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줄곧 외부로 향하던 관심이

나의 내부로 돌아오는 시간.



초록이들을 참 좋아하는데

늘 죽이기만 했던 난,

코로나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어느덧 식물러버가 되었다.



작년에 산 몬스테라가

근 일년에 거쳐

새잎을 4개나 내주는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조용히 느리게,

아무 움직임도 생명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문득 돌아보면

훌쩍 성장해있는 모습에 매료됐다.



그간 내가 왜 식물을 죽였는지

확실히 알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사두기만 하고

나가서 노느라

옆에서 지켜볼 줄을 몰랐던 거다.

잠시잠깐 관심을 줬다가

마치 장식품처럼 그냥 두기만 했으니

어느날 갑자기 깨달았을 땐

이미 회생불가.



마침 내가 주로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자리에서

잘 보이는 곳에 몇 가지 식물들이 있다.

무심히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갈아주고,

화분은 과습만 조심하면 된다고 해서

흙 상태에 맞게 물을 줬더니

아직까지 잘들 자라고 있다.



너무 많은 관심과

무관심 사이,

그 적정선이 중요하다.



다시 요가를 하고 있다.

4년 전쯤

아이를 신랑에게 맞기고

밤 열시 마지막 타임 요가를

열심히 하러 다녔던 적이 있었다.

그냥 여럿이서 함께 땀흘리며

호흡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당연히 올해는

바이러스로부터 서서히 해방될 줄 알고

뭔가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작년보다 더 심하잖아?



홈트는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혼자서 하는 요가는 

함께하는 요가보다 힘은 더 들지만,

뭔가 묘하게 더 집중된다.

한 호흡 한 호흡

나의 흐름에 맞춰가는 시간이 좋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들도,

돌아보면 변해있다.

나는 그간 보지 못했던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중이다.



코로나 덕분이고,

가을이라 더더욱 그렇다.



이 느린 호흡이

다시 바삐 돌아가는 세상과 합을 맞출 시간도 다가오겠지.

그렇게 돌고 도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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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10-04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대 변하지 않을 것들도, 돌아보면 변해있다.˝ 뭔가 심쿵한 느낌인데요.
˝잊혀진 것들은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김연수 작가의 이 글귀가 요즘 맘에 콕 박히는 가을입니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21-10-04 21:08   좋아요 0 | URL
그럴 수 있겠네요... 늘 그대로 거기에서 변함없이 있기에 자각조차 못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겠어요. 전 언젠가부터 변하지 않는 게 없다라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같아 보이는데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들, 조금씩의 변화를 눈치 못 채다가 갑자기 변했구나 알게 되는 것들...
잉크냄새님 마음에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
 


어제부터 내일까지 주어진 휴가.

어차피 오후는 

아이 픽업 때문에

나를 위해 쓸 시간이 많진 않지만,

오전만큼은

평소에 잘 하지 못하는 것을 해보고 싶었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

바다 풍경을 뒤로 한 채

하얗고 투명한 커튼이 넘실대는

창문 그림이 왠지 힐링이 될 것 같은 생각에

오늘 삼성역으로 향했다.



사실 나는

실제와 똑같이 그리는 그림에 대해 

약간 편견을 갖고 있었다.

어차피 똑같이 그릴 거라면

사진이 낫지 않아?

뭐 이런 생각.



그런데 오늘 앨리스 달튼의 그림을 보는데,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고,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오후 창가로 스며든

빛의 나른함에 도취되는 것을 느끼며.

아, 똑같은 풍경일지라도

누군가의 손을 거쳐

완성되는 그림이란,

화가의 느낌과 기분과 분위기 같은 것이

녹아있는 거구나.

사진이랑은 완전 다른 거구나.

얼핏 알 것 같았다.






그녀의 그림은

빛을 좇는다.

여름 바람이라는 연작의 결과물들은

우리가 휴가를 떠나

막 숙소에 도착해

커튼을 촤르륵 열었을 때 보고싶은

딱 그런 느낌의 풍경이다.

밖은 뜨거운 열기로 일렁거리지만,

바다는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저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제법 시원하다.

눈이 푸르고 푸르다 못해 눈부시다.



그런데 막상,

그런 풍경은 어디론가 떠나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시회를 보고 나오는데

길가의 가로수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며 무수히 많은 빛들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 반짝임에는

빛에 가려진 그림자도 함께했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뿐.





앨리스 달튼의 전시회를 계기로

일상에서 좀더 많은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청명한 가을이라 더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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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09-2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속의 풍경이 그림이라니....이렇게 눈부신데

마음을데려가는人 2021-09-26 23:54   좋아요 0 | URL
그쵸? 저도 첨엔 사진인 줄 알았어요. 굿즈가 저 섬세함을 못 담아서... 못 산 게 아쉬워요.
 
