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독도 독서
우치다 타츠루의 구조주의 강의서를 읽었다. 읽기 시작할 때부터 찜찜한 부분이 있었다. 구조주의 이론과는 거리가 있는 부분이고, 이 책의 주요 부분도 아니지만.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까뮈의 정직함에 대한 부분이다.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났을 때 서로 다투는 당사자 가운데 어느 한쪽에 ‘절대적 정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고 사르트르는 그 ‘상식’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프랑스와 알제리 어느 쪽이 더 정당한지 판정을 내리기 힘들다. 양쪽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고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라고 정직하게 말한 프랑스 지식인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알베르 카뮈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이 일로 카뮈는 당시 거의 고립무원이 되었조.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갈라파고스, 2010), p.26.
우치다 타츠루의 책은 구조주의 맛보기 책이다. 이 책이 쉽게 이해된다고 열광하는 사람들은 어려운 구조주의를 이미 접해 본 사람이 아닐까. 무언가를 쉽다고 느끼려면 어려운 걸 접해 봐야 한다. 철학자 한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여러 철학자의 이론을 한 권에, 그것도 쉽게 적으려면 아무래도 핵심만 적게 된다. 그런데 이 맛보기용 철학서에서 철학 내용만 전달해도 모자랄 텐데 자꾸 사르트르를 데리고 온다. 사르트르만 데리고 오면 되는데 까뮈도 데려온다. 까뮈와 구조주의가 무슨 상관이지?
어쨌든 위 구절에 마음이 걸렸다. 아마도 내가 한국인이고 저자가 일본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해일 것이다. 프랑스가 일본으로, 알제리가 조선으로 보이는 것은. 까뮈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어서 카뮈가 정직하게 양비론을 펼쳤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알제리인이 나오는 까뮈 책이다. 『이방인』. 프랑스인 뫼르소가 알제리인을 죽인다. 감옥에 갇힌다. 재판 중에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이 부각된다. 알제리인을 죽였다는 데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뫼르소 역시 엄마 생각도 하고, 애인 생각도 하지만 죽은 알제리인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름을 살짝 바꾸면 일본인이 조선에서 조선인을 죽였는데 조선인 죽인 것보다 자기 엄마 장례 때 슬퍼하지 않은 걸로 심판 받는 거다. 소설은, 삶은 훨씬 더 복잡하겠지만 여기에선 프랑스와 알제리만 본다. 까뮈가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고 정직하게 말했을까.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 말을 왜 정직하다고 받아들여야 할까. 구조주의 이야기도 시작하기 전에 저자는 왜 이 이야기를 꺼낼까.
우리는 모두 고유한 역사적 상황에 휘말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일본인이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로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사람들로부터 전쟁의 책임에 대해 추궁당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태어난 이 나라가 반세기 전에 저지른 행위에 나는 내 의사와 관계없이 결부되어 있으며, 그에 대해 사죄를 하든 무시를 하든 입장을 분명히 하라는 압박을 받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관계가 없어요. 나는 중립입니다’라고 우는 소리를 해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상황이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참여’라는 사태입니다. -같은 책, p.155.
그 참여라는 사태를 부르짖은 사람이 사르트르고, 사르트르는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분쇄되었다고 한다. 구조주의가 실존주의에 승리했다고 한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니까 나는 다 믿어야 할까. 사르트르와 까뮈는 같은 실존주의자가 아니었나. 왜 자꾸 사르트르와 까뮈의 논쟁을 이야기에 끼어 넣지? 이 간단한 책에서 두 번씩이나 언급될 만큼 구조주의와 긴밀한가? 이 내용은 몇 페이지 되지 않지만 여러 철학자를 소개해야 한다는 점에서 몇 페이지는 적지 않은 분량이다. 그리고 레비스트로스가 사르트르와의 논쟁에서 이겼다고 레비스트로스의 말이 역사를 이해하는 옳은 방법인가? 정말 이상하다. 구조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전혀 없다.
어차피 맛보기용 책이니 이렇게 따지기도 뭐하지만 혹시 저자가 ‘일본과 일본이 식민 지배했던 나라 양쪽 중 어느 쪽이 더 정당한지 판정 내리기 힘들다.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고,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대놓고 말할 수 없어서 사르트르와 까뮈와 레비스트로스를 데리고 온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저자는 정말 교묘하게 교활한 사람이 된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이상하다. 어쩌면 식민 지배를 받았던 후손의 피해망상일 것이다. 지독한 오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