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받을 권리 - 팬데믹 시대, 역사학자의 병상일기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강우성 옮김 / 엘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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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이 민낯을 드러나게 만든 게 있습니다. 바로 미국 의료 시스템이었습니다. 2020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삶을 등졌습니다. 하필 저자가 입원한 시점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처음 보고되었던 시점이었고, 팬데믹에 대한 대처가 엉망인 현장을 목도합니다. 무엇보다 저자가 애초에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입원했던 이유도 상업적 의료 시스템으로 비롯된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기에, 저자는 병상일기를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티머시 스나이더는 인종말살, 나치 홀로코스트, 소비에트 공포정치 등을 주제로 20년간 20세기 참상들에 관한 글을 써온 역사학자입니다. 하지만 자유국가라 불리는 미국의 의료 시스템을 경험하고 나서 의료보장의 권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나 봅니다.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했을까요.


2019년 12월 29일 한밤중에 응급실에 가야 했던 티머니 스나이더. 12월 초 독일 출장 중 복부 통증으로 병원을 방문했지만 퇴원 조치를 받았고, 미국으로 돌아와서 맹장염 수술을 하게 됩니다. 이때 이미 맹장이 터진 상태여서 간에도 염증이 퍼져있었지만, 수술 후 다음날 퇴원 조치를 받습니다. 그리고 휴가 중 몸 상태가 안 좋아져 병원에 갔지만 역시 다음 날 또 퇴원 조치를 받습니다. 그리고 결국 심각해진 상태로 응급실에 갔지만 역시 다음 날 아침까지 아무런 조치를 받지 못한 채 보냅니다.


2주 전 맹장수술 이력을 확인조차 하지 않는 초보적인 실수는 다음날에도 이어집니다. 쓸모없는 척수 검사를 받는 중에는 수련의의 휴대전화가 울려댄 탓에 정신산만한 의사의 모습을 봅니다. 결국 그동안 무시됐던 문제를 발견하며 간 수술을 받습니다. 이마저도 수술 후 처치에 문제가 생겨 또다시 간 수술을 받습니다. 여기서 그는 분노합니다. 의사나 간호사, 자신에게 분노한 게 아니라 의사들이 쫓겨 허둥대며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시스템의 본질에 분노합니다.


이런 일을 지인들이 알았을 때 재력과 연줄로 일찍 처치 받지 않은 것에 놀라워했을 정도라니 의료보장은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합니다. 누구나 최소한의 비용으로 적절한 의료보장을 누릴 수 있는 것, 이게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는 걸 현실적으로 보여준 사례입니다.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이 낳은 영아의 사망률은 알바니아, 카자흐스탄, 중국 등 다른 70여 개국들보다 높다고 합니다. 팬데믹 초기에 대처 못한 미국은 15만 명 이상이 이유 없이 죽어갔습니다. 미국인은 비용을 댈 수 없어 치료를 회피합니다. 수천만 명이 의료보험이 없습니다. 팬데믹으로 일자리를 잃자 의료보험마저 잃게 됩니다.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 일터로 나간 탓에 감염은 확산되었습니다.


건강은 생존에 있어 너무나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의료보장에 대한 신뢰는 자유를 이루는 중요한 일부임에도 의료보장이 특혜가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보편적 권리여야 하는 의료보장에 대해 저자는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다 더 나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미국의 상업적 의료 시스템은 숫자 놀음뿐이라고 비판합니다.


유대인은 인종적 폐결핵이라 부른 히틀러와 다를 바 없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질병에 걸릴 수 있으며 평등하게 치료받을 권리가 있음을 그리고 생산성과 이익성에 대한 판단 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치료받을 권리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문 25장에서는 "모든 인간은 의식주와 의료보장, 필수적인 사회서비스 등을 포함해, 그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복지에 합당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의료보장이 인권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라며 의료보장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건강보험을 받으면서 말이죠.


