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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그림 같다 - 미술에 홀린, 손철주 미셀러니
손철주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그림을 볼 때 누가 옆에서 귀찮게(?) 설명해주는 것조차 싫어하는 나는, 그림해설서류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똑같은 경치를 보고도 보는 사람의 마음과 취향에 따라서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나오게 마련인데 그들이 설명해준 테두리 안에서 그림을 느껴보라니, 정말 싫다 싫어, 였다. 그래서 배경해설을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작가의 표현력과 감성이 마구마구 발휘되는 현대미술 쪽을 더 좋아한다. 물론, 추상화는 예외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고흐나, 샤갈을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도 내 맘대로 그들의 개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어찌하여 ‘인생이 그림이냐, 그림이 인생이냐.’라는 알쏭달쏭한 질문을 던지는 이 책을 알게 되었고, '그림을 어떻게 보든 내 맘이야’에서 ‘역시나 아는 게 힘인가? 힘인갑다, 힘이군.’으로 마음이 바뀌어 버렸다. 아마도 처음 서두에서 작가가 그림과 나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미리 언급해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말한다.
“나는 왜 남 눈치 보지 않고 그림을 내 멋대로 읽고 있는가. 그것은 그림 보기에서 ‘차이’와 ‘사이’를 수용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 제 자신이 깊어지는 걸 느끼고 있답니다. ‘차이’니 ‘사이’니 하는 말을 제 기억에 하이데거가 쓴 용어인데요, 저는 제 식대로 이것을 풀이하고자 합니다.
(중략)
‘차이’는 변별성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닙니까. 작가의 고유성은 이 차이에서 오는 거겠죠. 설혹 내용이 똑같은 아이디어로 창작을 해도 결코 판박이가 나오지 않는 것은 뻔한 얘기로, 문화의 차이, 교육의 차이, 경험의 차이가 있어 그런 거지요. 그의 속과 나의 속의 차이를 짚어보는 것, 그림 보기의 요체는 이겁니다. 그의 아이디어가 이러저러할진대, 왜 저런 모습의 작품으로 나타났을까. 작품의 원형질인 아이디어가 작가의 손을 거쳐 나오기까지 어떤 곡절을 거쳤으며, 그 사연은 작품을 보고 있는 나와 과연 공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서로 빗나간다 해도 저는 괘념치 않습니다. 아니, 빗나가는 것이 자명합니다. 오히려 귀한 것은 차이를 인식하고 있는 저를 자의식 안에서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가 갖춰질 때 작가와 나, 작품과 관객의 ‘사이’가 감상에 주효한 것이 되지요.
김 선배,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왜 떠드는 걸 주저하는 걸까요. 저는 작가의 그림 그리기와 감상자의 그림 읽기가 서로 달라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상자는 맹목적인 동일시에의 집착이 있습니다. 너와 내가 그림을 본 느낌이 일치했으면 하는 희망, 그리하여 공감이 주는 안도감을 누리고 싶은 욕구, 이런 게 다 동일시에 대한 집착입니다. 작품 보면서 그런 느낌을 가지는 경우가 더러 있지 않았나요? 그런데 그게 다 허욕인 겁니다. 세상 보는 눈은 장삼이사 우수마발이 다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작품 볼 때는 그 세계에 자신을 틈 없이 밀착하고픈 집착에 사로잡히는 겁니까. 동일시는 절대로 불가능한 욕망입니다. 차라리 차이를 인식하는 게 현명합니다.”
이러니 그림과 나 ‘사이’의 ‘차이’를 좁히려면 더 많이 알고 관심을 가져야 그 검은(?) 속내가 조금이라도 드러나지 않겠는가. 저 글귀를 읽고 그림 대함이 마치 사람 대함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관심을 가지고 요모조모 꼼꼼하게 왜 저 사람이 그러할지 살필 때, 나와 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이 보이는 것처럼 그림도 이와 같다고. 무엇보다 그 사람과 나와 같아야 한다는 동일시에 대한 허욕과 집착, 강박관념을 버릴 때 나와 그 사람 ‘사이’의 진짜가 보인다고.
그렇게 마음을 열고 책장을 넘기자 옛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여백의 미나 근거 없는 민족의 우수성 같은 것들을 주구장창 반복하지 않고서도 동양의 옛 그림에 대해 감탄할 만한 해설이 이어진다. 산수가 어우러진 모습을 눈으로 보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귀로 듣는 그림이 있다는 것(정말로 정선의 <박연폭포>와 <내연산 삼룡추>에선 거친 물살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성기고 소박한 이미지를 뿜어내는 우리 그림의 넉넉함, 한때 유행이었다는 저고리 사이로 비치는 여인네의 가슴이 드러난 그림을 두고 그린 이에 따라 그림의 느낌이 얼마나 달라지느냐 하는 것. 요란하고 선정적인 남녀의 교합장면이 나오지 않고도 ‘있을 것은 다 있고, 될 일은 다 돼 있는’ 그림의 재치 등. 그러면서 작가는 우리네 초상화가 서양화가들이 그린 초상화와 다른 점은 그 초상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정신을 그려내려 한 점이라며 우리의 초상화는 ‘성형수술하지 않는 얼굴’이라 은근히 우리 그림의 우수성에 쐐기를 박아 넣는다. 이름있는 화가들이 계속 언급되고, 일본에서 대접받는 우리의 막사발에서 숨이 통하게끔 만든 옹이의 투박함까지. 옛물건에 대한 애정까지도 술술 풀려나오는데, 작가는 서양미술에 관한 이야기까지 아우르고 있다.
신앙심을 표현하는 도구였던 서양미술에서 풍경은 단순한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동양의 옛 그림에서 사람은 코딱지만 하게 그리고 산수는 크고 웅장하게 그려지는 것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자연에 대한 인식차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동안의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표현방식을 선보이기 시작한(야수파, 인상파에 이은 표현주의의 등장, 그리고 줄줄이 입체주의 절대주의, 다다이즘, 신조형주의, 초현실주의,추상표현주의가 나타남.)19세기의 미술사, 뭉크, 모네, 앤디워홀, 고갱, 샤갈, 세잔 등의 이야기를 해준다.
하지만 잘나가던 작가의 글발은 마지막 장에서 잠시 삐긋하는데 끝으로가면서 내가 집중력을 잃어버린 건지 작가가 집중력을 잃어버린 건지, 구색을 맞추기 위해 넣은 글들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쨌든 그림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나는 이 책을 통해 좀더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인생이 그림이고, 그림이 인생이다.' 가만히 잘 들여다 보면 그 속엔 작가의 인생이 있고, 작가가 말하고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와 내 이야기가 만나는 지점에서 나는 웃거나 울거나 슬퍼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할 것이다. 그림의 이야기와 내 이야기가 갖는 '차이'는 당연한 것이니, 그 만나는 지점에서 '사이'좋게 지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