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치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내 주위 기계들이 말을 잘 듣지 않을까? 저녁까지 매장을 보는 날이라 점심때 출근하는 날이지만, 오전에 약속이 잡혀 있어서 조금 일찍 사무실에 나와야 했다. 방문하신 분과 약 30분 가량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매장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걸레를 찾아와서 닦으며 어디서 물이 새고 있는지 찾아보니 에어컨에서 나온 물인 것 같았다. 우리 매장 에어컨에서 나온 물은 호스를 통해 밖으로 빠지도록 되어 있다. 지금껏 한번도 물이 샌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왜 물이 샜을까? 밖에 나가 호스를 살펴보니 그 끝부분이 화단 흙에 박혀 있었다. 이래서 물이 샌 건가? 호스 끝 부분을 꺼내고 묻어있는 흙을 털고 닦아냈다. 호스 안 쪽이 막혀 있지는 않아서 이러면 해결이 된건가 하고 다시 에어컨을 켰다. 그래도 여전히 물이 새어 나왔다. 일단 이미 바닥에 고여있는 물을 닦아서 짜내고 다시 닦기를 반복하면서 엉망이 된 바닥을 정리하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그 와중에도 에어컨에서는 계속 물이 새어나왔다. 일단 에어컨을 껐다. 밖엔 비가 와서 문도 못 열어두는데, 에어컨을 끄고 나니 덥고 습한 공기 때문에 턱 숨이 막혔다.
에어컨과 호스의 연결부위가 빠지거나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해서 뒤쪽을 살펴봤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 와중에 더러워진 필터를 발견했다. 일단 필터를 꺼내 청소했다. 깨끗하게 씻어서 말려두고 한동안 다른 일을 했다. 나중에 다 마른 필터를 끼우고 다시 에어컨을 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물이 새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된 것은 확실한데, 나로서는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냥 에어컨을 끄고 일하는 수 밖에.
지난 주에 바쁜 와중에도 쓰레기 처리시설 탐방을 다녀왔다. 약 20년 전에 환경단체에서 일할 당시에 선별장 실태 조사를 여러 번 나간 적이 있었다. 그 시절 선별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요즘 선별장의 상황은 가끔 이런저런 매체들을 통해 접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탐방 소식을 접하고 신청했었다. 오랜만에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야 또 강의할 때 쓸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 꺼리들이 생길테니. 게다가 이번 탐방에서는 소각장과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 하수 처리장 등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고 했다. 두 번 없을 좋은 기회라 생각해 바쁜 일을 제쳐두고 다녀왔다. 선별장은 정말 많이 자동화가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지저분하고 열악한 상황인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더라. 소각장은 20년 전에도 다녀온 적은 있지만, 소각로를 직접 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소각로의 불꽃을 볼 수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은 처음 보았는데, 깔끔하고 자동화 된 공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고작 가축을 기르는 사료로 만든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자동화 된 공정을 통해 생산한 사료가 헐 값에도 팔리지 않고 그대로 쌓여 처치 곤란한 상황이지만 말이다. 이 사료들은 나중에 시간이 지나도 안 팔리면 결국 저 멀리 해외의 가난한 나라로 수출된다고 한다.
아, 이 탐방 이야기를 여기서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음, 그 탐방에서 찍은 사진이 엄청 많았다. 사진 정리를 좀 하려고 노트북으로 사진을 받아서 각 폴더에 찾기 쉽게 옮겨 놓으려고 하는데, 사진을 옮기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사진의 용량을 고려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처음에는 시스템 리소스가 문제를 일으켜 컴퓨터가 멈춘 줄 알았다.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사진을 옮기는 중이라고 그 처리 과정을 보여주는 바가 멈춰서 움직이지 않길래 강제 종료하고 다시 시도했다. 해당 폴더로 엑세스 할 수 없다고 오류 메세지가 떴다. 음, 또 뭐가 문제일까? 띄워놓은 모든 프로그램을 다 종료하고 시스템을 재부팅했다. 그리고 다른 프로그램을 하나도 안 띄우고 우선 사진 옮기는 작업만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도 상태 표시바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너무 성급한 건가 싶어서 한동안 매장으로 가서 다른 일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는 사진을 다 옮겼겠지 싶어서 노트북을 들여다봤는데, 아까 8% 였는데, 이제 겨우 11% 였다. 음, 이게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일인가?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일단 3%가 올랐으니 일을 하고 있긴 한 것이겠지.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다시 매장으로 나가 다른 일들을 했다. 적어도 1시간 가까이 다른 일들을 하다 돌아왔는데, 이번엔 아까와 같이 11% 그대로다.
하! 오늘 따라 왜 에어컨과 노트북이 말썽일까? 일을 하지 말라는 얘긴가? 이 사진들을 빨리 정리해서 공유해야 하는데, 겨우 몇 십장의 사진 옮기는 것 뿐인데, 왜 몇 시간이 지나도 처리를 못 하는 것일까? 평소라면 그보다 더 많은 사진들도 훨씬 더 빨리 처리했는데.
노트북(컴퓨터), 에어컨, 냉장고, 스피커, 텔레비전 등 전자제품을 쓰다보면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오류나 고장을 접하기도 한다. 나는 나이에 비해 이런 기계들을 잘 다루지 못해 스스로 기계치라고 생각하곤 한다. 일을 하면서 컴퓨터는 제법 많이 안다고 여기기도 하는데, 가끔씩 오늘처럼 어이없는 일들을 겪기도 한다. 주위에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많아서 늘 물어보곤 하는데, 이상하게 그들이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살펴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 문제가 안 생기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곤 한다.