한국의 의료보험은 민영 의료보험인 미국에 비해 나은 편입니다. 의료보장이 적절히 이뤄질 때 의사들은 처방전을 써주는 일 말고도 뭔가를 해줄 수 있는 여유가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걸 가능하게 하고 권장하는 시스템이라면 고통과 약 사이에 수많은 의료적 보살핌의 대안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덜 끔찍한 의료보장을 받는 것에 대한 상대적 만족감은 전체 시스템이 얼마나 엉망인지 들여다보지 못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저자가 목소리를 높이게 된 이유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후퇴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신호가 바로 공중보건의 위기라고 짚어줍니다. "우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상업적 의료 시스템하에 놓여 있다."라며 책임을 전가하기만 하는 현 의료 시스템을 비판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요양원 사망자 누락 등 실리콘밸리의 빅데이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국인들은 지역공동체에 이미 창궐한 바이러스를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지역 언론의 쇠퇴로 정치가들과 기업들 간의 부적절한 관계를 감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전국적 참사를 규명하지 못한 채 소셜미디어에서는 음모론만 퍼졌습니다. 그리고 상업적 민영의료의 권력 집중화는 의사들의 목소리를 약화시켰습니다. 개인 방호복을 일터에 가져왔다는 이유로 의사와 간호사가 해고되기도 했습니다. 병원 비축품 부족 사실이 드러났다는 이유로 말이죠.


"사실을 밝히는 사람들을 잃게 되면, 우리는 진실이라는 개념 자체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다." - 책 속에서


저자는 병원에서 분노와 함께 공감이라는 감정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병문안을 온 옛 친구들과 자원봉사자 등으로부터 받은 '다정한 공감'이 작동한 겁니다. 이 분노와 공감은 미국의 질병, 즉 육체적 병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적 병폐라는 질병을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 병상이 부족한지, 왜 수술 후 다음 날 퇴원하게 되는지, 왜 의사들을 만나기 힘든지 상업적 민영의료 시스템에서 풀어내는 <치료받을 권리>. 미국의 병폐를 드러낸 이 책을 읽으며 의료보장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 본 시간입니다. 모두를 위해 분노하기로 한 저자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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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메론 프로젝트 -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29개의 이야기
빅터 라발 외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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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애트우드, 리브카 갈첸, 빅터 라발 등 이 시대 주목받는 작가 29인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만으로 눈길을 사로잡은 책 <데카메론 프로젝트>.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봉쇄 조치 등 팬데믹 시대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의 낯선 경험이 낳은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데카메론 프로젝트>는 고전 문학 <데카메론>과 닮았습니다. 1353년 흑사병 시대에 탄생한 소설 <데카메론>은 14세기 페스트의 잔학무도함에 무력해진 유럽의 모습을 100편의 이야기로 보여줍니다.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경험을 한 시대가 낳은 이야기들을 통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 우리 시대의 데카메론이 기획됩니다. 뉴욕 타임스에 <데카메론>의 리뷰를 싣고자 했던 리브카 갈첸의 제안을 계기로 말이지요. 그렇게 작가들은 한 편 한 편 그들의 이야기를 내놓았습니다.


리브카 갈첸의 <생명을 구하는 이야기들>는 <데카메론 프로젝트>의 의도를 잘 보여줍니다. 코로나로 휴관 중인 수족관과 미술관에 펭귄이 관람하는 영상을 유튜브에서 봤었는데, 저자도 그 영상을 보며 뜻밖의 힐링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저자의 말로는 그 감정이 바로 '감정적 보호막'이라고 합니다. 현실도피성 이야기에서 역설적으로 도망쳤던 곳으로 복귀시킨 <데카메론>처럼 "어려운 시기에 소설을 읽는 것은 그 시기를 이해하는 방식이자 그 시기를 끈기 있게 버텨내는 방식"이니까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메멘토 모리 대신 "너는 살아야 할 운명임을 기억하라"라는 메멘토 베레레(Memento vivere) 메시지를 안겨주는 데카메론의 의미를 되살립니다.


