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optrash > 폴 오스터와 열린책들.

사실 나는 폴 오스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그의 책 두 어권을 읽어보았을 뿐이니까, 그런 상태에서 그에 대해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어딘지 불공평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책에 (그러니까 그 내용에, 그의 글쓰기에) 대한 어떤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죽어버린 문학계에 불고있는 폴 오스터 열풍을 (이정도를 열풍이라고까지 표현해야 하는 현실이 조금쯤 참담하기도 하지만, 객관적이며 상대적인 사실로써. 어찌되었건 개미집에 부는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이 열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생각하면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뭐라 말을 한다는 것은 일견 불경스럽게 보이기까지한다. 물론, 전적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 본다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로써. 이것은 그의 글쓰기에 대한 나의 취향이기도 하지만, 폴 오스터 열풍에 대한 나의 취향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일종의 하이프에 대한 일종의 스노브로써. - 결국엔 같은 이유다. 누군가는 같은 이유로 그를 열렬히 신봉하지만, 나는 같은 이유로 그를 '별로'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이제는 더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사실 하루키야, 그런 열풍이 불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좋아라 했고, 그렇기에 '첫사랑이 어느덧 인기스타가 되어 TV에 출연하는 모습을 보는 (결코 자랑할만하지 않은) 기분'이라도 들지만, 폴 오스터의 경우엔 그저, '글쎄 난 별로...' 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미국문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니가 다른 문학은 좀 아니?"라고 물어본다면 할 말 없지만, '아무것도 아는게 없긴 하지만 그나마 미국문학 보다는 다른 문학을 조금 더 읽어온 입장'에서 그렇다. 헤밍웨이건 포크너건 업다이크건 마찬가지다. 물론 두 레이먼드는 조금 다르지만. 그렇다고는해도 솔직히 다른 작가들은 한 두권 읽은걸 그 작가들에 있어선 두 세권 읽은 것 뿐이다. 그것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장광성을 늘어 놓으면서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폴 오스터의 책'에 대한 불만이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열린책들의 출판 정책'에 관한 것도 되겠지만 굳이 폴 오스터의 책, 이라고 한정을 한 이유는 내가 폴 오스터를 좋아하지 않게 된 이유에는 열린책들의 출판 정책도 일정부분 포함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문학 동네에서 펴낸 '굶기의 예술'을 통해서이다. 역시나 가난한 국문과생이고 보니, 학교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다 문득 바라본 저러한 제목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운명의 장난으로까지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공감, 공감 끄덕끄덕 하면서 결국엔 끄덕 끄덕 졸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책을 읽기에 나는 너무 배가 고팠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것이 그다지 그의 책에 대한 실례는 아니었다고 믿고 있다. 폴 오스터 본인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더라도 고개를 끄덕였을 테니까. 아마 그는 이렇게 말했겠지. "oh, so pity, you were too hungry. i understand"
어쨌든 내가 그에 대해 알아낸 것은 그가 스모크의 원작자라는 사실과 (잘은 모르겠지만) 읽을 만 해보인다는 것. 그리고 얼마후 96학번 선배의 추천으로 문팰리스란 이름으로 나왔던 책을 읽게 되었다. 뭐랄까, 확실히 내 취향엔 좀 아니었다. 옆에 있던 94학번 선배가 추천해준 카뮈 (이전까지 나는 그의 이방인 한권을 읽었을 뿐이다.) 의 전작은 그야말로 나의 바이블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내가 보기엔) 어딘지 조금 구질구질 하기도 하고 어딘지 촌스런 냄새도 났다. 확실히 하루키에 비해선 그랬다. 그리고 당시 내가 비교할 만한 작가는 하루키밖에 없었다. 무식이 죄는 아니니까. 뭐 그래도 재미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소위 말해 쿨~한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읽는 재미는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내가 그의 이름을 잊게 되었을 때 즈음, 이미 하루키와도 결별하고 나만의 쿨에이드 리얼리티를 찾아 헤매이고 있던 언젠가, 그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폴 오스터가 어쩌구, 어쩌구... 솔직히 처음엔 잘 몰랐다. 그저 그게 누구야? 생각을 했을 뿐. 기억력을 탓하자. 담배를 끊어볼까? 어쨌든, 조금쯤 흥미가 일었다. 아니 요즘 세상에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아닌 이상에야 이렇게 문학책을 갖고 떠들 일이 없을텐데, 하는. 결국 갸가 갸라는 것을 깨닫고, 내 너무 편협한 취향을 가졌나 자문해보며 그의 다른 책을 찾아 한번 읽어볼까, 하는데. 이런, 책이 꽤 많이 있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책이 다 두터운 배불뚝 양장본으로 나와있는 것이 아닌가. 가격은 또 왜이리 비싸구. 그때 즈음, 무슨 알수없는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허파에 바람이 들렸는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는 일을 기피하게 된 나는, 그러니까 곧 죽어도 사서 보자로 자본주의의 발등에 키스하며 불쌍한 선배들 (그러니까 출판사하겠다는 사람하고는 죽어도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 분유값에나 조금 도움이 되어볼까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살 맛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이었다. 솔직히 나는 양장본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오에의 전집 양장본이 그러하다. 혹은 포우의 무식하도록 두꺼운 전집(단 한권짜리 전집)도 마찬가지. 기형도의 전집도 괜찮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로 폴 오스터의 책을 다신 읽지 않게되었다는, 어이없고도 썰렁한 이야기.
