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적과 흑 -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68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쌍둥이의 운명만 봐도 알 수 있듯, 운명이란 참 덧없다. A에 의해 B의 삶이 그리도 쉽게 변하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이. A와 B는 가족, 친구, 연인을 비롯해 사실상 관계의 양상 거의 모두에 해당하는데 가까운 사이일수록, 친밀도가 높을수록 해당 비극의 강도가 세어지는 특성을 보여준다. 혼자 왔다 가는 세상 아니다. 독불장군처럼 있다간 세상이 코 베어가도 모를 세상. 그래서 인간은 절충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우며 자라난다. 선과 악, 능력과 신분, 성직자와 군인, 윤리와 세속 사이에서 갈등하는 건 주인공 쥘리앵 뿐만이 아니다.
독실하고 순결한 성직자(흑)를 꿈꾸지만 남보다 특출난 지능 뿐인데다 가난하고 시간이 없으니 먼 길을 돌아가야 할 타당한 이유를 굳이 찾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 속의 기준이 무너진 사람을 보고 있는 일은 어찌나 아슬아슬한지. 노력이나 열정으로 되지 않으면 가능한 타인을 발판으로 삼아 올라서려 한다(적). 쥘리앵의 경우 은근하다는 것과 본인의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여자, 사교계,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은 쥘리앵의 목표에 희생되기 좋은 촉매제다. 대가를 챙긴 아버지가 억지로 떠민 집으로 들어가 레날 시장의 아이들을 돌보는 입주 가정교사가 되지만 상층사회의 배움은 도덕이 아니라 불법을 무릅써서라도 쟁취하는 법이다. 손쉽게 시장의 아내를 유혹해 원하는 것을 얻다가 들킬 위험에 처하자 평소 신부의 신임이 두터운 덕에 쉽게 추천장을 받아 드넓은 도시 브장송의 신학교에 들어간다. 자신이 타고난 능력을 과신하는 유형의 전형적 캐릭터. 쥘리앵의 갈등과 변화를 내세워 능력과 노력이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암울한 왕정복고 체제를 비판하는 동시에 노력과 열정이 통했던 나폴레옹 시대를 동경한다. 마음이 찬란해질 정도로 그리운 시대가 내게도 있었던 것 같다.
프랑스 문학은 희한하게도 최후에 돌아가야 할 보금자리처럼 여겨진다. 만족과 찬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이유에서 지성과 감성의 기로에 서서 흔들고 쓰다듬게 된다. 스탕달 보다는 발자크와 플로베르가 좋지만 어디까지나 세 사람은 프랑스 문학이라는 갱도 안에서 하나이다. 상징성 짙은 사회소설이 부담되면서도 정작 '레 미제라블'을 읽으면서는 할 수 없던 프랑스 왕정 역사를 살펴보는 계기가 된다. 한 청년의 수난사에 나를 대입해보는 감각, 프랑스 문학사의 획을 긋는 작품인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완연하게 보장해주지 않는 사회라면 묵과할 수도 없고 간과해서도 안되는 지점에서의 촌철살인적 멘트. 읽어내는 자에게만 허락된 어떤 뿌듯한 벅참 같은 것. 프랑스 혁명 이후의 왕정 복고(부르봉 왕가), 나폴레옹 집권과 실각, 루이 필리프(오를레앙 왕가) 등장 직전까지가 스탕달이 마흔 여덟, 죽기 12년 전에 발표한 작품의 배경이다. 이후 나폴레옹 정권 역시 유럽을 전란으로 밀어넣었다는 명분을 쓰고 워털루 전쟁으로 명을 다한다. 신체제가 구체제를 전복할 수 없는 현대 시각으로 보면 한없이 무력하게만 보이는 이들의 부침이 약간은 멀뚱하게 느껴지는 건 너무나도 상식적인 돌담을 부수지 못한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일까.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부제: 1830년 7월 28일), 1830, 루브르 박물관 소장
미어터지는 겨울날 루브르에서 좋은 자리에 크게 걸려있기도 했지만, 유독 시선을 사로잡던 이 작품을 기억한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라곤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밖에 모를 때였다. 당시 들라크루아 그림에 심취한 적이 있어 중심에 선 여인이 잔 다르크를 상징한다는 것도 아는 상태에서 본 그림이라 모나리자 다음으로 기억에 남았다. 좋아한다기 보다 그저 기억에 남은 것이다. <적과 흑>이 발표된 1830년, 비로소 7월 혁명으로 복고왕정이 무너진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성공으로부터 겨우 15년 만에 다시 황제를 맞아들인 후였다. 나폴레옹의 실각 후 혜성처럼 등장한 루이 필리프는 국민 모두의 열망을 안았지만 사실상 착각임이 밝혀진다. 그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수명을 다할 때까지 프랑스 시민의 왕으로 군림하지만 그의 집권은 왕정 복고 체제로 돌아간 것과 다름 없었다. 군주제는 자취를 감춘 게 아니었고 루이 필리프는 즉위 후에도 자본가측의 이익만을 대변했다. 급분한 시민들이 벌인 2월 혁명의 결과로 공화정이 성립되지만 이후 등장한 나폴레옹 3세 역시 황제를 선언하면서 공화정도 민주정도 너무나 멀게만 보인다. 이러한 상황. 다소 용맹스럽지만 강인하고 유연한 정책을 폈던 나폴레옹에게는 넘치는 추종자들이 있었고, 실각 후에도 그를 그리는 이들이 많았다.