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모>는 나에게 특별한 책이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편이 아닌데,

반복해서 읽는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다.



어린 시절에는

시간도둑과 모모의 모험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어른이 되고

엄마가 돼 읽는

<모모>는 또 달랐다.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길동이가

어릴 땐 그렇게 밉더니,

어른이 돼 다시 본 둘리 속의 길동이가

너무 이해되는 것처럼,

정신없이 바쁜 삶에 갇혀버린

기기와 베포 할아버지와 같은 어른들의 이야기에

더욱 공감하게 된 것이다. 



가장 마음 아팠던 건

청소부 베포 할아버지.



베포 할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했다.

"얘, 모모야. 때론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지."

그러고는 한참 동안 묵묵히 앞만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그리고 점점 더 빨리 서두르는 거야. 

허리를 펴고 앞을 보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지. 

그러면 더욱 긴장되고 불안한 거야. 

나중에는 숨이 탁탁 막혀서 더 이상 비질을 할 수가 없어. 

앞에는 여전히 길이 아득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거야."

그러고는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고는 다시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생각을 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해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 거야."


-50~51p




일하는 순간순간의 행복을

즐기던 베포 할아버지가

모모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일을 해치우는

모습으로 변했을때,

그 모습이 남일 같지 않아서

마음이 아려왔다.



나는 아이에게 하루에 몇 번이나

"엄마 바빠."

"시간이 없어."

라는 말을 하는지.



진짜 시간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인데 말이다.



회색신사들이 가장 곤란하게 생각했던 대상은 

아이들이다.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에게

시간을 빼앗아가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을 회유해

아이들을 쓸모있는 인간으로 만든다는 명목으로

탁아소를 만들고,

아이들은 그 안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야 생활해야 했다.



지금 우리의 상황과 너무 비슷해 소름이 돋았다.

마음껏 뛰놀고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 아이들이

정해준 배움과 놀이를 하면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현실.



예전에는 회색신사를 그냥 시간도둑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들의 정체는 현대문명, 시스템일 수도 있겠다 싶다.

정해진 루틴을 챗바퀴처럼 돌며

쓸모있는 인간으로서의 몫을 해내야

이 사회가 스무스하게 돌아갈 테니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몇 번을 읽어도

<모모>는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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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

하늘이 너무 예뻐서

위를 올려다보았더니

무성한 나뭇잎들과

구름이 콜라보를 이뤄

낮과 밤이 공존하는 듯한 

사진이 되었다.



구름 무늬 달님이

우주를 품고 있는 것 같기도.



마음에 뭐하나

품고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딸아이 베프가

요즘 

브리트니 스피어스 노래에

꽂혀서

미국 가고 싶다고

노래를 한다는데.



한번

품었던 마음은

잊어버린 사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도 한다.



<중경삼림>에 빠져서

왕가위 감독 만나러

홍콩에 간다고 

노래 부르던 나처럼.



진짜로 홍콩여행을

갈 때쯤엔

까마득히 잊었던

그 마음.



요즘 품은 마음은

넘 현실적 문제라 그런지,

쉬이 잊혀지지가 않네.



매일 물 주는 마음으로

키워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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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09-0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편의 시 같네요.
특히 ˝갈 때쯤엔 까마득히 잊었던 그 마음˝ 이 부분.

마음을데려가는人 2021-09-09 14:02   좋아요 0 | URL
꺄악~~ 잉크냄새님이닷!!! 요즘 간간히 들리시는 것 같아서 저도 종종 들어와보곤 했는데, 오늘은 찌찌뽕이네요! 참 좋은 가을이네요. :)
 



어딘가로 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가질 못하니

마음이 예전의 기억들을 찾아

돌아다닌다.


올해 유독,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나이가 들면

추억을 파먹고 산다는데,

끊임없이 기억이 떠오르는 걸 보면

생각보다 

많은 추억을 쌓았나보다.


알라딘도 그중 하나였지.

알라딘 서재에서 만난 이웃들은

시간이 지나도 

늘 마음 한구석에 

아련하게 남아있다가

불현듯 '나 여기 있지롱' 하고 나타나

나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온다.


특별한 것도 없었는데,

마음을 나눴다고 느낀다.

실제로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지만,

왠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본 것 같은 이 느낌이란.


다들

각자 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는 거죠?

늘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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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1-09-08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여기 있지롱‘ 하고 나타난 1인입니다.
오랫만이네요. 님 말씀처럼 저도 가끔 흔적을 따라 거닐어 보곤 합니다.
그러다 이렇게 짠! 하고 나타나신 흔적에 저도 낙서 하나 보태곤 하죠.
가끔 서재에서 뵈었으면 합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21-09-09 14:04   좋아요 0 | URL
오실 거라 생각했어요!! 히잇~ 언제 짠하고 나타나실지 모르니 종종 들어와야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