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부터 동네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출퇴근을 포함해서 활동 반경이 좁아졌다. 그 전에는 장거리 출퇴근을 주로 했고, 일의 특성상 낮에 이동거리도 어마어마했다. 그땐 늘 이동하면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는데, 요즘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책이나 음악에 빠지기에 이동거리가 너무 짧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일하는 것이, 그래서 이동거리가 짧은 것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어제, 오늘 깨닫고 있다. 어제는 진주를 다녀왔다. 아침 8시 반에 집을 나서서 9시쯤 돌아왔다. 진주에 머문 시간은 겨우 2시간이 못된다.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도로에서 보냈다. 고속버스 시간을 맞추느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하루종일 남북 종단을 두 번 하고 나니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싶었다. 왜 굳이 계약서에 도장 하나 찍으려고 진주까지 갔어야 했을까? 그냥 등기우편으로 주고 받으면 안되는 거였을까?

좁은 의자에 갇혀 답답한 시간을 보내느라 힘들었지만, 한 가지는 좋았다. 원하는만큼 실컷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2년 동안 거의 음악을 안 듣고 살았구나. 즐겨듣던 노래들을 오랫만에 들으니 정말 좋았다.

로렌 크리스티, 핑크, 데비 깁슨, 켈리 클락슨, 알라니스 모리셋, 프로우 프로우, 크랜베리스, 미쉘 브랜치, 바넷사 칼튼, 더 코어스 등 한때 참 좋아했던 가수들을 그동안 잊고 살았구나 싶었다.

고향을 떠나 살면서 외로울 땐 늘 노래를 듣고 지냈는데, 노래 한 곡 한 곡에 이런저런 사연들이 참 많은데, 어떻게 그걸 다 잊고 살았나 싶었다.

하루종일 이 노래, 저 노래를 들으며 지나온 추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머라이어 캐리의 `이모션`을 들으며 고등학생 때 모 여고의 축제에 놀러갔다가 만난 목선이 예뻤던 아이가 떠올랐고, 크랜베리스의 `링거`를 들으며 대핟 2학년때 사귀던 아이와 함께 등산갔던 일이 떠올랐고, 로렌 크리스티의 `테잌 미 투더 처치`를 들으며 20대 중반 혼자 놀러갔던 강원도 어느 바닷가가 떠올랐고, 핑크의 `저스트 라이크 어 필`을 들으며 20대 후반 좁은 고시원에서 밤새 습작에 몰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은 잠실 쪽에 일이 있었다. 가는데만 1시간 20분쯤 걸렸다. 돌아오는 시간도 비슷하겠지. 오늘은 켈리 클락슨의 `아니 헤이트 마이셀프 포 루징 유`와 로렌 크리스티의 `더 나잇 아이 쏘 피터 유그타프`가 참 좋았다. 나중에 이 두 곡을 들으면 잠실쪽 거리 풍경이나, 지하철 역에서 스쳐 지나간 긴 머리가 나풀거렸던 여성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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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6-24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엇 덕분에 저는 오늘 퇴근길 오랜만에 켈리 클락슨 들어요. Because of you 반복 청취중이에요. 오늘은 제가 못나게 느껴지는 날이라서 책도 인읽히고 ㅜㅜ 음악이나 들으며 한없이 찌질해져야겠어요 ㅜㅜ

감은빛 2016-07-04 20:54   좋아요 0 | URL
Because of you
저도 좋아하는 곡이예요.

답이 많이 늦었네요.
장마철이라 그만큼 자주 술이 땡기네요.
하긴 굳이 비 핑계를 대지 않더라도, 늘 술과 함께 하고 있지만요. ㅎㅎ

루쉰P 2016-06-25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ㅋ 엄청난 음악적 식견이셔요. 그나저나 잠실이면 멀지가 않은 곳인데유 ㅋ 근처에 계시는군요 푸하
이동거리가 긴 게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운전을 했을 때는 음악을 들었는데 거의 대부분 그냥 한국 노래...허허허허:::
감은빛님의 음악적 소양과 여자만 기억하시는 기억력에 감탄했어요 ㅋ

감은빛 2016-07-04 20:56   좋아요 0 | URL
루쉰님, 식견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예요.
어려서부터 팝 음악을 좋아했는데, 두루 들었던 것도 아니고,
특정한 가수만 골라 듣는 편이었어요.
오래 들었더니, 그 골라듣던 특정한 가수들이 많아지긴 하네요.

여자만 기억하는 기억력이라~ 그랬군요. ㅎㅎㅎ

마녀고양이 2016-06-27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아가버리는 한없이 긴 시간들을 음악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바꾸셨네요.
감은빛님을 보면, 에너지가 있는 분이라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어요.

저는 지금 컴퓨터로 음악 틀어놓고, 뻘짓 하는 중입니다. 부럽죠? ^^

감은빛 2016-07-04 20:58   좋아요 0 | URL
네 오랜만에 음악을 들어서 긴 시간도 그리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주로 술을 먹을 때만 에너지가 팍팍 솓아나죠. ㅎㅎ

비가 오니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님은 지금 어디서 뭐하고 계실까?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