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20일 토요일




    나는 새 책이 오면 커버를 벗기는 버릇이 있다. 그 탓에 서재에는 두 권의 하얀 책이 꽂혀 있다. 시간의 먼지와 손때 틈에서 더욱 하얗게 보이는 책이다. 미술 공부를 할 때, 나는 이 백지 같은 두 책에게 많은 빚을 졌다. 한 권은 Belleza, 다른 한 권은 Bruttezza. 그렇다. 미(美)와 추(醜)에 관한 책이었기에, ‘미술’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 사이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보고로 자주 회자된 바가 있다. 저자의 이름은 움베르토 에코. 올해 여든넷인 그가, 나는 거의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어왔다. 이 어리석은 믿음은 그에 대한 큰 동경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났다. 2016년 2월 19일 밤이었다. 이제는 내 곁에 꽂아두는 그 책이 죽은 자가 ‘썼던’ 책이 되어버렸다.


    아름다움은 더러움이요, 더러움은 아름다움이니.

    Fair is foul, and foul is fair.


    움베르토가 『추의 역사(Storia della Bruttezza)』의 서문에서 언급한 맥베스의 제 1막 구절이다. 2004년과 2007년에 걸쳐 움베르토는 추와 미의 집약을 세상에 내놓았다. 미가 먼저였고, 3년 뒤 추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나라 번역본의 편집에는 불만이 많았지만, 그 책은 내게 돌덩이 같은 충격을 줬고, 나는 고서 가득한 도서관에서 밤을 새는 학자처럼 몇 달이고 그것만 들여다봤었다. 『미의 역사』는 미학 관련 양서라면 어느 책에서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지만 추는, 그 책을 번역한 역자도 술회했듯 여태 본격적인 주제로 대중들 앞에 소개된 적이 없는 테마였다. 한동안 미술을 공부한 독자의 입장에서 나 역시 감히 돌아보건대, 그와 같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애덤 모턴의『잔혹함에 대하여(원제 : Thinking in Action)』에는 “놀랍게도 철학사에서 심각한 잘못에 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다. 니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덕철학자들은 주로 동기가 손쉽게 파악되는 잘못된 행위에 주목했다.”(16쪽, 변진경 옮김)라는 문장이 있다. 추와 관련된 형용사들은 주로 “거의 모두 격렬한 거부감이나 공포, 두려움까지는 아닐지라도, 어떤 혐오감의 반응을 포함하고”(움베르토 에코, 오숙은 옮김,『추의 역사』, 16쪽) 있으며, 그 혐오가 애덤 모턴이 자신의 책에서 논하는 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서양의 미학에서, 즉 고전미학이든 근대미학이든 상관없이 전체적인 아름다움과 모방, 더 나아가 창조(천재와 관련)의 이론을 구축한 역사에서 추는 거의 예외 없는 논외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움베르토가 『추의 역사』의 절반을 도배해놓은 도판과 인용구들을 보면 추는 분명 서양의 매력적인 주제였다. 그것도 수 천 년을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명백하다. 우리는 추와 미의 기준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으며, 그걸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무수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통계를 내 두 기준의 공통점들을 뽑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출해낸 공통점을 절대화시키는 건 오류다. 우리는 역사의 어느 시점에 어느 특정 집단의 민족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숭배했다는 사실을 안다. 또는  그와 반대로 우리가 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감동적인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종교의 경우 그런 사례가 즐비하다. 마르크스는 150여 년도 더 전에 “돈으로 여인을 살 수 있다.”는 문장을 저서에 남겼다. 지금은 유럽적인 미에서 탈출하려는 일부 저자들의 ‘미학 설립’ 운동이 유행이다. 아방가르드가 권위를 부수기 위해 사용한 온갖 ‘추한’ 양식들을 지금 미술 애호가들은 아름답다며 좋아한다. (적어도 추가 전면적으로 승리한 적은 그때가 최초였다.) 무엇이 미이고 무엇이 추인지, 우리는 별로 고민하지 않으며, 특히 다른 한쪽에 대해 생각하는 걸 가치가 덜한 것이라 여기곤 한다. 대단히 복잡한 문제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는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다. 예술을 아름다운 것을 생산해내는 창조적 행위로만 본다면, 콧등에 가려 그 너머로 결코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발견하지도 못한 채 ‘아, 아름다워라.’라는 말만 되풀이하게 된다.


