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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립
로브 라이너 감독, 레베카 드 모네이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1년 2월
평점 :
무엇에 빠져들었는지 콕 집어내지는 못하지만 20대 초반 하염없이 빠져들었던 중국인이면서 프랑스어로 쓰는 작가, 샨사의 소설 <바둑 두는 여자>는 중국문학을 잘 몰랐던 내게 일제침략기의 만주를 배경으로 낯설고 아련하고 기이하면서 신비롭고 안타까운 시대의 이야기를 펼쳐주며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 소설은 만주로 파병 온 일본군 장교와 한 중국 소녀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1930년대 급박한 도시의 모습과 개인의 삶을 바둑판 위의 게임이 진행되는 것마냥 보여준다. 그래서 바둑게임은 영화의 모든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며, 현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바둑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이 게임은 누군가 멈출 수도 없고 멈춰서도 안되는 것, 굴러가고 흘러가야 할 모든 것이었다. 소녀는 이 시대의 모든 것을 떠안고 온 힘을 다해 바둑을 둔다. 할 수 있는 일이 그뿐, 절망과 슬픔과 고독의 구렁텅이가 아무 것도 허락치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와 소녀가 만난 것 또한 바둑 두던 광장이었다. 서로의 아픔과 간절함, 고독과 절망을 알아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깊은 사랑에 빠지지만 둘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런 시대, 그런 시절, 그런 시간들. 그럴 수 밖에 없는 정황들이 명명백백하다. 아픈 만남은 비극적 결말을 낳고, 소설은 비로소 이보다 더 희망적일 수 있겠는가, 이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를 묻는다. 모든 것이 반어법이었다. 이보다 절망을, 이보다 구속을 느끼냐고 묻는 소설에서 나는 비극으로나마 서로의 가까이에 옮겨 앉는 두 주인공들을 보았었다. 총소리, 시체, 울음, 데모, 억압,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흘러 넘치던 꽉 막힌 슬픔의 시대였다.
그리고 <플립>은 바로 그 바둑게임을 온전히 화면으로 옮겨온 영화다. 하지만 <바둑 두는 여자> 속 처연함과 결연함, 안타까움이 이 영화에는 없다. 사실 두 작품은 서로 비교할 만한 대상도 아니고 비교될 대상도 아니며, 내용상으로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만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 마음, 상황이 교차한다는 것이 닮았다. 이곳에 소녀가 있고, 저곳에 소년이 있다는 것이 닮았다. 여기 소년의 마음이 있고, 저기 소녀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 닮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영화판 <그 남자, 그 여자> 아니, <그 소년, 그 소녀>다. 눈치챘겠지만, 소년과 소녀다. 작은 남자와 작은 여자 아니,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말이다. 쾌활하고 발랄하고 천진하고 순수하고 어여쁘고 밝고 화사한 아이들. 우린 이 영화를 보며 어린시절을 불러오게 된다. 그 시절에는 내 옆에 누가 있었던가, 자전거가 있었던가, 인형이 아니면 우산이 그것도 아니면 사탕이, 장미꽃이, 문구세트가, 숨바꼭질이, 귤 한바구니가 있었던가. 그 시절이라면 나, 할 말이 끝도 없이 쏟아질 것처럼 하염없지만 매몰차게 막아버린다. 감당할 수 없다. 그 밞음, 수줍음, 눈부심, 순수함들을 감히 감당할 용기가 없어서다. 다른 모든 것 앞에 단 하나, 작은 손! 그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손은 참 작고 희고 깨끗했다. 아무 것에도 노출되지 않아 무엇에도 닿은 적이 없는 손. 세상 때 묻지 않고, 세상 짐 얹지 않고, 세상 아픔 스며들지 않은, 서로를 향해 반짝거리며 서로 잡아주기를 기대하던 작은 손. 그것만이 떠오른다. 전부가 아니지만 거의 모든 것인듯, 달뜨게 떠오른다. 해질녘 풍경도 떠오른다. 좀 더 놀고 싶은데 들어오라고 저녁 먹자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와 찌개 냄새, 아쉬워하던 우리의 고무줄 놀이, 숨바꼭질, 달리기 계주 그런 것들. 결국 완전한 어둠이 거리를 잡아먹고 나서야 잔뜩 잔소리를 듣고 우리들은 집으로 끌려들어갔다. 그것들은 파노라마처럼 두서없고 정처없이 자꾸만 흐른다. 찰칵.
