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연극



 

보나파르트가 새벽 세 시의 용기를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얼마간 녹이 슬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방 안에 머무를 수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저녁의 그림자가 햇빛과 이미 섞이기 시작해 하루를 벌충하기에는 너무 늦은 오후 네 시, 그 막바지 시간에도 산책을 하러 살며시 집을 빠져나오는 데 속죄해야 할 어떤 죄라도 저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 주 혹은 몇 달, 나아가, 합하면 대략 몇 년 동안이나 자기들 스스로를 하루 종일 가게나 사무실에 가둘 수 있는 내 이웃들의 도덕적 무감각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인내력이 나를 놀라게 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지금 오후 세 시에도 마치 새벽 세 시인 양 앉아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도대체 어떤 물질로 만들어진 건지 모르겠다. 보나파르트가 새벽 세 시의 용기를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당신네들이 아침 내내 본 것처럼 스스로의 본성에 반하여 오후 이 시간에도 명랑하게 앉아 있어서, 공감이라는 강력한 유대감으로 결속되어 있는 한 주둔군을 굶겨서 기어코 밖으로 나오게 하는 사람들의 용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때쯤, 말하자면 조간신문이 오기에는 너무 늦고 석간신문이 오기에는 너무 이른 오후 네다섯 시 사이에 대로를 가로질러 큰 폭발이 일어나서 낡고 촌스러운 개념과 변덕을 사방으로 날려 거풍시키지 않는지-그리하여 악이 스스로를 정화하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새벽 세 시의 용기(three-o'clock in the morning courage): 나폴레옹이 얘기했다는 '새벽 세 시의 용기'는 랠프 왈도 에머슨이 1838년 저널에 쓴 말인데,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의 마지막 대화를 기록한 사람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역사가 에마뉘엘 드 라스 카스(Emmanuel de Las Cases) 백작의 『세인트 헬레나의 회상(
Mémorial de Sainte-Hélène)』에서 따온 것이다. "도덕적 용기에 관해 말하면 나는 새벽 두 시의 용기 같은 것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예기치 않은 경우에 필요한 혹은 가장 예상치 못했던 경우에도 판단하고 결정하는 데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즉석 용기 말이다." 소로는 이 말을 여러 번 자신의 작품에서 언급했는데 시간을 잘못 기억해 『월든』에서도 "보나파르트는 새벽 세 시의 용기는 아주 드물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두려움은 그렇게 일찍 깨지 않는 법이다. 하루를 잘 시작하지 않음으로써 본성을 저버릴 정도로 타락한 사람은 많지 않다"라고 쓰고 있다. 여하튼 '새벽 세 시의 용기'라는 말은 즉각적인 용기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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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9-28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의 제목이 좋아요...

oren 2013-09-29 23:20   좋아요 0 | URL
'새벽 세 시'엔 깨어 있을 틈이 별로 없겠지만 앞으론 '오후 세 시'엔 뭔가 하릴없이 멍청하게 있거나 혹은 의자에 죽치고 앉아 있으면 안 될 듯한 시간처럼 느껴져요.

숲노래 2013-09-28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우 님 말마따나
사무실에 스스로 갇힌 채
헤어나지 않으며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봄도
누리려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oren 2013-09-29 23:23   좋아요 0 | URL
소로의 말처럼 '굶겨서 밖으로 나오게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길 기다려봐도 헛 일일 테니,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