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질
예전에 여기 서재에 왼손 젓가락질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군대에서 밥을 빨리 먹는다고 천천히 먹으라고 구박 받았던 선배가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해서 늦게 먹도록 적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건과 왼손을 잘 쓰기 위해서 양손 젓가락질 연습을 하는 내용이 나오는 이현세 화백의 권투 만화를 오래 전에 보고 따라했던 이야기.
얼마 전에 뒤늦게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몰아서 봤다. 시즌1은 교통사고 후 집에서 쉬고 있을 때 봤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한 후라서 병원 드라마가 제법 재미있었다. 그 드라마 특유의 가볍고 아기자기한 맛이 좋았었다. 나중에 시즌2가 나왔다고 듣긴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찾아보지 못 했었고, 최근에서야 생각이 나서 주말에 시즌1과 시즌2를 한번에 몰아서 봤다. 시즌1을 다시 본 이유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였다. 암튼 그 드라마 중간에 조정석 배우와 그 여동생 역의 배우님(성함을 몰라서 죄송!)이 밥 먹다가 식탁에서 디제이 디오씨의 그 유명한 노래(제목이 '디오씨와 춤을' 이었구나. 기억이 안 나서 방금 검색함)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젓가락질 잘 해야만 밥을 먹나요? 잘 못해도 서툴러도 밥 잘 먹어요." 조금 어색하게 부르는 듯 안 부르는 듯 부르다가 또 이어 받아서 부르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암튼 이 두 사람이 젓가락질이란 단어만 들어도 이 노래가 반사적으로 생각나듯이 나 역시 그렇다.
오늘 다시 젓가락질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아까 급하게 조금 난이도가 있는 젓가락질을 해야 했던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분이 매장에 들어오셨다. 선물세트를 구매하려고 하신다고 세트 쪽을 둘러보시더니 기능성 비누와 비누망이 2개씩 들어있는 세트를 고르셨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며 대나무 칫솔, 실리콘 칫솔캡, 고체치약이 10개 들어있는 작은 원형 틴케이스 이렇게 3가지가 광목 파우치에 담겨있는 외출용 양치 세트를 추가로 고르셨다. 두 세트를 합한 가격에서 약간의 할인을 해드리기로 하고 "언제까지 준비하면 될까요?" 라고 물었는데, "지금 주세요." 라고 답이 돌아왔다. 보통 세트 주문은 미리 받아서 예정된 시간까지 준비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은 5세트만 필요하다고 하니 금방 만들어 드릴 수 있다고 답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접어서 모양을 만들어 놓은 종이 상자를 5개 펼치고, 거기에 들어갈 기능성 비누 2종을 5개씩 찾아서 꺼냈다. 매장을 보기는 하지만 재고 정리는 매니저님께서 하는 일이라 나는 특정 상품의 재고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른다. 큰 틀에서 진열된 상품 근처의 수납장에 있다는 원칙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암튼 그래서 분주하게 수납장 문을 열었다 닫으며 해당 상품들을 찾아 다녔다. 비누망도 2장씩 5세트를 챙기고, 대나무 칫솔과 실리콘 캡을 챙겼다. 광목 파우치도 5개를 찾았다. 이제 남은 건 작고 귀여운 원형 틴케이스에 들어있는 고체 치약 10알 뿐이다. 이건 여기저기 아무리 뒤져도 안 보였다. 결국 주문하신 분께 양해를 구하고 매니저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 상품은 원래 판매하는 것이 아니고, 외출용 양치 세트에만 들어가는 용도로 만든 것이라고 했고, 원형 틴케이스의 위치와 거기에 채워 놓을 용도인 리필용 고체치약 팩의 위치를 알려주셨다. 틴케이스 뭉치와 고체치약 팩을 찾아 들고 생각해보니 입에 들어가는 제품을 그냥 손으로 담을 수는 없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젓가락이었다. 젓가락을 이용하면 되겠네. 매장에서 가끔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젓가락을 찾아서 틴 케이스에 작은 고체 치약을 10알씩 집어서 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잘 안 잡히더라.
저 위에서 언급한 이현세 화백의 권투 만화에서는 양손으로 콩을 옮기는 젓가락질 연습을 긴 시간 반복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고체치약은 콩처럼 완전히 둥근 모양은 아니라서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옆에 기다리는 분이 계시니 마음이 급해져서 그런지 생각보다 잘 집히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확 부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러면 이 작은 틴케이스에 제대로 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쏟아질 것이다. 게다가 10개씩 딱 맞춰서 쏟을 수 있는 재주도 없다. 젓가락질이 잘 되지 않으니 자꾸 마음은 답답해졌다. 그렇게 어렵게 3개의 틴케이스를 채운 순간 생각이 났다. 샘플로 만들어 놓은 틴케이스가 두 개 있으니 그걸 먼저 드리고, 이 분이 가시고 나면 내가 다시 샘플을 만들어 두면 되겠네.
그렇게 계산을 마친 손님을 보내드리고 나서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다시 틴케이스에 고체 치약을 담았다. 이번에는 너무 쉽게 잘 집혔다. 심지어 두 개씩 딱 딱 집혀서 젓가락질 5번 만에 틴케이스 하나를 완성하기도 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아까는 쫓기는 마음이어서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진정이 안 되고 자꾸만 젓가락질이 엇나갔었다. 똑같은 조건인데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 있게 하니까 '이게 왜 안 됐어?'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언젠가 우리나라 양궁 국가대표팀이 일부러 시끄러운 환경에서 훈련을 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올림픽 경기장에서 예상치 못한 소음 등의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을 마주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었다. 사실 내가 낮에 업무에 집중하기 어려운 것도 비슷한 이유다. 그래서 야근이 많은 것은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시끄럽고 분주한 환경에서도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되려면 나는 얼마나 더 훈련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니, 사실 시간에 쫓기면 아무리 시끄럽고 정신 사나운 환경에서도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문서 작업의 경우) 역시 이게 다 마음의 문제라는 말로 귀결된다.
암튼 예상치 못한 선물세트 판매로 오늘 낮에 부진했던 매출을 겨우 살렸다. 뿌듯한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겠다. 이번 주말에도 이래저래 일정이 많다. 물론 이번 주말만이 아니라 다음 주도 그 다음주도 그 다음 다음 주도. 하! 그만하자.
서울국제도서전과 관련하여 홍보대사 위촉 문제로 시끄럽다고 들었다. 게다가 홍보용으로 풀린 사진에 여성 소설가들만 있어서 그것과 관련해서도 말들이 나온다. 이 건에 대해서는 다음에 시간이 나면 자판을 두드려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