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아침 9시의 담배는 공허함이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는 날씨 혹은 지하철 역 앞 맥도날드 앞이 아니었다면 담배를 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오랫동안 담배를 피웠지만, 정오가 되기 전에 담배를 꺼내 무는 일은 드물었다. 그가 아직 어렸을 때, 그러니까 거의 가족이 아직 한국에 있을 당시에 아버지는 일이 없었다. 가끔 막노동일을 나가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거의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새벽에 어머니가 일을 나가고, 늦게 일어난 언니와 그가 배가 고파 부엌을 뒤질 무렵 깨어난 아버지는 이불 위에 앉아 담배부터 찾아 물었다. 성냥갑을 열고, 성냥 하나를 치익 그어 불을 붙이고 천천히 담배에 대고 불을 당겼다. 어린 그는 단칸방 아래켠에서 눈치를 살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담배에서 연기가 올라오면 아버지는 손을 휘저어 성냥불을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 천천히 깊게 한 모금을 들이마신 후, 아버지는 아주 깊은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았다.

 

목표는 다섯 걸음 옆에 있었다. 그 역시 담배를 물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아주 오랜만의 외출이었고, 아주 이른 시간의 외출이었다. 통역사라는 직업이 이렇게 불규칙적으로 일을 받는다면, 목표는 어떻게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뭔가 숨겨진 돈이 없다면, 묵고 있는 방의 월세와 지금 입고 있는 값비싼 옷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공허함을 달려려고 담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는 것과 달리 다섯 걸음 옆의 목표는 담배를 몇 번 빨지 않고 그냥 타들어가게 내버려 두고 있다. 뭔가 고민하고 있는 듯 보이던 목표가 갑자기 맥도널드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는 마지막 한 모금을 깊이 빨았다가 내뱉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목표를 따라 걸었다. 목표가 비를 피해 실내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그는 다시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냈다. 흰 연기를 내뿜으며 유리창 너머로 목표를 주시한다. 목표는 계산대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건지는 알 수 없다. 한 참 후에야 커피 한잔을 받아 들고 빈 자리를 찾아 두리번 거린다. 마침 한 남성이 맞은 편 빈 자리를 권한다. 목표와 같은 동양계 남성이다. 어쩌면 목표와 그리고 그와 같은 한국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가 이 일은 맡은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뒤를 밟고, 정보를 캐고, 감시하는 일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런 경험을 쌓아 잘 처리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우연히 목표와 같은 나라 출신이고, 목표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으며, 급하게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이 일이 훨씬 더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고, 돈을 위해서라면 위험도 각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지금까지는 평범했다. 목표는 외출이 거의 없었고, 간혹 외출을 해도 특이사항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렇게 거금을 들여 목표를 감시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의뢰인에게 그 이유를 물을 수는 없다.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목표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중년 남성이 밖으로 나온다. 둘이 대화를 나눈 것 같지는 않았다. 남성은 자리를 권했지만, 목표가 앉자마자 신문을 펼쳐들고는 내내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둘이 비밀 접선을 했을 가능성을 떠올려본다. 아니. 곧바로 머리를 가로젖는다. 그는 목표에게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자리를 권했다. 비밀 접선이라면 그렇게 눈에 띄는 행위를 했을 리 없다. 남성은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오늘 아침 뉴욕 변두리에서 공허한 동양인을 또 만난다. 그는 중년 남성의 눈빛에서 아주 오래전 아버지의 눈빛을 본다.

 

****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머리 속에 외전 격의 곁이야기가 떠올랐다. 수지를 감시하는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 그 그림자는 그레이스가 고용했을 수도 있고, 해마다 아이리스를 보내는 누군가가 보냈을 수도 있다.(그 누군가가 그레이스 아니라면) 혹은 KK단의 누군가가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민국의 누군가가 고용했을 수도 있다.

 

아, 소설에서 그림자의 존재는 확실치 않다. 다만 수지가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을 뿐이다. 그 생각은 착각일수도 있고, 실제일수도 있다. 나는 그 그림자가 실제이고, 그가 수지와 같이 한국에서 어릴때 떠나온 젊은이라는 가정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 흥미로운 책에 뻔한 미사여구로 감상을 붙이고 싶지는 않다. 내가 쓴 함량미달의 글이 이 책에 폐를 끼치겠지만, 나로서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것이라는 점을 알리며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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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8-1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오래 전에 읽었는데, 그래서 자세한 스토리는 기억이 가물가물해가는데, 그럼에도 감은빛님의 이 리뷰 첫줄을 읽는데 금방 알겠는거예요, 이 책이 이렇게 시작했다는걸.
은근히 긴장감을 더해주는 스토리에, 비밀스러움,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외로움, 쓸쓸함이 짙게 전해져 왔었지요.

감은빛 2013-08-14 11:37   좋아요 0 | URL
'오전 9시의 담배는 절망감의 표현이다.'로 시작하죠.
저도 이 문장이 인상적이어서 따라해봤어요.
알아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말씀하신 것처럼 비밀스럽고 차분한 전개에 은근한 긴장감이 있죠.
외롭고 쓸쓸하고 축축하고 무거운 느낌이 글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요.
그런 점이 무척 끌리는 책이었습니다.

마녀고양이 2013-08-14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최고의 찬사.
책이 좋은가 보네요.

감은빛님, 잘 지내시죠?
아침 9시의 담배는 공허함이군요, 제게 있어 커피가 다소 그렇다는... ^^

감은빛 2013-08-14 11:41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예요. 마녀고양이님!

이 책 제법 좋았습니다.

아침에 피는 담배는 늘 공허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커피도 그렇군요.
저는 커피를 졸음을 쫓기 위해 마시는 편이라 그 느낌을 잘 모르겠네요.

yamoo 2013-08-1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다는 단어가 반복되는 거 보니, 정말 재밌나보군요! 서점에서 한 번 훑어보고 재밌으면 그냥 서점에서 읽어야 겠어요^^

감은빛님 흡연자이시군요~ㅎ 아침에 피는 담배는 공허하다란 말을 누구한테선가 좀 들었습니다. 아마 친구들이 그랬던거 같아요. 저는 비흡연자라 저얼대 그 느낌을 알 수 없다는^^;;

감은빛 2013-08-14 14:47   좋아요 0 | URL
어, 동어반복이었군요. 막판에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랬나봅니다.
서점에서 읽기에는 분량이 좀 많지 않을까 싶은데,
야무님 책을 빨리 읽으시나요? 속독법?

오랫동안 흡연자였구요.
끊었다고 해놓고 참고 참고 또 참는
(그러다가 도저히 못 참고 간혹 한 대 피우기도....)
생활을 한지도 제법 되었네요.

담배를 피워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맛을 알수 없죠! ^^

무해한모리군 2013-08-14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다음책을 내지 않나 궁금한 작가중에 하나입니다.
누구나 한권의 책을 쓸만한 이야기는 가지고 있다라는 얘기가 생각나기도 하고...

감은빛 2013-08-16 16:57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왜 차기작이 없을까요?
그 말 멋지네요.
휘모리님께서도 책 여러 권 쓰실만한 이야기 갖고 계시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들려주세요. ^^