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내 눈에 들어온 책은 에세이 두 권.
하나는 프랑스 여자들을 말하고, 또 하나는 동유럽 여행기인데 둘은 내가 좋아하는 유럽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동시에 읽어줘야 하는 의무감을 갖게 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유와 구속이 공존하고 전 세계 배낭여행자들이 손꼽는 1순위 대륙 유럽. 중에서도 동유럽. 더불어 문화, 예술, 자유를 표방하는 파리지앵의 도시 파리는 참기 힘든 궁합이 분명하다. 둘은 서로에게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지만 정작 제3자인 나는 둘 사이에서 널을 뛰는 멜로의 여주인공 즉, 양다리의 여왕이었다.
그리고 두 권의 책은 어젯밤 모래 한 줌을 억지로 움켜쥐고 흘리지 않으려 애쓰는 안쓰러운 나를 다독여주었다. 동유럽으로의 여행과 프랑스 여자들과의 만남이라니. 죽기 전 마지막으로 빌어도 좋을 소원이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곧 죽어도 좋았다.
카미유 클로델의 비극적 외사랑과 천재적인 예술적 소양 그리고 로댕으로부터 배신당한 후 억눌린 재능으로부터 나온 광기가 다시 태어나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로망이라면, 작가이자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자유와 살아있는 나비의 대명사였던 프랑수아즈 사강은 지금 내게 꼭 필요한 로망이다.
[슬픔이여 안녕]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는 것보다 그녀에게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녀를 동경해서라기 보다 나와 정 반대의 성향을 지닌 자유로움 그 자체를 동경해서인 것 같다. 열아홉에 쓴 단 하나의 소설로 일약 스타작가가 된 그녀는 어린나이에 모든 고독과 영광을 경험해서인지 죽을 때까지 마약과 도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다.
담배 한 개비 피워보지 못하는 나와는 정반대라야 정반대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클로델이 동경이라면 사강은 더 동경이고, 영부인의 자리를 버리고 자신의 꿈과 행복을 찾아 날아간 세실리아는 더더 동경이다. 손아귀 권력과 타인의 동경을 위해 불행마저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과감히 내려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평생 알 수도 없겠지. 나는 영부인이 아닐 테니까. 에잇.
(프랑수아즈 사강 作)
하지만 더 대박은 세실리아의 자리에 이탈리아 최고의 패션 모델이자 가수인 카를라 브루니가 왔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지금도 뉴스에서 간혹 사르코지 대통령 옆 또는 한걸음 뒤에 조신하고 참신한 모습으로 함께하는 걸 볼 수 있는데, 나는 이 여자가 평생 사회생활을 안 해도 먹고 살 만큼의 경제력을 갖춘 부모 아래 유명세를 노린 테러를 피해 프랑스에서 명문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어서 잠시 팽하다 말았다. 윌리엄 왕자의 케이트 미들턴처럼 신데렐라는 아니었구나. 언젠가 조지 부시는 사르코지 부부와의 만찬 자리에서 브루니를 본 순간 사르코지가 왜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는데,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 시작은 누구나 그렇다지요. 사르코지 대통령도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데 그들의 마지막은 과연 처음보다 아름다울까요? 저의 밤이 당신의 낮보다 아름다운 것처럼.
또한 이자벨 아자니. 난 줄리엣 비노쉬를 더 좋아하기에 가볍게 패스하려 했지만 워낙 대단한 이 여자의 필모그래피가 한 줄로라도 그녀를 저장하고 싶게 하는 걸 무슨 수로 막으리. 워낙 유명한 영화들이니 존재만으로도 장악의 기운이 뻗치는 듯. 개인적으로 [여왕 마고]는 거의 10년을 벼르던 거라 다음 기회에. 응? [카미유 클로델]은 정말 좋았어. 그래, 좋았지. 자자, 다들 영화 보세요.
특히 빅토르 위고의 숨겨진 둘째 딸 아델의 일대기를 다룬 [아델 H 이야기]는 줄거리만으로도 사로잡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이쯤에서 너무 잘난 부모를 둔 자식은 많은 걸 누리는 것과는 반대로 본인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할 수도 있는 거구나 싶어진다. 아버지의 명성을 넘기 위해 홀로 싸워야 했을 아델이 오늘날 부모의 영광 아래 덕 보려는 자식들이나 부모 등골 빼먹는 자식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 같아서 씁쓸해진다.