소설 <블랙 톰의 발라드>로 인상 깊은 빅터 라발 작가의 글도 작가 특유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있어 좋았어요. 봉쇄 조치로 인해 떠날 사람들은 떠나고 소수의 사람들만 남은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데 초자연적 공포 분위기도 슬쩍 안겨줘 역시 빅터 라발 다운 이야기구나 싶어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떤 것도 공통된 취미를 공유하지 않지만 사귀고 있는 커플이 봉쇄 조치로 집에 머물며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늘어나자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 콜럼 토빈 작가의 <LA강 이야기>도 인상 깊었습니다. 행복한 커플에 대한 환상 대신 실제 있을법한 이야기여서 오히려 더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더라고요. 그나저나 LA강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청계천 복원사업의 노하우가 전수된 곳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작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데카메론 프로젝트>를 읽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는데, 역시 마거릿 애트우드 작가의 이야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팬데믹으로 격리 중인 지구인들을 위해 은하계간 위기 지원 프로그램이 발동해 문어처럼 생긴 외계인이 방문합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지구인을 위로하지요. 데카메론의 액자소설 형식 구조를 그대로 따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에다가 결말이 주는 깊은 의미까지, 가장 데카메론적인 구성이라 친근감이 듭니다.


데카메론의 구성을 따온 소설은 레이철 쿠시너 작가의 <빨간 가방을 든 여인>도 있습니다. 일주일 간 성에서 머물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기로 한 사람들. 질병, 슬픔, 죽음에 대한 것 외에 행복한 이야기만 하자고 합니다. 나도 모르게 홀리듯 빠져들게 하는 스토리입니다.


120일간의 격리 후의 이야기를 쓴 에트가르 케레트 작가의 <바깥>도 재밌어요. 이미 그 생활에 익숙해진 탓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정부가 강제로 나오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입니다. 인간의 탁월한 적응력에 대한 반전 결말까지 인상 깊습니다. 캐런 러셀 작가의 <마지막 버스 클럽>은 위기의 순간에 시간이 멈춘 초자연적 현상을 일상이 멈춘 팬데믹 시대를 잘 표현해 멋졌어요. 미아 쿠토의 <친절한 강도>는 코미디 같은 상황을 진지하게 표현해서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 이해하는 순간 제대로 빵 터질 정도로 정말 재밌었어요. 매튜 베이커의 <기원 이야기>도 유쾌한 반전이 즐겁습니다. 봉쇄 기간 중 한 집에 모인 가족은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씩만 먹어야 하는 배급제 방식 때문에 박탈감과 좌절감을 가집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낼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평소라면 출판해 주지 않았을 이야기들일지도 모릅니다. 실험적 소설도 많아서 읽는 맛이 낯선 경우도 많습니다. 뷔페에서도 손 한 번 가지 않는 음식이 있듯, <데카메론 프로젝트>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아이디어 창고 속에서 창의적 영감이 샘솟는 기분이 드는 데다가 기대 없던 이야기에서 뜻밖의 감동을 받기도 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쓴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데카메론 프로젝트>. 미래에는 페스트 시대의 <데카메론>과 함께 코로나19 시대에 탄생한 <데카메론 프로젝트>가 함께 회자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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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는 괴물들 - 드라큘라, 앨리스, 슈퍼맨과 그 밖의 문학 친구들
알베르토 망겔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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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독서가 알베르토 망겔 정도 되면 압도적 배경지식 덕분에 책에 대해 이야기할 게 정말 많아지나 봅니다.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초점 맞춘 책 <끝내주는 괴물들>을 통해 책을 사랑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한 가지를 새롭게 배워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작가이자 번역자, 편집자, 비평가이며 스스로는 독서가라고 소개하는 알베르토 망겔은 보르헤스와의 인연으로 책과 끊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다섯 편의 소설과 스물두 권의 문학 선집, 스무 권의 논픽션을 출간하며 문학, 영화, 예술을 아우르는 전방위 활동을 하는 알베르토 망겔. 국내에서는 메디치상 수상작 <독서의 역사>와 <은유가 된 독자> 등으로 특히 인기 있는 작가입니다.


