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꿈들 두번째 이야기


어제 쓰려다가 다 못 쓴 잡다한 꿈 이야기를 다시 이어 쓴다.


#3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거리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비에 완전히 젖은 옷은 무겁게 축 늘어져 불편하고 찝찝했고, 신발 안에 들어찬 물 속에서 양말은 물을 흡수하며 불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까는 주위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다 맞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주위에 하나 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도 모두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있었다. 나는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두 명, 세 명 다시 네 명으로 늘어나는 사람들이 보였다.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까지 식별할 정도로 잘 보이지는 않았다. 먼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마치 그림자처럼 까만 형체로만 보였다. 내가 더 자세히 보려고 다시 눈가에 흐르는 빗물을 오른손 손바닥으로 훔쳐내자 그들도 같은 동작을 보였다. 살짝 고개를 숙인 자세에서 고개를 조금 들더니 오른손을 들어 얼굴 높이를 훔치는 동작을 취했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이젠 아예 물폭탄을 들이붓는 느낌이었다. 이미 온 몸이 다 젖어버린 상태라 비가 얼마나 더 오든 상관은 없었지만, 머리와 어깨로 쏟아지는 빗물의 무게와 강도가 세진 것은 좀 곤란했다. 나는 피곤했고 간신히 남은 힘을 모두 짜내어 서 있었는데, 내리 쏟아지는 빗물을 맞으며 조금씩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까운 듯 멀리 보이는 내 주변의 인물들도 그때마다 같이 휘청거렸다. 나는 일부러 왼발을 한 발작 옆으로 빼면서 살짝 무릎을 굽혀 넘어질 것처럼 동작을 취했다가 버텼다. 그들 역시 거의 동시에 같은 동작을 취했다.


피곤함에 잠시 눈이 감겼다. 빗물이 계속 흘러내려 눈을 바로 뜨고 있기가 힘들기도 했다. 눈을 감고 서 있으니 더더욱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나도 모르게 양쪽 무릎이 휙 꺾이며 비틀 몸이 기울었지만,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렇게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동작을 유지한 채로 눈을 뜨고 주위를 살피니 그림자들 또한 같은 동작이었다. 다만 아까 대여섯 명에 불과하던 그림자들이 더 많이 늘어나 있었다. 이젠 눈 대중으로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꿈에서 깬 시점에서 나는 꿈 속의 내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잊어버려 다시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꿈 속의 나는 분명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안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니, 안 올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꿈 속의 내가 그 비를 다 맞으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절실히 그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그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였을까? 꿈 속의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사람은.


자꾸만 눈이 감겼고, 축 늘어진 옷은 자꾸만 무겁게 몸을 끌어내렸다. 계속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었지만, 그래도 넘어지지 않고 계속 버텼다. 문득 시간이 궁금해서 손목시계 유리의 물기를 손목으로 닦았다. 시간은 9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던 것 같다. 오전이었을까? 오후였을까? 비 내리는 어두운 하늘 탓에 아침인지, 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리는 듯 작게 울리기 시작했다가 다음 번에는 가까운 곳인 듯 크게 울리기도 했다. 종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9번을 울렸다. 종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 가늠해보려고 다시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지만,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엔 오른쪽에서 들렸고, 또 다음 순간엔 왼쪽에서 들렸다.


꿈 속의 나는 생각했다. 그는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더 기다리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아무리 오래 비를 맞고 기다려봐야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래 알고 있었다. 아마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꿈 속의 나는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돌로 변해 세월의 풍화에 가루가 되어 없어질 때까지 여기에 머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외롭지 않았다. 내 주위로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림자들이 나와 함께 있었다. 나만 혼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 말고도 수많은 어떤 이들이 나처럼 비를 맞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외롭지 않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비록 비참하게 버림 받고 쓸쓸하게 혼자 기다리고 있었어도 나는 결코 쓸쓸하거나 외롭지 않았다고 꿈 속의 나는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시계를 보고 싶었는데, 왼손 손목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떨궈진 고개를 들어 올릴 힘도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그림자들이 내 주위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빗줄기는 아까보다는 가늘어졌다. 졸고 있었던 걸까? 비틀 한 차례 크게 몸이 왼쪽으로 꺾였다. 무언가를 짚으려고 왼손을 들어보려 했으나 빈 허공을 휘저으며 나는 쓰러졌다. 철퍼덕 하고 큰 소리가 나며 바닥에 고여있던 물이 튀어 물보라가 일었다.쓰러지며 머리가 바닥에 닿기 직전에 몸을 뒤집으며 누워버렸다. 물보라가 그렇게 크게 솟아 오른 건 내 온 몸으로 바닥을 쳤기 때문이다.


누워서 비를 맞으니 입과 코로 자꾸만 빗물이 들어왔다. 몸을 일으키려고 생각은 했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옆으로 돌아 눕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내 주위에 머물렀던 그림자들도 함께 넘어졌을까? 궁금했는데 볼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발자국 소리가 찰박 찰박 들렸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작은 물보라가 일었다가 흩어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발소리는 점점 내게 다가왔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경쾌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내게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볼 수 없었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간절히 원했던 그 사람일까? 아니면 넘어진 나를 보고 누군가 놀라서 다가오는 것일까? 혹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어떤 사람일까? 마침내 발소리가 바로 뒤까지 다가왔고 그때 투명한 비닐 우산의 한 쪽 끝이 내 머리 위에 나타났다. 내 얼굴로 계속 떨어지던 빗물이 우산에 막혔다. 대신 상체로는 우산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이 더 많이 떨어졌다. 발소리는 거기서 멈췄고, 이제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눈을 뜨고 비닐 우산의 한 쪽을 올려다 보았다. 우산 뒤쪽으로 흐리던 하늘이 갑자기 맑아졌다. 짧은 순간 순식간에 비가 그쳤다. 나는 우산을 든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궁금했으나 그는 내 얼굴을 막아준 후로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으으으 온 몸에 힘을 주고 얼굴을 찡그리며 입가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 얼굴을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계속 힘을 줬다. 그러다 잠에서 깼다.


꿈 속에서 무언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 안간힘을 쓰다가 잠에서 깨는 경우는 흔하다. 보통은 피하거나 도망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힘을 쓰다가 깨는 경우가 많았다. 이 꿈 속에서 나는 반대로 누구든 무엇이든 내게 와주기를 바랐다. 그게 날카로운 칼 끝이라도 피하지 않고 받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긴 기다림의 끝에, 마침내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주었지만, 나는 끝내 그게 누구였는지 알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 버렸다. 궁금했다. 누구를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던 것인지. 마침내 나타난 인물은 과연 누구였는지. 꿈에서 깨어버린 이상 이젠 결코 알아낼 수 없겠지만.


어제에 이어 오늘도 쓰려던 꿈 이야기를 다 못 썼다. 더 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지금 나는 저 꿈 속의 나처럼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또 다른 꿈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시 써야겠다. 오늘도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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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6-22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꿈을 자세하게 기억하시는군요 저는 꿈 한 장면밖에 기억 못하기도 해요 일어났을 때는 좀 길게 기억하지만... 예전에 꿈을 적은 적도 있는데, 그걸 보니 별난 꿈을 꿨네 했어요 비를 맞고 누군가를 기다리다니, 혼자가 아니었다니 조금 무서운 느낌도 드네요 그림자는 뭐였을지...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