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가 나서 아파
아마 열흘 전쯤이었다. 운동을 하고 씻고 잤는데, 새벽에 팔에 쥐가 나서 잠을 깼다. 종아리에 쥐가 나서 깨는 일은 가끔 있지만, 팔뚝에 쥐가 나서 깬 건 처음이었다. 쥐가 난 것은 왼팔이었고, 오른팔로 주무르다가, 주먹으로 쾅쾅 내리쳤더니 통증이 가라앉았다. 팔뚝이 돌덩어리처럼 굳어 있었다. 낯선 느낌이었다. 팔에 쥐가 나다니! 생각해보니 평소와 달리 운동을 마치고 팔 운동을 더 했었다. 특정 부위 근육만 키우는 고립운동을 잘 하지 않다가, 갑자기 더 했던 것이 화근이었나보다. 고통 때문에 잠을 깬 것은 기분이 나빴지만, 다음날 그 만큼 운동을 열심히 한 때문이라 생각하니, 운동한 보람이 있구나 싶었다.
어제 밤에는 종아리에 쥐가 나서 잠을 깼다. 너무 아팠다. 발을 뒤로 젖혀야 풀리는데, 혼자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혼자 끙끙 신음 소리를 내며 손을 뻗었지만, 통증 때문에 발가락 끝에 손이 닿지도 않았다. 예전에는 자다가 쥐가 나 신음 소리를 내면 애들엄마가 깨서 발을 젖혀주기도 했다. 아, 곤히 자느라 모르고 도와주지 못했던 적도 많지만, 가끔은 도와줬다. 억지로 고통을 참으며 손을 뻗어 발가락 아래 굳은살이 배긴 부분을 잡고 뒤로 당겼다. 간신히 쥐가 풀렸다. 이젠 쥐가 나서 고통스러워도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구나. 새삼 깨달았다. 그렇구나. 아프지 말아야 겠다. 다치지 말아야 겠다. 돌봐줄 사람이 곁에 없으니 혼자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아프지도, 다치지도 말아야 겠다. 새삼 다시 깨달았다.
어제 쥐가 난 건 토요일 아치 발전소 청소와 집회 참가 때문이었으리라. 종아리 근육에 무리가 갈만큼, 발전소 청소 때 힘을 많이 썼고, 이후 계속 서있거나, 인파를 뚫고 걸어다녔다. 가끔 뛰기도 했다. 수많은 인파에 묻혀 꼼짝하지 못할 때에도 계속 몸이 이리저리 밀려 다리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까지 계속 밖에 있었고, 계속 다리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고, 또 제법 걸어야 했다. 그러니 종아리 근육이 뭉쳐서 쥐가 날 만 했다.
예전에 이명박 시절에 G20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두 분의 실형 선고 소식을 전하면서, 내 종아리에 쥐가 난 소식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어느 알라디너가 비밀 댓글로 조심스럽게 하지정맥류 증상이 아닌가 걱정을 하셨다. 쥐가 나서 깬 적은 많았지만, 아침에 깨서 그 쥐가 난 증상 때문에 다리를 절고 걸어야 할 정도고 통증이 오래 간 적은 없었으니까 나도 좀 이상하다 생각했던 참이었다. 다행히 그 후로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당시에도 무리해서 운동을 했거나, 많이 걷거나 뛰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0
뛰어다니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가방이나 거추장한 옷 차림을 별로 좋아히지 않는다. 가방이 작거나, 없어야 뛰어다니기 편하다. 옷도 되도록 간편해야 한다. 사람들이 많은 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도에 인파가 많으면 과감하게 차도로 내려가 뛰기도 한다.
출근을 할 때나,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을 퇴근시간이나,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하필 눈 앞에서 버스를 놓쳤다면 버스 노선과 거리를 가늠해보고 뛰어서 다음 정류장에서 버스를 따라잡아 타기도 한다. 차가 막히는 시간이거나, 다음 정류장이 거리가 아주 가깝거나, 신호가 절묘하게 걸렸을 때 등 운이 따라줘야 하고, 가슴이 터지도록, 허벅지 근육이 터지도록 전력질주를 해야 가능하다.
#1
출판사에 다닐 때니까 벌써 몇 년 전이다. 뭔가 급한 일을 하다가 거래처를 방문하기로 한 약속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나섰는데, 하필 눈 앞에서 버스가 출발해버렸다. 택시도 잘 잡히지 않는 거리였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다음 뛰기 시작했다. 교차로 3개를 지나는 동안 버스는 계속 신호에 걸렸다가 가기를 반복했고, 그 동안 나는 전력으로 달려서 다음 정류장에서 간신히 버스를 탔다. 가을이었던 것 같은데, 땀을 비오듯 흘렸고, 거의 10여분 이상을 숨을 헐떡였다. 그래도 덕분에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았다.
#2
어느 날 출근 시간 집에서 나서서 내려오는데, 저기 앞 종점에서 버스가 출발하는 것이 보인다. 뛰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차량이 가로막고, 사람들이 앞을 가려서 제대로 뛰기 어려웠다.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버스가 승객들을 태운 뒤 출발해 버렸다. 다음 정류장은 가까웠다. 뛰면 분명히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전력질주. 교차로에 닿기 직전에 직진신호로 바뀌면서 버스가 출발했고, 횡단보도 역시 초록불로 바뀌었다. 버스보다 빨리 정류장에 닿아야 했다. 버스가 서서히 속력을 올리는 동안 온 몸의 힘을 짜내어 달려서 버스를 추월했다. 정류장에 도착하기 직전 버스가 나를 앞서가 정류장에 섰다. 하필이면 아무도 타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이 타면서 버스를 잠시라도 붙잡아 둬야 하는데. 다행히 내가 뛰는 걸 본 기사님께서 잠시 기다려주셨다. 숨을 헐떡이며 버스에 오르며 기사님께 간신히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터에 도착할 때까지 숨을 고르며 지냈다.
