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는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란 시집에서 '설겆이'의 즐거움을 노래했다. 영혼이 말갛게 씻기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콧노래를 흥~흥~ 불며 이야기했지. 그런데, 나는 도대체 설겆이의 어떤 점이 그토록 카타르시스를 주는지 도통 모르겠다.
먹고, 치우고의 반복. 그 연장선상에서 나는 내 육체를 사랑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이런 과정들이 참 허망하고 이유없어 보이니까. 몸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책을 한 줄 읽는 것'만큼이나 무척 중요할진대, 나는 가끔씩 굶을 수 있다면 굶어본다. 아, 이렇게 잔인한 말이 어디있나? 하지만, 시간이 없으면 나는 굶는 방법을 택한다. (설겆이에서 시작한 말이 어떻게 '굶는 이야기'로 넘어왔는지 갑자기 망연자실... 어휴! 내 글쓰기가 그렇지, 모. -_-)
아니면, 간단하게 때울 수 있는 걸 사먹든가. 편의점에서 파는 건 삼각김밥 빼고는 다 인스턴트 식품이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 중 하나는 '정크 식품'을 거의 혐오했다. 어떻게 그런 걸 먹을 수 있냐며, 1차 식품을 맛있게 조리해서 호호하하하며 잡수셨다. 가끔 우리는 도시락 반찬을 통해서 그녀가 섭취하는 음식의 질적 우수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하여간 나는 내 몸에 '쓰레기'를 먹이고도 '하하'하는 인간이었다. 왜? 조리하려면 귀찮고, 시간도 없고, 설겆이도 해야 하고.. 이유는 이랬다. 그런 내가, 요즘은 매번 설겆이를 해가면서 밥을 해먹는다. 그런데, 즐겁지가 않고 짜증이 난다. 왜 이렇게 허무한 일을 할까, 하고.
그런 생각 끝에 이해인 수녀의 '설겆이'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 수녀님은 설겆이에서 카타르시스까지 느낄까? 그래서 수녀님인가? 암튼... 몸을 사랑하는 법,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한 개체로서 자기 생명을 위협하는 이 모순적인 행동(굶는 행동--어떻게 보면 파렴치한!)을 서슴치 않는다. (여전히 나는 정크푸드가 정신건강에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몸에 좋지 않겠지만.)
아.. 언제쯤이 되어야 나는 설겆이를 사랑하게 될까? 언제쯤이 되야 책읽는 것만큼 음식을 만들고 먹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길까? 내 몸을 사랑하는 길, 도닦는 수련의 과정만 같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