지 못했다. 다시, 이 책을 발판으로 정의와 영혼에 다가가는 카뮈 읽기를 시작해야지. 어쩐지 햇빛 푹푹 찌는 더위 아래 양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이 청춘이 다하도록, 생각이 깊어지도록 그렇게 읽어야 할 것 같다. 그의 <작가수첩> 마냥 지금 나도 잘 쓰고 있는 것인지.

 

 

인생이라는 꿈속에서, 여기 한 인간이 죽음의 땅 위에서 자신의 진실들을 찾았다가 잃고, 전쟁과 함성, 정의와 사랑의 광기, 마침내 고통을 거쳐서 죽음마저 행복한 침묵인 평화로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 또 여기...... 그렇다, 나는 적어도 이것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으니, 이 유적(流謫)의 시간에, 인간에 의하여 이룩되는 작품이란, 예술이라는 우회로들을 거쳐서, 처음으로 가슴을 열었던 두세 개의 단순하고도 위대한 이미지들을 되찾기 위한 기나긴 행로에 지나지 않는다고 꿈꾸는 것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20년 동안 일과 작품 활동을 거치고 나서도, 여전히 나의 작품은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안과 겉> 서문 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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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9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9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8 0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0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8 0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05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아이님 태그 멋져요. 아직 이 글 읽기 전인데, 태그가 멋져서 한 마디 안 할 수 없네요. 아이님은 진정한 낭만가~~*

아이리시스 2013-08-06 10:33   좋아요 0 | URL
섬님, 좋은 아침! 그..그런데..저도 착각이 들었는데.. 저건 제가 한 마..말이..아..니고.. 저자가.. 이 책을 그렇게 만들고 싶으셨대요. 참 좋은 말이죠? 낭만적이고 뭉클하고 그래서 저한테 그런 책이 어떤 책일지 이제부터 찾아보기로 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