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쎈연필 > 든든한 책이 옆에 있어야 안심이 된다





아까 전엔 학보사 동기들이 내 방 좀 구경시켜 달라기에 그렇게 했다. 내가 아주 지저분하고 우중충하게ㅡ나의 구레나룻처럼ㅡ살 것으로 예상했는데, 몹시 의외라고 입을 모았다. 열아홉 살짜리 여아해는 박상륭 소설이 읽고 싶댔다. 나는 제발 그 딴 거 읽지 말라고 했다. 오정희부터 읽으라고 했다. 읽었댄다. 어려운 책이 읽고 싶댔다. 하기사, 나도 그랬으니까(^-^;;). 나도 괜히 박상륭이나 이인성 같은 인간들 책 뒤적거릴 때가 있었지. 서정인의 『강』을 빌려줬다. 스물두 살짜리 여아해는 『핏기 없는 독백』과 쿤데라의 『느림』과 민경현의 첫소설집을 빌려갔다. 아해는, 민경현의 첫소설집 첫문장, "이 놈의 비가 지랄이다."를 읽더니 마음에 든다며 괴성을 질렀다. 나보다 한 살 많은 누나는 『천 개의 고원』을 보더니 다 읽었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아니요, 라고. 실은 리좀과 늑대에 대한 고원만 읽었다. (지난 번 자질구레에서 언급한) 형이 그 책을 읽고 늑대인간에 대한 소설을 썼다기에 형의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산 것일 뿐이다(뿐아니라, 천의 고원을 읽고 소설을 네 편 썼다고 했다). 나한테 천 개의 고원은 그저 그런 용도의 책일 뿐이다. 그다지 읽고 싶지도 않은. 『계몽의 변증법』과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 조금 얘기했다. 누나는 철학과 출신답게(?) 묵직한 책에만 관심을 보였다. 누나는 내공이 있는 거 같은데 영 티를 내지 않는다.
며칠 전엔 동생이 왔다가 갔다. 동생을 위해 정성스레 요리를 했지만 동생은 잠온다면서 잤다. 일어났을 때 다시 찌개를 만들어줬지만 대단히 맛없어 했다. 대구에 있을 때, 내가 밥을 먹고 있으면 할머니는 항상 물끄러미 바라보시곤 했다. 나는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내가 자꾸만 먹는 걸 바라보자 동생은 재수없어 했다. 날 닮은 녀석. 이틀을 잠만 자다가 서울에 갔다. 친구가 강남에서 특례병으로 일하고 있는데, 가서 함께 하겠단다. 군대보다 더 힘들거라고 말했지만 하겠단다. 지하철 역까지 같이 걸어가자고 했지만 택시타고 가 버렸다.
지난 편집회의 때, 나는 앙토냉 아르토를 추천했다. 매달 예술가 한 사람을 소개하는 코너에. 의외로 다들 아르토를 몰랐다.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미친 놈이라고 답했더니, 우리 학교 애들은 그런 사람들 좋아해, 라기에 나는 장황하게 떠들었다. 잔혹극이란 것을 만들어서 연극판을 갱신했고, 정신병원에 갔다 왔고, 때문에 광인과 정상인을 구분짓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해서 그게 후에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쓰게 했고, 요새 우리 나라에 유행하는 철학자가 자주 쓰는 기관없는신체라는 용어도 아르토가 썼고, 언어에 속박되는 것을 비판해서 후에 데리다가 로고스 중심주의 비판을 하게 됐고 어쩌구…, 결정적으로 잘 생겼다, 라고 마무리했다. 그랬더니 만장일치로 아르토가 뽑혔다. 나보고 기사를 쓰랬다. 나야 환영하는 바. 헌데 정작 아르토의 책을 대구에 두고 온 것이다.
시실습 교수가 중간고사 대신 타르코프스키의 「향수」를 보고 시를 써서 제출하란다. 부랴부랴 봤다. 보다가 잠시 졸았다. 재미는 있는데 피로해서(^-^;). 나는 집에 비디오가 없어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한 편도 못 봤었다. 요즘 들어 도서관 시청각 자료실이란 곳을 애용한다(그제는 니진스키의 무용을 봤다). 그래도 그의 책은 다 샀었다. 향수를 다 보고 집에 오자 마자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를 새삼스레 읽다가, 『봉인된 시간』이 너무 읽고 싶어졌다. 헌데 그건 대구에 두고 왔다. 이런.
그래서 이모한테 전화를 했다. 돈끼호떼, 일리아스, 모비 딕, 이데아총서 시리즈 등을 택배로 보내 달라고 했다. 아, 토마스 만의 책도 보내 달랠 걸. 으후-. 싸그리 다 옮겨 올 걸 그랬다.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전화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