이전 나폴레옹의 인기와 명성을 입고 당선된 나폴레옹 3세는 곧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 이로서 보나파르트 왕조의 막이 열린다. 1842년에 세상을 떠난 스탕달은 이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거나 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때 쿠데타를 반대하다 국외추방을 당한 이가 위고다. 그는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 섬과 건지 섬을 전전하면서 19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한 걸로 알려졌다. <노트르담 드 파리>가 1831년, <적과 흑>이 1830년에 발표되었다. 위고의 문학인생은 추방 전과 후로 나뉜다. 1862년에 나온 <레 미제라블>과는 다른 정치상황에서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이 쓰여진 것이다. 이 시기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 세계를 통틀어 가장 최초의 근대적 혁명으로 불려왔다.
요약하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 처형 이후 나폴레옹의 쿠데타 성공, 자유,평등,소유권을 인정한 1793년 헌법 제정, 안팎의 흉흉한 전쟁이 거듭된 시기를 거쳐 워털루 전쟁(1815)에 의한 나폴레옹의 실각까지가 스탕달이 사회주의 소설로도, 애틋한 사랑의 심리주의 소설로도 읽히는 이 작품을 내놓은 배경이다. 정확히 루이 필리프가 취임한 해에 나왔고, 주인공 쥘리앵을 작가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같도록 설정한다. 부정으로 얼룩진 혼란한 시대에 남몰래 침대 아래 숨겨둔 나폴레옹 초상화가 발각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쥘리앵들이 이 사회에도 얼마나 많은가. 이 목표지향적 보나파르티스트는 신학교 교장의 신임과 영리한 두뇌로 라몰 후작의 비서로 들어가 사교계의 꽃으로 부상한다. 후작의 딸 마틸드와의 사랑이나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기병연대의 중대자리는 쥘리앵의 신분을 고속승진시키지만 이후 찾아온 비극에 비하면 영광의 축에도 못 끼는 불꽃같은 순간이기도 했다.
여느 고전이 그렇듯 스토리상의 속력전이나 짜릿한 쾌감은 덜하다. 대신 반종교, 반체제, 혁명적, 저항적인 작가의 사상이 잘 반영되어 세상을 향해 돌진한 꽃다운 젊은 청년의 말할 수 없는 비극을 체화시킨다.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고결한 저울질은 바닥과 하늘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다. 운명순응자들의 끝을 알 수 없는 몰감각이 쓸쓸하다. 정확히는 피곤하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막연한 세상에서 저마다의 숫자만큼이나 존재하는 기준, 잣대, 경계, 원칙이란 숫자 0에 0을 곱한 듯한 모양새 또는 시그마나 인테그랄처럼 정답이 떨어지는 투명하고 신속한 기제가 아니다. 첫 장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의 고독해질 마지막을 짐작하고 있었다. 슬프고 애처로운 비상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가 우리의 정답이라 확신할 순 없어도 그가 우리의 대안 중 하나이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쥘리앵은 우리들을 닮았고, 저녁 시간의 유쾌함을 지켜주는 드라마 속 갈등유발자들과도 닮았다. 어쩌면 나를 그리고 당신을 너나할 것 없는 모두를 닮았다. 두려워해야 할 것, 궁금해 어쩔 줄 몰라야 할 것은 결말이 아니라 바로 나쁜 줄 알면서 품은 마음이다. 뭉개버린 원칙, 깨버린 금기, 등한시해야 했던 욕망이다.
이쯤에서 꼬꼬마 때 좋아한 Wellington's Victory을 다시 듣는 건 나폴레옹에게나 프랑스에나 스탕달에게나 적과흑에 조금은 미안한 일이지만 먼지 쌓인 피아노 뚜껑을 열고 결혼 축하곡집, 체르니, 하농, 소곡집, 명곡집,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의 연주집을 뒤적이는 대신에, 누가 연주했는지 올렸는지도 모르는 Wellington's Victory을 연달아 재생시킨다. 승리의 포만감과 환희가 넘실대는 경쾌하고 가벼운 멜로디가 난데없이 땅에 닿지도 않는 다리로 피아노 학원 의자에 앉아 몇 번이고 건반을 두드리던 작은 여자아이를 눈앞에 데려다준다. 이게 봄과 여름 사이 적과 흑의 유일한 결론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