첫 시나리오를 쓰면서 불이 켜졌다 꺼졌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페이드인,아웃 기법을 의도적으로 많이 넣었다. 나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씬이 끝날 때마다 계속 하얘졌다 까매졌다 하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시나리오가 빈약해 기술적으로 채우려는 욕심의 발로였는데, 그날 작품 발표 시간에 태클이 엄청 들어왔다. 말이 토론이지, 토론당할 시나리오들이 아니라는 걸 민망하게도 우리끼리 잘 알고 있었다. 빨강 머리에 빨강 코트, 빨강 구두를 신은 여자가 새벽마다 이부자리에 누군가를 눕혀놓고 흰 이불을 덮어준 채 얼그러진 화장을 하고서 또각또각 출근하는 장면이 여러번 반복되었다. 인기척 없는 이불 속 인물과 대화를 하기도 하고, 언제나 이인분의 밥상을 차린다. 심지어 느릿느릿 움직이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천천히 흔드는 섹스도. 기이하면서 고독한 지하방 인생.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 말이 안되는 퇴폐적 시나리오는 사실 어디선가 졸업작품으로 감상했던 독립영화 장면을 나름 포착해온 거였다.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그걸 강조하기 위해 붉은 빛이나 불안한 듯 흔들리는 흰 조명,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카메라 기법이 필요했던 거였다. 어떤 애가 F.I/F.O이 너무 많이 등장해서 읽기가 부담스럽다고 했고 거기에 교수님이 종지부를 찍었다. 교수님은 우리의 빈약한 글에도 함부로 비난하지 않는 신사였다. 나는 내용상 의도였다고 어쭙잖은 변명이라도 하려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못했고,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나는 내가 쓴 작품에 타당성을 주장하지 못했던 자책을 안고 지금까지 지내왔다. 왜 그랬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설사 그게 타인의 눈에 이상하게 보였대도 나는 말해야 했던 것이다. 알지만 그게 필요했다고, 나는 이 시나리오가 영화가 된다면 잦은 F.I/F.O이 등장해도 좋다고 해야 했다. 그게 내 의도였으니까.
여자아이(줄리)는 옆집에 사는 남자아이(브라이스)가 좋다. 항상 남자아이를 주목하고 다른 여자 애에게 다정하거나 친절하면 신경 쓰인다. 그래서 졸졸 쫓아다니며 묻고, 관찰하고, 신경쓴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가 귀찮다. 왜 날 따라다니는지 어째서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는지 짜증날 지경이다. 마을 어귀 무화과 나무에 올라가 나더러 올라오라고 소리친다. 친한 척 하고 날더러 자꾸 뭘 해주려거나 해달라 한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가 나무 위에 올라와줄 것으로 기대했다. 이 나무에 오르면 세상이 짠 하고 펼쳐지면서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그것들이 다 발밑에 있는 듯 행복한데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 어른들이 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거기에 새집을 짓는 것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줄리네 꼬꼬들은 달걀을 참 많이 낳는다. 동네 아주머니는 줄리에게서 그 달걀을 사기로 하고, 줄리는 종종 꼬꼬가 낳은 달걀로 용돈을 번다. 브라이스가 이 달걀을 먹어봤으면 좋겠다. 내가 기르는 꼬꼬가 낳은 달걀은 식구들이 다 못먹을 정도로 많다. 브라이스에게도 갖다 줘야지. 브라이스는 줄리가 주는 달걀이 달갑잖다. 줄리네는 돈이 없는 걸까. 어째서 정원 관리를 안하고 저런 곳에서 닭을 기르는지 모르겠다. 더러운 정원에서 사는 닭이 낳은 달걀에는 균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족 누군가의 말에 줄리가 매일 가져다주는 달걀을 버리기로 한다. 줄리는 브라이스가 내다버린 달걀을 발견한다. 처음부터 어째서 말하지 않았니. 줄리는 다시 심하게 상처받는다. 이제 정말로 브라이스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줄리네 아빠는 정신이상을 앓고 있는 동생(줄리의 삼촌) 때문에 많은 돈이 든다. 그래서 정원을 가꾸는 데에 큰 돈을 들일 수가 없다. 줄리의 부모님은 종종 다투지만, 줄리도 아빠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느 날 아빠를 따라 삼촌을 만나고 온 다음, 알게 된다. 아빠가 옳다는 것을. 도서관에서 브라이스를 본다. 눈길이 가는 건 사실이지만 외면하기로 했지만 우연히 브라이스가 친구와 하는 대화를 듣게 된다. 그들은 내 삼촌 얘기를 하고 있었다. 브라이스의 친구가 말한다. 난 그 아이의 삼촌이 그렇다는 걸 들으니까 그 아이가 그런 이유를 알겠다. 그 아이가 이상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구나. 줄리는 완전히 상처 받는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동조해버리는 브라이스 때문에. 