<끝내주는 괴물들>에는 저자가 직접 뽑은 37명의 괴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라인업이 좀 황당합니다. 드라큘라, 웬디고,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건 이해되는데 빨간 모자, 앨리스, 보바리 씨?


괴물 monster는 "경고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인 monere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천재, 괴짜, 특이한 것, 예기치 못한 것, 거의 또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그러고 보니 괴물 신인처럼 대단한 정신력과 우월한 능력을 보일 때 괴물 같은 능력이라고 하듯, 존재감이 뛰어난 인물을 표현할 때 우리는 괴물이라는 단어를 쓰곤 합니다. <끝내주는 괴물들>에서는 바로 이런 괴물들이 소개됩니다.


문학 작품을 통해 독자의 동반자로 선택되는 인물들. 허구의 인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생생하게 살아움직이는 듯한 작품 속 캐릭터에 감정 이입합니다. 가상의 인물들에게서 받는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걸 깨닫습니다.


알베르토 망겔 저자는 첫 공포와 사랑을 그림형제 동화에서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 죽음, 우정, 상실, 감사, 혼란, 고통, 공포, 정체성 등 이 세상의 경험을 배우는 데 가상의 친구들이 도움과 조언을 줬다고 말입니다.


고전 『보바리 부인』의 남편이자 조역인 보바리 씨로부터 그는 무엇을 배웠던 걸까요. 찰스 디킨스조차 자기 첫사랑이라고 말했던 빨간 모자에게서는 어떤 매력이 숨어 있는 걸까요. <끝내주는 괴물들>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주인공부터 조역까지 각양각색 인물들이 등장해 매력을 발산합니다.


내가 바라는 모습 혹은 하지 못하는 금기를 작품 속 캐릭터에게서 발견했을 때 묘한 짜릿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에만 접근한다면 너무 뻔한 리스트로 끝나버립니다. 이미 라인업에서부터 놀라움을 선사한 만큼 알베르토 망겔은 철학적이고 심리적으로 접근하며 캐릭터가 가진 이면의 의미를 밝혀냅니다.


그런데 결국 무척 보편적인 캐릭터로 결론이 난다는 거예요. 쟤 혼자 특이하고 이상한 거야 대신 누구나,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 작품 속 캐릭터는 우리의 모습이자,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를 대변합니다.


깜짝 놀랄만한 캐릭터가 등장하는데요. 조선 후기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의 주인공 파계승 성진이 목록에 올랐습니다. 저는 『구운몽』이 꿈의 문학의 최고봉이라는 정도만 알았지 세세한 내용은 몰랐던지라 좀 쇼킹하긴 했어요. 저자는 치정 모험극이라 부를 만큼 육욕적 세계를 그린 작품이면서 성장소설이자 유교, 도교, 불교의 진리를 설파하는 교육소설인 이 오묘한 정체성을 가진 구운몽의 완역본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가장 빵 터진 인물은 사오정입니다. 원숭이 손오공도 아니고 돼지 저팔계도 아닌 수수께끼 같은 인물 사오정. 애니메이션 만화 덕분에 사오정 개그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돈키호테와 닮은 점이 있다는 사오정의 새로운 면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재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하이디 대신 하이디의 할아버지를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고, 전혀 몰랐던 인물인데 이 책을 읽으며 관심 가진 인물도 많아졌습니다.


캐릭터에 집중한 리뷰를 쓴다면 이런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겠구나 싶은 책입니다. 물론 이만한 수준이 되려면 알베르토 망겔처럼 문학, 종교, 신화, 대중문화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배경지식이 가득해야 멋진 해석이 나올 텐데 말이지요. 캐릭터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 <끝내주는 괴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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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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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는 법정 수화 통역사 시리즈 중 세 번째 책입니다. 연작소설인 만큼 순서대로 읽어오면 좀더 깨알 재미를 느낄 수 있어요.