여배우가 몇 나오고 워낙 유명하긴 하지만 프랑스 영화를 썩 즐기지는 않는 관계로 여기까지. 차라리 목숨 걸고 투쟁하다 죽어간 잔다르크 페이지가 난 훨씬 맘에 든다. 아름답자고 만들어져 카메라 앞에서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배우들을 혁명가와 동등하게 취급할 수는 없는 법. 그 외에도 보부아르는 빼놓을 수 없는 작가. 무엇보다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와 따로 평가받기를 바라지만 여자로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동맹자적인 관계와 사랑을 빼먹을 수 없다. 사랑하면 소유하고 싶고 소유하고 나면 갖고 싶어지고 가졌다 싶으면 달라지는 게 사람 마음인데, 이들은 남과 여, 음과 양을 넘어 인간으로서 존재로서 진정 이해받고 이해했으니 죽어서도 부러울 게 없을 듯. 커플이라는 건 한 사람만 변해도 깨지기 마련인데. 이 커플과는 너무 대조적이라 부럽다, 부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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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제자를 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로댕은 그녀의 개성과 뛰어난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제자를 받아들인다. 카미유는 그와 함께 작업을 하면서 그의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존경심과 더불어 사랑하게 된다. 부모의 사랑에 목말라하던 카미유는 스물네 살이나 차이가 나는 로댕에게서 아버지 같은 강력한 존재감을 발견한 것이다. 이미 중년에 접어든 로댕에게는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며 그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로즈 뵈레라는 연인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랑에 눈이 먼 두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후 10년 동안 열렬한 사랑을 하는데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적 동지이기도 했다. 카미유는 그의 제자였지만 협력자였고 동시에 그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뮤즈였다. 이때 그녀를 모델로 한 많은 작품과 서로에게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탄생한다. (pp.3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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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누군가에게 뮤즈가 되고 싶다. 이제보니 로댕은 주몽 다음으로 여자 등쳐먹어 성공한 남자 되시겠다. 물론 자신의 성공이 절반 이상이었다. 하지만 절반의 성공은 누군가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지 못한다. 그 절반의 성공은 오로지 카미유의 희생과 눈물과 외로움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정신병원 감금 30년.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어쨌거나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내던지겠다고 약속하는 남자의 마음은 거짓이라는 걸. 물론 로댕은 카미유에게 그런 말을 해준 적도 없다. 그에게 카미유는 특별하긴 했어도 그저 그의 곁에 있는 많은 여자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여자들은 남자를 믿지 말아야 한다. 믿었으면 책임도 자기가 져야 한다. 카미유가 고독과 광기에 몸부림 치다 가족들 손에 이끌려 정신병원에 감금돼 생을 마감한 것처럼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사람만 남자에게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억해야 한다. 남자는 자기가 가진 그 무엇과도 여자를 바꾸지 않는다. 그의 곁에 남는 사람이 내가 되면 좋겠지만 대부분이 그 반대인 것 같아 슬프다.
이렇게 쓰는 지금 나는 또 하나 알겠다. 남자에게 예술은 여자보다 강하다는 걸. 아니, 예술가에게 예술은 여자보다 강하다고 해야 말이 맞나.
이건 현재 첫 번째 챕터 [프라하] 편만 읽었다. 유럽여행 당시 나는 프라하에 대한 다분한 갈망이 있었고 비엔나에서 프라하까지 버스로 다섯 시간이 채 안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도 있었지만 체코는 유로화를 쓰지 않는 국가라 과감히 패스했다. 동유럽권은 솔직히 두렵고 겁도 났다. 왠지는 모르겠다. 프라하는 슬펐다. 먼 훗날 그곳에 가면 카를교에 서야 할 텐데 뛰어들어 죽고 싶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어 차라리 안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할슈타트와 부다페스트, 크로아티아는 아쉬웠지만. 그런데 바로 첫 챕터에서 프라하를 온통 훑어준다. 앗싸, 프라하 갈 필요 없네.
난 그냥 프라하 성을 상상하다 시간이 되면 카프카와 흐라발을 읽어주기로 한다. 그리고 다음 장은 크로아티아인데 기대된다. 이상하게 동유럽은 슬프다. 역사를 많이 알지도 못하고 직접 겪은 것도 아닌데 그나마도 온전히 마음으로 전해지니 이상한 일이다. 기운이 다르다. 프라하. 부다페스트. 어딘지 모르게 고독의 향기가 묻어있는 지명의 도시들 아닌가. [굴라쉬 브런치]는 워낙 유명했어서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에세이지만 동유럽에 관한 일기라는 점에서 이곳저곳 섞인 발랄한 여행일기보다는 애틋하다.
(흐라발 作)
(카프카 作)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나처럼 쿤데라가 최고.
(쿤데라 作)
예술은 넓고 읽을 책은 많고 볼 영화도 많다. 그보다 더 많은 게 할 일이고 그보다 더 하고 싶은 게 글쓰는 일이고 그보다 더더 하고 싶은 게 뭘까. 우선 책을 쌓았다. 높을 수록 좋았다. 배가 고팠다. 읽어 치운다. 내 안에 쌓이는 건 분명 양식인데 그보다 먼저 위안을 얻는다. 정체모를 것들을 자꾸 배워간다.
책을 읽으면 배가 든든해지진 않지만 세상이 자꾸 내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래서 좋다. 특히 존재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쓴 글들이 좋다. 그들은 내가 겪는 감정들을 다 겪었을 것만 같다. 그러니까 위로다. 책을 몇 박스 사고나면 해소되는 지랄맞은 물욕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치우다 보면 잊을 수 있을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장바구니를 한가득 채워둔 걸 보면.
허락되지 않는 시대에 허락되지 않은 것들을 꿈꿨던 프랑스 여자들에게는 있고 우리에게 그리고 나에게 없는 것. 자의식. 너무 강해도 본인을 망가뜨리고 약해도 본인을 망가뜨리는 무서운 것. 실체없는 그것을 향해 똑바로 서서 배워야 할 것이다. 어째서 프랑스 여자라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라고 말하려면. 말하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 우리나라 여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너무 모른다. 일도 사랑도 투쟁도 가정도 모두 같은 농도로 필요한데 그걸 체득하고 지킬 줄 모른다. 그걸 찾아가는 법을 동유럽으로 떠난 한국 여자에게서 배웠다. 멋진 번역가를 꿈꾸는 그녀에게서 엿봤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것이다. 내게도, 당신에게도. 그리고 오늘은 또 지나가고 있다. 바싹한 토스트에 싱싱한 방울 토마토와 시원한 우유를 곁들여 먹는 것 말고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또 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