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꿈들
#1
구체적인 내용들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꿈 속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쫓기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어떤 일들을 겪다가 어느 순간부터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축제에서 무대에 서기 위해서. 어떤 노래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꿈에서 깬 직후에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때 적어 두었으면 좋았을텐데. 아마도 최근 연습해서 잘 부르게 된 몇 곡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꿈 속에서는 현실과 마찬가지로 친한 후배가 내게 노래를 가르쳐줬다. 실제로 나는 그 후배 덕분에 몇 달 전에 두성으로 노래 부르는 방법을 익혔고, 그 전까지 그저 고함 지르는 수준에 머물렀던 노래 실력이 그나마 노래처럼 들리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암튼 다시 꿈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엄청 열심히 연습을 했는데도, 어떤 특정한 맛을 잘 살리지 못했고, 그래서 가르치던 후배에게 계속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꿈 속의 나는 그 녀석의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 내 실력에 이 정도면 잘 부르는 것이라고 여기며, 이 정도라도 부르는 것이 어디냐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대에 올라야 하는 축제 날이 왔다. 내가 무대에 올라야 할 시간이 다가올 수록 초조함과 긴장감을 느끼며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었는데, 내 무대 직전에 한 여성이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너무나도 매력적인 목소리에 너무나도 훌륭한 가창력이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긴장감과 초조함은 사라졌고, 그저 그 목소리에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깬 순간 자기 전에 틀어놓은 플레이리스트에서 이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커버곡을 주로 부르던 제이플라가 최근 계속 자신의 곡을 발표하고 있다. 이 곡은 분위기도 좋았고 창법도 평소 제이플라와 달라서 좋았고, 특히 가사가 좋았다. 최근에 낸 서너곡들이 모두 제이플라 자신의 상황을 잘 드러내는 듯한 가사라서 좋다. 암튼 이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두고 자주 듣는 편인데, 하필 잠에서 깨는 시점에서 이 곡이 흘러나왔다. 아니 잠에서 깬 후 멍한 상태에서 조금 생각하다가 깨달았는데, 꿈 속에서 내 차례 바로 앞 무대가 바로 이 곡이었다. 그러니까 실제로 이 노래를 들으며 자고 있던 나는 꿈 속에서도 이 노래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꿈 속에서 무대에 섰던 분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실제 제이플라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학 시절의 나는 나름 노래를 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음은 잘 안 올라가지만, 분위기 있게 잘 부르는 편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졌었다. 노래패 활동을 하면서 발성을 조금 배웠는데, 내 목소리와 내 성향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때 노래를 조금 배운 덕분에 결혼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실마리를 잡았었다. 암튼 내가 정말 노래를 못하는 구나 하고 깨달았던 계기가 있었다. 언젠가 축제 무대에 우리과 동기 한 명과 둘이 올랐다. 연습할 시간이 별로 없어서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나랑 같이 무대에 오른 친구는 심각할 정도의 박치에 약간 음치였다. 이런 친구와 왜 무대에 오르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의 나는 이 녀석이 실수하고 노래를 못 할수록 내가 잘 한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라고 재수없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고 나서 나도 참 노래를 못하는 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로 절대 노래 실력에 대해 자만심을 갖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동기 녀석은 당연히 계속 박자를 틀리고 절정에서는 음이탈도 일어나는 등 실수가 많았고, 그건 예상했던 부분이었지만, 나 역시도 내 생각처럼 노래가 잘 되지 않아 무척 당황했다. 당황은 계속 실수로 이어졌고, 우리 무대는 그야말로 코메디가 되거나, 귀와 마음을 괴롭히는 고문이 되어버렸다.
이 꿈을 꾸고 나서 두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하나는 방금 얘기했던 최악의 축제 무대였고, 또 하나는 신입생 환영회를 가서 즉석으로 짧은 꽁트 대본을 쓰고 그 속에서 민중가요를 부르는 역할을 나 자신에게 배정해서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 불렀던 모습. 하나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나름 자랑스러운 기억이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내 노래 실력이 그렇게 좋지 않다고는 여기지만, 그래도 어떤 노래들은 내 나름의 스타일로 잘 부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더는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2
그 길은 거미줄처럼 복잡한 골목길이었다. 그리고 경사가 급한 오르막이기도 했다. 나는 쫓기고 있었다. 오르막을 뛰어 올라가다가 숨이 차서 멈추고 싶었지만, 뒤에서 쫓아오는 존재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든 와중에도 어떻게든 다리를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어느 순간 나는 사방이 탁 트인 어떤 공원 같은 곳에 올라 있었다. 어디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 거리는데, 내 뒤를 빠르게 쫓아온 일행들이 어느새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그들을 향한 후에 어디 빠져나갈 틈이 없는지 살폈지만, 그들은 잘 훈련받은 몸 놀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옆으로 퍼지며 내 도주로를 차단했다. 그들 모두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고, 손에는 각양각색의 무기들이 들려있었다. 각목, 야구방망이, 곤봉, 삼단봉, 쇠파이프까지. 계속 뒷걸음질을 치다보니 나는 어느새 절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섣불리 들어오지 않고 포위한 채 간격을 좁히고 있었다.