이제 브라이스 따위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브라이스는 줄리의 무화과 나무, 달걀, 삼촌 이야기를 모두 안 이후로 그녀를 무시하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들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애의 뒷모습과 표정에 늘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그 애는 날 없는 사람처럼 대한다. 삼촌에 대한 일로 많이 기분이 상했을 거야. 줄리가 나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이 못지 않게 속이 상한다. 어쩌지. 아 어쩌지. 이제 줄리는 더더욱, 더군다나 나를 봐주지 않는다.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다. 그녀는 매몰차게 나가 버리고 친구들에게 비웃음만 듣는다. 그래도 괜찮다. 어떻게 하면 줄리의 화가 풀려, 예전처럼 나를 귀찮게 하며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줄까. 어떻게 하면. 딱 하나 있다. 내가 줄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줄리를 위해 무화과 나무를 심기로 한다. 그녀의 집 정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고 그 나무가 자랄 때까지는 날 용서해주지 않을까. 그래, 무화과 나무를 심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세상에, 그녀가 나온다. 우리 같이 나무를 심는다. 우리. 그애가 내 정원에 묘목을 가져왔다. 무화과 나무를 심고 있다. 세상에, 브라이스의 눈이 달라 보인다. 아무래도 여전히 브라이스와의 첫 키스 기회는 지나버리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가 심은 나무가 자랄 때까지. 예쁜 나무와 다정한 우리들과 아름다운 정원 그리고 마을 풍경. 추억은 그런 것들일 것이다. 사람과 풍경, 인상 속에 숨어있던 많은 시간들. 그것을 편리하게 추억이라는 두 글자로 뭉뚱그려 부리는 것일 테다. 브라이스와 줄리가 나무를 심는 광경은 내가 가진 모든 추억을 압도할 만큼 멋졌다. 함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던 그 시절에서 해방된 건 언제였을까. 그때, 내가 아홉 살이고 그가 열 살이었을 때에 소년은 종종 옷걸이로 맞았다. 뭘 잘못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소년은 다락방으로 기어서 도망갔다. 우리집 하고 똑같이 생긴 방인데도 소년의 집에 들어갔다가 무척 경이로운 기분을 느꼈다. 거기 짜부러진 옷걸이가 아무데나 널려 있었다. 옷이 걸린 것과 매로 변용된 옷걸이. 아 옷걸이.
기억은 때로 단편적이고, 그 단편적 기억을 차례로 늘어세우면 그것이 종종 전부가 된다. <플립>은 작은 여자아이와 작은 남자아이의 순수하고 화사한 연애 이야기지만, 순수한 발랄함과 아직 어린 마음과 공존하는 영악함을 보자면 피식 웃음이 난다. 그때 나도 그가 전부였었다. 그를 보기 위해 잠을 자고, 일어나고, 피아노를 치고, 공부를 했다. 참 작은 소년, 소녀였는데(당연히 우리 둘 뿐인 건 아니었다, 동네에는 족히 한 다스는 될 법한 소년,소녀들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아주 다 커버린 어른처럼 느껴졌었다. 그런 감정은 커서는 가질 수 없는 거였다. 학생 때의 사랑은 기념일을 챙기는 데에 열올리는 "보여주기식 사랑"이었고, 성인이 된 후의 사랑은 상대가 아니라 나를 더 가여워하는 "나를 향한 사랑"이었다. 참 예뻤다, 어린 시절. 좋은 집은 아니었지만 꽈배기 공장이 있고 친구들이 엄청 많던 동네. 나는 그곳에 살았던 어린시절을 따뜻하고 안락하고 조용하지만 함께 뛰어놀 친구가 없는 아파트에 살던 시절보다 훨씬 영예롭게 기억한다. 누구에게나 아련하게 떠오르는 시절이 있을 것이다. 어린시절을 불러오는 것은 자유, 그 시절을 빨강 머리를 고수한 주근깨 빼빼 마른 앤이나 안소니와 테리우스 사이를 방황하던 캔디, 이집트를 호령하던 피부 검은 왕비 클레오파트라, 오스트리아 공주에서 프랑스 왕비가 된 비운의 여인 마리 앙투와네트와 함께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책이나 TV 속에 존재했지만 그 시절, 온 동네를 휘감으며 몰려 뛰어다니던 우리는 오로지 우리 아니, 내 안에만 살아있다. 불러올 추억이 있다는 것은, 이미 몸이 다 커버린 여자가 아주 작아서 서로 부딪칠까 겁이 났던 작은 손을 기억하는 일은, 기가 막힐 만큼 매혹적인 일이다. 강렬하면서 신비롭고 그래서 아무 데나 가라앉아 버려도 좋을 만큼 황홀한 일이다. 안녕, 내 어린시절. 그리고 당신의 어린시절. 내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오는 어린 날의 시간들이 버겁지만 보물이다. 이건 정말이지 감동이고 매혹이고 황홀 그 자체다. <플립>을 볼 때만큼은 어깨에 얹힌 어른의 무거운 짐 살며시 내려놓고 잠시나마 줄리와 브라이스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지. 내가 줄리라면 브라이스가 있을 것이고, 브라이스라면 반드시 줄리도 옆에 있을 것이다.
브라이스가 줄리를 잃지 않는 법
1. 세상이 한 눈에 보인다는 줄리(가 좋아하는) 무화과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함께 올라가줄 것
2. 줄리네 집 정원에서 자란 꼬꼬들이 낳은 달걀을 맛있게 먹어줄 것
3. 줄리가 사랑하는 삼촌, 줄리의 삼촌을 사랑하는 줄리의 아버지, 그로인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될 줄리의 가족을 존중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