    움베르토는 『추의 역사』 마지막을 이탈로 칼비노의 글로 맺는다. 반가운 이탈로. 인용된 단편은 「참관인(La giornata d'uno scrutatore)」이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우리나라에는 번역 출간된 바가 없다.) 이탈로의 글을 읽어보면 섣불리 추에 대한 선입견을 들이댈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느껴볼 수 있다. (오히려 善을 본다.) 그 전에, 즉 이탈로를 불러오기 전에 에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양한 세기의 예술들이 왜 집요하게 추를 묘사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술의 목소리는 주변적일지 몰라도, 일부 형이상학자들의 낙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는 냉엄하고 슬프게도 악한 어떤 것이 있음을,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 상기시키려고 했던 것이다.”(움베르토의 책, 436쪽) 그리하여 추는 인간적 비극으로, 우리가 혐오해야 마땅한 것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비극으로 격상된다. ‘격상’이란 표현이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나는 『추의 역사』를 서재에서 꺼내 다시 한 장 한 장 넘겨봤다. 공부하는 이는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그런 적이 있었는데, 지적 만족을 위안 삼아 이 책을 만지작거렸던 때도 추억해봤다. 하지만 위대한 미술 이론가, 비평가, 그리고 작가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건, 무수한 지식과 작품들 사이를 올곧게 관통하는 하나의 가치다. 언제나 그랬다. ‘보는 것’의 힘. 싫다며 밀쳐낸 사물과 대상에게 다시 눈을 주고 알아보려고 하는, 관심의 힘. 누군가 그랬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그렇다고 내가 ‘추한 것’들을 사랑하게 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할까! (그러니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마음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추한 것’들을 밀쳐내지 않는다. 미술은 내게 실로 놀라운 세계를 알려줬다. 특히 시각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많은 걸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미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깨달음은 앞으로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더 깊어질 것이다. 여전히 미술의 웅숭깊은 우물, 수평선 끝없는 바다에서 이곳저곳 여정을 이어가는 나에게 미술은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 생각해본다. 그동안 내게 도움을 준 수많은 대가들의 통찰력과 뛰어난 인내, 호기심을. 움베르토 에코는 단연 그 중 최고였다고 언제나 회고할 수 있는 학자다. 『장미의 이름』을 제외하면 그의 다른 글들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앞으로 읽어본다 해도, 나는 그의 이름을 이 손때 가득한 책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안식에 들었다. 그가 내게 알려준 ‘큰 눈’은 지금껏 얻은 여러 눈 중 하나이며,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그 무엇보다도 그 눈을 뜨게 하는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일이리라. 곱씹어야 할 것들은 참으로 많다.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고 주지시키는 인간 정신의 근원에게, 그 대가들에게, 나는 충실한 한 명의 독자로 살며 하루하루 보답할 수밖에 없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풀꽃놀이 2016-02-20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퍼 리에 이어 움베르토 에코까지...뒤늦게 소식을 전해듣고 신산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네요. 에코와 그리 깊이 사귄 인연이 있었다니 탕기님은 더욱 남다른 마음이지 않을까 짐작이 됩니다. 대가들의 죽음 앞에서 저는 조금쯤은 고아가 되어버린 기분이 드네요. 그들이 남긴 무언가를 통해 저마다의 몫으로 남겨진 숙제가 있다는,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그 엄중한 사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는 무서움 때문일런지...
이런 제 기분과는 다르게 심상한 사람들과 섞여있다가 여기 들어와 탕기님 글을 보니 반갑습니다. 그래서 댓글이 좀 길어졌습니다.

탕기 2016-02-20 22:56   좋아요 0 | URL
오후에 기분좋게 운동하고 와서도 한동안 마음 어딘가가 떠내려간 기분이었습니다. 풀꽃님 말씀마따나 심상한 이들 사이에서 저 역시 무거운 심정을 끌어올리지 못했는데, 그래도 이런 변변치 못한 글로나마 기억을 되살리고 다시 책을 펼쳐보니 위안은 되더군요. 저와 마음이 같으시다니 풀꽃님 댓글이 반갑습니다.

비로그인 2016-02-20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움베르토 에코와 같은 대가들과 그렇게 깊은 교감을 나누시는 탕기님이 부럽습니다. 엄청난 사유를 끌어 올리지 않고서는 대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없겠지요. 대가들과는 친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안식을 애도하며, 탕기님도 그 사색이 좋은 결실을 맺길 바랍니다.

탕기 2016-02-20 22:52   좋아요 0 | URL
시인이시니 일개 독자인 저보다 대가들의 곁에 더 가까이 계실 텐데요. 저는 그저 대가들을 읽으면서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겨간다는 상상을 하는 젊은이일 분입니다. 마음의 상중을 이렇게 달래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