어느새 절벽 앞 난간에 내 등이 닿았다. 빠르게 뒤돌아보니 절벽은 까마득하게 높았다. 떨어지면 반드시 죽는다 라고 생각했다. 내 정면 쪽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야구방망이를 든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정한 간격을 둔 상태로 더 들어오지 않고 멈췄다. 앞으로 나선 그는 몇 발자국 더 걸어서 내게 다가왔다. 가면 때문에 누군지 알아볼 수 없어서 무척 답답하고 두려웠다. 그는 한 서너 발걸음 간격을 두고 멈추더니 손에 들고 있던 방망이를 과시하듯이 크게 공중에서 한 번 휘두르고 그대로 방망이를 땅에 짚고 양 손을 그 위에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왼손을 들어 가면을 벗었다.
턱에서부터 천천히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가면을 벗는 그 짧은 시간이 마치 영원이라도 된 것처럼 무척 길게 느껴졌다. 대체 누구야? 얼른 가면을 벗어! 그 얼굴을 보여줘.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가면이 올라가면서 이제 입매가 드러났다. 웃는 모습이었다. 비웃음이었을까? 빨간 입술과 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러면서 양 볼에 살짝 패인 보조개도 드러났다. 보조개가 있다. 나는 머리를 굴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보조개가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천천히 가면을 벗고 있었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시간이었다. 이제 콧날 끝이 보일락 말락 했다. 콧날이 제법 높았다. 여기까지 드러난 하관을 보며 나는 계속 내가 아는 얼굴들과 비교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나는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안면 인식 장애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완전히 얼굴이 드러나도, 그 사람이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었어도 누군지 금방 알아보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콧등이 조금씩 드러났다. 하얀 피부와 높은 콧날. 누군지 모르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얼굴일 것이라고 느꼈다. 아주 느린 그의 움직임은 눈이 드러나기 직전에 멈췄다. 그는 가면을 칠할 정도 드러낸 상태에서 멈추고 나와 대치를 이어갔다. 그 다음에는 몇 발작 뒤쪽에 멈춰있던 이들이 일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일사분란하게 걸음을 맞췄다. 그들은 앞서 가면을 벗다가 멈춘 이와 함께 정확하게 반원 모양이 되는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처음에 그가 했던 것처럼 그들은 각자의 손에 든 곤봉이나 삼단봉이나 쇠파이프 등을 크게 휘두르는 동작을 하고는 땅 바닥에 짚고 섰다. 그리고 하나둘씩 가면을 벗어 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나올 때 일사분란하게 딱 맞췄던 것과는 달리 가면을 벗는 동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아직 손을 들어 올리는 사람도 있었고, 벌써 가면의 아랫쪽을 쥔 사람도 있었고, 입매가 드러나는 지점까지 가면을 들어올린 사람도 있었다.
나는 더 큰 두려움을 느끼며 한 사람씩 얼굴을 보려고 애썼으나, 어찌된 일인지 어느 누구에게도 촛점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만 돌리고 있었다. 제각기 저마다의 속도로 가면을 올리는 그 손길들은 역시 정확히 눈이 드러나기 직전에 멈췄다. 그들은 손으로 가면의 턱을 쥔 동작 그대로 멈춘 채 마치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쯤 깨달았던 것 같다. 이거 아마도 꿈일 것이다. 악몽은 자각몽이 되어 버렸고, 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꿈이었어. 나는 용기를 내어 그들의 가면을 하나씩 벗겨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여전히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꿈이란 것을 깨달았어도 꿈 속의 나를 마음대로 통제하지는 못했다. 꿈이란 것을 깨닫자 나는 더 궁금해졌다. 그들은 과연 누구이고 왜 무기를 들고 나를 쫓아 이 절벽으로 몰았을까? 무엇을 복수하려는 걸까? 무엇을 비난하려는 것일까? 꿈이라고 깨닫기 전의 두려움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절박한 어떤 감정들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음 순간 멈춰있던 그들이 일제히 가면을 벗어던지고 손에 든 무기들을 높이 들어 올리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내 시야는 갑자기 새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으로 채워졌다. 푸르게 맑은 하늘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갑자기 빠른 속도로 몸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 순간 잠에서 깼다. 아마도 꿈 속의 나는 스스로 절벽으로 몸을 던진 것이겠지? 그들이 가면을 벗어 던진 찰나 그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여유는 없었다.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잠에서 깨자마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불을 머리 위로 덮어 쓰고 몸을 새우처럼 웅크린 채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한참을 곱씹은 후에야 그들은 아마도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마치 분신처럼 여러 몸으로 복제했지만, 실은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그게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얼굴을 보지 못하고 꿈에서 깬 이상 그걸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그냥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편이 나았다.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혹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꿈 속의 그 얼굴처럼 그렇게 잘 생긴 얼굴을 한 사람은 현재 내 주변에는 없다. 그러니까 현재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도, 가장 싫어하는 사람도 아닐 거라는 뜻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있었다. 그렇게 하얀 피부와 오똑한 콧날 그리고 예쁜 입술. 남성 중에서도 있었고, 여성 중에서도 있었다. 그들 모두를 한 때 꽤나 좋아했었고(이성으로서도, 친구로서도) 꽤나 원망하거나 싫어하기도 했었다.
물론 꿈은 꿈일 뿐이므로 그 얼굴이 실제 내가 아는 누군가의 얼굴과 꼭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 신기하게도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나이대가 달랐으므로 아이들은 생김새가 달랐지만, 꿈 속의 나는 그들이 내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꿈이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지. 그러니 저 꿈 속의 가면 속 얼굴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졌건 실제 내가 아는 사람들과 맞아 떨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더 많은 꿈 이야기를 쓰고 싶었으나,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