아, 정말 그나저나 저 사진들 빨리 분류해서 보내줘야 하는데, 언제까지 11%에 멈춰 있을 거니? 답답하다 정말. 아무래도 오늘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내일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을 불러 해결해야겠다.
대화의 효능
저 위에서 언급한 쓰레기 처리시설 탐방을 갔을 때, 주최 측에서 임의로 조를 편성해줬다. 당시 집결지에 여기저기 흩어져 기다리던 사람들을 편의상 가까이 서있는 사람들끼리 묶어서 조를 짰다. 나는 남성 1분과 여성 3분과 한 조가 되었다. 우리는 주어진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통해 역할을 나눴다. 이동하는 버스에서는 우리 조에 편성된 여성 1분과 앞 뒤로 앉게 되었다. 그날 처음 만난 이 분과 몇 시간동안 함께 탐방을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제법 나눴고, 막판에는 좀 친해졌다. 이 분은 작년까지 다른 지역에서 우리 매장과 같은 제로웨이스트 매장을 운영하셨었고, 최근에는 다른 일을 찾고 있다고 했다. 주로 매장 운영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금방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서로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하면서 친해졌다.
거기에 더해 점심 식사를 하러 들어간 식당에서 다른 조 여성 2분과 아까 그 우리 조 여성 분과 나까지 이렇게 4명이 한 테이블에 앉았는데, 이때 정말 네 명이서 대화를 많이 나눴다. 콩을 주로 사용하는 식당은 음식도 정말 맛있었고, 우리의 대화도 정말 재미있었다. 어느 정도로 대화를 나눴는가 하면, 우리가 전체 참가자들 중에 두번째 혹은 세번째 정도로 일찍 들어가서 테이블에 앉았고, 식사 주문도 곧바로 해서 음식도 빨리 나온 편이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살펴보니 이미 우리 4명을 제외한 다른 탐방 멤버들은 모두 식사를 마치고 다 나간 후였다. 식사를 늦게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실제로 나는 그날 배가 고팠기도 했고, 주문한 콩국수가 엄청 맛있어서 엄청 빨리 후루룩 다 먹어 치우고, 콩국도 남김없이 모두 마셔버렸는데, 그러고 아마 30분 이상을 이 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른 분들이 늦게 먹은 탓도 있지만, 그 늦게 먹은 이유 중 하나가 대화에 열중하느라 그랬던 것이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이제 일어서야 할 때가 되니 대화에 가장 열심이었던 여성 2분(우리 조 1분, 다른 조 1분)은 너무 아쉽다는 듯이 더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다음에 꼭 뵐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만약 뒤에 다른 일정이 없었다면 커피까지 같이 마시자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른 조 2분은 원래 지인이어서 다른 선약이 있다며 함께 떠났고, 나와 우리 조 여성은 함께 지하철 역을 찾아서 10여 분을 걸었다. 우리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져 지하철 역에서도, 열차에 올라서도 계속 되었고, 그 분이 열차를 갈아타기 위해 내릴 때에야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쳤다. 헤어질 때 그 분은 꼭 우리 매장에 놀러 오겠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낯선 이들, 처음 만나는 이들과 뭔가 함께 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별로 없었지만, 과거에는 제법 많았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처음 만난 이들과 공감대가 잘 형성되어 깊은 대화를 나누곤 했던 일들 말이다.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혹은 낯선 사람들 앞에서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뭔가 내가 잘 아는 주제라면 말을 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잘 아는 주제니까 남들과는 달리 나만 아는 정보들이 분명 있고, 그런 정보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흥미롭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인지에 대해 나는 제법 잘 알고, 잘 전달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짧은 시간 안에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가장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 중에도 처음 시작이 그랬던 경우가 제법 있다. 다른 어떤 인연인 경우들도 있지만, 처음 만난 자리에서 금방 공감대가 형성되고, 서로 정보를 주고 받다가 친해진 경우 말이다.
어쨌거나 나로서도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대화에 참여한 적이 최근에는 별로 없었다. 최근에는 거의 대부분 잘 아는 이들하고만 어울렸고, 그들과의 대화는 대개 비슷한 패턴이기에 한 편으로 익숙하지만, 한 편으로 식상하기도 하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흥미로운 대화를 가진 그 경험이 내게도 약간의 흥분으로 남았다. 탐방 장소에서 사무실까지 먼 길을 전철을 갈아타고 돌아오면서 내내 묘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위기 교과서를 냈다. 해외 출간 소식은 벌써 접했었는데, 드디어 국내에도 번역본이 나왔다. 음, 읽어야 할 책은 계속 늘어나는구나. 이 책은 나중에 학생들 교육 자료로도 잘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빨리 읽고 필요한 부분들을 잘 챙겨 놓아야겠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이번처럼 전국이 동시에 장마에 들어가는 일은 기상관측 이래 4번째라고 했던가? 암튼 이 기후위기 시대에는 더위도 장마도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내일은 에어컨이 말을 좀 잘 들을 것인가? 아님 결국 수리기사님을 불러야 할 것인가? 노트북은 일을 잘 해줄까? 아님 또 공치게 만들까? 아, 안돼! 내일도 일을 제대로 못하면 정말 큰일이다. 제발 내일은 좀 잘 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