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27



  '이제 글을 좀 써볼까?'


  나를 부채질 하는 수많은 '나'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는 이렇게 넌지시 물어본다. 가을이다. 지난 주까지만 하더라도, 특히 추석 연휴의 대낮에는 여름처럼 더웠는데 길을 걷다보니 뭔가 바스락거린다. 내려다보지 않아도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모두가 알 것이다. 이제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나무가 제 옷을 벗는 계절이 왔다. 그늘 밑에 있으면 발밑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바람이 이제는 냉랭하다. 손발이 유난히 찬 나 같은 사람은 벌써부터 겨울 걱정을 할 것이다. 겨울. 나는 겨울이 좋다만은 모든 이를 시인으로 만들어준다는 숙고의 이 가을은 또 어떻게 견뎌야 하는 것인지, 초입에서부터 그저 막막하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하는데, 나는 믿지 않는다. 가을은 시의 계절이다. 저물어가는 것들 앞에서는 긴 산문을 읽기보다는 우리의 감정을 거칠게 뭉텅뭉텅 썰어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야만의 시를 처절하게 낭송하거나, 정성을 다해 송편을 빚는 마음으로 조물조물 만들어낸 먹기 좋은 시를 둥글둥글 암송하는 것이 가을의 체질에 맞다. 괜스레 얇디얇은 시집을 바라보게 된다. 고등학생 때 썼던 나의 옛 시를 대관절 꺼내 읽으면서 부끄러워도 해본다. 하지만 마음에 시의 기름을 발라놓았으니, 우리는 어떤 말을 시어로 바꿔놓아도 용서받는다. 아무도 읽지 않을 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시, 나중에 읽으면 소위 '손발이 오그라들' 시도 좋다. 내뱉지 않으면 마음 속에서 폭발할 것 같아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기도 하는 이 참에 우리가 가진 것을 이렇게나 저렇게나 막 던져놓는 게 뭔 죄가 될까. 예술은 무죄이니, 가을을 맞이하여 많이 읽고, 많이 쓰고, 새벽에 울기도 하고, 아침에 내일을 꿈꾸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도 나무처럼 잎을 맺었다가, 다 털어내는 것이다. 겨울은 그 감정들이 우리의 마음에 매달려 있기에는 너무 추운 날이지 않은가.


  라파엘 앙토방의 『오후 3시』라는 책이 있다. 다 읽진 않았지만 새삼 가을의 문고리를 손에 잡으니 '오후 3시'라는 단어가 그리도 가을에 어울릴 수가 없다. 아직 한 해가 끝나려면 세 달이 남았는데, 가을은 괜스레 마음을 뛰게 하여 조바심을 내게 만들기도 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다가도 내면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처럼 쉬운 일도 없을 것인데) 그 안은 차분하고 선선한 가을이 아니라 강풍이 몰아닥치고 파도가 거세게 이는 바닷가 즈음이 된다. 생각해보면 이런 불일치는 가을이 만든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한 해의 3분기가 시작됐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다.


  오후 3시도 그런 느낌이다. 야간 자율학습이나 야근, 혹은 저녁 늦게까지 해야 하는 대학 조별활동 같은 것들, 우릴 피곤하게 만드는 그런 것들을 제외한다면 오후 3시란 하루의 일과가 다 끝나가는 시간이다. 곧 저녁 식사와 함께 가족과의, 혹은 자신만의 시간이 찾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갑자기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 드는 시간이다. 그러면서도 차츰 떨어지기 시작하는 해가 노을 빛으로 변하며 하늘을 아련하게 물들일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하게 된다. 오후 3시가 되면 하고 싶은 일들이 불쑥 생각난다. 가을도 그렇다. 선선한 날씨에 몸 상할 일도 없고, 이 산 저 산의 풍경도 붉게 물들었으니 여기저기 떠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후 3시의 일과가 그렇듯, 우리를 붙잡고 있는 일상은 가을을 그저 주변에서 힐끗힐끗 쳐다봐야 하는 세월의 광고판 정도로 추락시킨다. 그래서 바쁜 이들에게 가을의 풍경은 온 데 간 데 없다. 그들에게는 한 해의 '3분기'라는 단어가 주는 후련함과 압박감이 섞인 이상한 감정이 찾아온다. 욕을 한다고 하더라도 주절거린다기보다는 뭉텅이로 툭툭 내뱉고 싶은 심정이리라. 가을의 시인이 언어를 마름질하듯이.


  아직 하늘은 높고 구름은 많다. 곧 구름이 없어 마치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우주의 끝자락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청아한 하늘이 가을의 천장을 장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을의 진짜배기 감정도 찾아오고, 더 이상 이런 글과 같은 긴 넋두리도 필요 없는 시기가 장막을 거둘 것이다. 우리는 별로 할 말이 없는 가을의 배우가 된다. 관객들도 별로 들을 말이 없다. 이따금 나오는 거친 말들, 아니면 작게 줄여서 밀도를 높인 초신성과 같은 말들이 오고 갈 뿐, 그 나머지는 마치 우리가 가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위해 남겨놓기라도 한 것 같은 공허한 침묵만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1) 좋아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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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후 세 시에도 마치 새벽 세 시인 양
    from Value Investing 2013-09-27 21:50 
    나는 얼마간 녹이 슬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방 안에 머무를 수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저녁의 그림자가 햇빛과 이미 섞이기 시작해 하루를 벌충하기에는 너무 늦은 오후 네 시, 그 막바지 시간에도 산책을 하러 살며시 집을 빠져나오는 데 속죄해야 할 어떤 죄라도 저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 주 혹은 몇 달, 나아가, 합하면 대략 몇 년 동안이나 자기들 스스로를 하루 종일 가게나 사무실에 가둘 수 있는 내 이웃들의 도덕적 무감각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인
 
 
oren 2013-09-2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후 3시』라는 책도 다 있군요. '오후 3시'가 주는 느낌에 대한 글이 참 인상적입니다. 저는 문득 '오후 3시'와 마주치며 스마트폰 어플 가운데 '인생시계'라는 걸 떠올렸답니다. 그걸 들여다보면 제 나이는 요즘 '오후 3시'를 막 지나가는 중이거든요.

최근에 읽은 어떤 책에서도 '오후 세 시'와 '새벽 세 시'에 대해 각주까지 달아놓은 걸 발견하고는 어디다 좀 적어둬야겠다 싶었는데, 마침 탕기님의 이 글을 빌어 먼댓글로 제 페이퍼에 남겨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탕기 2013-09-27 23:30   좋아요 0 | URL
저보다는 oren님께서 '오후 3시'라는 단어를 더 깊게 실감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직 아침의 인생을 살고 있는 제가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이 몹시 창피해지는군요.^^;

'먼댓글'이라는 기능은 사실 좀 생소합니다. oren님의 서재에 담기는 거였군요.
별로 곰삭은 반찬도 아닌데, 좋은 글이라고 해주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