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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비 ㅣ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크레이그 톰슨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살기로 선택했어. 하지만 돌아오는 차편을 놓치고 말았어. 결국 걸어왔어.
사막에서의 그 여덟 시간이야말로 사십 일 동안의 낮과 밤이었지.
<하비비>를 관통하는 주제는 결국 두 가지다. 노예문제 즉 인종문제와 생명의 탄생 혹은 신비.
여기서 하나 더 보태면, 1900년에 태어나 지금까지 장수하고 계신 할머니를 한 번 떠올려보자. 그런 할머니 안계신다고? 나도 없다. 상상해보자. 아니, 빙의를 해보는 거다. 호롱불 켜고 농사 짓거나 삯바느질 하고살다 갑자기 일본인들에게 점령됐다. 신랑 얼굴도 모른 채 열여덟에 시집와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거쳐 자식을 길렀더니 해방이란다. 같은 민족이라더니 내전 비스무리한 전쟁도 3년이나 계속된다. 휴전선이 그어지는 걸 보았다. 더불어 부모의 삶으로부터 일정부분 영향받을 수밖에 없는 자식이고보면 이런 일도 있었다. 일본과 청나라, 서양문물이 막 들어오기 시작한다. 부모시대는 영정조, 순조,헌종,철종 시대 세도정치기인데 어느 날 갑자기 신분제 폐지라더니 곧이어 일본에 의한 식민시대를 맞고 계속된 애국과 계몽 끝에 해방이라는 결실을 본다. 호롱불이 형광등으로, 개울에서 방망이로 하던 빨래가 세탁기 역할로 바뀐다. 오래 살다보니 텔레비전, 김치전용냉장고, 에어컨, 컴퓨터란 걸 다 본다. 1,2,3차 산업 시대를 인생 전체와 맞부딪혀가며 살아오신 할머니의 삶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반대로 할머니는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까. 이 세상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 세월이 흐른다는 건 그런 뜻이다.
읽다 가려운 곳이 생겨도 성경이나 코란을 펼쳐 독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시작한 일이다. 크레이그 톰슨이 바쳤다는 7년이 허투루 가능한 시간도 아닌데다 띠지에 적힌 수많은 수상이력을 대하면서 무엇 하나 보여주겠지 싶은 믿음이 있었다. 코란과 성경.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되면 달리 방법이 없지만 아랍이든 서구든, 이슬람이든 가톨릭이든, 종교를 향한 뿌리깊은 선입견이라도 배제하는 게 이 책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라고 여겼다. 적나라한 섹스라도 있는 걸까. 비닐로 꽁꽁싸인 벽돌처럼 두꺼운 책을 받고서야 비로소 조금은 설렜다. 빽빽한 그림과 경건한 글자체. 그린 이의 위대함을 체험하는 건 수년 들인 공을 단 몇 시간 신공으로 낼름 집어삼키는 게 왠지 모르게 미안해질 때부터다. 아버지에게 팔려 필경사의 아내가 되었다가 남편이 책사냥꾼들에게 목숨을 잃자 다시 노예시장으로 온 열두살 소녀 도돌라가 버림받아 죽기 직전의 운명인 세 살배기 잠을 만나면서 위대한 사랑이 시작된다. 장장 15년. 9년을 함께하고 6년을 그리워하다 비로소 다시 만난 연.인.들. 종교를 갖지 못한 이들이 특정 문화권의 한낱 종교서에 불과하다 여기는 코란과 성경이 이 오누이의 성장과 사랑을 둘러싼 채 배경음악처럼 흐른다. 맞다. 새삼감탄할 것도 없다. 사랑에 대해, 세월에 대해, 달콤함에 대해 두 종교서는 늘 접점을 보여주곤 했었다.