들리지 않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코다(CODA)라고 부릅니다.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의 주인공 아라이는 부모와 형이 모두 농인이지만, 아라이만 청인입니다. 


가족 모두가 선천적 농인인 데프 패밀리를 비롯해 중도 실청자, 난청자 등 다양한 농인을 등장시켜 그들 앞에 놓인 편견을 속속들이 드러낸 첫 번째 소설 <데프 보이스>. 그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농인이라는 테두리 안에 묶어두고 편견 또는 오해한 채 바라보던 것들을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발달 장애 아동의 영역까지 들어가 소통으로서의 언어란 무엇인지 짚어준 <용의 귀를 너에게>. 농인에게도 다양한 사고방식으로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농인이라면 구화법을 배워 청인의 말을 잘 알아듣기를 바라는 다수자의 입장을 꼬집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작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에서는 네 편의 주요 에피소드가 있지만 특히 주인공 아라이의 가족 성장 스토리가 인상 깊습니다.


전작에서 인연을 맺은 경찰관 미유키와 딸 미와와 새로운 가정을 이룬 아라이. 그 사이에 들리지 않는 아이 히토미의 탄생은 그들에게 또 다른 감정을 겪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첫째 딸 미와는 청각장애인 형제자매를 둔 사람을 일컫는 SODA로서 언니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CODA인 아라이 역시 농인의 부모로서 새로운 변화들을 경험합니다.


인공와우 수술을 포기하고 "나는 이 아이를 '농아'로서 키우겠습니다."라고 결심하기까지 아라이 가족의 고민은 무척 깊었습니다.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는 흥미롭게도 6년의 세월을 담아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첫째 딸은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었고, 둘째 딸 히토미도 성장해 수화로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작에 비해 긴 시간 흐름은 아라이 가족을 위해 설정하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들리지 않는 아이가 잘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당연하니까요.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는 의료, 복지, 노동 현장에서 겪는 농인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청인 중심 사회에서 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요된 불편함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청인이라면 평소 생각하지 못했을 것들이라 얼마나 편협하게 살고 있는지 반성하게 되기도 합니다.


범죄 신고 전화도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으니 장난 전화로 판단해버리기 일쑤라고 합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임신한 농인이 긴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농인 남편이 119 신고를 하지 못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소리 없는 외침만 가득한 절망의 순간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을 통역할 때는 '신중하게 + 필요가 있다'는 수화 표현으로 전달하는 아라이처럼 수화 통역이 단순히 단어를 일대일로 연결해 표현하는 게 아니라 농인의 사고방식으로 정확히 전달하려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일본수화와 일본어대응수화로 구분해 사용하고, 상대의 입을 읽는 청각구화법도 있지만 이 모두가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농인으로 연예인이 된 HAL의 이야기를 다룬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이 사회가 바라는 모습으로만 있길 바라는 이기적인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구화법을 사용해 청인의 말을 척척 알아듣고, 수화를 할 때도 우아하게 표현하길 바라는 식으로 말이죠. HAL의 고민은 전작 <용의 귀를 너에게>에서 짚어준 소통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폐업한 여인숙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신원불명 농인의 사연을 그린 세 번째 에피소드는 수화를 사용할 때 쾌활했던 사람이 사회에 나오고 나서 어떻게 변하는지 가슴 아픈 사연을 만나게 됩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고용 차별로 회사를 고소한 농인의 민사재판을 다루며 흔히 약자를 위한 지원만으로 생각했던 장애인 고용에 대한 청인의 사고방식에 일침을 놓기도 합니다.