#3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건만, 회의는 끝날 줄을 몰랐다. 어린이집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을 작은 아이가 생각났다. 지금 일어서야 했지만, 이 회의에 자주 들어오지 못하다가 오랫만에 들어온 터라 눈치가 보였다. 게다가 중요한 논의였고, 사람들은 망설였고, 쉽게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답답했다. 내가 나서서 정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나에게 책임이 돌아올까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리고 있어야 했다. 아, 이 회의는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거야! 회의 주최자가 원망스러웠다. 결국 참지 못하고 발언을 했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간단한 문제가 아닌가. 이렇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빨리 결정을 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 다음, 눈치를 보다가 살그머니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건물을 나와 정류장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는데, 저 위에서 버스가 좌회전을 해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앗! 아직 정류장까지 거리가 제법 되는데, 자동으로 뛰기 시작했는데, 인도에 사람이 많았다. 한 명 한 명이 장애물이었다. 요리조리 피해가며 뛰는데, 버스가 나를 추월해 지나갔다. 다급했다.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가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오던 택시가 빵빵 클랙션을 울리며 나를 피해갔다. 다시 인도로 돌아와 사람들 사이로 뛰었다. 정류장에서 타는 사람이 많아 버스는 한참 서있었다. 퇴근 시간이라 만원버스겠지? 과연 탈 수나 있을까? 정류장에 닿기 직전에 버스는 출발해버렸다. 이런 젠장! 다시 한번 혼자 심심하게 기다리고 있을 작은 아이 얼굴이 떠오른다.
출발했던 버스가 저 앞에서 신호에 걸린다. 다시 뛰기 시작한다. 다행히 이 구간엔 사람이 많지 않다. 전력으로 뛰었다.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나도 도착해 버스를 탔다. 완전 만원 버스라 간신히 사람들을 밀고 올라탈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문이 닫힐 때 옆 사람을 밀치고 몸을 피해야 했다. 작은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또 뛰어야 했다. 아이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린이집에 도착해서 선생님을 만났을 때 말이 나오지 않아 허리를 크게 숙여 인사를 해야했다. 만나자마자 작은 아이의 한 마디. "아빠,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나는 바로 대답도 못 하고 한참 숨을 고른 후에야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가슴이 아파
'내 귓가에 스친 노래가 아파' 라는 가사가 가슴을 후벼팠다. 한때 좋아했던 슬픈 노래 중에 너무 아파서 잘 듣지 못하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들으면 길 한 가운데에서 걷던 중이라도, 사람이 많은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도저히 들을 수 없었다. 다행히 아주 유명한 노래가 아니지만, 가끔 라디오에서 틀어주거나, 유튜브 자동재생 목록에 포함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가슴이 아파, 너와 함께 했던 시간이 아파~ 니가 없는 나의 하루가 아파~ '
'햇살이 아파, 너와 함께 걷던 거리가 아파~'
꽤 오랫동안 그 사람과 좋았던 시간들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 생활 반경 곳곳에 그 사람과의 추억이 도사리고 있다. 일터에서 자주 들러야 하는 지역의 거점 공간을 가려면 결혼하자마자 구해서 짧게 살았던(미친 집주인 때문에 대판 싸우고 나왔던) 집 앞을 지나야 하고, 그 거점 공간 뒤쪽에는 재개발을 통해 지금은 허물고 아파트를 지었지만, 평택에서 막 올라왔던 나를 받아줬던, 그래서 그와 동거했던 집이 있었다. 그와 팔짝을 끼고 웃으며, 장난치며 걸어다녔던 골목길들, 큰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 내 팔에 몸을 기댄 그를 데리고 산부인과로 걸었던 길이 바로 근처다. 잊고 싶어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떠오른다. 머리가 나빠 숫자도, 사람 얼굴도,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 하면서 왜 그런 기억은 자꾸 떠오르는 거냐!
아이들이 좋아하는 월드컵공원을 가면 늘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다. 거긴 그가 나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가르쳐주고 함께 탔던 데이트 장소였다. 나도 모르게 아직 젊었던 그의 얼굴과 바람에 날리던 머리칼이 떠오르고, 저만치 앞서 가다가 나를 향해 돌아보며 웃던 표정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신나게 뛰고 놀지만, 나는 괴롭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 그래도 조금씩 무뎌지긴 하는 것 같다. 최근에 갔을 때는 덜 아팠다. 대신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 적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작은 아이가 아직 한참 어렸을 때, 인라인 스케이트를 신은 채로 작은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몰고 좀 타보려고 시도했던 기억이 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결혼 후 창고에 처박아놓고 한번도 타지 않은 탓이다. 발목 근육이 약해졌는지, 자세가 바로 잡히지 않았다. 아마 그때가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아니다! 큰 아이와 함께 타보겠다고, 겁없이 인라인을 신었던 적이 또 한 번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난 이제 더이상 인라인을 탈 수 없구나. 몸이 타는 법을 기억하지 못하는 구나. 아니 탈 수 있는 몸이 아니구나.
인라인을 더이상 타지 못하는 몸이 된 것처럼, 이제 그와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다 잊어버리고, 더이상 괴롭고 아프지 않은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쉽지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