두 가지 색의 실타래가 얽혀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코란과 성경이 따로 놀도록, 도돌라와 잠의 인연 사이 억지로 끼어들도록 하지 않는다. 숨겨진 상징을 찾아내고 말고는 읽는 이의 몫이지만 이 작품은 전혀 다른 두 종교서-코란과 성경-를 곧고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동시에 이야기적 특수성과 시대적 보편성을 필연적으로 획득한다. 찾아내는 만큼만 보인다. 노예시장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친 오누이가 버려진 배 위에서 살아가며 필요한 것들을 사막에서 구한다. 각자 먹고마실 것을 구해오기로 한 그들은 때로 도와주고 때로 가혹한 하늘의 이치를 모르고 있다. 도돌라의 희생은 성스러운 것이었다. 사건과 아랍의 문화 혹은 신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맞닿아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지키기 위해 내어주는 행위는 영혼과 육체가 따로 행하는 숭고한 결합이며, 그 열기는 오래도록 식지 않고 불빛을 밝혔다. 어린 잠이 도돌라를 위해 물을 팔아 식량을 사러간 사이 정체모를 이들에게 잡혀간 도돌라는 술탄의 하렘에 갇혀 매일밤 왕의 욕망을 받아내며 괴물로서의 지옥을 살아간다. 힘겹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낳지만 권모술수에 능한 권력과 투기로 잃어버린다. 그녀는 오래도록 잠에게로 가기 위한 자유와, 아이이자 소년의 이상으로 남은 지켜주기 위한 이로서의 잠과, 진정한 사랑에 의한 봉인된 분수의 샘을 위해 버틴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아팠는지 차마 확신할 수 없었으니, 고통 때문에 순차적 시간 감각에 혼란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러 질병에 매달린 것도 있었다. 내 이상의 상실과 이 낯선 남자의 기묘함을 받아들일 시간을 벌기 위해서.
이 남자는 내가 창조한 잠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난 6년간 스스로를 창조해 온 잠이었다. (p.517)
시공간 속에 또다른 시공간을 짜넣고, 이야기 안에 또다른 이야기를 섞은 이 책을 읽는 일만큼이나 독해 역시 만만치 않지만 결국 다시 이야기, 이야기의 이야기에 대해 생각한다. 돌아갈 곳에 대한 이야기를. 돌아가야 할 사람, 장소, 시간에 대한 모든 것들을. 마침내 잠이 도돌라를 구해 그들이 함께 지낸 샘물같은 터전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부터 믿어의심치 않았던 이야기, 이야기에 깃든 원천의 배신은 와르르 더없이 아프게 무너져내린다. 도돌라가 만들어낸 이상과 그 이상 속에서 훌쩍 커버린 남자아이. 서로가 서로에게 이제는 더이상 줄 수도, 주지 않을 수도 없는 괴리가 문명과 비문명, 문자와 이미지, 순결과 헤픔, 이성과 감성, 사랑과 욕정 등 많은 것들을 건드릴 수 있었다. 육체와 영혼, 물주와 노예, 여자와 남자, 탄생과 소멸, 천국과 지옥도 마찬가지였다. 말로 어쩌지 못해 끝내 글로 적고야 마는 공허. 하루가 멀다하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내 이야기. 써온 시간이 스쳐지나갔다. 흘러넘치면 또 다른 곳을 채우리라. 손상와 치유, 참회와 용서가 인과를 형성하고서야 허락된 반대말이듯, 나 그리고 너와의 차이, 그로인한 간격을 가늠해봤다. 섹스와 사랑이 동의어가 아닌 것. 쾌락과 욕망, 숨과 이야기로 가분된 세상 끝의 이야기들. 나는 오랫동안 나일 수가 없었다. 보여주는 데 인색함 없는 삶이고 싶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언제나 보여주기에, 시간흐름에, 홀딱 벗고 뒹구는데에, 결합의 시간이 소중한 것이라 믿고 또 믿었던 시간들. 고통과 희생과 사랑이 어쩌면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낙원에서 비롯된 막의 파열은 침묵과 운명이 낳은 같은 비율로 기능한다. 나는 펜을 다루지 못하고 내 글을 다루지도 못한다. 샘을 가늠할 수 없고 샘이 있기나한지 의심스러우며 확신도 없다. 시간도 욕망도 운명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삶이 가슴을 긋고 지나갔다. 나는 겨우 소유격과 내가 속한 사각형이나 삼각형, 맨 처음 글자와 마지막 글자 사이의 간극을 통제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늘이 태양과 구름을, 바다가 물과 파도를, 사랑이 욕망과 절제를 대하듯 그저 내 이름 세 글자(나는 다섯글자지만) 앞에서만 당당할 뿐이다. 지금 든 것들을 모두 휘두른 후에야 죽을 것이다. 잉태, 탄생, 풍요 앞에 나는 허약하다. 그래서 더욱 숭고하고 고귀하다는 것을 안다. 사라진 것들은 아직 파묻혀있다. 우리가 밟고지나온 바로 그곳에. 길고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결국은 태어나고 살고 사랑하고 죽는 얘기다. 그래서 마주치는 온 세상에 맞서는 일이다. 그 과정에 분신을 하나쯤 생산해 던져주는 일이다. 세상을 제어하는 힘을 스스로 기르자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