농인 세계를 알리려는 목소리는 세 권의 소설로 이야기해도 여전히 할 말이 많아 보입니다. 첫 책 <데프 보이스>를 쓸 때는 단 한 명의 농인 지인 없이 탄생했던 작품이었다는데 (사실 다들 깜짝 놀라는 게 작가가 농인도 코다도 아닌 청인이라는 것이지요)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를 쓰면서는 수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작가. 농인이 아니면서도 농인문화를 알리는데 탁월한 감수성과 능력을 가진 멋진 작가입니다. 


배려심을 가진다는 것과는 달리 실제 농인들의 불편함을 인지하는 수준은 낮다는 걸 소설을 읽을 때마다 깨닫게 됩니다.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가 앞으로도 나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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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수화 통역사 세트 - 전3권 - 데프 보이스 + 용의 귀를 너에게 +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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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만 우리 주변의 삶이기도 한, 농인문화를 접할 수 있는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 2017년 마루야마 마사키 작가의 데뷔작 <데프 보이스>를 읽으며 청각장애인의 세계를 새롭게 바라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가슴 따스한 스토리 속에 사회 고발 주제를 담아 전개하는 방식이 큰 울림을 줍니다. 


들리지 않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 코다(CODA). 주인공 아라이는 부모와 형이 모두 농인이지만, 아라이만 청인입니다. 어린 시절 그는 가족의 통역사 역할을 하며 자랐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배운 수화를 사회생활에 사용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불편할까 싶어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속 사정을 알게 되면 이쪽도 저쪽도 아닌 코다의 체성에 방황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데프 보이스>는 가족 모두가 선천적 농인인 데프 패밀리를 비롯해 중도 실청자, 난청자 등 다양한 농인을 등장시켜 그들 앞에 놓인 편견을 속속들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농인이라는 테두리 안에 묶어두고 편견 또는 오해한 채 바라보던 것들을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용의 귀를 너에게>는 발달 장애 아동의 영역까지 들어가 소통으로서의 언어란 무엇인지 짚어줍니다. 이 소설을 통해서는 농인에게도 다양한 사고방식으로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농인이라면 구화법을 배워 청인의 말을 잘 알아듣기를 바라는 다수자의 입장을 꼬집기도 합니다. 


신작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에서는 네 편의 주요 에피소드가 있지만 특히 주인공 아라이의 가족 성장 스토리가 인상 깊습니다. 전작에서 인연을 맺은 경찰관 미유키와 딸 미와와 새로운 가정을 이룬 아라이. 그 사이에 들리지 않는 아이 히토미의 탄생은 그들에게 또 다른 감정을 겪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첫째 딸 미와는 청각장애인 형제자매를 둔 사람을 일컫는 SODA로서 언니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CODA인 아라이 역시 농인의 부모로서 새로운 변화들을 경험합니다.


흥미롭게도 6년의 세월을 담아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첫째 딸은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었고, 둘째 딸 히토미도 성장해 수화로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작에 비해 긴 시간 흐름은 아라이 가족을 위해 설정하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들리지 않는 아이가 잘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당연하니까요.


현실에선 코다의 위치가 농인 사회에서든 청인 사회에서든 경계에 걸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데프 보이스>에서 우리 편이냐 적이냐 묻던 소녀의 물음에 아라이는 이제 답을 할 수 있을까요.


농인 세계를 알리려는 목소리는 세 권의 소설로 이야기해도 여전히 할 말이 많아 보입니다. 첫 책 <데프 보이스>를 쓸 때는 단 한 명의 농인 지인 없이 탄생했던 작품이었다는데 (사실 다들 깜짝 놀라는 게 작가가 농인도 코다도 아닌 청인이라는 것이지요)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를 쓰면서는 수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작가. 농인이 아니면서도 농인문화를 알리는데 탁월한 감수성과 능력을 가진 멋진 작가입니다. 


배려심을 가진다는 것과는 달리 실제 농인들의 불편함을 인지하는 수준은 낮다는 걸 소설을 읽을 때마다 깨닫게 됩니다.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법정의 수화 통역사 시리즈가 앞으로도 나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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