물론 이것은 여전히 조금쯤은 불공평하다. 열린책들에서 그런 식으로 내는게 분명 폴 오스터만은 아닌 것이다. 쥐스킨트도 있고(사실 나는 향수가 양장본으로 재출간된 이후 쥐스킨트의 책을 읽지 않는다) 에코도 있으며, 베르베르도 있고 그 밖에 등등등이 있지만. 사실 폴 오스터에 대해 뭔가 안좋은 말을 하고 싶은 근거없는 스노브가 달달달 목구멍을, 아니 손가락을 간지럽힌 탓이다.
그런데 열린책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책이야 이쁘지만, 어울리지 않는다. 오스터에 책에 그런게 어울리는가? 루이스 쎄뿔베다의 책에는? 쥐스킨트의 책에도? 무엇보다 값이 비싸다. 하지만 똑같은 제본에 단지 값을 싸게 팔았다고 해도, 석연찮은 느낌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동시대의 소설은 동시대의 소설로써 읽혀야 한다. 오에의 소설이라면 괜찮다. 사실 그는 동시대, 라고 할만한 지점까지도 끊임없이 좋은 소설을 내주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우리의 앞 세대이다. 그리고 그는 위대하다. 굳이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책을 읽어본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런 위대한 작품들에는 솔직히 양장본으로 만들어 폼도 나고, 읽을 때 그 특유의 불편함으로 마치 생수에 나뭇잎을 띄어놓듯 한번쯤 쉬어가며, 어떤 경외를 품고 읽을 수 있도록 하는게 나쁜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100% 좋은 일만도 아니다.) 하지만 오스터는?
그가 위대하고 하지 않고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그는 동시대인으로써, 동시대인인 우리에게는 동시대의 작품으로 읽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에 양장본은 너무나, 조금쯤은 부담스럽다. 그건 마치, 스포츠 스타에게 세련된 정장을 입히고 TV쇼에 나오게 하는 것만큼이나 어색하다.
물론 이것은 조금쯤 과잉 반응일런지도 모른다. 사실 출판사 입장에서도, 우리 선배님들도 먹고 살아야 할테니까. 알고 있다. 나도 배고프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꽤 많은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사실, 이건 나쁜 일은 아니지 않는가. 누군가는 좋아하겠지. 아마 많은 사람이. 다만 나는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그냥, 가벼운 그 무게만큼이나 가볍게 페이퍼백으로 된 책을, 부담없이 사서 부담없이 가방에 넣고 다니며 조금쯤 표지가 닳아 헌 책의 느낌이 될 때까지 부담없이 읽으며, 때론 '야 역시'라 감탄하고 때론 '에이 이건 좀 오버다' 혼자 생각하며 부담없이 즐길 수는 없는 일인가. 그러니까 내말은, '본전 생각나게' 하는 그 화려하고도 불필요한 겉치레가, 진정한 책 읽기를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쓰다보니 '진정한 책읽기' 같은 어깨에 힘준 표현이 본의 아니게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일상 생활의 병리학?)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냥 부담없이 어떠한 예술에 대한 압박없이, 상업성에 대한 지나친 흔들림없이 수수한 커피를 마시듯, 그렇게 마실 수는 없냐는 말이다. 굳이 원두를 갈아서 만든 진정한 커피향을 음미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스타벅스처럼 화려한 쇼케이스에 들어가서 마셔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저 집에서 혹은 조용한 동네 카페에서,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다지 나쁘지도 않은 그것을, '동네 주민으로써' 수수하게 마실 수는 없냐 이 말이다.
너무 말이 길었다. 이런건 절대 좋은 글쓰기가 아니다. 사실, '불평'이 주제인 글은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제 그만. 여기서 끝. 밥이나 먹어야지 젠장할.
사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또다시 야간 근무가 시작되긴 시작되었는데 무엇을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하나 나를 기다리며 다소곳이 펼쳐져 있는 저 책은, 웬지 읽기 싫은 생각만이 철철 드는데 저 책을 펼쳐둔채 다른 책을 피는 것은 어쩐지 너무나 비윤리적인 일로까지 생각되고 그렇다고 읽기는 싫은데 인터넷 하며 시간을 보내자니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보이고 그런데 인터넷을 하다가 버릇처럼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니다 보니 폴 오스터가 보이고, 이렇게 해서. 자, 오늘 하루도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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